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로365] 가상자산 투자자 위한 법·인프라 필요하다
류홍열 비댁스 대표·변호사
지난 19일 ‘이용자보호법’ 시행돼
거래소 시장 기능에 규제 초점 맞춰
관리 편의 위한 ‘독과점 묵인’ 아닌지
금융당국 소극적인 태도 심히 우려
투자자 위한 ‘기반 구축’이 현실적 대안
블록체인 도시 부산 시장 선도할 기회
지난 19일 비로소 가상자산이용자보호법이 시행됐다. 수년간의 입법 심의, 1년간의 유예 기간을 거쳐 드디어 가상자산에 관한 별도의 법률이 작동하기 시작한 것이다. 가상자산거래소에 예치한 고객의 돈을 보호하기 위해 거래소는 별도로 신탁해 관리하고 그 예치금에 대한 이용료, 즉 이자도 지급해야 한다. 거래소가 파산하더라도 거래소에 예치해 둔 돈은 보호받게 된다. 거래소에서 횡행하던 시세조종, 내부자거래 등 각종 불공정거래 행위도 처벌 대상이 되어 보다 투명하고 공정한 가상자산 거래가 기대된다.
그러나 이 법의 보호는 여기까지이다. 가상자산거래소에서 가장 중요한 가상자산은 보호 대상에서 빠져 있다. 거래소가 투자자의 가상자산을 분리 보관하도록 하고 있을 뿐 그 외 다른 보호 장치는 없다. 주식이나 개인 간 금융(P2P) 투자자 보호 관련 법과 비교해도 보호 수준은 미흡하다. 그래서인지 법률의 명칭도 가상자산‘투자자’보호법이 아니라 가상자산‘이용자’보호법이다. 정부는 아직 가상자산을 투자 대상으로 보지 않고 있다. 가상자산이 이미 투자의 대상이 되어 있는 현실과 괴리된 상황이다. 적극적인 입법과 규율을 통한 체계화보다는 가상자산 투자와 관련한 위험과 책임은 국민이 부담해야 한다는 것이 원칙이 돼버린 셈이다. 도박처럼 금지하지도 않지만, 그렇다고 규제권 내로 편입시키지도 않고 있다. 그래서 투자자를 투자자로 부르지 못하고 이용자로 부를 수밖에 없는 ‘홍길동’ 같은 일이 벌어지는 것이다.
한편, 해외에서는 어떤 변화가 있는가. 2022년 글로벌 5대 거래소였던 FTX가 파산하면서 고객들의 가상자산이 보호받지 못하게 되자, 거래소의 막강한 기능에 대한 회의적인 시각이 자리 잡게 됐다. 그래서 거래소가 예치하고 있는 투자자들의 가상자산을 제3기관에 신탁해 보관하는 것이 글로벌 트렌드가 됐다. 특히, 보유 단위가 큰 기관투자자나 자산관리인 등 법인 고객들은 거래소에 자산을 맡기지 않고 제삼자 위탁기관인 커스터디에 보관하는 것이 원칙이 되었다.
우리나라는 이런 흐름과는 동떨어져 있다. 대표적인 투자 대상인 주식은 투자자-증권사(중개)-거래소(시장)-예탁원(보관)-지급(은행) 순으로 분권화돼 기능별 전문화가 이루어져 있다. 가상자산의 경우, 이런 모든 기능이 거래소에 집중돼 있는 실정이고, 이번에 시행된 법은 거래소의 시장 기능에만 규제의 초점이 맞춰져 있다. 왜 이런 미흡한 법률이 시행되게 되었는지 아쉬움이 크다. 한두 개 대형 거래소가 시장의 90% 이상을 장악한 현 상황은 이 법에 의해 독과점이 보장되는 것이 아닌가 생각이 들 정도다. 자유경쟁을 촉진해 독과점의 폐해를 없애야 할 정부가 관리 편의를 위해 작금의 독과점 상황을 묵인 내지 방관하는 것은 아닌지 심히 우려된다. 금융당국 입장에서는 입법권자인 국회에 책임을 돌릴지 모르겠지만, 정부의 입법제안권에 비춰 보면 금융당국의 소극적인 태도가 오히려 가상자산 시장을 더욱 왜곡시키지 않을지 심히 우려된다.
지금 한국에는 가상자산 투자자를 위한 법과 인프라가 없다. 법은 경제, 사회 현상에 후행할 수밖에 없다. 여야 간 극심한 대치 정국이 계속되는 상황에서 가상자산 투자자를 위한 법률이 제때 마련되기를 기대하기 어렵다. 블록체인 기술이 적용되는 토큰증권 관련 입법이 불발되면서 수많은 업체가 유탄을 맞았던 사례를 보면 더욱 그렇다. 그래서 법이나 규제의 제정보다 인프라 구축이 시급하고 현실적인 대안으로 보인다. 그러한 차원에서 필자는 블록체인 핵심 도시인 부산에서 가상자산 관련 인프라 구축을 진행하면 관련 산업을 선도해 나갈 기회가 될 것으로 본다. 부산시는 블록체인 규제자유특구로 지정돼 있다. 부산시는 매년 규제 특례 대상이 될 만한 사업을 선정해 중앙 정부에 규제 특례 심사 신청을 진행하고 있다. 다만, 부산시에 규제 특례 부여에 대한 승인 권한이 없어 제도상 한계가 있다.
부산시가 반드시 가상자산과 관련해서 규제 특례 제도를 활용할 필요는 없다. 부산디지털자산거래소(BDX)를 통해 가상자산 시장의 모범이 되는 인프라 구조를 구현해 보이면 된다. 민간사업인 BDX가 중심이 돼 여러 인프라 기업과 손을 맞잡고 기존 거래소가 갖는 독점적 기능을 분권화, 전문화한 생태계를 선보인다면 정부 규제가 그에 맞춰 성문화될 수 있고, 규제자유특구로서 새로운 규율 체계를 만들어 나가는 길이 될 것으로 생각된다. 그 과정에서 부산시는 주도자는 아니지만 촉진자로서 역할을 얼마든지 할 수 있다. 가상자산이 블록체인의 전부는 아니지만 블록체인에 관한 관심과 자본을 집중시킬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수단임에는 틀림이 없다. 가상자산이용자보호법이 아니라 가상자산투자자보호법 제정의 밀알이 되는 사례가 부산에서 시작되기를 기대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