펜(pen), 팬(fan)을 심다 [논설위원의 뉴스 요리]

정달식 논설위원 dosol@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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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한미정상회담서 건넨 펜 하나
소박함 속에 품격·정성·진심 담겨
트럼프 미국 대통령 마음 훔치고
양국 외교 온도 완전히 바꿔 놔

진정한 가치 ‘의미·마음’에서 비롯해
외교 현장에서 시작된 작은 울림
우리 일상·정치판에도 이어지길

이재명 대통령이 25일(현지 시간) 미국 워싱턴DC 백악관에서 열린 한미정상회담에서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에게 방명록 작성 때 쓴 만년필을 선물하고 있다. 연합뉴스 이재명 대통령이 25일(현지 시간) 미국 워싱턴DC 백악관에서 열린 한미정상회담에서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에게 방명록 작성 때 쓴 만년필을 선물하고 있다. 연합뉴스

외교 무대는 늘 무겁다. 회담장에는 계산된 미소가 오가고 기자들의 카메라 셔터는 그 순간을 박제한다. 한데 최근 한미정상회담을 기념하는 서명식에서 그 무거움을 덜어내는 뜻밖의 장면이 있었다. 이재명 대통령이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에게 건넨 것은 값비싼 선물이 아니라 손에 쥐고 있던 펜 한 자루였다. 한데 그 펜 하나가 외교의 온도를 바꿔 놓았다. 나아가 뉴스의 헤드라인이 되었으며, SNS를 뜨겁게 달궜다. 해당 펜을 제작한 업체는 주문이 폭주해 잠시 판매를 중단해야 할 정도였다. 말 그대로 펜(pen)이 팬(fan)을 만든 셈이다. 외교 현장에서 펜은 역사를 만들지만, 때로는 누군가의 마음을 훔치기도 한다.


이재명 대통령이 트럼프 대통령에게 준 펜. 이 펜은 선물이 아닌 이 대통령의 서명용이었지만 트럼프 대통령의 요청으로 즉석에서 선물했다. 연합뉴스 이재명 대통령이 트럼프 대통령에게 준 펜. 이 펜은 선물이 아닌 이 대통령의 서명용이었지만 트럼프 대통령의 요청으로 즉석에서 선물했다. 연합뉴스

■소박한 네임펜, 진심은 ‘명품’

정치가 늘 멀게만 느껴지는 시대에 대통령이 건넨 작은 펜 하나는 국민에게 깊은 울림을 주었다. 정치적 계산으로는 얻기 힘든 자연스러운 공감이 담겨 있었기 때문이다. 지난 25일(현지 시간) 미국 워싱턴 DC 백악관에서 가진 방명록 서명식에서 트럼프 대통령은 이 대통령이 서명하는 모습을 유심히 바라보다가 “좋은 펜(nice pen)”이라고 말하며 관심을 보였다. 이어 “펜의 두께가 매우 아름답다”라고 감탄했다. 트럼프의 입에서 ‘아름답다’라는 단어가 나온 것은 의외의 순간이었다. 이 대통령은 “대통령님의 다소 복잡한 서명에 유용할 것”이라며 펜을 선물했고, 두 정상은 이 짧은 대화 속에서 자연스러운 교감을 나눴다.

사실 이 펜은 특별할 것이 없는 물건이었다. 원목을 다듬어 봉황과 태극 문양을 새기고, 값비싼 만년필촉 대신 흔한 ‘모나미 네임펜’ 심을 넣어 만든 대통령 전용 사인펜이었을 뿐이다. 브랜드 로고도, 고가의 펜촉도 없었다. 그러나 장인의 손길이 더해지자 평범한 펜은 품격을 갖추었고, 겉으로는 소박했지만 그 속에는 한국적 정체성과 진심이 담겨 있었다.

이 같은 형태의 펜이 만들어진 것은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2018년 9월 문재인 당시 대통령은 평양 백화원 영빈관에서 열린 남북정상회담 공동선언문 서명식에서 평소 즐겨 쓰던 네임펜으로 서명했다. 반면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은 몽블랑 만년필을 사용했다. 그러자 일부 언론과 온라인에서는 “국격에 맞지 않는다”, “의전 실패”라는 비판이 쏟아졌다. 그러나 “서명 도구보다 중요한 건 선언문의 내용”이라는 옹호론도 적지 않았다. 펜 하나를 두고 나라 전체가 갑론을박했던 것이다. 이를 계기로 당시 청와대 참모들은 대통령 서명을 위한 전용 네임펜 제작을 추진했다. 나무와 금속으로 외형을 다듬고, 내부에는 네임펜 심을 넣어 편의성을 높였다. 작은 펜일지라도 정성과 의미가 더해지면 누군가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음을 보여 준 사례라 할 수 있겠다.


