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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래의 메타경제] 문제는 우선순위
한국전쟁에 참전하였던 미군들이 남긴 기록을 보다가 눈물이 나기도 하고 놀라기도 한 것이 아직도 기억에 생생하다. 참혹한 전쟁 중에서도 한국의 맑고 높은 가을 하늘을 넋을 빼고 보았다는 기록에서 눈물이 나기도 하고, 시골 어디를 가나 초등학교가 있다는 기록에서 크게 고개를 끄덕인 적이 있었다.
그러면서 기록은 한국의 농촌 어디를 가든 큰 건물을 보거든 초등학교로 생각하면 틀림이 없다고 강조하고 있었다. 찢어지게 가난한 상황에서도 한국은 초등교육에 투자를 하고 있는 것에 그들은 큰 놀라움을 나타내었다. 물론 많은 초등학교들은 일제강점기에 이미 세워진 것이었을 게다. 그렇지만 재정 사정이 형편없었던 시절에도 초등학교 문을 닫지 않았던 것은 대단한 일이라고 하겠다.
사회간접자본이라고 하면 으레 고속도로나 철도를 떠올리겠지만 의외로 우리 주변 곳곳에 사회간접자본이 널리 깔려 있다. 일자리 안내와 시민들이 쉴 수 있는 공간, 그리고 새로운 기술을 익히고 정보를 얻는 기관은 물론 다양한 복지 시설에 이르기까지 정말로 찾아보면 곳곳에 사회간접자본이 넘쳐나는 것을 발견한다.
그런데 정말로 필요한 사회간접자본을 제대로 공급하고 있는 것일까를 곰곰이 생각하게 되는 경우가 많다. 이른 아침 온천천에 가끔 나간다. 약간은 어두운 시간인데도 온천천 양변은 사람들로 붐빈다. 부산에서 온천천만큼 접근하기 쉽고 걷기 좋은 곳도 없다. 이른 시간 온천천 양변을 꽉 메운 사람들은 모두 나이 든 사람들이다. 노인의 도시 부산을 정말로 백배 느끼게 되는 시간이다.
그러면서 돌아보니 온천천 전체가 어르신들의 운동기구로 꽉 차 있다. 온천천 가까운 곳에 오랫동안 살면서 온천천의 관리 주체인 동래구와 연제구가 다투어 공사를 하는 것을 수없이 보아 왔다. 거의 한 해도 거르지 않고 양쪽 어디에서인가 무엇인가 뜯어내고 새로 세우는 일이 반복되었다.
그런데 아주 기이하게도 어린이들을 위한 시설은 별로 없었다. 유아들을 위한 놀이시설이 있었다는 기억은 전혀 없다. 부산과 한국이 직면한 문제 중에 고령화와 저출산이 가장 심각한데, 그 문제에 대한 부산의 시선이 얼마나 편중되어 있는지 명확하게 보여 주는 사례이다. 저출산 때문에 도시와 나라의 존립이 위태로운데도 아직 우리의 인식은 그에 미치지 못하고 있다. 비단 이것은 온천천만의 문제가 아니라 부산 전체의 문제이기도 하다.
올 여름에도 정말 많은 사람들이 해외여행을 다녀왔다고 한다. 가까운 나라들로 많이 갔지만 배울 게 있는 선진국들로도 많은 사람들이 다녀왔을 것이다. 어디를 가든 어린이들이 놀 곳이 있고, 놀이터마다 그 지역의 문화적 콘텐츠가 스며 있는 창의적인 놀이기구와 시설들을 보면서 조금은 놀라는 경험도 있었을 것이다.
정말로 아이가 귀하고 그들이 우리의 미래라면 어르신의 운동기구를 만드는 만큼 아이들이 나와서 놀 수 있는 놀이시설도 만드는 데 진심을 보여야 하지 않을까. 투표권이 있는 어른의 시설뿐만 아니라 우리 사회의 미래를 위해 정말로 필요한 사회간접자본이 무엇인지 고민하여야 하는 것이다.
아이를 낳지 않고 젊은이들은 떠나고 고령화된 어르신들이 돌아가시면서, 부산은 빈집이라는 또 다른 사회적이면서도 경제적인 문제와 맞닥뜨리고 있다. 사실 이것도 오래된 문제이지만 최근 들어 갑자기 부각되고 있다. 사람이 없어 비어가는 집에 대한 대책을 세우기는 매우 어렵다. 재생도 사람이 있을 때 효과가 있지, 사람이 떠나면 아무런 효과가 없다.
빈집에 대한 가장 미래지향적인 대응은 공공이 매입하는 것이다. 공공이 보유하고 있는 자산이 많을수록 도시계획을 세우고 정책을 수립하기가 좋다. 언젠가 도시가 필요한 건물을 짓고 시설을 확보하고 또 도시의 미관을 살릴 수 있는 디자인을 강제할 수 있으려면 공공이 일정 부분 소유권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부산시가 나서서 빈집을 사들이는 것이 최선인데 아마 돈 때문에 쉽지 않을 것이다. 사실 부산시의 예산을 이리저리 따져 보면 여윳돈을 찾아내는 것은 매우 어렵다. 재정은 언제나 그런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지금 여유가 없다면 앞으로는 더욱 여유가 없다. 오랫동안의 정체 속에서도 부산 경제는 여전히 성장을 하고 있고, 그로 인해 부산시의 예산도 매년 최고 기록을 경신하고 있다.
다시 돌아보자. 미국의 원조 자금으로 재정을 어렵게 꾸리던 힘든 시절에도 초등학교는 문을 닫지 않았다. 돈이 없는 것은 맞지만 문제는 우선순위이다. 그게 또 재정이다.
2024-09-10 [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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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소영의 법의 창] 초연결사회에 필요한 디지털 쉼표 법제화
아침에 눈뜨면서 카톡을 확인하고, 관심 있는 동영상을 보며 출근 준비를 한다. 출근길에는 인스타그램에서 지인들의 스토리와 게시물에 ‘좋아요’를 누른다. 근무 중 인터넷 검색을 하고, 점심 식사는 블로그 추천 맛집에 간다. 텔레그램으로 전달된 업무 지시도 이행하고, 귀갓길에는 좋아하는 유튜버 방송을 청취한다. 앱으로 주문한 저녁 식사 후엔 게임하고, 침대에 누워 핸드폰을 하다가 잠이 든다. 우리의 흔한 하루 모습이다.
우리는 지금, 초연결사회에 살고 있다. 초연결사회란 사람, 사물, 공간 등 모든 것들(Things)이 인터넷(Internet)으로 서로 연결되어, 모든 것에 대한 정보가 생성·수집되고 공유·활용되는 사회를 말한다. 초연결사회는 우리의 생활 전반에 많은 변화를 일으켰고, 이 변화는 긍정적이기도 부정적이기도 하다.
게다가 인공지능(AI)의 등장으로 디지털이 사람을 돕고 보완하는 것을 넘어, 사람과 함께 공존하는 디지털 심화 시대가 시작되었다. 이러한 디지털 세계의 확장은 초연결사회를 더욱 강화한다. 디지털 중독을 고민하게 된 우리가 스스로를 지키기 위한 디지털 쉼표를 찾고 만들어가야 하는 현실적 이유다.
디지털 쉼표 제도 중 대표적인 것이 소위 ‘연결을 끊을 권리(right to disconnect)’의 법제화다. 기기의 전원을 끄지 못하는 현대 직장인들에게, 더 나은 휴식을 취하고 일과 삶의 균형을 위해 퇴근 후 직장으로부터의 연락과 연결을 끊을 수 있는 법적 권리를 인정하는 내용이다. 물론 비상 상황이나 직책, 업종별 차이 등 예외는 인정된다.
‘연결을 끊을 권리’ 보장법은 프랑스, 독일 등 20여 개 국가에서 시행되고 있고, 8월 26일부터 시행된 호주법이 가장 강력한 처벌 규정(최대 8460만 원 벌금 부과)을 두었다. 우리나라에서도 근로자의 사생활 보장을 위해 지난 8년 동안 ‘퇴근 후 업무 카톡 금지’ 법안을 논의했지만, 아직 성사되지 못했다.
디지털 기기로 인한 수면장애, 몸을 움직이지 않는 생활 방식, 신체 활동 부족, 과체중과 비만, 시각에 미치는 직간접의 부정적 영향 등은 여러 조사 결과를 통해 확인된 바 있다. 그래서 특히 미성년자의 휴대전화 사용 문제는 우리를 비롯한 여러 국가에서 논쟁 대상이 되어 왔다. 독일은 공립학교에서 교육 외 목적의 교실 내 휴대전화 사용을 제한하며, 영국도 수업 시간 휴대전화 사용 금지 지침을 발표했다.
프랑스는 9월부터 중학교 대상의 ‘등교 후 스마트폰 금지’ 정책을 시범 도입했다. 이미 2018년 초·중학교 내 휴대전화 소지 허용 및 사용 금지법을 시행했지만 강제성이 없어서 잘 지켜지지 않았고, 결국 물리적으로 사용을 막기로 한 것이다. 이제는 우리도 언론에 보도된 교실에서의 문제적 상황 때문이 아니라 디지털 쉼표 차원에서의 재고가 필요하다.
개인은 어떻게 해야 할까. 온라인 활동 중 중요한 개인정보가 노출되지 않도록 각별히 주의해야 한다. 초연결사회에서 자신이 원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자신과 관련된 정보가 계속 노출되는 괴로움은 심각한 사생활 침해가 된다. 여기에 ‘잊힐 권리(right to be forgotten)’의 출발점이 있다.
잊힐 권리는 정보 주체가 온라인상 자신과 관련된 정보에 대한 삭제 및 확산 방지를 요구할 수 있는 자기결정권이다. 자신이 과거에 저지른 행동에 구애받지 않고 자신의 삶을 주체적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보장해 주자는 의미다. 물론 이 권리의 인정 여부나 범위에 대해서는 국가마다 입장이 다르다. 상대방의 알권리 보장이나 기술적 실효성 등 어려움이 병존해서다.
지난해부터 개인정보보호위원회는 어릴 적 무심코 올린 개인정보가 포함된 온라인 게시물에 대해 삭제나 블라인드 처리 등을 도와주는, 이른바 ‘지우개 서비스’를 시행하고 있다. 19세 미만 아동·청소년 시기에 본인이 온라인에 글·사진·영상 등 개인정보를 포함한 게시물을 게시했지만, 지금은 삭제를 희망하는 경우 정부가 대신 접근 배제를 요청하는 디지털 잊힐 권리 서비스다. 2023년 4월 시작 후 올해 7월까지 신청된 2만 896건 중 총 2만 272건이 처리 완료되었고, 신청 건수가 더 증가하는 추세다.
