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서거니 뒤서거니 한·대·일 삼국지 [비즈앤피플]

이현정 기자 yourfoot@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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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만 선두 부상, 동아시아 3국 경제 전쟁

일본, 반 세기 이상 압도적인 우위 유지
1995년엔 1인당 GDP, 한국+대만 2배
자산 버블 붕괴로 저성장 늪 빠져 정체
한국, 반도체 필두 ‘한강의 기적’ 일궈
일본 따라잡았으나 높은 물가에 ‘주춤’
대만, 1인당 GDP 22년 만에 한국 제쳐
TSMC 파운드리 독주·물가 안정 바탕
내년엔 4만 달러 시대 열며 상승세 지속

반 세기 이상 동아시아의 경제 지형은 압도적인 ‘일본 우위’였다. 70~80년간 한국과 대만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맹렬히 추격하는 형국이었다. 일본의 1인당 GDP(국내총생산)가 나머지 두 나라를 합친 것보다도 2배가량 많았던 시절도 있었다. 한국은 ‘한강의 기적’을, 대만은 ‘아시아의 네 마리 용’을 앞세워 일본을 열심히 쫓아갔지만 언제나 일본은 더 멀리 달아나 있는 ‘넘사벽’ 이웃이었다. 한국인과 대만인은 ‘잘 사는 나라’ 일본 기업에 취업하고 싶어했고, 일본에 여행이라도 갈라치면 물가부터 걱정해야 했다.

그러나 몇 년 전부터 일본 경제학자들 사이에서 일본 경제가 한국과 대만에 따라잡힐 것이라는 우려들이 쏟아져 나왔다. 임금 수준은 이미 한국이 일본을 앞섰다고 했다. 반대로 일본에서 한국으로 파견을 오거나, 여행을 오는 이들이 한국의 물가를 걱정하기 시작했다. 임금을 더 얹어줘야 한국에 가서 살 수 있다고 했다.

한국에서는 곧 한국 경제가 ‘실속파’ 대만에 따라잡힐 것이라는 예상들이 나왔다. 결국 올해 한국은 22년 만에 대만에 GDP 역전을 당할 것이 유력해졌다.


대만 TSMC가 일본 구마모토현 기쿠요마치에 지은 공장. 연합뉴스 대만 TSMC가 일본 구마모토현 기쿠요마치에 지은 공장. 연합뉴스

#장면 1. 찬란했던 일본의 뒷걸음질

1980년대 일본은 ‘팍스 아메리카나’를 위협하는 유일한 경제 대국이었다. 1995년에는 1인당 GDP가 4만 4000달러를 넘어서며 당시 1만 2000달러 전후에 불과했던 한국과 대만을 아득한 격차로 따돌렸다. 당시 일본은 자동차, 전자제품 등 전 세계 제조업과 금융을 장악하며 세계로 뻗어나갔다. 하지만 1990년대 자산 버블 붕괴는 일본을 ‘잃어버린 10년’으로 몰아넣었고, 그 10년은 20년, 30년이 되고 말았다.

만성적인 저성장과 디플레이션 늪에 빠진 일본 경제는 제로에 가까운 경제성장률을 보이며 안정적인 내수 시장에도 불구하고 고령화라는 장애물을 만나 활력을 잃고 말았다. ‘아베노믹스’로 대표되는 경기 부양책을 썼지만 성장률은 좀처럼 오르지 않았다. 이는 임금 정체로 이어졌고, 가난해진 국민들은 돈을 쓰기 버거워졌다.

일본의 성장 정체를 가속화한 건 역설적으로 일본 정부가 수출 경쟁력을 위해 용인한 ‘엔저’라는 분석도 있다. 엔화 가치가 점점 떨어지면서 달러 환산 1인당 GDP 수치는 더욱 추락하고 말았다는 것이다.

최근 고물가로 성장세가 주춤한 한국 서울의 한 대형마트 식품 코너에서 장 보는 시민들. 연합뉴스 최근 고물가로 성장세가 주춤한 한국 서울의 한 대형마트 식품 코너에서 장 보는 시민들. 연합뉴스

#장면 2. 대만 경제, 22년 만에 한국 역전

최근 국제통화기금(IMF)은 한국의 1인당 GDP가 지난해 34위에서 올해 37위로 1년 사이 세 계단 주저앉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반면 대만은 38위에서 35위로 세 계단 상승해 한국을 22년 만에 역전할 것으로 전망했다.

