[데스크 칼럼] 폭염과 기후재난
이자영 사회부 차장
열대야 지속 일수 매일 신기록 경신
'처서 매직 안 통한다' 우울한 예보
기온 오르면 폭력 사건 증가 분석도
기후위기 대응 더 이상 미뤄선 안 돼
그야말로 역대급 더위다. 부산의 열대야 지속 일수는 지난 18일까지 총 25일에 달한다. 이미 지난 14일에 1994년과 2018년의 열대야 지속 일수(21일) 역대 기록을 갈아 치웠다. 기상관측이 시작된 1904년 이후 가장 긴 열대야 지속 일수 기록이다. 폭염에 관한 각종 신기록 행진은 오늘도 전국 각지에서 진행 중이다. 하지만 기후위기는 올림픽이 아니다. 기록 경신 소식이 반갑지 않은 이유다.
이제는 ‘지구 온난화(Global Warming)’가 아니라 ‘지구 열탕화(Global Boiling)’ 시대라고 부를 정도로 기후위기가 심각하다. 기후위기라는 용어조차 기후재난, 기후재앙으로 대체되고 있을 정도다. 올여름 특히 고온다습해진 우리나라 날씨를 빗대 ‘습식 사우나 같다’는 말이 유행한다. 전문가들은 올해가 어쩌면 남은 일생에서 가장 선선한 여름일지도 모른다고 경고한다. 정말 믿고 싶지 않은 이야기지만 말이다.
모름지기 피서라면 시원한 계곡이나 자연을 찾아 떠나야겠지만, 야외로 휴가를 떠나기에도 두려운 날씨다. 그래서 지난해와 올해 여름 휴가지는 모두 서울로 택했다. 주변에선 “서울이 더 덥지 않냐”며 의아해 했다. 그런데 이제 우리나라에 덥지 않은 곳이 있기나 한 걸까. 차라리 전시장, 공연장, 쇼핑몰 같은 실내가 더위를 피하기엔 더 제격이라 판단했다.
공교롭게도 휴가 때면 서울 혹은 그 인근에서 큰 사건이 발생했다. 지난해 8월엔 경기도 성남시 분당구 AK플라자 부근에서 흉기 난동 사건이 벌어졌다. 비슷한 시기, 친구와 나는 서울에 있는 또 다른 AK플라자에서 더위를 식히고 있던 차였다.
지난달엔 서울 은평구에서 일본도 살인 사건이 벌어졌다. 휴가 차 서울에 간 김에 그곳에 직장을 둔 지인에게 연락을 했더니 “회사 동료가 상을 당했는데, 고인이 일본도 사건의 피해자라고 한다”며 안타까워 했다.
휴가 때마다 충격적인 사건 사고가 되풀이된 탓일까. 동행한 친구는 “내년부턴 여름 휴가 땐 서울에 가지 말아야 되나 하는 생각이 든다”고 말했다. 우리나라 인구의 50% 이상이 밀집한 서울을 중심으로 한 수도권에 각종 사건 사고가 더 많은 건 확률적으로도 설명이 되는 문제다. 그렇다면 폭염이라는 기후 변수는 어떨까. 묻지 마(이상동기) 범죄나 흉기 난동 사건이 혹시 더위와 상관 관계가 있을까?
미국의 기후 저널리스트 제프 구델은 책 〈폭염 살인〉에서 “그렇다”고 답한다. 기온이 올라갈수록 혐오 발언·자살·총기 사고·강간 사건과 폭력 범죄도 증가한다는 것이다. 더위로 스트레스를 받으면 평소보다 더 충동적으로 행동해 쉽사리 분쟁을 일으킨다는 설명이다. 우리나라도 이와 유사한 인과 관계가 성립될지는 별도 연구를 통해 입증해 봐야 할 일이다. 또 이 책에 따르면 지구 온도가 1도 상승할 때마다 미국의 1년 GDP의 1.2%에 해당하는 3000억 달러(약 400조 원)가 사라진다고 한다. 폭염으로 인한 생산성 저하 탓이다.
국내에서도 기후재난과 관련한 분석, 연구가 활발해지고 있다. 한국은행에 따르면 지난해 상승한 물가의 10%가량은 이상기후 때문이라는 분석이 나왔다. 사과 1개 가격이 1만 원에 달할 정도로 치솟아 한때 ‘금사과’라는 이야기가 나올 정도로 과일 가격이 급등한 원인에도 기후위기가 꼽힌다. 경제나 물가, 생산성 같은 문제가 아니더라도 이제 기후재난은 우리 모두가 체감하는 생활 이슈가 됐다. 매일 밤 열대야로 잠을 설치는 건 우리 모두의 이야기이고, 폭염으로 고통 받는 취약계층은 바로 우리 이웃의 이야기다. 더 이상 저 멀리 사는 북극곰의 문제 정도로 기후위기 대응을 미뤄둘 수 없다.
올여름엔 ‘더위가 그쳐 계절이 바뀐다’는 처서의 마법도 통하지 않을 거란 우울한 예보가 나온다. 기상청에서도 최근 한반도의 계절별 길이 전반을 재설정하는 논의를 검토할 정도로, 계절의 의미가 변화하고 있다. 봄·여름·가을·겨울 사이좋게 3개월씩 나눈 한반도의 사계절은 이제 추억 속으로 사라질지도 모른다. 조상의 지혜가 담긴 과학으로 추앙받던 24절기도 급격한 기후변화 앞에서는 그 권위를 잃어갈 가능성이 높다. 우리도 기후재난에 대한 대응을 서둘러야 한다. ‘미세먼지나 탄소 배출 문제는 다 중국 때문’이라는 남 탓이나 ‘너는 에어컨 없이 살 수 있냐’ 하는 감정적 반응은 이제 그만 거두자. 정부와 지자체, 기업이 장기적이고 체계적인 대응에 나설 수 있도록 국민, 시민, 소비자로서 제 목소리를 내야 할 때다.
이자영 기자 2young@busa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