우리는 선택했든 선택하지 않았든 일상에 아주 많은 것들과 ‘연결’된 사회에서 살고 있다. 거의 모든 것이 연결되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렇다고 디지털 부작용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기술이 미래를 변화시키는 것에 저항하는 매우 특이한 공동체인 아미시(Amish)처럼 지낼 수는 없다. 권리를 보호하기 위해 필요한 법제 마련이나 개인적 노력도 필요하지만, 그 안에는 연결의 가치와 더불어 비연결의 가치도 함께 담아야만 한다.
2024-09-03 [17: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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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우석의 기후 인사이트] 혼돈과 질서, 기후 시스템의 양면
1961년 미국 MIT 연구실에서 갓 부임한 교수가 기온 분포를 예보할 수 있는 간단한 예측 모델을 시험하고 있었다. 이 모델은 날씨의 비선형적인 특성을 포함하고 있었다. 교수는 기본값을 설정하고, 당시 컴퓨터를 이용해 시간이 지남에 따라 변하는 온도 값을 계산하기 시작했다. 이후 비슷한 기본값들을 설정하여 모델을 반복 실행하면서 여러 기온 데이터 세트를 만들었다. 비슷한 초기 조건에서 생성된 데이터이기 때문에 그는 시간에 따라 변하는 비슷한 값을 지닌 데이터를 얻을 수 있으리라 기대하였다. 그러나 결과는 기대와 크게 달랐다. 거의 동일한 초기 조건에서 시작된 온도 값들이 시간이 지남에 따라 완전히 다른 결과를 보였던 것이다.
구식 컴퓨터의 오작동으로 치부될 뻔한 이 테스트는 한 젊은 교수의 집념 덕에 물리학의 중요한 이론으로 발전했다. 이 이론이 바로 카오스 이론이며, 이를 시작한 교수가 에드워드 로렌츠(Edward Lorenz)이다. 거의 모든 자연계 시스템은 비선형적인 특성을 가지고 있으며, 그중 가장 독특한 성질이 바로 카오스다. 비슷한 초기 조건에서 시작한 동일한 시스템이 시간이 지나면서 완전히 다른 결과를 보일 수 있는데, 이를 카오스 이론에서 ‘초기 조건의 민감성’이라고 한다. 예를 들어, 마트에서 줄을 설 때 나와 앞 사람의 순서 차이는 매우 작은 찰나의 순간에 결정되지만, 그 결과로 누군가는 1만 번째 고객 경품 냉장고를 얻는 큰 행운을 얻고, 누군가는 그렇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이는 일상에서 볼 수 있는 비선형 시스템의 고유한 특성으로, 오늘날 현대 물리학의 중요한 이론으로 자리 잡았다.
날씨는 카오스 성질 자연 현상
단기 예보 한계 어쩔 수 없어도
장기 시간대에는 규칙성 보여
예측 가능성 최대한 활용해야
카오스 이론을 바탕으로 보면, 우리가 매일 접하는 일기 예보의 신뢰성을 더 잘 이해할 수 있다. 날씨는 카오스의 성질을 가진 자연계의 대표적인 시스템이다. 기상 예보 모델이 실제와 약간 다른 경곗값이나 초기 조건을 가질 경우, 시간이 지남에 따라 예측 결과가 실제와 크게 달라질 수 있는데, 이는 모델의 한계가 아니라 자연계의 본질적인 특성 때문이다. 물론, 더 정교한 모델을 개발하면 예측이 개선될 수 있지만 근본적으로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기후 변화로 인한 지구 곳곳의 이상기후 현상은 신뢰할 수 있는 예보를 더 일찍 제공해야 한다고 요구하고 있다. 아쉽지만 카오스 이론의 관점에서 보면 이는 현실적으로 어려운 요구이다. 날씨는 본질적으로 예측이 어려운 비선형적인 특성을 가지기 때문에 단기 예보에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다행인 것은 한 사람의 인격이 다양한 면을 가지고 있듯이, 기상과 기후 시스템도 카오스라는 단일한 특성만이 적용되진 않는다. 기후 시스템은 약 3일 이내와 같은 단기 시간대에서는 카오스의 성질을 지니지만, 이와는 달리 2주 이상의 장기적인 시간대에서는 규칙성도 갖는다. 2014년 〈사이언스〉지에 발표된 한 연구는 남반구 중위도 강수량의 총량이 약 25일의 주기성이 있다는 것을 밝혀냈다. 남반구 중위도에 비가 많이 내리는 기간이 존재하면 약 12일 후 비가 적게 내리는 날들이 존재하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주기성은 미래를 예측할 수 있는 특징으로, 카오스의 특성과는 대조적이다. 즉 정확한 날씨에 대한 예보는 3일 정도의 단기 예측에서는 불확실하지만 2주 정도의 장기 예측에서는 규칙성을 보일 수 있다.
오전 9시까지 출근하는 직장인은 직장에 도착하기까지 다양한 변수를 마주하게 된다. 가령 집을 나서자마자 중요한 서류를 잊고 다시 돌아가야 할 수도 있고, 갑작스러운 도로 위 사고로 교통 체증에 걸릴 수도 있다. 신호등을 기다리지 않는 행운으로 운 좋게 바로 출발하려는 버스에 승차하기도 한다. 이러한 다양한 변수 때문에 시시각각 직장인의 정확한 위치와 상황을 예측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하지만 책임감 있는 직장인은 대체로 9시 무렵에는 직장에 도착한다. 출근길 직장인의 정확한 위치를 분 단위로 예측하는 것은 어렵지만, 9시 언저리에 회사에 도착할 것이라는 예상은 충분히 신뢰할 수 있다.
최근 연구는 중위도 제트 기류와 이의 불안정성에 의해 발생하는 저기압이 상호작용하면서 25일 주기의 패턴이 형성된다는 것을 밝혀냈다. 이 주기성을 고려한 예보는, 마치 책임감 있는 직장인이 9시 무렵에 도착하는 것처럼, 약 2주 후의 날씨를 대략적으로 예측할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준다. 비록 날씨의 카오스적인 성질이 단기 예보의 한계를 드러내지만, 이와 더불어 기상기후 시스템이 지닌 예측 가능한 성질은 신뢰할 수 있는 중장기 예보가 가능하다는 희망 또한 제공한다. 기후 변화로 극한 기상이 증가하는 상황에서 신뢰성 있는 중장기 예보가 어느 때보다 중요해지고 있다. 앞으로의 예보는 이러한 예측 가능성을 최대한 활용하는 방법을 찾아야 할 것이다.
2024-08-27 [18: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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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승현의 남북 MZ] 탈주, 자유를 향한 경계 넘기
영화 ‘탈주’가 올여름 개봉작 중 처음으로 관객 수 255만 명을 넘기며 장기 흥행 모드에 들어갔다. 북한·분단을 소재로 한 작품에 대한 관심이 시들해질 즈음 모두의 예상을 깨고 다시금 관객을 집중시킬 수 있었던 것은 남북 대결이 휴전선을 중심으로 위태롭게 흘러가고 있는 점과 무관치 않다. 하지만 영화의 흥행을 보장하는 데 남북의 대결 구도나 탈출자의 스토리는 그리 함량이 높은 편이 아닐 것이다. 따라서 귀순 병사의 뻔한 탈출기가 아닌, 실패하더라도 꿈과 자유를 얻기 위해 ‘탈주’를 선택한 전개를 통해 한국에서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 모두의 복잡한 상황과 오버랩되며 관객의 흥미를 자극한다. 영화 ‘탈주’는 통제된 북한 비무장지대(DMZ) 부대에서 10년 만기 제대를 앞둔 규남(이제훈 분)의 실패할 자유가 있는 내일(한국)을 향한 질주와 오늘(북한)을 지키기 위한 보위부 장교 현상(구교환 분)의 목숨 건 추격전을 그린 작품이다.
영화는 북한군과 비무장지대 상황과 다소 어긋난다는 지적도 끊임없이 받아 왔는데 이를테면 자동차를 통한 탈북 과정과 추격 총격전, 고압선과 지뢰밭, 가수 자이언티의 노래 ‘양화대교’를 듣는 북한군과 한국어에 가까운 북한말 등 현실성이 낮다는 의견이 분분했고 감독도 인정했다. 하지만 감독을 포함하여 우리는 모두 영화보다 더 영화 같은 분단 상황을 간과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몇 년 전 판문점을 통한 귀순 병사는 군용차를 몰고 공동경비구역(JSA)의 군사분계선(MDL) 10m 앞까지 왔고 차가 배수로에 빠진 뒤 남쪽으로 향하자 북한군은 AK소총 등으로 40여 발의 총격을 가해 몸 5곳에 총상을 입은 후 가까스로 귀순에 성공했다. 휴전선을 넘어온 필자 역시 3중의 고압선과 수백m의 지뢰밭을 뚫고서야 한국에 올 수 있었고 DMZ 내 근무지에서는 몰래 라디오 주파수를 돌려가며 뉴스를 청취했다. 한때 북한의 MZ세대가 서울 말투뿐 아니라 용어까지 따라 하는 유행이 일었는데 이를 막기 위해 북한 당국은 ‘평양문화어보호법’을 제정하였으며 그 MZ들이 현재 북한군의 다수를 차지하고 있다. 최근 북한 오물 풍선 살포에 대응해 휴전선 일대에서 재개한 대북확성기의 방송 내용에는 북한군 46사단 전방 DMZ 안에서 귀순을 시도하려는 북한군이 포박돼 압송당했다는 내용도 들어있는데 영화가 아닌 현실이다.
그런데 영화 ‘탈주’가 관객에게 전달하려는 메시지는 북한과 탈출자에게만 국한되지 않는다. 제목이 말해주듯이 탈북도, 탈출도, 귀순도, 월경도 아닌 ‘탈주’다. 탈주의 사전적 의미는 ‘감금된 곳에서 몸을 빼어 달아남’이다. 분단은 한민족의 대결 상태를 뜻하므로 영화 ‘탈주’는 분단 현실에 갇혀 살아가는 우리의 이야기로 향하고 투영된다. 태어나 보니 분단국가인 나라의 MZ세대가 평소 그것을 인지하지 못하다가 군에 입대해서야 긴장된 현실을 마주하게 되는 상황이나, 분단으로 사방이 꽉 막힌 섬나라에서 청년들이 마주한 끊임없는 경쟁과 필사적인 도전은 마냥 남 일이 아니다. 영화는 더 이상의 안주가 보장되지 않는 작금의 현실과 미래에 경종을 울리고 있다. 세계 유일의 분단국가인 한국과 북한의 분단선은 통일을 원하든 아니든 잘못된 ‘민족의 분단선’으로서 그 불편함과 불안함에서 해방될 수 없다. 어디 그것뿐이겠는가. 북에서 탈주에 성공한 이들이 한국에 와서 겪게 되는 차별과 편견 속에서도 악착같이 더 나은 자유와 꿈을 위한 의지를 불태우는 스토리는 덤덤하지만 납득되는 메시지를 전달한다.
