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설위원의 뉴스 요리] 그들은 어떻게 검사님이 되었나

천영철 논설위원 cyc@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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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 보이스피싱 피해액이 올해 1조 원을 상회할 것이라는 전망이다. 범죄 수법에 심리 지배 기법을 도입하는 등 수법이 갈수록 치밀해지면서 피해액도 눈덩이처럼 불어나고 있다. 경찰이 만든 보이스피싱 예방 영상을 캡처한 장면. 연합뉴스 국내 보이스피싱 피해액이 올해 1조 원을 상회할 것이라는 전망이다. 범죄 수법에 심리 지배 기법을 도입하는 등 수법이 갈수록 치밀해지면서 피해액도 눈덩이처럼 불어나고 있다. 경찰이 만든 보이스피싱 예방 영상을 캡처한 장면. 연합뉴스

전화금융사기인 보이스피싱 수법은 진화하고 있다. 통화를 통해 피해자를 속여 돈을 뜯어내야 하는 범죄의 속성 상 보이스피싱 조직은 세간에 널리 알려진 수법을 폐기하고 새로운 사기 방안 고안에 골몰하기 때문이다. 보이스피싱에 대한 지속적 홍보에도 불구하고 국내 보이스피싱 범죄 피해액이 2023년 4400억 원에서 지난해 8500억 원으로 증가한 데 이어 올해 처음으로 1조 원을 넘길 것으로 전망되는 것도 이런 이유다.

보이스피싱 조직은 최근 가스라이팅 기법까지 동원하고 있다. 가스라이팅은 사실이나 사건을 의도적으로 왜곡하는 방식으로 상대방 심리나 상황을 조작, 피해자를 통제하고 조종하는 등 심리적 지배 상태에 빠뜨린다. 특히 최근엔 피해자들이 상상하기 어려운 첨단 기술까지 활용해 가스라이팅 강도를 높이기 때문에 자칫하면 피해를 볼 수 있다. 특히 그동안 젊은 층에 비해 스마트폰과 최신 AI(인공지능) 기술에 대한 이해도가 떨어지는 50대 이상 장년층과 노년층들이 보이스피싱 피해를 주로 입었지만 최근 가스라이팅 유형의 보이스피싱 피해는 거의 모든 연령대에서 발생하고 있는 상황이다. 심지어 경찰관과 가족들이 설득을 해도 쉽사리 자신이 보이스피싱을 당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할 만큼 강하게 심리를 지배 당하는 사례도 속출하고 있다.


가스라이팅은 심리적 조작을 통해 타인의 마음에 스스로에 대한 의심을 불러일으키고, 현실감과 판단력을 잃게 만들어 그 사람에게 지배력을 행사하는 것을 의미한다. 사진은 부산에서 2022년 3월 공연된 연극 ‘가스라이팅’ 포스터. 부산일보DB 가스라이팅은 심리적 조작을 통해 타인의 마음에 스스로에 대한 의심을 불러일으키고, 현실감과 판단력을 잃게 만들어 그 사람에게 지배력을 행사하는 것을 의미한다. 사진은 부산에서 2022년 3월 공연된 연극 ‘가스라이팅’ 포스터. 부산일보DB

■ 가스라이팅 보이스피싱 사례

# 지난달 울산에 거주하는 60대 여성 A 씨는 ‘카드 배송’을 알리는 전화 한 통을 받았다. A 씨가 카드를 신청한 적 없다고 하자, 전화를 건 보이스피싱 조직원은 가짜 고객센터로 안내했다. 해당 연락처로 전화하자 상담원을 사칭한 조직원이 “명의가 도용된 것 같다”며 원격 제어 기능이 있는 악성 애플리케이션 설치를 유도했다. 이어 보이스피싱 조직원들이 상황극을 하듯 A 씨에게 연이어 접근했다. 자신을 금융감독원이라고 밝힌 조직원은 전화로 “계좌가 범행에 이용됐으니 서울중앙지검으로 연락해 보라”며 불안감을 조장했다.

