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건수의 지금 여기] 이·팔 분쟁, 멀고 먼 평화의 길

김건수 논설위원 kswoo333@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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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구의 영토 야욕이 비극의 씨앗
80년 가까운 세월 눈물의 땅으로

국제 질서 여전히 힘의 논리 지배
겹겹의 정치 역학 관계 얽히고설켜

소통 꽉 막힌 한반도 상황 오버랩
불신·적대 걷고 대화의 물길 뚫어야

팔레스타인 무장 정파 하마스와 이스라엘 간 교전 엿새째인 12일(현지시간) 가자지구 중심 도시 가자시티에서 팔레스타인 남성이 아이를 품에 안은 채 달리고 있다. 이번 무력 충돌로 지금까지 양쪽 사망자 수는 2500명이 넘는 것으로 전해졌다. 연합뉴스 팔레스타인 무장 정파 하마스와 이스라엘 간 교전 엿새째인 12일(현지시간) 가자지구 중심 도시 가자시티에서 팔레스타인 남성이 아이를 품에 안은 채 달리고 있다. 이번 무력 충돌로 지금까지 양쪽 사망자 수는 2500명이 넘는 것으로 전해졌다. 연합뉴스

중동이 다시 거센 불길에 휩싸였다. 지난 7일(현지시간) 팔레스타인 가자 지구를 통치하는 무장 정파 하마스가 먼저 방아쇠를 당겼다. 수천 발의 로켓에 피폭된 이스라엘은 즉각 대규모 보복 공격에 나섰다. 여기에 이란의 지원을 받는 레바논의 무장 세력 헤즈볼라가 가세했다. 이스라엘은 지상군 투입을 준비 중이고, 미국은 항모전단을 전진 배치해 군사 지원에 뛰어들었다. 양쪽 사망자 수가 벌써 2500명을 넘었다는 소식. 일촉즉발의 상황이다.

이·팔 분쟁은 80년 가까운 세월 이어지고 있는 중동의 눈물이다. 원죄는 서구 열강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1914년 일어난 제1차 세계대전 때 비극의 씨앗이 잉태됐다. 당시 중동 지역 대부분은 오스만 제국 땅이었다. 제국을 와해시켜 영토를 차지하려고 애쓴 나라가 영국이다. 당시 전쟁 내각의 외무장관이던 아서 밸푸어는 시온주의 지도자 월터 로스차일드 가문을 필두로 한 유대계 금융권에 접근해 전쟁 자금을 지원해 주면 유대인의 독립국 건립을 돕겠다고 약속했다(밸푸어 선언). 유대인이 유럽을 떠나 팔레스타인에 새 나라를 세워야 한다는 시온 민족주의 운동을 이용한 것이다.


그런데 영국은 아랍 민족주의자들에게도 똑같은 약조를 했다. 오스만 제국을 무너뜨리게 도와주면 아랍 민족의 통일 국가를 세우도록 해주겠다는 것(후사인·맥마흔 협정). 또 한 편에는 영국과 프랑스가 중동 지역을 분할 점령하기로 한 밀약(사이크스·피코 협정)이 따로 있었다. 거짓 약속, 이중·삼중 계약이었던 셈인데, 유대계·아랍계에 대한 독립 약속은 그렇게 무시됐다.

2차 대전 이후 이 문제는 유엔 소관으로 넘어갔다. 하지만 이·팔 영토 분리안은 어느 쪽도 만족시키지 못했다. 그러는 사이 유대인들은 팔레스타인으로 이주해 예루살렘을 수도로 건설해 나갔다. 결국 1948년 제1차 중동전쟁이 터지고 아랍 연맹에 승리한 이스라엘이 건국을 선포한다. 그때 팔레스타인은 영토의 78%를 잃었다.

이후로도 팔레스타인은 서방의 지원을 받는 이스라엘과의 전투에서 연전연패했다. 팔레스타인 땅은 지금 요르단강 서안과 가자 지구로 크게 축소된 상태다. 1993년 이스라엘의 이츠하크 라빈 총리와 팔레스타인 지도자 아라파트가 미국 백악관에서 평화협정을 체결하기도 했다. 계획대로 실천되면 좋았겠으나 역사의 여신은 중동 평화를 거부했다. 라빈이 군중집회에서 극우파에 살해됐기 때문이다.

분쟁의 속을 들여다보면 대단히 복잡한 실타래로 얽혀 있다. 서안 지구는 팔레스타인의 집권 세력인 파타가, 가자 지구는 하마스가 통치 실권을 쥐고 있는데 무장 투쟁에 대해 견해가 서로 달라 갈등을 빚었다. 이번 충돌을 주도한 하마스는 이스라엘과 사우디아라비아의 수교 움직임에 반발해 온 강경파다. 중동 전체로는 이란·이라크를 비롯한 시아파, 미국 등 서방의 지원을 받는 사우디 중심의 수니파가 대결하는 구도가 엮여 있다. 최근 중동에서 영향력 확대를 꾀하는 중국과 러시아의 움직임도 변수다.

국제 질서는 여전히 냉혹한 힘의 논리가 좌우하는 국익의 각축장이다. 우리는 식민 지배의 설움을 겪은 바 있고 한반도의 허리를 분할 당한 뼈아픈 기억이 있다. 먼 이국땅에서 벌어지는 이·팔 분쟁을 주시하는 이유는 이런 국제 정치 역학의 중요성을 잘 알기 때문이다. 하여, 어쩔 수 없이 남북·북미 관계가 오버랩될 수밖에 없다. 돌이켜보면 2000년, 2007년, 2018년 남북정상회담 때처럼 관계 개선과 평화 정착을 위한 노력이 없지는 않았다. 그러나 불신과 적대를 키우는 정치 역학이 늘 발목을 잡았다. 긴장과 위기의 반복 끝에 지금은 대화 통로가 끊겨 무력 대결로 치닫고 있다.

이번 이·하마스 충돌 때 일부 국내 언론은 한반도 전쟁 상황을 대입해 긴장을 조성하는 모습을 보였다. 이스라엘의 아이언돔이 초기 대응에 실패한 걸 보건대 북한 장사정포 같은 재래식 무기에 우리 방어 체계는 더 취약할 수 있다는 논리였다. 평화를 모색하기에도 부족할 시간에 대놓고 한반도 위기를 강조하는 게 무슨 도움이 되는지 의문이다.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을 막론하고 많은 사람이 죽어 나가고 있다. 고통과 비극 앞에서 인간이 해야 할 도리는 평화를 찾고 생명을 지키기 위해 미약한 힘이나마 모으는 것이다.

악화일로인 북미 관계는 국제 정치의 역학 관계에 따라 언제 파국으로 치달을지 모른다. 그때 평화는 길을 잃고 한반도는 다시 눈물의 땅으로 변할 것이다. 남북이 이번 기회에 불신과 적대를 해소하기 위한 깨달음의 지혜를 모아야 한다. 대화의 통로를 여는 것이 무엇보다 급하다. 힘들고 복잡한 과정을 하나씩 되밟아야 하겠으나 다른 길이 없다. 평화와 인권의 감수성을 회복해 무너진 신뢰, 막힌 소통의 물길을 다시 뚫어야 할 때다.

김건수 논설위원 kswoo333@busan.com


김건수 논설위원 kswoo333@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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