사실 북한군 신분으로 군사분계선을 통과해 온 필자 또한 목숨을 건 지독한 탈주 끝에 한국에 왔지만 만만치 않은 탈주의 여정은 지금도 현재진행형이다. 녹록지 않은 도전 끝에 교수라는 신분도 얻었지만, 무수한 좌충우돌 끝에 지금은 비무장과 멀리 떨어진 최남단에 있는 섬에서 살고 있지만 여기까지 쫓아오는 사회적 편견과 현실의 핍진함은 여전히 극복해야만 할 벽이다. 하지만 돌아보면 희망의 도착점은 늘 도전의 시작점이었고 자유와 의지는 절박한 삶에서 ‘탈주’를 선택할 수 있는 동력이었다. 그래서 아슬했던 휴전선 탈주 경험과 비빌 언덕 하나 없었던 치열한 경쟁 사회에서의 도전을 학생들과 공유한다. 그리고 대학 졸업 후 세상으로의 탈주를 준비하는 학생들에게 섬에서 많은 것을 배우고 축적한 후 대륙을 횡단하라고 주문하고 있다. 아직 포기하지 않는 절박한 꿈도 갖고 있다. 분단을 딛고 통일이 돼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는 내달음이라면 한 번 더 목숨을 걸만한 성취라고 믿고 있다. 성공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마음껏 선택하고 실패라도 해보기 위해서 간다”라고 했던 영화 속 주인공이 던진 대사의 의미를 여러 환경적 이유로 불안전한 현재에 사는 우리는 이미 직관적으로 알고 있다.
2024-08-20 [17: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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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순연의 도시 공감] 퐁피두, 공감의 도시문화로 전환하기
세계인의 축제인 파리 올림픽이 끝났다. 이번 올림픽은 문화 다양성과 탄소발자국, 지속 가능성 등의 키워드를 통해 과제와 가능성을 던진 대회로 평가되고 있다. 새롭게 건축하지 않고 기존의 공간을 활용해 서양 건축사 시간에 배웠던 르네상스 시대의 앵발리드 탑을 양궁 경기 내내 볼 수 있었다. 근대5종 경기에서는 베르사유 궁전 모습을 감상하면서 아이들에게 역사를 설명하는 계기가 되었다. 역사적인 장소뿐만 아니라 미래지향적인 파리라는 도시를 통해 과거와 현재, 미래의 시대적 정신을 담아냈다. 파리가 세계적인 이벤트로 전 세계의 이목이 집중된 것처럼 부산의 도시 공간에서도 파리의 도시 정책과 거점 활용에 대한 내용이 연결되어 있다. 그것이 바로 15분 도시 퐁피두센터일 것이다.
15분 도시의 경우 여가, 쇼핑, 교육, 문화, 휴식, 공유 및 재사용 등 다양한 기능을 복합적으로 누릴 수 있는 자립적인 생활권으로 재편성을 주도하였다. 그리고 공공 공간인 도로와 광장, 학교를 주민을 위한 삶의 공간으로 전환하는 동시에 주민 중심 문화와 소통을 강조한다. 파리의 경우 일상에서 문화를 연결하는 플랫폼 형식으로 재편성하는 작업을 진행하고 있다. 이러한 정책과 유사하게 소생활권 개념의 '부산형 n분 도시 사업'이 진행 중이다.
특히, 퐁피두센터는 1977년에 오픈한 복합문화공간이다. 지역재생 중에서 문화적 재생 사례의 성지로서 거점을 통한 지역 활성화를 모태로 건축과 도시를 전공하는 학생들이라면 무조건 방문해야 하는 코스 중에 하나이다. ‘대중을 위한 문화의 장소’로 건립된 퐁피두센터는 생마르탱 거리와 보부르 거리 사이에 경사진 광장을 지나다 보면 외관이 파이프로 노출된 괴상하게 생긴 건축물이다. 배낭여행으로 찾았던 퐁피두센터는 광장과 건축물을 따라 들어서다가 선명한 색채에 감탄하며, 공간 내부를 오르다 보면 자연스럽게 앙리 마티스, 마르셀 뒤샹, 잭슨 폴록의 작품들을 감상하고 개방형 도서관과 디자인 전시 및 관련된 서적들을 볼 수 있었다.
한참을 내부와 외부 공간을 보면서 건축이 가진 힘과 관계성에 대한 내용을 접하게 되었다. 당시 건축학도의 로망이었던 퐁피두센터가 ‘세계적인 미술관’ 계획 아래 부산에도 유치된다는 소식을 들었다. 대상지는 부산의 대표적인 자연경관지역으로 지역 주민들이 사랑하는 트래킹 장소인 부산 남구 이기대라는 뉴스를 접했다. 사업 초기에는 북항에서, 이제는 이기대로 장소가 변경되었으며 3차례에 걸쳐 계획이 수립 중이라고 한다. 중간에 모 기업에서 유치 경쟁에 끼어들어 이미 서울 63빌딩에 퐁피두센터 분관이 유치됨에 따라 사업의 힘이 빠졌으나, 2025년부터 퐁피두 분관 서울 4년간 유치 후 2030년부터 유치하는 계획 변경을 통해 추진 중이다.
시민단체에서는 몇 가지 문제점을 지적하고 있다. 첫 번째가 부산의 메가 이벤트가 대부분 동부산권역에 집중된 점에서 문화 불균형이다. 그리고 건설비를 포함한 로열티, 관리·운영 비용 문제, 인근 지역 대형주거지 인허가에 따른 공공성 훼손 문제 등 난개발 우려까지 제기했다. 세계적인 미술관이란 대표성을 가진 퐁피두센터가 오히려 시민의 공감대를 형성해야 함에도 과정의 투명성 문제와 대상지 주변의 이슈까지 겹치면서 논란이 되고 있는 셈이다. 결국 사업 타당성에 대한 의문까지 제기되고 말았다.
아마도 사업 초기에 입지타당성 및 다양한 장단점을 고려하여 계획을 수립했을 것이다. 다만 이러한 과정 속에 시민들의 공감대를 형성하는 적극적인 소통이 있었다면 세계적인 미술관이 부산 시민들에게 환영받지 않았을까. 건축계획각론에는 기획-계획-설계-시공이라는 단계적 추진 과정이 있다. 그중 기획은 예전에는 ‘초기 검토 정도’ 단계였으나, 현재는 하드웨어적 내용과 함께 사회·경제적 요소와 통계적 수치를 활용한 지속 가능성까지 반영하도록 한다. 그리고 사회적 실험을 통해 니즈와 가능성까지도 고려하여 기획 단계에서 했던 다양한 고민을 계획단계에 최대한 반영해야 한다.
퐁피두센터 본원이 지어진 지 약 50년 가까이 되어간다. 당시 퐁피두센터를 비롯하여 오르세미술관, 라빌레트 공원 등을 건립한 파리 전체가 문화 공간이자 창작 활동의 중심지 역할을 위한 활동이었다면 2024년 이후의 퐁피두센터는 달라져야 하지 않을까. 향후 50년 동안 세계적인 미술관으로서 자리매김하기 위해서는 지역이 가진 다양한 문화 요소와 결합하는 방법과 부산만의 도시의 방향성에 따른 마스터플랜 아래 퐁피두의 역할을 제안해야 하지 않을까? 법적 프로세스와 하드웨어적 검토가 아닌 도시문화로서 내용을 채울 방법과 퐁피두센터가 결합하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
2024-08-13 [18: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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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인권의 핵인싸] 망원경과 가속기
외국에서 태어난 딸아이가 하루는 한국말이 어렵다며 울상을 지었다. 학교에서 ‘별을 관측하기에 적당한 도구’를 묻는 질문에 망원경·현미경·돋보기가 예시로 나왔단다. 망원경도 현미경도 돋보기도 모두 ‘작은 것을 크게 보는 것’인데, 도대체 무엇이 다르냐는 푸념이었다. 당시 열 살이던 딸아이 덕분에 필자도 우리말의 어려움을 새삼 알게 됐다.
망원경·돋보기·현미경은 모두 작은 것을 크게 보는 원리지만, 각각의 용도에 맞도록 달리 제작된 도구다. 특히 멀리 있는 것을 당겨서 보기 위해 제작된 망원경과, 작은 것을 크게 확대하는 기능만 최대화한 현미경은 큰 차이가 있다. 빛을 모으는 볼록렌즈는 작은 것을 크게 보이게 하는 반면, 빛을 퍼뜨리는 성질이 있는 오목렌즈는 광각을 크게 만드는 역할을 한다. 흔히 이런 광학기기의 경우 자세히 볼 수 있는 분해능에만 관심이 있을 수 있으나, 실은 어두운 것을 밝게 볼 수 있게 하는 집광력도 광학기기의 아주 중요한 성능이다.
망원경은 멀리 있는 것을 크게 볼 수 있게 한다는 점에서 천체 관측의 중요한 도구가 됐는데, 멀리 있는 천체란 결국 빛이 그만큼 먼 거리를 달려와야 한다는 점에서 멀리 있는 별의 관측은 과거의 우주를 눈으로 관측하는 셈이 된다. 그래서 우주의 나이만큼이나 멀리 있는 별은 초기우주를 알려주는 중요한 단서가 된다. 그래서 원리적으로만 보면 ‘우주 최초의 상태를 알 수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하게 되지만, 유감스럽게도 초기우주는 빛이 아무 장애 없이 통과될 만큼 투명하지 않았다. 전기적으로 중성인 안정된 원자들이 형성되기 이전, 전자·핵·양성자·쿼크 등 하전된 입자들이 우주를 가득 채워 우주가 불투명했을 때를 알기 위해서는 다른 장치가 필요하다. 그게 바로 가속기다.
흔히 입자를 가속시킨다고 알려져 있는 가속기는 하전된 입자만 전기장을 통해서 가속시킨다. 음전하를 띠는 전자가 음극과는 밀치고 양극에는 당겨지는 원리를 이용한 것이다. 건전지의 음극과 양극을 따로 전선을 연결해서 두 판을 마주 보게 하면 가장 기본적인 가속장치가 되는데, 공기 입자가 방해하지 않도록 진공으로 만든다. 보통 음극을 뜨겁게 만들면 전자가 음극에서 방출되는데, 그래서 음극선관(Cathode-Ray Tube, CRT) 모니터는 그 자체로 작은 가속기다.