A 씨가 인터넷으로 직접 검색해 알아낸 서울중앙지검 대표 번호로 연락했지만, 악성 앱 때문에 통화는 보이스피싱 조직으로 연결됐다. 검사를 사칭한 조직원은 “검찰이 수사 중인 사안인데 어떻게 알았냐”며 화를 낸 뒤 가짜 구속영장과 입출금 내역서를 A 씨에게 보내 “당장 구속시키겠다”고 압박했다. A 씨는 극도의 공포감에 빠졌다. 검사 사칭범은 이런 심리 변화를 인지한 듯 “수사에 순순히 협조하면 약식기소로 처리해주겠다”며 A 씨를 회유했다. 연이은 겁박과 회유를 통해 심리 지배 상태에 빠진 피해자는 결국 보이스피싱 사기범을 자신을 도와주는 ‘검사님’으로 믿게 됐다. 상식적인 판단을 하지 못하는 상황에 빠진 것이다. 결국 사기범은 “범죄 수익금이 섞였는지 확인해야 하니, 모든 자산을 골드바로 바꿔 안전하게 전달하라”라고 유도했다. A 씨는 이 말을 믿고 평생 모은 적금 1억 9000만 원으로 골드바 10개를 구매해 전달하려 했다. 다행히 악성 애플리케이션 설치 기록 등을 실시간으로 모니터링 중이던 경찰이 A 씨의 소재지를 추적하면서 피해를 막을 수 있었다. 하지만 당시 이미 완전한 심리 지배 상태에 놓인 A 씨는 되레 경찰에게 “(검찰) 수사를 방해하지 말라”며 강한 거부감을 보였다고 한다. 당시 출동한 경찰관은 “피해자가 조직에 완전히 가스라이팅을 당해 설득에만 서너 시간이 걸렸다”고 밝혔다.


# 올 5월 대전에서는 20대 B 씨가 보이스피싱에 속아 자신을 모텔에 '셀프 감금'하는 사례가 발생했다. 보이스피싱범은 B 씨에게 자신이 서울중앙지방검찰청 검사라고 사칭했다. 이어 "검찰이 수사 중인 특수 사기 사건에서 본인 계좌가 발견됐다"면서 "범죄에 관여하지 않았느냐"고 B 씨를 추궁했다. 사기범은 가짜 수사 서류를 B 씨에게 보내기도 했다. 그 이후 "혼자 있을 수 있는 곳에 가서 대기하라. 지시에 따르지 않으면 바로 구속하겠다"고 겁을 주는 방식으로 B 씨에 대한 가스라이팅을 이어갔다. 보이스피싱범의 가스라이팅 때문에 판단력이 저하된 B 씨는 지시에 따라 모텔에 투숙, 장시간 머물면서 보이스피싱범들과 통화를 이어갔다. 이 과정에 스마트폰 공기계를 구입했고 원격제어 앱을 다운로드해 실행했다. 다행히 "수사관과 통화하더니 모텔에 들어가 나오지 않고 있다"는 B 씨 지인의 신고를 받고 출동한 경찰 덕분에 피해를 막을 수 있었다. 하지만 B 씨도 A 씨처럼 처음엔 출동한 경찰관을 되레 의심했다고 한다.


현금인출기 화면에 나오는 금융사기방지 안내문. 보이스피싱이 우려되는 경우 본인 명의의 모든 금융계좌를 한 번에 지급정지하는 '내 계좌 지급정지'를 계좌통합관리서비스 및 금융소비자 포털 파인에서 신청할 수 있다. 연합뉴스 현금인출기 화면에 나오는 금융사기방지 안내문. 보이스피싱이 우려되는 경우 본인 명의의 모든 금융계좌를 한 번에 지급정지하는 '내 계좌 지급정지'를 계좌통합관리서비스 및 금융소비자 포털 파인에서 신청할 수 있다. 연합뉴스

# 올 6월 30대 C 씨는 치밀한 각본에 따라 검사, 금융감독원 직원 등을 사칭하며 가스라이팅을 하는 보이스피싱 조직에 4억 원을 뜯겼다. C 씨는 등기우편이 반송됐으니 수령 가능한 날을 알려달라는 전화를 받았다. 전화를 건 보이스피싱범은 문자를 통해 홈페이지 주소를 남겼고, 해당 홈페이지엔 ‘C 씨의 계좌가 불법 사기 사건에 연루돼 조사받고 있다’는 내용의 공문이 게재돼 있었다. 이후 C 씨는 검사를 사칭한 일당의 전화를 받았다. 검사 사칭범은 “불법 계좌를 발견했는데 이 계좌가 사용되지 않았다는 입증은 본인이 직접 해야 한다”며 “특급사건이니 절대 어디에 말하지 말라”고 강요했다.

