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훈의 시그니처 문화공간 이야기] 2차 대전 벙커가 미술관으로 변신, 잠룽 보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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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룽 보로스 전경. 이상훈 제공 잠룽 보로스 전경. 이상훈 제공

전 세계 주요 수집가의 미술관이 ‘컬렉션’이라는 이름으로 관람객을 만나는 곳이 제법 된다. 스위스 루체른의 로젠가르트 컬렉션, 프랑스 파리의 피노 컬렉션, 미국 휴스턴의 메닐 컬렉션, 뉴욕의 프릭 컬렉션이 대표적이다. 독일 베를린의 잠룽 보로스도 그러하다. 독일어로 잠룽(Sammlung)은 컬렉션이란 뜻이다.

광고업계의 성공한 사업가인 크리스티안 보로스는 자신의 컬렉션을 전시할 베를린의 역사적인 장소를 물색했고, 2차 세계대전 시기인 1943년 히틀러 명령으로 건축가 카를 보나츠가 설계한 벙커를 2003년 구입한다. 다른 벙커와 마찬가지로 전쟁 직후는 감옥으로 사용되었다가 이후 꽤 오랫동안 직물과 과일을 저장하는 창고로 쓰였던 공간이다. 독일 통일 직후인 1992년부터는 테크노 클럽으로 바뀌었다.

베를린에는 2차 세계대전 당시 폭격에 대비해 자국민을 대피시키기 위한 벙커가 곳곳에 남아 있다. 독일인에게 벙커는 참혹한 역사의 잔해이다. 벙커를 부수지 않고 보존하는 곳이 적지 않으며, 도심 속에서 과거의 역사를 직면하고 있다. 그리고 몇몇 벙커는 과거를 넘어 미래로 향하고 있는데 이들 중 대표적인 곳이 베를린 미테 지역에 위치한 라이히스반 벙커이다.

보로스가 인수한 라이히스반 벙커는 그의 컬렉션을 담은 현대미술관으로 바뀌었다. 건축가 캐스퍼 뮐런 니어에 의해 베를린에서 가장 주목받는 현대미술관으로 재탄생한 것이다. 현재는 예약제로 운영되고 있으며 적어도 한 달 전에는 예약해야 할 만큼 인기가 많다.

건물을 처음 마주하였을 때 그 육중한 콘크리트 매스가 주는 위압감에 놀라게 되고, 내부로 들어가면 창 하나 없이 폐쇄적인 공간을 잇달아 만나게 되면서 긴장감마저 돈다. 하지만 회화부터, 조각, 설치미술, 비디오, 사진 등 독립적인 공간마다 각기 다른 작품을 만날 수 있어서 그 긴장감은 이내 호기심으로 바뀐다.

흥미로운 것은 진입로가 사면으로 뚫려져 있어 똑같은 4개의 파사드를 가지고 있다. 그래서 입구가 어디인지 알기가 쉽지 않다. 심지어 단 하나의 사인물도 건축물 외관에는 없다. 예약 시간이 되어 내부에서 문을 열어주었기에 메인 파사드와 입구를 알 수 있었으며, 이마저도 두 개의 철문으로 된 입구 중 하나는 거대한 돌로 막혀 있어, 무언가 역사적 사건 현장 한가운데 있는 분위기를 연출시킨다.

부산에도 200여 개의 근대건조물이 있고, 문화재 수준의 가치가 있는 건조물을 2010년부터는 근대건조물로 지정, 관리하는 조례가 제정되었다. 하지만 손이 미치지 못한 40여 곳은 이미 사라졌고, 시비로 매입해 운영하는 곳도 처음 의도와는 다르게 방치되기도 한다. 아쉬운 대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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