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감] 그림 한 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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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호철 소설가

우연히 방문하게 된 갤러리
아름다움 끌려 덜컥 그림 구입
무엇이 아름다운 것인가 고민
예술은 생각하게 만드는 계기

얼마 전 연극공연을 보러 간 적이 있다. 아내의 지인이 출연한다고 해서 함께 보러 간 것이다. 구실이야 어쨌든 간에 간만의 데이트라 제법 들떠있었고, 주말에 번잡할지 모른다며 설레발을 쳤다. 그러다 보니 너무 일찍 도착해버렸다. 공연시간까지 문화센터 여기저기를 둘러볼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가 문화센터 한쪽에서 지역 미술작가의 개인전이 개최되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이런 행운이 있나. 당연히 관람해야지. 우린 전시회를 보려고 일부러 방문한 사람처럼 품위 있게 작품을 감상했다. 꽃이 있고 별이 있고, 색채만 가득한 무정형의 그림도 있었다.

그림은 잘 모르지만, 왠지 포근하고 아름답다는 느낌이었다. 달력만 걸려 있는 우리 집에도 이런 그림 하나쯤 걸려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미처 가다듬기도 전에 덜컥 그림 한 점을 구매하고 말았다.

그림을 사 놓고 하루가 지나서야 내가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자각했다. 그 돈이면 한우가 몇 근이며, 가족과 몇 번의 외식을 할 수 있을까. 거실에 두었으면 좋겠다고 아내가 몇 번이나 중얼거리던 공기청정기도 생각났다. 그때는 왜 아내의 흔들리는 눈빛을 감지하지 못했을까.

내가 뭔가에 홀려버린 것이다. ‘아름다움’은 그 자체로 뭔가를 끌어당기는 힘이 있는 게 분명하다. 나 같은 문외한들은 그런 묘한 힘이 깃든 그림이나, 음악, 혹은 유무형의 작품을 ‘예술작품’이라 부르고, 이런 작품을 창작하는 사람을 ‘예술가’라 여겼다.

사실, ‘아름다움’의 수명은 그리 길지 않았다. 아름답다고 탄복하며 사들인 장식품도 집에 몇 년간 뒹굴다 보면 어느새 하나의 익숙한 물건으로 취급받기 마련이다.

무엇이 진정 아름다운 것인가? 꼭 예술가가 아니어도 한 번쯤은 던져봤을 물음이다. 아름다움을 유발하는 이론적 조건을 써 놓은 책을 읽어본 적이 있다. 대칭과 균형, 비율과 질서라는 알쏭달쏭한 말들이 기억난다. 어떤 이는 대자연의 모습이 궁극의 아름다움이라 주장하기도 한다.

그런데, 예술가들은 아름다움이 창작의 목적이 아님을 진작 깨달은 듯하다. 일전에 인터넷을 뒤적이다가 독특한 사진 하나가 눈에 띄었다. 현대미술의 출발점이 된 작품이라 했는데, 사진 속 작품은 바로 남자의 소변기였다.

이게 뭔가 싶어서 설명 글을 읽어봤다. 소변기는 ‘마르셀 뒤샹’이라는 프랑스 미술가가 출품한 작품이었다. 그것도 작가가 직접 만든 게 아니라 시중에 판매되는 소변기에 ‘R. Mutt’라는 서명을 넣고 예술품이라 내놓은 것이었다. 대뜸 이런 생각이 들었다.

“이게 무슨 예술품이지? 도대체 왜?”

본격적으로 읽어봤다. 그러니까 작가의 깊은 뜻을 나 같은 문외한이 이해하기 쉽도록 잘 설명해 놓은 해설을 읽어봤다. 우습게도, 작가의 의도는 바로 나처럼 도대체 왜?라는 질문이 나오게 하는 것이었다. 말인즉슨, 그 작가로 인해 예술가가 “무엇을 그렸는가”가 아니라 “어떻게 생각하게 했나”로 전환하게 된 계기가 되었다고 한다.

그러니 내가 산 그림의 작가도 내가 무엇을 아름답게 여기는지 묻고 있었는지 모른다. 나 또한 아름다움이 뭐고 예술이 뭔지 되묻는 글 한 줄을 쓰게 된 셈이기도 하다. 누군가를 생각에 잠기게 하고, 그 내면을 자극하는 작품을 창작한다는 것은 정말 대단하지만, 모두가 예술가가 될 수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꼭 그림이 아니어도 될 것이다. 소변기든, 카텔란의 바나나든, 혹은 일상의 짧은 글이라도 상관없을 것이다. 분에 넘치는 그림 한 점으로 이런 글 한 줄 남기게 된 것이 그나마 위안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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