문재인 대통령이 2018년 9월 19일 북한 백화원 영빈관에서 평양공동선언문 합의서에 서명하고 있다. 당시 문 대통령은 평소 즐겨 쓰던 네임펜으로 합의서에 서명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연합뉴스 문재인 대통령이 2018년 9월 19일 북한 백화원 영빈관에서 평양공동선언문 합의서에 서명하고 있다. 당시 문 대통령은 평소 즐겨 쓰던 네임펜으로 합의서에 서명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연합뉴스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2018년 9월 19일 평양 백화원 영빈관에서 열린 평양공동선언 합의문에 서명하고 있다. 오른쪽은 김여정 노동당 제1부부장. 당시 김 국무위원장은 몽블랑 만년필을 사용해 합의서에 서명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연합뉴스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2018년 9월 19일 평양 백화원 영빈관에서 열린 평양공동선언 합의문에 서명하고 있다. 오른쪽은 김여정 노동당 제1부부장. 당시 김 국무위원장은 몽블랑 만년필을 사용해 합의서에 서명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연합뉴스

■펜은 언제나 역사의 현장에

외교 무대에서 대통령이 사용하는 펜은 단순한 필기구가 아니다. 한 자루의 펜 끝에서 국익이 좌우되고 역사가 기록된다. 그래서 정상들이 사용하는 펜은 언제나 화제가 되곤 했다. 특히 역사 속 만년필은 그 존재만으로 빛을 발했다. 국가 간 조약이나 협정 체결 같은 중대한 순간에 늘 함께한 것도 만년필이었다. 1919년 1차 세계대전 종결 후 체결된 베르사유 조약에는 영국 총리 로이드 조지가 ‘워터맨’ 만년필로 서명했다. 1945년 2차 세계대전 종전 후 일본 항복 문서에는 맥아더 장군의 ‘파카 듀오폴드 오렌지’ 만년필이 사용됐다. 1987년 워싱턴에서 로널드 레이건 미국 대통령과 미하일 고르바초프 소련 대통령이 공동 서명한 ‘중·단거리 핵미사일 폐기협정’(INF)에도 ‘파카 75’ 만년필이 등장했다. 냉전 시대 종식을 상징하는 이 협정에서, 두 정상은 이름이 새겨진 만년필로 서명한 뒤 서로의 펜을 교환했고, 그 장면은 역사의 한 페이지로 남았다. 1990년 10월 3일 독일 통일 조약에 서명할 때도 서독의 헬무트 콜 총리와 동독의 로타어 데메지에르 총리는 몽블랑 만년필을 사용했다. 펜 하나가 조약을 완성하고, 새로운 시대를 열었던 것이다.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은 2009년 취임식에서 크로스(Cross)의 ‘타운젠트 라카블랙 575’ 볼펜으로 선언문에 서명했다. 이듬해인 2010년에는 건강보험개혁법안에 서명하며 크로스 볼펜 22개를 사용했고 이를 법안 통과의 주역들에게 나눠주면서 이 펜은 더욱 큰 명성을 얻었다. 한국에서도 박정희 대통령과 노무현 대통령이 서명 시 자주 사용한 펜은 다름 아닌 모나미의 수성펜 ‘프러스펜 3000’이었다. 이처럼 펜은 언제나 조용히, 그러나 분명히 역사 한가운데 있었다.


■작은 것의 힘, 그리고 남겨진 메시지

외교는 차갑고 냉정한 계산의 연속이다. 국익이라는 저울 위에서 한 치의 양보도 허락되지 않는 곳. 그러나 때때로 그 모든 계산을 무력화하는 따뜻한 순간이 찾아온다. 이번 백악관의 펜 선물이 바로 그런 순간이었다. 작은 펜 한 자루가 촉매제가 된 것이다.

이 장면은 우리에게 분명한 메시지를 전한다. 진정한 가치는 가격표가 아니라 그 속에 담긴 의미와 진심에서 비롯된다는 것이다. 평범한 펜심에 장인의 손길이 더해져 세계 정상의 마음을 움직였듯, 우리의 일상 속 작은 것도 충분히 세계적 가치를 지닐 수 있다. 외교가 복잡한 계산의 산물처럼 보이지만, 그 이면에는 인간적인 교감과 따뜻한 순간들이 숨어 있으며, 때로는 가장 소박한 것에서 비롯되기도 한다.

정치 역시 흔히 차갑고 계산적인 영역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그 안에서도 작은 배려와 진심은 늘 감동을 주고 빛을 발한다. 펜 하나가 팬을 만든 것처럼, 이런 정성과 진심이 우리 정치에도 더해져 국민의 마음을 움직이기를 기대해 본다. 이는 우리의 일상에서도 다르지 않다. 누군가에게 건네는 작은 배려, 손수 쓴 메모 한 장이 때로는 큰 울림을 남긴다. 결국 외교든 정치든 일상이든, 진정한 가치는 크기나 값이 아니라 의미와 마음에서 비롯된다. 화려함이 아닌 진심이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힘이다.

물론 이번에 선물한 펜이 실제로 트럼프의 손끝에서 사용될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그 펜이 두 정상이 보여준 소통과 공감의 상징으로 오래 기억될 것이라는 사실이다. 한 자루의 펜이 만들어낸 감동이다.

정달식 부산일보 논설위원. 부산일보DB 정달식 부산일보 논설위원. 부산일보DB



정달식 논설위원 dosol@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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