검사 사칭범은 C 씨에게 수사를 위해 새로운 휴대전화를 개통할 것도 지시했다. 특히 C 씨에게 인근 호텔로 이동할 것과 새로 개통한 휴대전화에 원격조종 애플리케이션 등을 설치할 것 등을 주문한 데 이어 불법 계좌가 없다는 사실을 입증하려면 대출을 실행하라고 유인했다. 추후에 계좌가 도용되지 않았다는 사실이 입증되면 돈을 모두 돌려받을 수 있다고 피해자를 안심시키는 수법도 사용했다. 그들의 말을 믿은 C 씨는 대출금 8000만 원가량을 그들의 계좌로 송금을 했다. 이후 검사 사칭범은 “불법 계좌가 또 발견됐는데 수사가 마무리될 때까지 호텔 방을 나갈 수 없다”며 “입증이 안 되면 제 검사 커리어를 걸고 구속하겠다”고 협박했다. 사건 정보를 유출할 경우에도 구속하겠다고 위협했다. 가족이나 회사 등을 언급하며 겁박도 서슴지 않았다. 또 금융감독원 직원을 사칭한 남성은 “남부지검에서 공탁금을 원한다”고 말해 C 씨가 7000만 원을 송금토록 했다. 심리 지배 상태가 이어지면서 C 씨가 일당에게 건넨 돈은 결국 4억 원에 달한 것으로 조사됐다.


■ 상식적 판단 차단하는 치밀한 수법

가스라이팅 유형의 보이스피싱은 범인들이 피해자에게 공포와 불안감을 유발해 판단력을 저하시킨 뒤 자신들의 말을 듣도록 하는 방식으로 이뤄진다. 각종 피해 사례를 참고할 때 피해자의 내면을 지배하는 가스라이팅 유형의 보이스피싱은 크게 ‘접근, 피해자 행동 통제, 심리 지배’ 등의 단계를 거친다.

접근 단계는 주로 가짜 신분을 진짜인 것처럼 피해자에게 사칭하는 방식으로 이뤄진다. 자신이 금융기관, 수사기관, 카드사 등의 관계자라며 피해자에게 접근한다. 특히 검찰과 경찰, 금융감독원 등 권위있는 기관 소속원을 가장 많이 사칭한다. 취업이나 저금리 대출·신용 회복 지원 등을 미끼로 접근하는 경우도 많다. 최근 유행하는 카드 배송 사기의 경우 카드사 직원이나 배송기사를 사칭한다. 가족이나 지인, 친구를 사칭하는 경우도 많다.


부산경찰청이 보이스피싱 범죄 근절과 피해 예방을 위해 제작한 모션 그래픽 가운데 대출사기형의 수법을 설명한 내용. 부산일보DB 부산경찰청이 보이스피싱 범죄 근절과 피해 예방을 위해 제작한 모션 그래픽 가운데 대출사기형의 수법을 설명한 내용. 부산일보DB

행동 통제 단계에서 가장 눈에 띄는 것은 피해자의 휴대전화부터 최우선적으로 통제하는 사례가 대부분이라는 것이다. 위의 사례들처럼 보이스피싱범들은 통상 휴대전화에 악성 애플리케이션을 설치하도록 유도한다. 이를 위해 명의도용 여부를 확인하기 위해 필요하다고 속이는 등의 수법을 사용한다. 이 앱을 통해 원격조종으로 피해자의 휴대전화를 마음대로 조작하고 위치까지 파악한다. 범죄 수익을 얻은 뒤에는 피해자에게 휴대폰을 초기화시킬 것을 종용, 범죄 증거까지 없애는 치밀함을 보인다.

본격적인 심리적 지배를 위해 보이스피싱범들은 협박 등을 통해 피해자에게 불안을 조장한다. 피해자의 무고함을 입증하기 위해 좋은 마음을 갖고 도와주고 있는데도 지시에 따르지 않는다면 구속할 수밖에 없다는 식으로 대화를 끌고 간다. 이 과정에서 호통을 치거나 강하게 협박하면서 피해자들이 상식적인 판단을 하지 못하도록 옥죈다. 피해자들이 말을 듣지 않으면 가족이나 회사 등에 알려 큰 불이익을 받도록 하겠다는 등의 강한 겁박도 사기범들이 흔히 사용하는 심리 지배 기법이다. 일반인들에게 익숙하지 않은 법률 등 어려운 전문용어를 사용해 피해자들에게 심리적 위축감을 주는 것도 흔한 수법이다. 심지어 가짜 수사 공문과 위조 신분증, 조작된 인터넷 홈페이지 등도 동원한다. 특히 악성 애플리케이션의 기능은 갈수록 강력해지고 있다. 피해자들이 해당 기관에 진위 여부를 확인하기 위해 해당 기관 진짜 전화번호로 연락하더라도 보이스피싱 조직의 전화로 연결되도록 하는 악성 애플리케이션이 많이 활용되고 있다. 예전엔 해외에서 전화를 하더라도 피해자 휴대전화에 뜨는 발신자 번호를 국내 전화번호로 바꿔주는 중계기를 사용하던 수준의 단계에서 한층 더 진화한 것이다. 이쯤 되면 가스라이팅 보이스피싱에 대한 지식이 없는 피해자들은 아무런 의심없이 사기범들의 지시에 순순히 따르게 된다. 더욱이 인공지능(AI) 기술이 발달하면서 목소리를 변조하는 방식도 일반화되고 있다. 최근 피해자들이 자신을 모텔 등에 자체 감금하거나 사기범들에게 피해자의 일상을 보고하고 반성문까지 작성해 제출하는 등의 사례가 이어지는 것도 악성 애플리케이션과 위조 서류 등을 활용한 심리 지배가 워낙 강력하기 때문이라는 지적이다.


