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감] 한 가지 작은 다행
서정아 소설가
자신을 직면하고
계속 쓰는 일,
그것이 나를
조금은 나은 사람으로
만들어 줄 수 있을까
올해 중학교에 입학한 아들은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즐겁게 한 학기를 보내고 있다. 자유학기제 덕분에 시험공부에 대한 스트레스가 없는 데다 각종 스포츠 활동, 문화예술 체험, 진로 체험 등 다양하고 흥미로운 활동들을 학교에서 하고 있기 때문이다. 어떤 날엔 석고 방향제나 도자기 컵 같은 것을 만들어 오고, 어떤 날엔 먼 나라의 전통춤을 배워 오고, 또 어떤 날엔 종일 축구를 했다면서 자기가 어떤 활약을 했었는지 저녁 내내 자랑한다. 그런 이야기들을 늘어놓을 때 아이 얼굴에 가득 채워지는 해맑은 웃음. 그 웃음이 오래 지속되었으면 좋겠다고, 그걸 지켜주고 싶다고 나는 생각한다. 2학기부터는 성적이 산출되는 지필평가가 있겠지만 시험 점수로 스트레스 주지 말자. 저렇게 행복하고 즐거운 표정, 그거면 되지 않나. 다른 건 부차적인 문제다, 그런 생각.
공식적인 시험은 없어도 학습 확인 차원에서 수업 중에 시험을 치기도 하는 모양인데, 큰 관심을 두지는 않았다. 그런데 얼마 전 아이가 학교에 다녀와서 말했다. “엄마, 나 오늘 국어 시험 쳤는데 38점 받았어.” “그렇구나. 만점이 50점이야?” 나는 미소를 띠고 물었다. 50점 만점에 38점이면 딱히 잘한 건 아니지만 그래도 나쁘진 않네, 라고 생각하면서. 시험 점수로 아이를 압박하지 않겠다고 늘 생각했으니까, 썩 만족스러운 점수가 아니더라도 칭찬하고 격려해 줘야지, 하고 다시 한번 다짐하면서.
“아닌데. 100점이 만점인데?” 아이는 천진난만하게 대답했는데, 그 순간 내 동공은 흔들렸던 것 같다. 100점 만점에 38점이라고? 영어도 수학도 아닌 국어 점수가? “그건 너무 심한데. 충격인데. 공부를 좀 해야겠다. EBS 강의를 들어볼래? 엄마랑 문제집을 하나 풀어볼까? 차라리 학원 다닐래?” 등등의 말을 횡설수설 늘어놓는 나에게 아이는 또박또박 말했다. “엄마, 진로 탐색 시간에 선생님이 그러셨는데 시험 점수 같은 것보다 내가 행복한 게 제일 중요한 거래.”
물론 나도 아이들을 대상으로 강의를 할 때마다 그렇게 말했었다. 다른 사람들이 획일적인 가치에 매몰되어 허황된 목표를 향해 달려가고 있을 때 자신이 진정으로 좋아하는 소박한 일들을 하루하루 기쁘게 해내는 주인공의 모습이 담긴 그림책을 읽어주면서 “여러분도 남들이 다 좋다고 말하는 것 말고 자기가 진심으로 좋아하는 걸 찾아가면서 그 과정에서 행복하기를 바랍니다”고 말해 주었다. 사춘기에 접어든 아이들은 그 이야기에 눈빛을 반짝였고, 그때의 내 마음도 가식은 아니었다. 하지만 국어 점수 38점을 받아온 아이에게 나는 끝내 그 말을 해주지 못했다.
그날 나는 내 안의 모순을 마주하고 밤새 괴로웠다. 아이가 원하지 않으니까, 라며 세상 쿨한 엄마인 것처럼 학원도 안 보내고 있지만, 그 저변에는 아이가 학원에 가지 않고도 평균 이상의 학업 성취를 이룬다는 전제가 있었나 보다. 어쩌면 나는 사교육 없이 명문대에 간 아이들의 인터뷰 답변을 내 아이에게 기대했을지도 모른다. “학원은 안 다녔고요, 교과서 위주로 공부했어요.” 나는 초연한 태도를 취하되 아이는 알아서 잘했으면 하는 더 큰 욕망. 차라리 닦달하는 것만 못한 속물성과 이중성.
내가 했던 말과 행동의 저변에 깔린 마음을 가만히 들여다본다. 대외적으로 나를 포장한 언어들을 벗겨내면 결국 드러나고 마는 것은 비루함이었다. 내 안에 가득 찬 모순과 자아의 민모습을 마주하는 순간이 오면 고작 이런 인간으로 살다 죽게 된다는 것이 슬프고 한심하다. 다만 한 가지 작은 다행은, 그런 나에 대해 글을 쓴다는 것. 쓰기 위해 내면의 밑바닥까지 내려가 마주하기 싫은 스스로의 모습을 오래도록 우두커니 바라본다는 것이다. 고통스러워도 자신을 직면하고 계속 쓰는 일, 그것이 나를 조금은 나은 사람으로 만들어 줄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