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진영을 넘어, 다시 민주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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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보경 인제대 자유전공학부 부교수

작년 여름, 우리 대학 독서토론대회 도서로 민주주의 위기를 다룬 책을 제안했다. 책은 선정되지 않았지만, 그 제안은 교육 현장에서 민주주의 재건을 공론화해야 한다는 절박한 문제의식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그 무렵 나는 양당 정치에 대한 깊은 회의 속에서 진영 정당을 탈출해 제3지대 정치를 모색하고 있었다. 여당의 일방통행 폭정에 못지않게 야당의 팬덤 정치와 반민주적 작태 또한 시민으로서, 교육자로서 도저히 용납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그리고 겨울, 반헌법적인 12·3 계엄이 선포되었다. 의원들이 국회로 몰려들었고 시민들도 국회 밖에서 밤새 촛불을 밝혔다. 계엄은 몇 시간 만에 해제되었다. 많은 사람들이 그것을 ‘빛의 혁명’, ‘민주주의의 승리’라고 환호했다. 그러나 나는 전적으로 동의하기는 어려웠다. 이것이 과연 민주주의의 승리인가. 내 눈에는 민주주의가 승리한 사건이 아니라, 양당의 극단적 진영정치, 반민주세력 끼리의 충돌이 빚어낸 정치 붕괴의 현장으로 보였다.

올해 4월 4일, 계엄 넉 달 만에 대통령이 파면되었다. 며칠 뒤 교수노조에서 ‘새로운 공화국을 향한 시국선언’ 참여를 독려하는 메일이 왔다. 나는 1987년 체제를 넘어 제7공화국을 수립해야 한다는 대의에 적극 동의하면서도, 이의를 제기했다. 첫째, 헌법재판소 결정문에도 명시된 거대 야당의 의회독재 문제를 외면하고 있다. 둘째, 야당을 민주주의 수호세력으로 상대 진영을 극우 폭동세력으로 단정하는 것은 이분법적 시각이다. 셋째, 민주당 역시 헌정질서 파괴의 공범으로 민주주의 재건의 주체로 볼 수 없다.

그리고 다음의 내용을 포함할 것을 요구했다. 첫째, 이재명 대표와 민주당의 비민주적 행태에 대한 분명한 비판. 둘째, 대선 이전 공정한 재판과 선고 촉구. 셋째, 개헌안에 삼권분립, 헌재·선관위의 정치적 중립성 명문화. 넷째, 다당제 실현을 위한 중대선거구제 도입과 의회독재를 견제할 제도적 장치 마련. 물론 이 답신은 메아리 없는 아우성에 그쳤다. 이후 교수노조에서 탈퇴했다.

6월 3일, 조기대선이 치러지고 새 대통령이 선출되었다. 대선 기간 나는 제3지대에서 독재국가의 탄생을 저지하고 제7공화국을 수립하기 위한 개헌 운동에 시민으로서 참여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성공하지 못했다. 새 정부 출범 이후, 우려는 현실이 되었다. 삼권분립이 무너지고, 사법부 독립이 흔들리며, 언론통제와 입법 독주가 이어졌다. ‘정치 개입’ 프레임으로 대선 이후로 연기된 이재명 대통령의 선거법 재판은 6월 9일, 다시 무기한 연기되었다. 국민 63.9%가 대통령 당선 뒤에도 재판은 계속되어야 한다고 답했었다. 그런데 사법부가 권력 앞에 스스로 무릎을 꿇은 것이다.

브레이크 없는 절대권력, 무소불위 독재국가가 현현되는 모습을 실시간으로 목도하며, 나는 1987년 ‘독재 타도, 호헌 철폐’를 외치던 거리 한가운데 다시 내던져진 듯한 현기증과 고통을 느끼고 있다. 이번에는 총칼도 군화도 없다. 그 대신, 더 정교하고 교묘한 방식으로, 법과 제도를 무기 삼은 ‘합법적 탈민주주의’가 민주주의를 오염시키고 압살하고 있다. 더 두려운 것은 많은 사람들이 이 민주주의 난장판을 위기로 인식하지 못하거나 오히려 정치 효능감을 만끽하며 상찬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나는 민주주의에 인사를 건넨다. 이 인사가 민주주의의 건재함을 기뻐하는 축사가 될지, 민주주의의 종언을 알리는 고별사가 될지는 아직 알 수 없다. 그것은 거리에 다시 내던져진 우리가 어떻게 하느냐에 달려 있다. 시작은 미약했지만 끝내 위대했던 역사를 기억한다. 주춤하는 개헌 논의를 다시 추진하면서 1987년 체제를 청산하고 제7공화국을 수립하기 위한 새로운 정치 설계, 진짜 시민운동을 전개해야 한다. 그것은 오로지 진영을 뛰어넘은 시민들의 성찰과 연대 위에서 시작될 수 있다.

민주주의는 스스로 오지 않는다. 부디 시민들의 직시, 지혜, 용기, 그리고 힘찬 연대로 민주주의가 진영의 감옥에서 벗어나 온전한 모습으로 다시 ‘안녕’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란다. 진정한 ‘빛의 혁명’은 그제서야 완수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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