입자를 가속시키는 가속기가 초기우주 탐구를 가능하게 한 비결에는 두 가지 물리학적 이유가 있다. 입자는 빨라질수록 커다란 것은 통과해 버리고 점점 더 작은 것들과 반응하는 양자적 성질이 있다. 오늘날 세계 최대인 27km 가속기에서 가속된 양성자는 1아토미터(100경 분의 1m)의 미시세계까지 볼 수 있게 해 준다. 동시에 이 작은 공간에 집약된 엄청난 에너지는 아인슈타인의 ‘에너지와 물질의 등가원리’(E=mc²)에 따라 완전히 새로운 무거운 입자들을 생성시킨다. 좁쌀끼리 충돌시켰는데 마술처럼 수박과 호박들이 쏟아져 나오는 것이다. 10여 년 전 표준모형의 화룡점정이 된 힉스 입자도 양성자보다 약 125배 무겁다. 이렇듯 가속기는 빠른 입자를 통해 미시세계를 볼 수 있게 해 줄 뿐만이 아니라, 지금 우주엔 존재하지 않지만 최초의 우주에나 존재했을 법한 무거운 입자들을 생성시켜 우주 최초의 상태들에 대한 연구를 가능하게 해 준다.
약 400년 전 거의 동시에 발명된 망원경과 현미경이 인류 역사를 완전히 바꾸어 놓았듯이, 약 100년 전 개발된 가속기는 우주와 물질의 근원에 대한 탐구에 완전히 새로운 지평을 열었으며 거의 예외 없이 노벨상의 업적이 됐다. 미국과 러시아(옛 소련), 유럽은 경쟁적으로 고에너지의 가속기를 개발해 왔으며 일본도 예외가 아니었다. 30년 전 우리나라도 가속된 전자를 통해 고에너지의 빛(X선)을 만들어내는 포항 방사광가속기를 시작으로 최근 중이온(희귀동위원소) 가속기(RAON)를 완공하고 첫 충돌실험을 눈앞에 두고 있다.
우주를 이해하려는 인간의 노정은 당장의 편리와 재화를 창출하는 일과 자못 거리가 먼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역사의 새로운 지평을 열어가는 첨단기술 개발의 동인이 됨은 물론 세상을 보는 우리의 눈과 생각을 변화시킨다. 중국과 유럽은 최근 100km에 달하는 초대형 가속기 건설 추진을 선언하고 나섰다. 사실 현재의 우리 지식으로는 그 새로운 도구가 우리를 어떤 경지로 데려다 줄지 아직 모른다. 현미경과 망원경을 처음 만들었던 이들이 질병의 원인이 되는 세균 관찰과 우주여행까지 꿈꾸었을 리 만무하다. 답답하고 아슬아슬해 보이는 국내외 정세와 기후변화를 실감하는 무더위 속에서도 과학자들의 호기심과 끈기는 그래서 더 위대해 보인다.
“인류의 도약은 새로운 개념보다는 새로운 도구의 발명에서 기인한 바가 훨씬 크다.”(프리먼 다이슨)
2024-08-06 [18: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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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래의 메타경제] 위기와 부산의 선택
지금 살고 있는 아파트에 30년 넘게 살았다. 한곳에 오래 살다 보니 그 시간만큼 묵은 관계도 적지 않게 생겼다. 자주 다녔던 목욕탕은 그사이 몇 번 수리를 하였고, 아직도 장사를 하고 있는 작은 마트의 주인과는 만나면 반가운 인사를 나눈다. 여기에 이발소를 빼놓을 수 없다. 이사 오고부터 줄곧 한 곳에서만 머리를 깎았으니 참으로 오래된 인연이다.
이발소를 하시던 분이 얼마 전 문을 닫았다. 나이가 팔순을 바라보면서 기력이 많이 떨어진 탓이다. 한두 달에 한 번씩 들렀던 이발소에서 머리를 깎으면서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1960년대에 경북 영주에서 부산으로 와서 이발소를 시작한 그 분을 통해 내가 살고 있는 아파트 자리에 원래 미진화학이 있었다는 것을 알았다. 1950년대부터 부산 화학공업의 일익을 담당했던 미진화학, 그 옆에는 대우실업이 있었다. 물론 거기도 지금은 아파트가 들어서 있다.
오래전에 지어져 지금은 재개발의 열기에 들떠 있는 이 동네의 작은 아파트 자리들은 모두 기업들이 있었던 곳이다. 이발소 아저씨는 그 아파트 자리에 있던 기업들을 아직도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명절이 가까워 오면 고향에 가는 인근 공장의 근로자들이 머리를 깎으러 몰려들곤 했는데, 명절 전날에는 밤새워 근로자들의 머리를 깎았다고 했다.
부산 산업을 이끌었던 봉제와 플라스틱이 작은 길 하나를 두고 마주해 있었던 것처럼, 1960년대는 우리가 잘 기억하고 있지 않지만 부산 경제가 정말 잘나가던 때였다. 사실 포항제철이 생기기 전까지 우리나라 최대의 철강 도시는 부산이었다. 많은 철강기업이 지금은 부산을 떠났지만, 당시 부산에서 생산된 철강이 전국으로 판매되어 갔었다. 흔히 부산 경제의 구조적 문제점으로 지적되어 온 노동집약적인 경공업 중심이라는 수사는 훗날에 만들어진 것으로 1960년대 말까지만 해도 그렇지 않았다.
산업구조 혁신 기회 잃고 쇠락의 길로
기업 사라진 자리에 아파트만 들어서
수도권 집중 부산 경제 선택의 기로
소멸 벗어날 준비 하고 있나 성찰해야
그리하여 부산시도 이러한 사실을 매우 자랑스러워했는데 ‘신문 용지 말고는 모든 것을 만들 수 있는 유일한 도시’라는 자부심을 공식 기록에 남기고 있었다. 그리고 부산의 미래를 ‘종합공업도시’로 제시하면서 경공업과 중화학공업이 고루 발전된 도시를 지향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1970년대로 접어들면서 그 길은 깨어졌다. 부산 경제는 신발과 섬유 그리고 합판과 같은 노동집약적 공업에 집중하였다.
이것이 태생적으로 공업 용지가 부족하고 정부의 산업단지 배치에서 부산이 소외된 구조적인 문제 때문인지 아니면 부산시와 부산 기업들의 선택의 결과인지는 좀 더 연구가 필요하다. 구도는 우리가 극복해야 할 대상이며 선택할 수 있는 범위에 영향을 준다. 반면 선택은 익숙한 길을 갈 것인지 아니면 혁신의 길을 갈 것인지에 관한 것이다. 익숙한 것은 쉽지만 성장성이 떨어진다.
1990년대 이래 긴 고난의 시대를 걸어오고 있는 부산 경제가 다시 중대한 선택의 기로에 놓여 있다. 오늘날 구도와 관련하여 가장 강력하게 작용하고 있는 것은 수도권 집중이다. 기업과 사람을 모두 빨아들이는 엄청난 흡인력이다. 이러한 구도를 넘어서서 부산이 선택할 수 있는 길을 찾는 것이 우리의 과제이다.
부산시가 가장 역점을 두고 추진하고 있는 글로벌 허브도시는 수도권 집중이라는 구도의 제약을 넘기 위한 수단과 함께 새로운 산업을 넣기 위한 방안으로 추진되고 있다. 부산 기업들의 다짐도 이에 가세하고 있다. 지난 19일 부산상공회의소는 창립 135주년 기념식을 가졌다. ‘더 강한 기업’이라는 비전을 통해 과거 부산의 기업들이 가졌던 역동성을 이어받으려는 의지를 보인 것으로 이해된다.
그러나 이러한 시도와 선택들이 부산 경제를 얼마나 바꿀 수 있을지는 지켜보아야 한다. 부산 경제가 잘나가던 시기에도 순간의 방심과 진취성의 상실로 기회를 놓쳤는데, 지금은 그때보다 더 힘든 상황이기 때문이다. 불리한 상황에서 역전을 이루어내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그렇기에 부산 시민들의 선택과 협조도 중요하다.
무엇보다 기업을 밀어내고 그 자리에 아파트를 짓는 선택이 지속되는 한 부산 경제의 회복은 쉽지 않다. 바다와 노인의 도시 부산에 쌓여가고 있는 것은 콘크리트 구조물들뿐이다. 대도시 가운데 가장 먼저 부산이 소멸의 위기에 직면하였다는 진단이 얼마 전 있었다. 달리 표현하면 부산이 위기에 빠져 있다는 것이다.
부산이 다시 활력을 찾고 소멸의 위험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당면하고 있는 문제에 대한 올바른 이해와 함께 제대로 된 선택을 하고 실천하는 지혜가 필요하다. 그런 준비가 정말로 되어 있는지 성찰해 보아야 한다.
2024-07-30 [17: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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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우석의 기후 인사이트] 지구온난화가 부른 극한 이상기후
1996년 미국 재난 영화 ‘트위스터’를 보며 기상학자라는 직업에 처음 매료되었던 기억이 떠오른다. 토네이도를 추적하는 과학자들의 모습이 매우 인상적으로 다가왔다. 30년 가까운 세월이 흐른 2024년 4월, 미국 중서부에서는 하룻밤 사이에 100여 개의 토네이도가 동시다발적으로 발생했다. 영화보다 더한 극한 이상기후 현상으로 인해 오클라호마에서는 4명이 숨지고 마을이 초토화되었다. 지금도 4700만 명의 미국인이 토네이도의 위험에 직면해 있다고 미국 기상청은 발표했다.
더욱 놀라운 것은 토네이도가 일어나지 않던 중국에서도 토네이도가 발생하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같은 시기 중국 남부 광저우에서도 이제껏 경험하지 못한 강력한 토네이도로 5명이 사망하고 141채의 공장 건물이 손상되었다. 그리고 얼마 전인 7월 초, 중국 산둥성에서도 토네이도가 발생해 2800여 채의 주택이 파괴되고 80여 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올여름 동아시아의 극한 기상은 비단 토네이도만이 아니다. 올해 4월 중순, 중국 광둥성에서는 폭우로 10만 명이 대피해야 했고, 양쯔강에서는 홍수로 안후이성에서만 100만 명에 가까운 이재민이 발생하였다. 지난주 일본 규슈 지방에서도 기록적인 폭우로 수십만 명이 대피했으며, 우리나라도 최근 중부지방의 집중 호우로 많은 지역이 침수 피해를 입었다. 이러한 폭우는 과거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강력하고 피해 역시 심각하다. 장마가 끝나면 극한 폭염이 예상된다.
지난해 전 세계 평균기온이 역대 최고치를 이미 기록했지만, 올해는 그 기록을 넘어설 것으로 보인다. 해양의 자연적 순환주기와 더불어 온난화는 지구 평균기온을 급격히 상승시키며 극한 이상기후 현상을 증가시키고 있다. 지구온난화와 극한 이상기후 현상의 관계를 살피려면 기온의 증가가 특정 지역 대기의 흐름과 어떠한 연관성을 지니는지 파악해야 한다. 최근의 연구에 따르면 대륙과 해양의 열적 성질 차이로 인해 형성된 전 지구 규모의 대기 패턴이 중위도 서풍의 약화와 함께 강해지고 있다. 중위도 서풍의 강도는 북극 지역과 적도 지역의 온도 차이에 비례한다. 온난화의 대표적 현상인 북극 지역의 가파른 온도 상승이 적도와의 온도 차이를 줄여 여름철 중위도 지역의 서풍을 약하게 하는 직접적인 원인이 되고 있는 것이다. 결국 북반구 여름철 기후를 주관하는 대륙성 저기압과 북태평양 고기압의 세기가 증가하고 있는 것이다.