보이스피싱 조직이 해외에서 전화를 걸더라도 국내에서 거는 전화번호인 것처럼 바꿔주는 중계기. 부산경찰청 제공 보이스피싱 조직이 해외에서 전화를 걸더라도 국내에서 거는 전화번호인 것처럼 바꿔주는 중계기. 부산경찰청 제공

■ 가스라이팅 보이스피싱 예방하려면

가스라이팅 형태의 보이스피싱은 심각한 피해를 유발한다. 심리 지배를 당하는 상태이기 때문에 다른 유형에 비해 피해액이 큰 편이다. 더욱이 보이스피싱은 단순한 금전 사기 범죄가 아니다. 가정을 무너뜨리고 평생 자책감에 시달리도록 하는 심각한 후유증을 남긴다.

보이스피싱 피해 예방을 위해 가장 중요한 것은 일단 의심하는 것이다. 의심스러운 전화는 일단 즉시 끊어야 한다. 또 경찰, 검찰, 금융감독원 등 정부기관은 어떤 경우에도 국민들에게 현금이나 금괴를 요구하지 않는다는 점을 숙지하는 것이다. 특히 개인에게 불쑥 전화를 걸어 호통을 치거나 협박하는 검사나 경찰관은 존재할 수 없다. 금융기관 관계자가 전화로 계좌 비밀번호를 물어보는 일도 절대 없다.

그리고 전화를 건 사람이 사건 조회, 특급보안, 엠바고, 약식조사, 보호관찰, 자산 검수, 자산 이전 등의 용어를 사용하면 보이스피싱일 가능성이 무척 높다. 또 출처가 불분명한 문자의 링크를 클릭하면 안 된다. 전화로 특정 애플리케이션을 설치하라는 요구도 무조건 거절해야 한다. 현금 인출, 송금을 요구하는 경우도 마찬가지다. 가족 사칭 보이스피싱 피해를 막으려면 가족들만 아는 비밀 암호를 사전에 정해두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통신사가 제공하는 보이스피싱 차단 서비스를 활용하는 것도 권장되고 있다. 경찰청의 보이스피싱 방지 애플리케이션인 시티즌코난 등을 설치해 수시로 자신의 휴대전화를 검사해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피해를 입었다면 경찰(112)이나 금융감독원(1332)에 즉시 신고해야 한다. 은행에도 전화해 계좌 지급정지를 요청, 인출을 차단해야 한다. 빨리 대처할수록 피해금을 회수할 가능성이 높아진다. 보이스피싱범의 전화번호와 계좌번호, 통화 내용, 문자, 송금 내역 등 증거를 보전하는 것도 중요하다.

여신거래·비대면 계좌개설 안심차단 서비스를 사전에 이용하는 것도 보이스피싱 피해를 막는 방법이다. 여신거래 안심차단 서비스는 소비자가 사전에 신용대출, 신용카드 발급, 카드론 등 본인의 여신거래 여부를 설정할 수 있는 시스템이다. 신규 여신거래를 사전에 차단할 수 있다. 별도 해제 신청을 하지 않으면 차단된 상태를 계속 유지하도록 설계됐다. 비대면 계좌 개설 안심서비스는 모든 금융권의 수시입출식 계좌의 비대면 개설을 사전에 일괄적으로 차단할 수 있는 시스템이다. 신분증, 휴대폰 등 분실로 명의도용 계좌 개설이 우려되거나 본인이 모르게 개설된 계좌가 범죄에 이용되는 것을 예방하고 싶을 때 신청하면 된다. 천영철 논설위원 cyc@busan.com


윤창렬 국무조정실장 등이 올 8월 28일 서울 종로구 정부서울청사에서 정부 차원의 보이스피싱 근절 종합대책을 발표하고 있다.연합뉴스 윤창렬 국무조정실장 등이 올 8월 28일 서울 종로구 정부서울청사에서 정부 차원의 보이스피싱 근절 종합대책을 발표하고 있다.연합뉴스


천영철 논설위원 cyc@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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