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감] 인간이여 분발하자
신호철 소설가
저녁 먹고 운동 삼아 동네를 한 바퀴 돌다 보면 개와 함께 산책하는 사람을 심심찮게 볼 수 있다. 모퉁이를 돌다가 강아지들끼리 마주치면 서로 냄새 맡고, 왈왈 짖기도 한다. 그 틈을 이용해 주인들은 서로 대화를 나눈다. ‘아휴, 털이 참 곱다. 어디서 미용시켜요?’, ‘얘는 몇 살이에요?’, 그렇게 친목을 쌓은 주인들은 자연스럽게 동네 학부모가 된다. 모찌 엄마, 율콩이 엄마. 아빠도 있다. 하몽이 아빠. 그렇게 불릴 때마다 하몽이 아빠는 객쩍게 웃는다.
그렇다. 내가 바로 하몽이 아빠다. 귀여운 아기로 꼬물대던 두 딸을 키웠고, 장성한 딸들은 버젓이 직장생활하고 있지만, 아이들은 어디로 가고, 나는 강아지 아빠가 되고 말았다. 어쩌면 우리 집안엔 개와 족보가 꼬이는 고대의 비밀이 있는지도 모른다. 어렸을 때, 할머니는 ‘아이고, 우리 강아지 인물이 훤하네.’ 하며 내 머리를 쓰다듬으셨고, 지금은 내가 ‘우리 애가 제일로 이쁘네.’ 하며 강아지를 쓰다듬고 있으니 말이다.
사실, 요즘엔 반려동물과 함께 사는 사람들이 참 많아졌다. 농림축산식품부가 2022년에 집계한 반려견의 수가 이미 302만 마리가 넘는다고 했다. 지금은 1000만이 넘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반려견뿐만 아니라 고양이, 새, 거북이, 열대어 등등 다양한 동물까지 생각하면 대단히 많은 사람이 반려동물과 함께 생활한다고 볼 수 있다.
덕분에 반려동물에 대한 인식도 많이 달라졌다. 어떤 항공사에서는 기내에서 반려견과 나란히 여행할 수 있는 상품을 발표하는가 하면, 또 어떤 대형 할인점에선 반려견과 함께 식사할 수 있는 공간을 따로 마련하기도 했다. 반려동물 전용 카페는 우후죽순으로 늘어나고 있다. 반려동물을 가족의 일원으로 여기는 추세에 맞춰진 상업적 대응이라 할 수 있겠지만, 또 한편으로 사람과 동물을 구분하는 어떤 경계가 허물어지고 있다는 느낌도 크게 와닿는다. 최근에 젊은이들이 이용하는 커뮤니티에서 아주 흥미로운 내용을 읽은 적이 있다. 만약에 자신이 키우던 개와 낯선 사람이 동시에 물에 빠졌을 때 누구를 구하겠냐는 물음이었다.
그런데, 의외로 많은 사람이 자신이 키우던 개를 구하겠다고 답변했다. 사랑하는 가족을 구하는 게 당연한데, 그게 무엇 잘못되었냐고 반문하기도 했다. 어떤 댓글에선 사람을 구하긴 하겠는데, 그 선택이 옳았는지 확신할 수 없겠다는 대답도 있었다. 인간의 가치는 여타 동물들과 비교할 수 없으며, 그 가치는 절대적이라는 의견에는 공격적인 댓글이 많았다. 인간 생명이 동물 생명보다 더 가치 있다는 근거가 무엇이냐는 반론부터 해서, 동물은 사랑을 베풀면 거짓 없이 그 사랑을 되돌려 주는데, 인간이라는 족속은 과연 그렇게 하고 있냐고 따지기도 했다.
나도 나 자신에게 그 질문을 던져 봤다. 나는 인간의 형상을 가진 생명을 위해 내가 사랑하는 식구의 죽음을 선택할 수 있을까? 솔직히 말해, 나는 인간과 반려동물 중 어느 생명이 더 소중하냐는 질문으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우리가 각자의 삶에서 인간에 대한 환멸을 얼마나 겪었을까, 라고 묻는 문제로 보였다. 나는 여전히 인간만의 특별한 가치를 믿고 싶기 때문이다.
하지만, 거짓으로 이득을 취하고, 폭력으로 빼앗고, 훔치고, 죽이고, 심지어 누군가의 약점을 이용해 착취하려는 사람들까지 북적이는 뉴스 속에서도 굳건히 그 믿음을 유지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사람에 대한 의심이 깊어질수록 인간 고유의 가치는 모호해질 것이며, 그 불신은 부조리의 악순환으로 되돌아올 것이다. 분명한 것은 나도 인간이며 누군가에게는 일면식 없는 타인이다. 자신의 가치조차 믿지 못하게 되어 버린 우리 인간들이여 부디…분발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