특히 한반도는 강해진 북태평양 고기압과 대륙성 저기압 사이에 위치하게 된다. 장마철 남풍의 영향은 적도의 고온다습한 공기를 한반도로 이동시키며, 북쪽의 차갑고 건조한 공기와 만나게 되고, 이로 인해 대기의 불안정성이 커져 극한 이상기후 현상이 발생한다. 온난화로 인해 중위도 서풍이 약화되면서 강한 남풍이 다량의 수증기를 한반도로 수송하고 있다. 이는 언제 어디서 폭우를 맞이할지 모르는 상황을 초래하게 된다. 여름철 극한 이상기후 현상에서 온난화의 흔적을 뚜렷하게 보게 되는 것이다.
극한 이상기후 현상이 현실로 다가온 지금, 필자는 가끔 피에르험버트 교수의 깊은 한숨이 떠오를 때가 있다. 2008년 2월 필자는 박사과정 입학 인터뷰를 위해 시카고대학을 방문하였고, 거기서 지구온난화 연구의 선구자이자 세계적인 석학인 피에르험버트 교수를 만나는 영광을 누리게 되었다. 석사 졸업 후 갓 연구를 시작한 필자에게 그의 조언은 무척이나 소중한 것이었다. 다양한 기후 관련 연구 주제들에 대해 열정적으로 이야기하던 그가 문득 필자의 눈을 조용히 바라보며 이야기했다. “나는 종종 잠들기 전에 지구온난화의 악영향을 생각하며 잠을 설치곤 한다네. 다음 세대가 겪어야 할 고통을 떠올리면 초조함에 날밤을 새울 때가 있어. 걱정이 밀려오기 때문이지.”
1996년 흥행에 성공한 영화 ‘트위스터’에 대해 당시 영화평론가들은 토네이도의 동시다발적 발생에 비현실적인 영화적 표현이 가미된 것으로 평가하였다. 하지만 올해 4월 오클라호마 인근에서 발생한 100여 개의 토네이도는 영화 ‘트위스터’를 작금의 현실을 전혀 담아내지 못한 매우 철 지난 영화로 만들어 버렸다. 북반구 여름의 고점을 지나고 있는 지금 피에르험버트 교수의 한숨과 걱정이 과장이 아닌 현실로 우리 곁에 바로 다가온 것이다. 이제 지구온난화와 극한 이상기후 현상은 우리가 직면한 현실의 무게이자, 변화의 심각성을 무시하지 말라는 단호한 비상 경고이다. 온난화의 진행을 막기 위한 국제적인 협력이 선행적이고 즉각적으로 이루어져야 함은 물론, 각국의 재난관리 시스템 강화를 통한 체계적인 대비가 반드시, 그리고 매우 절실히 필요한 때이다.
2024-07-23 [18: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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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소영의 법의 창] 반(反)헌법에 퇴색된 제헌절
헌법이 대중화되었다. 그만큼 헌법이 국민들 가까이서 체감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예상하지 못한 지점에서 헌법이 등장하는 시대이기도 하다. 그래서 헌법적 판단과 해석을 필요로 하는 일이 도처에서 등장하곤 한다. 그런 헌법이 17일로 일흔여섯 번째 탄생일을 맞았다.
하지만 제헌절에 마음이 무겁다. 나라의 경사를 기리는 5대 국경일(삼일절·제헌절·광복절·개천절·한글날) 중 2008년부터 제헌절만이 공휴일에서 제외된 것 때문만은 아니다. 헌법 제정을 축하하고 후손들의 제헌 정신 계승 의미를 이어 가기 위해 제헌절의 공휴일 재지정을 요구하는 목소리도 적잖고, 지난달에는 공휴일에 관한 법률 개정안이 발의되기도 했으니까.
제헌절을 맞은 헌법학자의 마음을 무겁게 만든 건, 우리 헌정 사상 요즘처럼 헌법의 근본 이념과 기본 원리가 심각하게 퇴색된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한 대한민국 헌법의 제정권자들은 시대가 흘러도 나라의 근본을 바탕으로 이어 가야 하는 헌법 이념과 원리를 1948년 7월 17일 선언했다. 우리 헌법이 지향하는 근본 가치는 인간의 존엄성 존중·기본권 보장·국민주권 원리·자유민주주의·법치주의·시장경제 원리 등을 핵심으로 한다.
국민주권은 존엄한 국민이 나라의 주인이라는 것이고, 그래서 주인의 위임을 받은 한시적인 국가권력은 국민의 기본권을 실현하기 위해서만 위임받은 권력을 행사해야 한다. 선출된 권력이 민주적 정당성을 가졌어도 헌법적 정당성에 어긋나는 권력 행사를 하면 안 되는 이유다.
선거를 통해 구성된 대의기관인 국회는 필연적으로 다수와 소수의 정치 세력이 대립하는 구도가 될 수밖에 없다. 다수결 원리와 소수의 보호는 대의민주주의를 기능하게 하는 쌍두마차다. 다수의 소수 보호는 민주주의 가치이기도 하다. 대의민주주의는 양자 간 타협과 절충을 통해서만 실현될 수 있다. 그래서 요즘 국회가 보여 주고 있는 모습, 다수결 원리만을 앞세워 타협과 절충을 무시하며 소수를 배제하는 건 사이비 대의민주주의다. 대의기관이 대의민주주의를 유린하는 이 상황을 뭐라 해야 하나. 22대 총선에서 야당은 182석의 다수가 되었지만, 여야 간의 지역구와 비례대표 득표율은 큰 차이가 없었다. 주권자가 디자인한 이 숫자 사이의 숨은 함수의 의미를 생각해야 한다. 견제와 균형이 작동하지 않으면 법치도 작동할 수 없다.
그뿐인가. 우리 헌법은 사회의 다양성을 포용하지만 평등 아래 자유를 희생시키거나 참여민주주의의 이름으로 대의민주주의를 말살하는 것까지 허용하지는 않는다. 대의제의 약점을 보완하고 극복하는 것이 참여민주주의다. 국민의 정치적 의사 표현과 국정에 대한 투입(Input)이 최대한 보장된다 하더라도, 헌법의 근본 이념과 기본 원리를 존중하는 범위 내에서만 허용된다. 때문에 합법과 민주주의로 포장한 극단적 열성 지지자들로 인한 민주주의 훼손은 허용될 수 없다. 민주주의는 상호 관용과 자제라는 두 규범적 가치를 필수 요건으로 하기 때문이다.
또다시 개헌이 언급되고 있다. 이즈음 헌정 현실의 모든 모순과 폐단이 헌법에 기인한 것인가. 그건 아니다. 물론 우리 헌법이 완전무결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수백 년의 헌법 역사를 가진 나라들이 제도와 운영의 정합성을 찾아왔던 것과 비교해 보면, 우리는 제도보다 운영의 문제가 컸다. 그래서 헌법 궤도를 이탈하지 않는 운영을 위한 보완적 개헌은 고민할 필요가 있다.
우선 국가 운영 시스템을 정비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대통령 인사권에 대한 제어 장치의 도입이나 국회의원의 불체포특권 폐지, 심지어 공직자에게는 유죄추정 원칙을 더 엄격히 적용하는 선진국의 예를 고려해 볼 필요가 있다. 또 헌법 재정 조항에 국가 부채 한계를 정해둔 나라들처럼, 우리 헌법에도 재정준칙 규정을 신설해서 퍼주기 포퓰리즘 정책을 방지할 필요가 있다. 그들만의 정쟁으로 국민을 잊은 국회가 국민을 위한 정부의 중요 정책을 발목 잡지 않도록, 국민 생활에 직접적이고 중대한 영향을 미치는 중요 정책은 대통령이 국민투표에 부쳐서 국민의 뜻으로 시행될 수 있게 하는 개헌 방안도 생각해 볼 만하다.
주권자가 선출해 준 현재의 권력들이 헌법을 정면으로 파괴하지는 않고 있다. 그런데 살펴보면 주권자인 우리들이 알아채지 못하는 사이 헌법의 지표가 흐물흐물해지고 있다. 소위 두더지식 헌법 파괴라 할 만하다. 선출된 권력이 국민의 뜻을 무시하고 이렇게 반헌법적인 정치 행태를 계속한다면, 주권자는 최후의 수단을 선택해야 하는 것인지 고민할 수밖에 없다. 이런 고민을 해야 하는 대한민국 주권자의 모습에 제76회 제헌절의 비애가 스며 있다. 퇴색된 제헌절의 의미를 누가 어떻게 되살려야 하는가.
2024-07-16 [17: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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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승현의 남북 MZ] 대남 확성기·대북 확성기의 추억
필자는 비무장지대(DMZ)에서 북측 심리전 방송 요원이자 서부전선 내 방송국 책임조장으로 근무하다가 휴전선을 통해 한국으로 왔다. 당시는 비무장지대를 중심으로 남측의 대북 확성기와 북측의 대남 확성기 공세가 끄트머리로 치닫던 시기라 최전방 확성기 방송은 군사적 긴장 고조를 유발해 왔다. 남북은 여러 심리전 수단 중에서도 각자 확성기 방송에 집중하고 있었는데 전방에 설치된 확성기를 통해 체제의 우월성을 직접 전파할 수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2000년대 초까지 남북은 전 휴전선 일대에 800여 개의 확성기 스피커를 운용하고 있었고, 야간에도 환히 볼 수 있는 선전용 전광판과 입간판을 남북이 각각 100여 개와 200여 개씩 설치해 심리전을 진행해 왔다. 한국전쟁 휴전 이후 반세기 넘도록 군사분계선(MDL) 지역에서 한국보다 더 공세적인 심리전을 전개하던 북한이 주춤거리기 시작했던 것은 소련 및 동유럽 사회주의 붕괴 이후 고립의 길로 접어들면서다. 체제 경쟁에서 열세를 확인하면서 북한 사회의 우월성을 선전해 봐야 의미 없는 울림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 시점이기도 했다. 설상가상으로 전력난과 장비난으로 대남 확성기 방송 시간은 하루 15시간에서 5시간으로 줄어든 반면 대북 확성기는 하루 10~15시간 증가했고, 공세적이었던 대남 확성기 방송은 대북 확성기를 방어하는 수세적 위치로 전환했다.
