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상훈의 포커스온] '조지아 구금 사태'가 남긴 것

김상훈 논설위원 neato@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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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설위원

한국인 300여 명, 구금 7일 만에 귀국
재입국할 때 불이익 없다는 확약 받아
미 이민 당국, 범죄자 취급 단속 공분
모욕감·굴욕감 유발 국민감정 악화
불확실성 커져 한국 기업 투자 위축
양국 신뢰가 경제 협력 튼튼한 기반

미국 이민 당국에 의해 체포·구금된 한국인 300여 명이 우여곡절 끝에 11일(현지시간) 귀국길에 올라 12일(한국시간) 오후 인천공항에 도착할 예정이다. 이들은 지난 4일 미 조지아주 엘러벨의 현대차그룹·LG에너지솔루션 합작 배터리 공장 건설 현장에서 이뤄진 미국 이민세관단속국(ICE)의 불법 체류 단속에서 체포돼 구금 시설에 일주일간 억류됐다. 방미 중인 조현 외교부 장관은 11일 “구금된 한국인이 미국에 재입국할 때 불이익이 없다는 점에 대해 미국 측의 확약을 받았다”고 밝혔다.


그러나 이번 한국인 집단 구금 사태는 ‘군사동맹’(상호방위조약)에서 ‘경제동맹’(자유무역협정)까지 영역을 확장해 온 양국 관계사에서 처음 있는 일이어서 외교적 파장이 만만치 않다. 중무장한 요원들이 강압적 분위기 속에서 현장 노동자들을 중범죄자 취급하며 수갑과 족쇄로 묶는 단속 영상을 미 당국이 자랑하듯 공개하면서 더 공분을 샀다. 미국이 관세 인하 대가로 대규모 투자를 유치해 놓고 정작 사업에 필수적인 외국인 인력을 범죄자처럼 다룬 것이다. 이를 접한 한국 국민은 모욕감, 굴욕감, 배신감, 분노 등 복합적 감정에 휩싸여야 했다.

이번 사태는 트럼프 행정부의 정책 모순에 기인한다. ‘뉴욕타임스’의 지적처럼 ‘미국 제조업 확대와 강력한 이민 단속 정책의 상호 충돌’이다. 관세를 무기로 내세워 대미 투자를 압박해 왔던 트럼프 행정부가 오히려 대규모 투자를 진행하는 기업을 공격한 셈이다. 이번 사태가 정치적인 배경에서 이뤄졌다는 분석도 있다. 조지아주는 2020년 대선 때는 바이든 전 대통령이, 지난해 대선에선 트럼프 대통령이 승리했던 대표적 경합주다. 특히 단속 대상이 된 합작 배터리 공장 투자는 조 바이든 전 미국 대통령 시절 결정됐다고 한다. 바이든 전 대통령 치적을 흠집 내면서 동시에 불법 이민자 추방을 지지하는 강성 지지층 ‘마가’(MAGA·미국을 다시 위대하게)’의 여론을 의식한 결정이라는 해석이다.

이번 사태의 핵심은 고질적으로 풀지 못한 대미 파견 직원들의 비자 문제였다. 미국에 진출한 우리 기업들은 현장에서 전문직 취업(H-1B) 비자 등을 발급받아야 하지만, 통상 2~3개월이 소요돼 관광 목적 체류만 가능한 무비자 전자여행허가(ESTA)나, 회의 참석 등을 위한 단기 상용 비자인 B-1, B-2 비자로 업무를 수행하는 편법적 관행을 반복해 왔다. 구금된 한국인 대다수가 전자여행허가와 B-1 비자를 받아 문제가 된 것이다. 정부는 2012년 이후 별도의 한국인 전문인력 대상 비자 쿼터(E-4 비자)를 신설하는 ‘한국 동반자법’ 입법을 위해 미국 정부·의회를 설득해 왔지만, 성과가 없었다. 이번 사태를 계기로 미 상무부와 국토안보부가 외국 기업 근로자의 비자 문제 해결을 위해 논의하기로 했고, 한국 외교부와 미 국무부도 워킹그룹을 구성해 새 비자 형태를 만들기로 협의한다는 소식도 들린다.

이번 사태로 미국 투자의 불확실성이 커지면서 한국 기업들이 장기 투자 계획이 위축될 것이 분명하다. 미국 시장에서 예측할 수 없는 리스크가 불쑥불쑥 출현하는 양상이기 때문이다. 오죽하면 국내 기업들 사이에서 “이렇게 예측 불가능한 시장이면 차라리 투자를 재검토하고 관세를 무는 게 나을 것”이란 볼멘소리가 나오겠는가.

미국에 진출한 부산 기업들도 사태를 면밀히 살피는 중이다. 자동차부품 기업인 성우하이텍은 테네시주 텔포드 공장에서 전기차와 자율주행차 모델 시장 공략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미국 현지에 나간 직원이 모두 주재원 비자를 받아 문제는 없지만, 새로 설비를 설치하거나 추가 투자가 이뤄질 경우 한국인 직원이 가야 하는 상황이 생길 수 있다. 취업비자 쿼터 확대 등 후속 대책에 민감할 수밖에 없다. 자동차부품, 방산, 에너지 부문의 북미 사업 확대를 위해 최근 미국 루이지애나주 공장 부지를 인수한 SNT 그룹도 동향을 예의 주시하고 있다고 한다. 또 한미 조선 협력 프로젝트인 ‘마스가’에 참여하는 부산·울산·경남 지역의 조선소와 조선기자재업체들도 촉각을 곤두세울 수밖에 없다.

트럼프 행정부는 대폭 늘어난 대미 투자 현실에 맞춰 미국 시장의 불확실성을 해소하고, 한국인 전문직 취업비자 쿼터를 늘려야 한다. 감정이 악화된 한국에 대한 진심 어린 사과와 재발 방지 약속도 뒤따라야 한다. 그래야 미국에 진출한 우리 기업들이 안심하고 작업할 수 있지 않은가.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 만들겠다며 일하러 간 한국인들이 또다시 부당한 수모와 불이익을 겪는다면 양국의 신뢰 약화는 불가피하다. 이번 사태로 한미동맹의 근간이 무너지지는 않겠지만, 미국에 대한 한국민의 우호적인 감정에 찬물을 끼얹은 것은 틀림없다. 미국은 양국의 굳건한 신뢰가 경제 협력의 튼튼한 기반임을 직시해야 할 것이다.


김상훈 논설위원 neato@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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