IMF는 지난 15일 발표한 세계경제전망(World Economic Outlook) 보고서에서 올해 한국의 1인당 GDP를 3만 5962달러로 예상했다. 이는 지난해 3만 6239달러보다 0.8% 감소한 수치다. 그나마 다행인 건 IMF가 한국이 3년 뒤인 2028년에는 4만 802달러로 1인당 GDP 4만 달러 시대를 열 것으로 예상했다는 점이다. 그러나 순위는 2028년 세계 40위로 더 떨어질 것으로 봤다.

대만은 반대다. IMF는 대만의 1인당 GDP가 지난해 3만 4060달러에서 올해 3만 7827달러로 11.1%가 증가해 세계 순위도 38위에서 35위로 세 계단 ‘껑충’ 올라설 것으로 봤다. 나아가 내년에는 4만 1586달러로, 한국보다 2년 앞서 국민소득 4만 달러 시대를 열 것으로 봤다. 세계 순위는 31위까지 치솟을 것으로 전망했다. 이에 더해 대만이 2030년에는 1인당 GDP가 5만 달러를 넘어설 것으로 보여 한국과의 격차를 더 벌릴 것으로 예상했다. 일본은 올해 3만 4713달러로 예상되며, 지난해에 이어 40위를 유지할 것으로 IMF는 내다봤다.

대만이 이처럼 눈부신 성장을 할 수 있었던 건 파운드리(반도체 위탁생산) 덕이 컸다. 전 세계 첨단 반도체의 90% 이상을 생산하는 TSMC는 그 자체로 대만 경제의 성장 엔진이 됐다. 최근 3~4년간 가속화된 인공지능(AI) 혁명과 4차 산업혁명 모두 TSMC의 칩을 필요로 했다. 과거 일본이 그랬던 것처럼, 이번엔 대만이 확실히 ‘미국 덕’을 봤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특히 대만의 경제 성장이 주변국의 부러움을 사는 건 ‘안정적인 물가 관리’가 뒷받침됐기 때문이다. 코로나 팬데믹 이후 한국과 일본이 저성장과 고물가에 시달릴 때, 대만은 AI 서버용 칩 수출 호황에 힘입어 2024~2025년 4~5%대의 폭발적인 경제 성장률을 기록했음에도 물가 상승률은 1~2%대에 그쳐 안정적인 물가를 유지했다.

IMF에 따르면 최근 10년간 연평균 물가상승률(소비자 물가지수 기준)은 한국 2.1%, 일본 2.4%였던 반면 대만은 1.3% 수준을 유지했다.

#장면 3. 대만, 일본에 TSMC 공장 건설

대만 TSMC는 지난해 2월 일본 구마모토현의 작은 마을 기쿠요마치에서 공장 개소식을 열었다. 이 공장은 TSMC가 일본 소니, 덴소 등과 함께 설립한 현지 법인 JASM이 운영·관리한다. 지분의 80% 이상을 TSMC가 보유한다.

일본 규슈 지역에 대만 TSMC 공장이 들어선 데 대해 규슈 지역 경제계 한 관계자는 “지역에 활기가 돌기 시작했고 젊은 사람들이 많아졌다”며 반겼다. 실제로 TSMC와 관련된 일자리의 보수는 수도 도쿄 수준에 맞먹는다. TSMC 공장 건립을 계기로 일본 반도체 업계에는 최근 대만에서 보고 배우는 관료라는 뜻의 ‘겐다이시’라는 신조어도 등장했다. 과거 중세 시기 당나라의 선진 문물을 배우겠다며 보낸 사절인 ‘겐토시’에 빗대 대만을 배우자는 의미다. 1970~80년대 세계 최고의 전자 기업으로 명성을 누렸다 지독한 쇠퇴기를 경험했던 소니는 작년에 기술자 200명을 대만 TSMC에 6개월간 파견해 반도체 기술을 배워왔다. 말 그대로 ‘전세역전’이었다.

실제 TSMC의 일본 내 공장 구축은 동아시아 경제 패권이 대만으로 옮겨간 상징이자 중요한 변곡점으로 해석된다.

한때 ‘초격차’라는 표현으로 글로벌 메모리 반도체 시장을 호령했던 한국 입장에서도 첨단 반도체 분야에서 대만을 추격해야 하는 처지가 됐다. 시장조사기관 트렌드포스에 따르면 올해 1분기 TSMC의 파운드리 점유율은 67.6%로 압도적이다. 삼성전자 점유율은 7.7%에 불과했고, 자칫 3위인 중국 SMIC(6%)에 따라잡힐 가능성까지 제기된다.

최근 스위스 국제경영개발대학원(IMD)의 국가경쟁력 평가에서도 한국은 69개국 중 27위로 전년보다 7계단 떨어진 반면 대만은 6위로 상위권에 자리했다.


이현정 기자 yourfoot@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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