필자가 북측 비무장지대에 있는 방송국에 배치되었을 때 이미 방송국 명칭이 ‘제압방송’으로 바뀌었다. 제압방송은 대북 확성기 방송 내용의 차단을 목표로 대북 확성기가 진행되면 대남 확성기의 자체 출력을 최대로 높여 남측 방송의 내용과 메시지를 무력화시키는 맞불 방송으로 운용됐다. 하지만 전력이 제대로 들어오지 않고 방송 장비 부품도 원활하게 조달되지 않으면서 비무장지대의 북한군은 남쪽의 일방적인 방송을 속수무책으로 들어야만 했다. 어찌 보면 좁은 DMZ 안에서 남북의 확성기 소음으로 노이로제에 걸릴 지경인 군인들 처지에서는 한쪽의 고출력 스피커만 중단되어도 반가운 일이다.
기본적으로 전방에 설치된 대북 확성기를 통한 대북 방송은 대한민국 체제의 우월성을 선전하는 내용으로 진행한다. 북한 체제를 고발하는 내용에는 북한 정권의 독재성과 인권침해, 경제적 실패 등이 포함돼 있고 북한군의 사기 저하를 위해 한국의 경제 발전과 생활 수준 등과 함께 국내외 뉴스와 최신 가요, 날씨 등도 내보낸다. 또한, 한국에 와 있는 탈북자들의 현황과 탈북 방법, 탈북 이후 남한에서의 생활에 대한 정보를 제공했는데 DMZ 내 북한군에게는 휴전선을 통해 한국으로 간 사례에 관심이 높다. 하지만 어찌 된 일인지 당시에는 휴전선 탈북 군인에 관한 방송 내용에는 한국에서의 정착 부분만은 쏙 빠져 있었다. 그 이유는 일반 탈북자와 다르게 휴전선을 통한 탈북 사례가 많지 않을 뿐더러 한국에서 성공 사례도 극히 드물기 때문으로 보인다.
그동안 대북 확성기가 북한군의 귀순 결심에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는 홍보와는 다르게 대북 확성기로 인한 귀순 사례는 드문 것으로 밝혀졌다. 대북 확성기가 공세적으로 진행되는 시기에 귀순한 사례보다는 방송 중단 후 귀순한 군인이 대부분이란 사실이 그 방증이다. 하지만 이는 과거 이야기일 수 있다. 장마당과 개인주의 환경에서 성장한 현재의 북한군에게 북한 체제의 취약점과 한국 사회의 발전상은 이제는 ‘정보’를 넘어선 ‘사실’에 가깝기 때문이다. 다만 심리전에서도 신뢰는 중요하다. 북한의 오물 풍선과 확성기 방송 문제로 소란스러울 무렵 알고 지내던 한 예비역 장군이 이럴 때 휴전선 귀순자들이 대북 확성기의 위력에 대해 한마디만 해 주면 얼마나 좋겠냐는 푸념을 한 적이 있다. 몇 명 안 되는 휴전선 귀순자들이 침묵을 지키는 것은 그럴 만한 이유가 있어서일 거라고 말해줬지만 사실 북한군에게 한국의 발전상만큼이나마 중요한 것이 한국을 선택했을 때 이곳에서의 삶에 관한 부분일 것이다. 그런 면에서 단순한 정보 전달보다는 한국을 선택한 후 삶의 질이 향후 심리전의 중요한 척도가 될 수 있다.
현재 대남 확성기는 기능을 상실했지만, 대북 확성기는 북한 정권의 ‘아킬레스건’으로 평가받는다. 비무장지대 30㎞ 안에 장마당 세대로 불리는 북한군 70여만 명이 복무 중인데 북한 지도부는 이들이 대북 확성기에 노출된다면 북한 체제 근간이 흔들릴 수 있다고 판단하고 있는 모양새다. 아직도 북한군의 복무 기간이 10년으로 긴 만큼 심리전은 연쇄적 탈북뿐만 아니라 전역 후 전국으로 흩어진 이들에 의해 북한 내부에 영향을 미칠 치명적인 무기가 될 수 있다. 남북의 갈등 상황에 따라 중단과 재개, 반복의 역사를 지속해 온 남북 ‘확성기 전쟁’은 대남 확성기의 몰락과 대북 확성기의 강력한 카드 앞에 또 다른 파란과 도전적인 환경을 예고하고 있다.
2024-07-09 [18: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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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순연의 도시 공감] 골목, 다시 상인들이 살아나야 한다
7월 여름의 시작으로 우리는 여행계획을 세운다. 도시를 찾거나 한적한 공간이 어디 있는지 키워드를 검색하고 시장을 방문하고 골목 맛집을 찾아다니면서 이미 휴가를 즐기는 상상을 하게 된다. 부산에 있으니, 다른 지역의 지인들이 오랜만에 부산에 오면 연락이 온다. 대부분 유명한 관광지가 아닌 지역민들만 아는 특별한 장소를 묻는다.
하지만, 부산의 현실은 외부의 관심과 다르게 지역 자영업자 수가 2024년 1분기에 31만 7000명으로 전년 동기 대비 4만 명(11.3%)이나 줄었다. 옛 번화가였던 대학가 상권, 원도심 상권은 이미 공실과 임대 표지판이 흔한 풍경이 된 상황이다. 이러다 보니 부산은 상인들이 활동하기에 힘든 도시가 되고 있다.
그럼에도 멈추지 말고 변화를 모색해야 한다. 좀 더 좁은 골목에 주목하였으면 한다. 과거 유명한 지역마다 있는 ‘~리단길’보다 북적이다가 쇠퇴하거나, ‘둥지 내몰림’ 현상을 경험했지만 생존력과 다양성을 품고 있는 골목상권은 지금까지도 버티고 있다. 대표적인 도시가 공주이다. 충남 공주는 제민천을 중심으로 비어있는 옛 하숙집들을 활용하며 새로운 골목상권을 형성하여 공주만의 라이프스타일형 도시로 탈바꿈하고 있다. ‘곡물집’이라는 가게는 일반적인 커피보다는 콩과 관련된 다양한 상품, 재배 농부들의 커뮤니티 프로그램과 함께 다양한 식 경험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관심 있는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를 않는다.
‘고마다락’이라는 가게는 헌책도 팔지만 집수리 프로그램을 비롯하여 자체 프로그램을 기획하고 지역의 주민들이 연극, 전시, 요가 등 다양한 공간으로 빌려 쓸 수 있게 하는 등 커뮤니티형 공간을 운영 중이다. 작은 가게를 중심으로 좁지만 생활형 복합문화공간으로 활용하고 있다. 또한 하나의 가게에서 다양한 시간 단위의 활동을 하면서 재방문율을 높이고 방문객들에게 공간을 활용할 수 있는 경험을 제공하고 있다. 이 중심에 상인들이 있고, 상인들의 아이디어가 모여서 골목이 활성화되는 것이다.
사실 골목은 건물 사이나 뒷면에 형성된 길을 가리킨다. 폭이 좁아 소수의 보행자만 통행할 수 있는 공간으로 큰길에서 갈라져 나온 작은 길을 통틀어 이른다. 골목은 보행권이 확보돼 있어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주변 건축물과 자연을 관찰하고, 교감할 수 있는 장소이다. 우연히 마주친 작은 가게들을 발견하는 즐거움과 가게에 들어서서 한참을 상품을 들여다보고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여유를 즐길 수 있는 장소이며 담장 너머 능소화나 수국이 피어있는 것을 슬쩍 볼 수 있는 장소이기도 하다.
골목을 중심으로 하는 특별한 생활형 골목상권은 부산에서도 곳곳에 존재한다. 상인들 대부분이 짧게는 10년, 길게는 30년 정도 골목을 중심으로 활동을 해온 분들이다. 상인들끼리는 사장님보다는 ‘형님 동생’이란 호칭에 더 익숙해져 있다. 이런 분들이 서로 협력하는 모델을 만들고 있다.
‘온천천 카페거리’의 경우 사계절 방문을 유도하는 방법을 고민하면서 포토존을 만들고 카페 상인들이 과자샌드 쿠키류를 만들어 공통 판매를 계획하고 있다. ‘수비벡스코’ 골목상권은 ‘면옥향천’ 주변 상인들 중심으로 벡스코 행사와 연결하여 골목상권을 홍보한다. 또, 방문객들에게 단발적인 행사 대신에 골목 상인들이 지속적으로 시즌 위크를 기획하여 참여하고 있다. 사상 ‘가로공원’ 상인들은 젊은 사장들 중심으로 인근 신라대와 협력하고 공동 배달 서비스를 통해 상권을 지키는 활동을 진행 중이다. 연제구의 ‘연동되는 골목상인회’는 지난해에 이어 팝업 스토어를 기획하고 있다.
결국 지역 특성을 잘 아는 주민이자 상인들을 중심으로 장소마다 다른 특색 있는 골목상권을 만드는 것이다. 이런 골목상권의 특징은 커뮤니티가 살아있다는 것이다. 오래도록 골목을 사이에 두고 이야기해 온 이웃들이다 보니, 그들의 눈에는 조급함을 찾아볼 수 없다. 그리고 협력해야만 한다는 것 또한 너무나 잘 알고 있어 여유를 배울 수 있다.
골목의 특성이 좀 더 살아나면 어떤 상권은 창업모델골목, 365일축제형 골목이 되고, 공주처럼 작은 단위의 복합문화공간들이 만들어질 것으로 기대된다. 정부 지원이 있건 없건 골목 상인들은 자발적으로 골목을 살릴 방법을 고민하고 실천력을 갖고 있다. 그래서 상인들만의 방식으로 골목상권이 움직일 것으로 기대된다.
부산이 이런 공간을 중심으로 도시와 도시민 간의 관계, 도시의 특성에 따른 다양한 삶의 방식으로부터 활력을 찾았으면 한다. 골목에서 활동하는 사람들 즉, 상인들로부터 도시의 생명력과 매력이 끊임없이 분출되기를 희망한다.
2024-07-02 [18: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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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인권의 핵인싸] 기초가 무너지고 있다
광속에 가깝게 가속된 두 개의 핵이 서로 충돌하면 순간적으로 엄청난 에너지가 ‘수천조 분의 1㎥’에 집중된다. 그 에너지는 순식간에 양성자보다 훨씬 무거운 입자들을 포함한 수많은 소립자들을 생성시키고, ‘백만 분의 1초’도 지나기 전에 모두 분열하여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양성자·중성자·전자를 비롯한 여러 중간자가 되어 사방으로 퍼져 날아간다. 이는 우주 최초에 일어난 일과 거의 같을 것으로 추정되기 때문에, 충돌 시 생성된 입자들의 질량과 속도 분포 등 각종 물리량들을 통하여 우주 최초의 물질 생성과 상태를 연구할 수 있다.
