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로365] 선악과(善惡果)와 선과 악
이근우 부경대 사학과 교수
농경·목축 위협하는 존재 상정
기독교 이분법 악마화 관념 형성
동양 음양 구별은 상호보완적
대립해도 ‘나눌 수 없는 하나’
보수·진보 우선 순위 문제일 뿐
새 정부, 분열 넘어 대동 세계로
구약성경에 아담과 이브가 뱀의 유혹을 받아 선악과를 따먹고, 선과 악을 알게 되었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이 일로 아담과 이브는 에덴동산에서 쫓겨났고, 하느님은 영원한 삶을 누릴 수 있는 생명나무 열매를 그들이 따먹지 못하게 했다고 한다. 둘은 카인과 아벨을 낳았으며, 카인은 밭을 가는 농부가 되었고 아벨은 양을 치는 목자가 되었다. 이러한 성경의 내용은 종교적 관점이 아니라 역사학의 관점에서 보면 인류 역사에 대한 은유이다.
우리의 단군신화도 역시 역사적 은유이다. 곰과 호랑이는 동물에 대한 토템신앙을 보여주고, 신석기 단계를 가리킨다. 하늘에서 풍백, 우사, 운사를 거느리고 내려온 환인은 청동기와 농경문화를 가진 우월한 집단을 상징한다. 단군신화가 신석기에서 청동기 단계로 변화하는 과정을 보여주는 것이라면, 에덴동산이라는 낙원을 상실한 이야기는 인류가 채집, 수렵, 어로의 구석기 단계에서 농경과 목축의 신석기 단계로 이행하는 과정을 보여주는 셈이다.
아담과 이브는 에덴동산에서 나무 열매를 마음대로 따먹을 수 있었고, 짐승도 잡고 물고기도 잡을 수 있었다. 채집, 수렵, 어로 생활이다. 그러나 에덴동산을 나온 단계에 이르러 그 자식들은 농경과 목축에 종사하게 되었다. 에덴동산이 인류문명의 발상지라고 할 수 있는 티그리스, 유프라테스 지역에 있었다는 사실에 주목하자. 농경이 가장 먼저 시작된 곳이 바로 이곳이다.
실낙원 이야기가 역사적인 사실을 반영하고 있는 것이라면, 선악과도 무엇인가를 은유하고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결론부터 말하면, 선악과가 열리는 나무는 하느님이 심은 것이 아니라, 우리 인류가 선악이라는 개념을 만들어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아담과 이브는 알몸으로도 서로 부끄러운 줄을 몰랐다. 그러나 선악을 구별하게 되면서 옷을 입게 되었다. 과연 인류는 어떻게 세상을 선악으로 구별하게 되었을까? 이것은 자연의 순환에 대한 지식을 바탕으로 한 농경과 목축을 영위하게 된 결과이다.
지금의 농사와 목축도 자연의 조건에 크게 좌우된다. 초보적인 농경·목축 단계에서는 그 영향력이 지대하였을 것이다. 홍수, 가뭄, 이상 기온 등은 농경민 전체의 삶을 좌지우지할 만큼 강력하였으리라. 순조로운 자연의 순환과 삶을 위협하는 자연의 순환을 경험하면서, 인류가 볼 수 없는 세상 저편에서 자연을 순조롭게 운행하는 선한 존재와 자연을 흉폭하게 만드는 악한 존재가 있다고 여기게 된 것이다.
이 순간 인류는 역사상 가장 획기적인 변화를 맞는다. 드디어 추상적인 관념을 갖게 된 것이다. 세상의 모든 것을 이분법으로 나누어 보고, 마침내 눈에 보이지 않는 세계조차 선과 악으로 나누는 거대한 이분법(Grand Dichotomy)에 도달한 것이야말로 현생인류의 정신적 원점이라고 할 수 있다. 기독교 문화권에서 볼 수 있는 선한 신과 악마의 대립이 대표적이다.
동일한 이분법은 우리에게도 있다. 음양의 이분법이다. 선과 악의 이분법이 극한 대립을 초래하는 관념이라면, 음과 양의 이분법은 조화와 균형의 이분법이다. 태극기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양의 세력이 강해지다 보면 이미 그 속에서 음이 나타나고, 음이 커지고 있는 중에도 양이 모습을 드러낸다.
우리는 음양의 상호보완적이고 조화로운 대립조차도 원래 나눌 수 없는 하나였다고 생각해 왔다. 동시에 세상을 선과 악으로 극단적으로 나누어 보지 않았다. 선의 건너편에는 불선이 있을 뿐이다. 즉 선의 반대편에 악한 존재가 아니라, 선을 행하지 않거나 선을 행하지 못하는 존재를 상정한 것이다. 그러기에 한 시대 전에는 구걸하는 거지도 “적선합쇼”라는 품격을 갖춘 말을 썼다.
그러나 지금의 우리는 나는 선, 상대는 악이라는 극단적인 이분법에 너무나 익숙해져 있다. 상대가 나와 왜 다른지를 생각하지 않고, 나만 선이라고 확고하게 단정하는 순간 대화와 타협이 설 자리를 잃는다. 조선시대에도 당쟁이 있었고, 그 당쟁이 조선이라는 나라를 좀먹었다고 생각하기도 한다. 그러나 처절한 당쟁의 과정에서도 우리는 군자이고, 상대는 소인이라고 생각하였을 뿐, 선과 악으로 구분하지는 않았다.
어찌 보면, 보수와 진보도 각각 자유와 평등, 그리고 파이 키우기와 파이 나누기 중 어느 쪽을 우선할 것이냐는 정도만 다를 수 있다. 양쪽 모두 중요한 가치이자 과정이다. 어느 한 쪽을 중시한다고 해서, 상대를 악으로 단정해서는 안 된다. 새로운 대통령은 선과 악의 이분법을 넘어서서, 태극기에 그려진 음과 양의 세계, 그리고 나아가 대동(大同) 세계를 만들기를 기대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