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승현의 남북 MZ] 대남 확성기·대북 확성기의 추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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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신대 교양학부 교수(통일학·경영학)

남북 격차 확대 대북 방송이 압도
북한 장마당 세대에 치명적 무기
확성기 전쟁의 미래 영향력 주목

필자는 비무장지대(DMZ)에서 북측 심리전 방송 요원이자 서부전선 내 방송국 책임조장으로 근무하다가 휴전선을 통해 한국으로 왔다. 당시는 비무장지대를 중심으로 남측의 대북 확성기와 북측의 대남 확성기 공세가 끄트머리로 치닫던 시기라 최전방 확성기 방송은 군사적 긴장 고조를 유발해 왔다. 남북은 여러 심리전 수단 중에서도 각자 확성기 방송에 집중하고 있었는데 전방에 설치된 확성기를 통해 체제의 우월성을 직접 전파할 수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2000년대 초까지 남북은 전 휴전선 일대에 800여 개의 확성기 스피커를 운용하고 있었고, 야간에도 환히 볼 수 있는 선전용 전광판과 입간판을 남북이 각각 100여 개와 200여 개씩 설치해 심리전을 진행해 왔다. 한국전쟁 휴전 이후 반세기 넘도록 군사분계선(MDL) 지역에서 한국보다 더 공세적인 심리전을 전개하던 북한이 주춤거리기 시작했던 것은 소련 및 동유럽 사회주의 붕괴 이후 고립의 길로 접어들면서다. 체제 경쟁에서 열세를 확인하면서 북한 사회의 우월성을 선전해 봐야 의미 없는 울림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 시점이기도 했다. 설상가상으로 전력난과 장비난으로 대남 확성기 방송 시간은 하루 15시간에서 5시간으로 줄어든 반면 대북 확성기는 하루 10~15시간 증가했고, 공세적이었던 대남 확성기 방송은 대북 확성기를 방어하는 수세적 위치로 전환했다.

필자가 북측 비무장지대에 있는 방송국에 배치되었을 때 이미 방송국 명칭이 ‘제압방송’으로 바뀌었다. 제압방송은 대북 확성기 방송 내용의 차단을 목표로 대북 확성기가 진행되면 대남 확성기의 자체 출력을 최대로 높여 남측 방송의 내용과 메시지를 무력화시키는 맞불 방송으로 운용됐다. 하지만 전력이 제대로 들어오지 않고 방송 장비 부품도 원활하게 조달되지 않으면서 비무장지대의 북한군은 남쪽의 일방적인 방송을 속수무책으로 들어야만 했다. 어찌 보면 좁은 DMZ 안에서 남북의 확성기 소음으로 노이로제에 걸릴 지경인 군인들 처지에서는 한쪽의 고출력 스피커만 중단되어도 반가운 일이다.

기본적으로 전방에 설치된 대북 확성기를 통한 대북 방송은 대한민국 체제의 우월성을 선전하는 내용으로 진행한다. 북한 체제를 고발하는 내용에는 북한 정권의 독재성과 인권침해, 경제적 실패 등이 포함돼 있고 북한군의 사기 저하를 위해 한국의 경제 발전과 생활 수준 등과 함께 국내외 뉴스와 최신 가요, 날씨 등도 내보낸다. 또한, 한국에 와 있는 탈북자들의 현황과 탈북 방법, 탈북 이후 남한에서의 생활에 대한 정보를 제공했는데 DMZ 내 북한군에게는 휴전선을 통해 한국으로 간 사례에 관심이 높다. 하지만 어찌 된 일인지 당시에는 휴전선 탈북 군인에 관한 방송 내용에는 한국에서의 정착 부분만은 쏙 빠져 있었다. 그 이유는 일반 탈북자와 다르게 휴전선을 통한 탈북 사례가 많지 않을 뿐더러 한국에서 성공 사례도 극히 드물기 때문으로 보인다.

그동안 대북 확성기가 북한군의 귀순 결심에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는 홍보와는 다르게 대북 확성기로 인한 귀순 사례는 드문 것으로 밝혀졌다. 대북 확성기가 공세적으로 진행되는 시기에 귀순한 사례보다는 방송 중단 후 귀순한 군인이 대부분이란 사실이 그 방증이다. 하지만 이는 과거 이야기일 수 있다. 장마당과 개인주의 환경에서 성장한 현재의 북한군에게 북한 체제의 취약점과 한국 사회의 발전상은 이제는 ‘정보’를 넘어선 ‘사실’에 가깝기 때문이다. 다만 심리전에서도 신뢰는 중요하다. 북한의 오물 풍선과 확성기 방송 문제로 소란스러울 무렵 알고 지내던 한 예비역 장군이 이럴 때 휴전선 귀순자들이 대북 확성기의 위력에 대해 한마디만 해 주면 얼마나 좋겠냐는 푸념을 한 적이 있다. 몇 명 안 되는 휴전선 귀순자들이 침묵을 지키는 것은 그럴 만한 이유가 있어서일 거라고 말해줬지만 사실 북한군에게 한국의 발전상만큼이나마 중요한 것이 한국을 선택했을 때 이곳에서의 삶에 관한 부분일 것이다. 그런 면에서 단순한 정보 전달보다는 한국을 선택한 후 삶의 질이 향후 심리전의 중요한 척도가 될 수 있다.

현재 대남 확성기는 기능을 상실했지만, 대북 확성기는 북한 정권의 ‘아킬레스건’으로 평가받는다. 비무장지대 30㎞ 안에 장마당 세대로 불리는 북한군 70여만 명이 복무 중인데 북한 지도부는 이들이 대북 확성기에 노출된다면 북한 체제 근간이 흔들릴 수 있다고 판단하고 있는 모양새다. 아직도 북한군의 복무 기간이 10년으로 긴 만큼 심리전은 연쇄적 탈북뿐만 아니라 전역 후 전국으로 흩어진 이들에 의해 북한 내부에 영향을 미칠 치명적인 무기가 될 수 있다. 남북의 갈등 상황에 따라 중단과 재개, 반복의 역사를 지속해 온 남북 ‘확성기 전쟁’은 대남 확성기의 몰락과 대북 확성기의 강력한 카드 앞에 또 다른 파란과 도전적인 환경을 예고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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