그래서 생성된 입자들의 물리량을 측정하기 위해서 이 충돌 지점(입자들의 생성 지점)은 수많은 검출기들로 둘러싸여 있다. 이 검출기들은 통과한 입자들의 궤적과 시간, 에너지를 측정한다. 마치 엑스선이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인화 필름에 투과된 흔적을 남기듯 여러 종류의 입자들은 검출기에 흔적을 남긴다. 입자들이 통과하면서 남긴 흔적을 우리가 알아볼 수 있는 신호로 잡아내는 일은 결코 간단치 않다. 오늘날 스마트폰으로 아무렇지도 않게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디지털카메라도 결국 이런 검출기들이 개발된 과정을 통해서 나온 것이다. 빛의 밝기에만 민감했던 흑백필름에서부터 시작하여, 마침내 다양한 색깔을 재현해 낸 디지털 영상에 이르기까지, 엑스선에 민감한 필름에서부터 여러 가지 입자들의 에너지를 검출해 내기까지, 연구와 개발의 엄청난 시행착오를 피할 수 없었다.
필름과 검출 센서에 나타난 정보들을 노이즈와 중요 정보로 구별하여, 각 픽셀 단위의 디지털 정보로 컴퓨터 저장장치에 기록한다. 이렇게 기록된 엄청난 양의 정보들을 분석하여 마침내 생성된 입자들의 궤적과 속도, 질량을 알아낸다. 생성된 입자들의 종류와 양, 각 입자들의 속도 분포와 상관관계를 통해 그 입자들이 생성될 당시의 온도와 같은 물리적 환경을 추적한다. 측정된 입자들의 질량 조합을 통하여 이 입자들이 어떤 다른 입자로부터 붕괴한 결과물이라는 것을 밝혀내고, 마침내 충돌 순간부터 여러 입자들로 측정되기까지의 시나리오를 구성해 낸다.
이 실험과 데이터들은 몇 개의 연구실과 몇 명의 연구자들로는 소화해 낼 수 없는 규모로, 전 세계의 검출기 및 데이터 전문가 수천 명을 필요로 한다. 이들이 실험 데이터와 의견의 교환을 위해서 월드와이드웹(WWW)을 개발했으며, 스마트폰의 터치패드를 비롯한 각종 신물질(섬광체, 반도체) 센서는 물론, 오늘날 컴퓨터의 새로운 패러다임이 된 클라우드와 그리드 컴퓨팅의 시대를 열었다.
우주 최초의 물질 상태를 연구하는 일은 이처럼 우리의 일상과 직접적인 연관은 없을지 모르지만 결과적으로 현재 우리의 일상을 채우고 있는 생각과 각종 문명의 이기들은 물론 인류가 아직까지 경험해 보지 못한 새로운 패러다임을 개척하고 있다. 오늘날 전 세계적인 국가경쟁력의 핵심이 된 반도체와 양자기술, 기계학습과 인공지능 등 모든 기술은 이같이 거의 하나도 빠짐없이 기초과학의 부산물로 얻어진 것들이다. 기초과학자들이 연구개발한 각 부산물들에 특허권을 걸었으면 어떤 일이 일어났을까. 새삼 부자가 되는 일이 과학자들의 바람이었다면, 인류의 역사는 어찌 됐을까.
나는 물리학자다. 물리학 중에서도 우주 최초의 물질상태를 연구하는 기초과학자다. 운 좋게도 사이언스와 네이처 같은 논문에 공동저자로 참여한 덕분에 나름 언론 등에 보도된 적이 있지만, 인터뷰에서 대뜸 이 연구가 우리의 일상생활에 어떤 영향을 미칠 것인지에 대한 질문을 받을 때면 무척 곤혹스러워지곤 한다. 우주 최초의 물질상태가 어떻든 도대체 우리의 일상생활과 무슨 상관이 있단 말인가. 하지만 그 연구 자체로 얼마나 엄청난 일인가. 감히 우리가 우주 최초를 이해하려 들고 있다니. 덕분에 우리는 인류의 새로운 지평을 개척하고 있지 않은가.
기초과학을 바탕으로 응용학문이 있고, 응용학문을 바탕으로 기술과 경제가 피어난다. 우리의 일상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는 완제품을 얻기 위해서는 투자된 기계설비와 인력을 바탕으로 이 제품을 대량생산하되, 이 기계설비와 이 제품에 대한 아이디어는 이보다 훨씬 앞서 수행된 수많은 연구와 개발이라는 인고의 시간을 거쳐야 한다. 바로 이 연구와 개발의 근본 동인이 되는 것이 ‘기초’다. 언어가 없이는 생각을 할 수 없고, 기본적인 원리에 대한 이해 없이는 연구를 할 수 없으며, 원리가 작동하는 이유와 근원적인 질문에 대한 도전 없이는 새로운 것이 있을 수 없다. 나무를 심고 물과 양분을 주어 살뜰히 가꾸는 과정을 모두 방기한 채, 정작 국가 연구개발(R&D) 예산은 축소시켜 기초학문이 고사되고 있는 마당에, 첨단학과를 새로 만들고 증원시킨단다. 거위의 배를 갈라 황금알만 꺼내겠다는 발상에 도대체 무슨 말을 어디서부터 어떻게 해야 할지 난감한 시국이다. 기초가 없이는 미래도 없다.
2024-06-25 [18: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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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래의 메타경제] 부산의 경제 생태계는 건강한가
2022년 11월 30일. 인공지능(AI) 개발 기업인 오픈AI가 챗GPT를 발표한 날이다. 이날을 특별히 기억하는 것은 그 뒤부터 느껴야 했던 범상치 않은 흐름 때문이다. 대학에서 경영학을 가르치는 친구로부터 거의 매일 경제 기사 스크랩을 받는다. 경제 흐름이 급박할 때는 하루에도 몇 차례 여러 신문의 주요 경제 기사를 받을 때도 있다.
친구의 선호에 따라 경제 기사의 중요도가 달라지기도 하고 강조되는 것들도 있다. 그렇지만 부지런한 친구 덕에 편하게 세계의 경제 소식을 읽는 것은 또 다른 기다림이기도 하다. 친구가 보내 주는 경제 기사에서 지난 1년 반 동안 일관되게 느꼈던 것은 AI 관련 기사의 폭발적 증가였다. 근래에 들어와 받는 경제 기사 스크랩에서 AI 관련 기사를 보지 않는 경우는 거의 손을 꼽을 것 같다.
그와 함께 매우 의아하게 생각해 오고 있었던 것은 이전까지 과학기술의 발달을 지칭하던 4차 산업혁명이라는 말을 최근에는 별로 들어 보지 못했다는 점이다. 컴퓨터에 이어 인터넷이 등장하면서 세계가 연결되고 이를 토대로 기술의 진보와 산업의 혁신이 일어나는 것을 의미하던 4차 산업혁명이라는 용어를 최근에는 별로 쓰지 않는 것 같다.
물론 4차 산업혁명이라는 용어가 경제학에서 공식적으로 정착된 적은 없었다. 보수적인 경제학은 18세기 후반 영국에서 시작된 산업 변화에만 혁명이라는 지위를 부여하여 왔고, 이후의 기술 발전은 그 연장선에 있다고 보고 있다. 그렇지만 너무나 빠르게 변하는 현대의 일련의 기술혁명에 붙였던 4차 산업혁명이라는 시사적인 용어의 사용까지 자제하게 만든 것은 AI 충격을 고려하지 않고는 이해하기 어렵다. AI는 단순한 하나의 기술이 아니라 그 자체가 새로운 생태계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세계 기업의 차원에서 보아도 두드러진다. 인공지능의 열풍을 타고, 존재 그 자체가 뉴스거리가 되고 있는, 엔비디아의 성장은 가히 충격적이다. AI에 필수적인 그래픽처리장치(GPU) 세계시장을 사실상 거의 독점하고 있는 엔비디아는 폭발적인 주가 상승으로 한때 애플을 넘어 세계 2위의 자리에 오르기도 하였다.
엔비디아의 추격을 받는 애플과 마이크로소프트(MS)의 주가도 역시 인공지능 전략에 따라 등락을 보이고 있다. 발표하는 인공지능 전략의 전망에 따라 주가 총액 수위 자리를 주고받고 있다. 더욱이 우리에게 충격적인 것은 이들 기업 하나의 주가 총액만으로도 거의 세계 모든 개별 국가의 국내총생산(GDP)을 능가한다는 것이다.
한때 제조업의 공동화로 미국 경제의 쇠퇴를 전망하였던 예측을 뒤집어 버린 이 거대한 흐름이야말로 경제 생태계를 선도하는 미국 기업들의 힘이라 할 것이다. 그런 흐름 속에서 세계 반도체 산업을 주도하는 것으로 알고 있었던 삼성전자조차 AI의 흐름 속에서는 오히려 작게 보이는 새로운 현실을 보고 있다. 우리 정부가 반도체 산업에 각종 혜택을 주고 돈을 지원하고 또 수도권 대학의 첨단학과 학생 정원을 늘려 준 것도 이러한 위기의식에서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인공지능과 같은 새로운 생태계를 만드는 것은 기술과 산업을 따라잡는 것과는 차원을 달리한다. 나아가 혁명적인 생태계 변화의 시기에는 그 흐름에 적응하고 그 안에서 산업과 기업의 지분을 차지하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다. 한국 전체가 안고 있는 이러한 문제의식은 글로벌 도시를 지향하는 부산에도 똑같이 타당하다.
세계 경제 생태계의 변화를 제대로 이해하고 그것에 적응하고 넘어서지 못하면 글로벌 도시로 발전할 수 없다. 이를 위해서는 무엇보다 열려 있고 혁신적인 문화와 열정이 넘치는 도시가 되어야 한다. 그런데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여전히 도시는 땅을 파고 집을 지으려는 사람들의 돈벌이를 향한 욕망의 지배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영국의 건축가 토마스 헤더윅의 말을 빌린다면 ‘전염병같이 지루한 아파트의 집착’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다행히 정부의 글로컬 사업을 앞두고 부산시가 신라대, 동명대와 손잡고 시립대학원대학을 건립하기로 한 것은 이제까지 보지 못한 신선한 발상이다. 지역 경제를 이끌 청년 인재를 지역 대학과 함께 지방자치단체가 돈을 들여 양성하는 것은 부산의 경제 생태계를 건강하게 만드는 아주 좋은 방안이다.
정말로 건강한 경제 생태계는 다양한 분야에서 이러한 노력이 더 많이 축적될 때 만들어지고 개선될 수 있다. 빠르게 도시가 늙어가고 있고, 수도권으로 쏠림은 더욱 심해지고 있다. 생태계가 척박해질 가능성이 농후한 것이다. 쏟아지는 정책 속에서 어떤 정책이 ‘부산의 경제 생태계에 도움이 될까’를 놓고 꼼꼼히 판단해 보아야 할 때이다.
