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을 여는 시] 확보
조말선(1965~)
벼랑처럼 여름이다 식물들은 쑥쑥 위로만 기어오른다 나는 날카로운 칼을 가진다 새삼 해변이 가까이 있었다 해변에는 한 번도 가지 않았다 화면에 비친 그곳은 낯설다 늘 모르는 사람들로 북적인다 칼날에서 번뜩이는 햇빛이 칼보다 날카로운 게 불만이다 내가 식물성향보다 동물성향이 강한 게 불만이다 덩굴들은 여름에 가장 멀리까지 올라가 있다 나는 늘 땀으로 번들거리며 벼랑을 기어오르고 있었다 희미한 한 사람이 밧줄 끝에 호의적으로 서 있었다 얼굴은 알아볼 수 없었다 나는 추락할 수 있는 경우의 수를 하나 더 확보했다
시집 〈재스민 향기는 어두운 두 개의 콧구멍을 지나서 탄생했다〉 (2012) 중에서
날카로운 칼은 날카로운 정신. 살아내야만 하는 여름은 험하고 가파른 또 하나의 벼랑입니다.
그 길을 오르는 것은 추락할 수 있는 경우의 수를 하나 더 확보하는 것.
누군가는 갈 수 있는 가장 먼 곳으로 기어오르는데, 우리의 여름은 언제나 땀으로 번들거립니다.
그래도 기어오르는 여름의 기분 강렬한 햇빛이 칼날보다 날카로워 불만이지만, 불만은 불만을 이겨내고자 하는 의지의 표명. 모르는 사람들로 북적이는 화면 속 해변이 오히려 더 뜨겁습니다.
그러나 확보는 암벽등반에서 동행자의 추락을 방지하기 위해 로프를 조작해주는 기술.
이번 여름도 호의적인 누군가의 협조로 오르고자 하는 곳까지 완등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신정민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