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감] 밥심에서 커피심으로
김정화 수필가
밥 대신 커피로 시작하는 하루
커피로 개인 정체성 알아내기도
옛 부산진역에 커피박물관 있어
절구통 분쇄기 보며 추억 회상
오늘도 아침밥 대신 커피로 하루를 연다. 비단 나만 그럴까. 요즈음은 밥심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커피심으로 견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예전에는 ‘밥’으로 통하는 인사말을 주고받았다면, 지금은 “언제 커피나 한잔합시다”라는 대화까지 일상화되었다. 나 또한 이다음에 죽으면 어동육서로 줄지은 제사음식 대신 좋아하는 커피 한 잔만 올려 달라고 일러두었으니 커피의 위력은 사후까지 발휘될 태세이다.
내친김에 커피박물관에 가보기로 한다. 가는 길 내내 다방, 커피숍, 카페, 커피하우스 등 커피 전문점 간판이 숱하게 내걸렸다. 가히 커피숍 전성시대이다. 현대인은 커피 소비로도 자신을 나타낸다. 어디서 커피를 마시는지, 어떤 커피를 애호하는지, 누구와 함께 마시는지…. 커피가 개인의 정체성을 확인하는 수단이 되었다. 그러나 무엇보다 커피는 분위기다. 밖에서 보더라도 감성 넘치는 카페에 더 오래 눈길이 간다. 도착지인 커피박물관도 폐역이 된 부산진역을 탈바꿈시켰으니 의미로운 장소가 되겠다.
이십 년 전만 하더라도 여객열차가 정차하던 곳이라 저 멀리서부터 기적 소리라도 울려 퍼지는 듯하다. 커피에 조예가 깊은 한 시민이 전 세계에서 수집한 이천여 점의 커피 기구를 기증했다는데 대단한 안목이다. 향미에 따라 적절히 섞어 재창조하는 블렌딩과 생콩에 열을 가하는 로스팅을 거쳐 분쇄 커피를 물과 함께 끓이는 달임식, 여과 장치에 넣고 거르는 여과식, 뜨거운 물에 담가 우리는 우림식, 압력을 가하는 가압식 등의 추출 방식이 시대별로 전시되었다. 추출 기구도 터키쉬, 보일링, 비긴, 사이펀, 네오폴리탄, 퍼컬레이터 등 생경한 것이 많고, 생김새도 램프를 닮은 것, 오르골 모양, 양동이를 본뜬 것, 기차 형태 등 다양한데, 에티오피아에서 가져온 절구통 분쇄기 앞에서 발길이 멈추었다.
콩팥 이식 수술을 한 그녀의 집은 단출했다. 가족이 떨어져 혼자 지낸 세월도 오래되었지만, 당뇨환자라는 상황이 주변을 더욱 간소하게 만들었다. 그 외로운 사람에게 찾아갔으니 얼마나 반가웠을까. 대뜸 커피를 좋아하느냐고 물었다. 선물 받은 원두 콩이 있다고 하였다. 아무렴, 한더위를 식혀줄 아이스커피 한 잔이면 된다고 무심코 말한 것이 화근이었다. 식이요법을 하는 그녀의 집에 커피머신이 있을 리가 만무했다. 그녀가 선택한 방법은 마늘 찧는 절구통이었다. 나는 아연하였으나 그날 열서너 평의 작은 아파트를 가득 채운 헤이즐넛 향기는 어느 과일 향과 꽃 향보다도 향긋했다. 십여 분간 절구통에 찧은 커피 가루를 체에 걸러 내려 얼음을 띄운 냉커피 한 잔, 어찌 그 맛을 짧은 혀의 감각으로만 평가할 수 있으랴.
에티오피아의 고원인 카파 지방에서 어느 목동 소년이 처음으로 커피를 발견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이천 년도 훨씬 넘은 설화가 사실이든 아니든, 첫 커피 열매를 발견한 자에게 경의를 올리는 것은 당연한 일. 밥은 굶어도 커피는 마시게 된다는 젊은이들과, 오로지 나만의 공간을 찾아 앉을 수 있는 것도 커피가 있기에 가능한 일이다. 절차가 복잡한 차와 정신을 혼미하게 하는 술은 일과 함께하기 힘들지만, 커피는 정신을 깨어있게 만드니 일할 때도 잘 어울린다. 심지어 ‘워킹 커피’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걸어 다니면서도 마실 수 있다.
오늘날 우리는 왜 이렇게 커피에 열광하는가. 맛은 물론이거니와 커피를 마실 때를 생각해보라. 신분이나 지위나 나이도 잊을 수 있을 만큼 경계를 허물고 여유를 주는 것이 가장 큰 이유가 아닐까. 이런저런 생각을 하는 동안 어느새 직원이 방금 내린 한 잔의 커피를 건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