2024-06-18 [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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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소영의 법의 창] 국회의원의 선서는 지켜야 하는 의무다
5월 30일로 22대 국회의원 임기가 시작됐다. 국회법상 22대 국회는 6월 5일 첫 회의를 개최해야 했고, 의장·부의장을 선출하고 개원식도 해야 했다. 그런데 현재까지도 개원식을 못 했고, ‘곧’ 할 것 같지도 않다. 새삼 놀랄 일도 아니다. 21대 국회도 여야 간 원 구성 협상 지연으로 임기 시작 48일 만에 겨우 개원식을 거행해 역대 최장 ‘지각’ 기록을 세웠다. 이번에도 여야가 원 구성을 두고 협상 없는 협상을 하는 상황인지라 기록 경신을 걱정해야 할 듯하다.
새 국회 구성 후 개원식에서 국회의원은 국민에 대한 선서를 해 왔다. 국회법 제24조, “나는 헌법을 준수하고 국민의 자유와 복리의 증진 및 조국의 평화적 통일을 위하여 노력하며, 국가 이익을 우선으로 하여 국회의원의 직무를 양심에 따라 성실히 수행할 것을 국민 앞에 엄숙히 선서합니다”라는 내용으로. 선서란 사전적으로 많은 사람들 앞에서 공표하는 행위다. 누구나 할 수 있는 행동이지만, 일정한 직업군에 속한 사람의 선서는 국민을 향한 약속이자 다짐의 표시로 받아들여진다. 대통령, 공무원, 국회의원, 지자체장, 군인 등의 선서가 그것이다. 그들은 법이 정한 대로 취임 시에 오른손 서약이건 서명에 의하건 간에 직무 수행에 관한 스스로의 의무를 확인하고 약속하는 선서를 해 왔다.
국회의원의 이 엄숙한 선서는 4년 동안 의원이 지켜야 하는 국민에 대한 다짐이자 약속이다. 그렇지만 스물한 번의 국회를 지나오면서, 국회의원 선서는 선언적·상징적인 것에 불과한 쓸모없는 절차라는 평가가 더 많았다. 국민들도 그렇게 느껴 왔다. 고 노무현 대통령 탄핵 심판에서 헌법재판소는 대통령 취임 선서는 대통령의 헌법적 책무를 구체화하고 강조한 실체적 내용을 지닌 것이고, 법치국가 원리가 대통령 직무 집행과 관련해 구체화한 헌법적 표현이라고 했다. 국회의원 선서라고 다를까?
국회의원의 취임 선서는 1960년 국회법에 처음 규정되었다. 국헌 준수, 국민 복리 증진, 성실한 직무 수행이 선서 내용의 출발이었다. 이후 1963년 법에서 국민의 자유 증진, 1973년 법에서 국력 배양과 조국의 평화적 통일을 위한 직무 수행, 1981년 법에서 헌법 준수·국가 이익 최우선·양심에 따른 직무 수행을 추가하는 개정을 거쳐 현재의 내용이 됐다.
헌법 제46조는 국회의원에게 청렴 의무와 국익 우선 의무, 양심에 따른 직무 수행을 책무로 부과하고 있고, 헌법 준수는 국회의원의 당연한 의무다. 따라서 국회법상 국회의원의 취임 선서 내용은 국회의원의 헌법적 책무를 구체화하고 강조한 실체적 내용이라 할 것이다. 그러니 이 선서를 선언적·상징적인 행위에 그치는 것으로 폄하해서는 안 된다.
국회는 국민 대표기관이자 입법기관으로 국회 운영에 관해 폭넓은 자율권을 갖는다. 그래서 국회 의사 절차나 입법 절차에 헌법이나 법률을 명백히 위반한 흠이 있지 않는 한, 그 자율권은 권력분립 원칙이나 국회 위상과 기능에 비추어 존중돼 왔다. 그러나 국회도 헌법에 구속되는 기관이다. 국회는 헌법 수호와 실현을 위한 모든 노력을 기울여야만 한다. 누구를, 무엇을 위한 국회여야 하는지 여기에 답이 있다.
4·10 총선을 통한 국민의 국회 구도 결정은 여야 모두에게 이러라는 뜻이 아니었다. 어려운 경제 상황과 세상의 빠른 변화로 지치고 힘겨운 국민을 위해 22대 국회의원들은 선서대로 실행해야만 한다. 그게 국회의원의 헌법적 책무이기 때문이다. ‘국민을 위한, 국익을 우선한, 국회의원의 직무적 양심에 따른’ 의원 업무 수행 말이다!
국민 체감도가 없었던, 그들만의 정쟁으로 끝났던 21대 국회의 모습을 반복할 것인가. 정당을 비롯한 그 누구도 국민에 우선될 수 없다. 원 구성이나 특검법 등 국민 없는 싸움에 힘쓰지 말고 민생 법안 처리에 주목해야 한다. 고준위방폐물저장시설 특별법, 인공지능(AI) 기본법, 외국인아동출생등록법, 체액(정액)테러 처벌법, K-칩스법, 판사 증원을 위한 법관정원법 등 국민 안전 및 기업 경쟁력 강화와 직결된 민생 법안의 신속한 처리는 국민을 위해 시급한 일이기 때문이다.
2016년부터 국회의원 선서문은 순한글문이다. 고 노회찬 의원의 ‘선서문 전면 한글화’ 요청의 결과였다. 당시 노 의원의 “국회의원 선서문이 이제 한글로 바뀌었기 때문에 내용을 몰라 (선서를) 못 지켰다는 변명은 통할 수 없다”던 소감을 기억한다. 그럼에도 또 22대 국회의 의원들은 국회의원의 책임감과 사명 의식을 모른다고 할 수 있을까? 답은 정해져 있다.
2024-06-11 [17: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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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우석의 기후 인사이트] 차세대 항공산업과 기상예보
라이트 형제가 인류 역사상 최초로 비행기를 개발한 이후, 항공산업은 유럽의 제1차 세계대전을 거치며 비약적인 발전을 이루었다. 비행이 보편화됨에 따라 기상 조건의 중요성이 부각되기 시작했다.
1939년 9월 1일 독일의 폴란드 침공으로 시작된 제2차 세계대전의 발발 역시 기상예보에 대한 폭발적 수요 증가를 요구했고, 이에 대응하기 위해 그 당시 기상예보 전공자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다. 미군은 1만 명 이상의 기상 관측자를 군부대에 배치했고 전 세계의 미군 기지들은 다양한 기상 데이터를 수집했으며, 이는 후일 기상 이론의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기상 연구가 활발히 진행되던 미국의 어느 한 대학에서 일기예보의 핵심 이론이 논문으로 발표되었다. UCLA의 박사 과정 학생이었던 줄 차니(Joule Charney)는 중위도 저기압의 발달 과정을 이론적으로 규명한 논문 ‘기압류하에서의 장파동역학에 관한 연구’(The Dynamics of Long Waves in a Baroclinic Westerly Current)를 발표했다.
UAM의 광범위한 상용화 눈앞
지상 300~600m 난류 불안정
기상학계 전에 없던 도전 직면
새로운 예보 시스템 구축 시급
논문에 따르면 중위도 저기압은 남북 간 기온 차로 인해 불안정해진 제트 기류에 의해 생성되고 발달된다. 이론적으로 밝혀진 주요 과정들은 실제 종관 규모 대기에 적용되었으며 곧 일기예보의 매우 필수적인 중요 요소로 자리 잡게 되었다. 이 핵심 이론의 등장은 경험적 예측을 과학적 영역으로 전환시키고 체계적인 예보 발전을 촉진했다. 이후 컴퓨터의 등장과 발전으로 수치예보 모델이 개발되었고, 오늘날 일기예보는 우리의 일상생활에 중요한 기본 정보로 자리 잡았다. 항공산업이 촉발한 기상예보의 필요성은 혁신적인 이론의 등장과 이를 기반으로 한 현대 기상예보 시스템 구축을 이끌었다.
2020년 국토교통부는 2025년까지 ‘하늘을 나는 자동차’인 UAM(Urban Air Mobility·도심항공교통)의 초기 상용화를 목표로, 2030년까지 상용화 범위를 확장하겠다는 계획을 발표했다. 이는 전 세계 어느 나라도 아직 시도하지 않은 새로운 항공시대를 여는 도전적 과제다. 기존 항공기가 지상 수 킬로미터 상공을 날아다닌다면, UAM은 지상 300~600m 상공을 운행할 예정이다. 약 15m 길이의 기체가 도심 빌딩 위를 날아다니며, 공상과학 만화와 영화에서 보던 미래 도시의 장면이 현실이 될 것이다. 우리는 버스, 지하철, 택시와는 다른 새로운 도심 교통체계의 구축을 눈앞에 두고 있다.
UAM이 운행할 300~600m 상공은 기존 항공기가 운항하는 고도와는 전혀 다른 역학적 성질을 가지고 있다. 이 영역은 대기 경계층으로, 난류라는 복잡한 공기의 흐름이 끊임없이 발생하며 짧은 시간 안에 급변할 수 있다. 도심의 건물이나 주변 산악 지형, 중위도 저기압과 고기압의 영향을 크게 받는다. 사람을 실어 나르는 새로운 교통수단인 UAM이 안정적으로 운영되기 위해서는 대기 경계층에서 일어나는 대기 난류의 흐름을 예측해 UAM의 운영 시스템에 반영해야 한다. 그러나 대기 경계층의 난류적 대기 흐름을 예측하는 것은 기존의 기상예보 분야에서 다루지 않는 새로운 연구 분야이며 도전 과제이다.
기존에 이루어진 대기 경계층 연구는 지표면 열속의 상태와 상층 대기의 바람에 따라 형성되는 평균 구조를 파악하는 데 중점을 두었다. 이 평균적인 경계층의 구조는 상층 대기의 흐름을 결정하는 중요한 경계 조건으로, 저기압 생성과 발달 예보에 필수적이다. 지금까지 대기 경계층에서 수 분 안에 일어나는 바람, 온도, 습도의 급격한 변화는 크게 주목받지 않았다. 하지만 UAM의 안정적 운영을 위해서는 대기 경계층의 평균 구조뿐 아니라, 그 안에서 발생하는 난류의 세기와 이동을 예측해야 한다. 이를 위해 새로운 연구 방향과 기상예보 시스템의 구축이 시급히 필요한 때이다.
라이트 형제를 시작으로 2차 세계대전을 거치며 발전한 항공산업은 종관 규모의 기상예보를 위한 새로운 이론과 수치 모델 기반의 체계적인 예보 시스템을 확립하는 데 큰 기여를 했다. 이제 새로운 개념의 항공산업인 UAM의 광범위한 상용화가 눈앞에 다가왔다. 이에 맞춰 UAM 운영에 필수적인 기상예보 시스템도 준비되어야 한다. 기상학계는 기존과는 다른 새로운 도전에 직면해 있다. 대기 경계층의 복잡한 난류를 이해하고 예측할 수 있는 기상학의 새로운 이론과 예보 시스템을 개발하는 창의적인 과제를 꼼꼼히 수행해야 할 시간이다.
2024-06-04 [18: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