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트북 단상] 한국 정치, 정반합은 언제쯤
김형 편집부 차장
헤겔이 당황하고 있을지 모른다. 한국 정치판을 보면서. 헤겔은 변증법, 국내에서는 ‘정반합’ 이론으로 알려진 사상가이다. 정반합 이론은 1970~80년대 민주화 운동이 한창일 때 주목 받았다. 한국 진보 진영들이 군부 독재 정권을 무너뜨리고 사회를 변화시키기 위한 이론적 토대로 이용됐다. 세월이 지났지만, 정반합 이론은 사회와 개인이 성장하는 과정을 설명하는 강력한 도구이다.
정반합 이론은 ‘정’, ‘반’, ‘합’의 세 단계로 이뤄진다. ‘정’은 현재 사회를 지배하고 있는 주장이나 개인의 상태, ‘반’은 ‘정’에 대한 반대 또는 대립되는 주장 그리고 ‘합’은 ‘정’과 ‘반’의 갈등을 통해 도출된 새로운 개념이나 상태를 의미한다. 이러한 과정을 반복하며 사회나 개인이 성장한다는 것이 요점이다.
그런데 헤겔이 지금의 한국 정치 현실을 보면 머리가 아플 듯하다. ‘정반합 이론이 틀렸나’라고 생각할지 모른다. 거대 양당 중심의 한국 정치 구조상 ‘정’은 4·10 총선에서 승리해 최대 의석을 차지하고 있는 민주당일 것이다. 이에 맞선 국민의힘을 ‘반’으로 볼 수 있다. 그런데 ‘정’과 ‘반’은 ‘강 대 강’ 대립과 극한 갈등만 되풀이할 뿐 민생을 담은 발전적인 ‘합’은 내놓지 못하고 있다.
민주는 총선 승리에 고취된 것일까? 아니면 헤겔을 따르던 진보 진영이 지금은 기득권인 ‘정’이 돼 ‘합’을 망각한 걸까? 선거 이후 입법 독주를 밥 먹듯 이어가고 있다. 자기들에게 유리한 원 구성을 위해 단독 표결도 강행할 모양새다. 소수 강성 지지층이 상식적 다수를 지배하는 ‘뉴노멀’이 당내 자리 잡는 것 같아 안타깝다. 무엇보다 특정인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당헌·당규 개정까지 이뤄지고 있다. 또 국힘은 총선에서 참패하고도 쇄신은 말뿐이고 당권을 둘러싼 내부 권력 투쟁에 몰두해 있는 모습이다. 민주의 입법 독주에 마땅한 방법을 찾지 못하고 대통령 거부권만 남발하고 있다. 특히 해외직구 규제 철회 등 굵직한 정책 이슈마다 헛발질을 하고 있다. 결국 22대 국회 첫 본회의가 여당이 불참한 가운데 ‘반쪽’으로 시작됐다. 야당이 단독으로 국회를 개원한 것은 헌정 사상 처음이다. 22대 국회 역시 21대처럼 지루한 갈등만 이어가며 민생을 외면하는 최악 국회로 남을 가능성이 크다.
그런데 이들이 착각하고 있는 것이 있다. 사실 4·10 총선에서 민주가 압승한 것처럼 보이지만 득표율을 따지면 민주가 승리했다고 보기 어렵다. 실제로 민주와 국힘의 득표율 차는 5.4%에 불과했다. 5.4% 격차에도 민주는 승리자가 됐고, 국힘은 패배자가 됐다. 지역구에서 득표 수 1위 후보만 당선되고 나머지 후보의 표는 ‘사표’가 되는 현행 소선거구제 영향이 크다. 민심이 반영된 득표율만 놓고 따졌을 때에는 그 누구도 승자가 아닌데 말이다. 현행 소선거구제 탓에 절반 정도가 사표가 됐으나 그 민심은 여전히 살아있다. 민주는 사표가 50%에 육박한다는 생각을 하면 승자로서 자신의 입장만 고집해서는 안 된다. 국힘 역시 사표가 패배의 핑곗거리나 되는 것처럼 기존 입장을 고수할 명분으로 삼을 수 없다. 양당 모두 승리자가 아니라 패배자 입장에서 민심을 바라보자. 사표로 얻은 승리 대신 민심이 반영된 승리 말이다.
김형 기자 moon@busa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