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경진의 기록으로 그림 읽기] 1915년 광화문에서는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110년 전 1915년, 광화문 광장에서는 무슨 일이 있었길래 안중식(心田 安中植, 1861~1919)이 ‘백악춘효’(白岳春曉)(1915)라고 제목도, 풍경도 같은 것 두 점을 그렸을까? 인상파처럼 시간 흐름에 따른 빛을 그린 것은 아닐 것이고. 그해 광화문 광장에서는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안중식은 소림 조석진과 고종황제 40주년 기념 ‘어진도사도감’을 주관한 조선의 마지막 화원이었다. 또 최초 미술 교육기관인 ‘서화미술회’ 화사(교수)로 우리 근대 화단 형성에 크게 기여한 화가이기도 하다. 1919년 3·1운동으로 투옥되었다가 곧 석방되었으나, 건강을 회복하지 못하고 사망하였다. 그러니까 ‘백악춘효’는 그가 식견과 필력이 최고조에 다다랐을 때인 54세 때 그린 작품이다.
‘백악춘효’는 광화문을 중심으로 광장과 경복궁, 백악(북악)산을 그린 수묵담채화이다. 두 점을 거의 비슷하게 그렸지만, 근정전과 경회루는 시점이 다르다. 여름에 그린 작품(왼쪽)은 신록이 우거져서 푸르다 못해 검다. 가을에 그린 작품(오른쪽)은 그 빛을 많이 잃었다. 그런데 어딘지 두 점 모두 쓸쓸함이 묻어난다. 지금 광화문 광장과는 전혀 딴 세상이다. 그때도 서울 중심이었기에 인파가 넘쳐났을 것인데 말이다. 그림에는 적막강산이다. 광화문 현판을 놓고 말 많았던 기억으로 현판을 찾아보니, 글자 없이 비었다. 또 이상한 것은 해태상 하나가 사라졌다. 나무 뒤에 숨었는지 보아도 흔적이 없다. 심전은 수수께끼 같은 그림을 왜 두 점이나 그렸을까. 이를 이해하려면 1915년 일을 알아야 한다.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에서 승리하고, 제1차 세계대전에서 연합군 편에 선 일본은 기세가 등등했다. 그때 우리는 1905년 을사늑약으로 외교권을 박탈당하고, 1910년에는 경술국치를 당해 국적을 잃었다. 이는 일본이 치밀하게 세운 계획을 수행한 결과였고, 1915년 우리를 회유할 야욕을 드러냈다. 그것은 바로 조선 물품을 모아 전시하는 박람회 ‘시정오년기념 조선물산공진회’로, 경복궁에서 열렸다. 9월 11일부터 10월 30일까지 열리는 동안 166만 명이나 다녀갔다. 서울 인구가 15만 명도 안 되던 시절에 일어난 엄청난 행사였다. 육조거리가 있던 광화문 광장에는 일본풍 물품이 넘쳐났다. 경복궁에는 박람회장으로 쓸 이상한 건물이 들어섰다.
심전은 한탄했을 것이다. ‘춘효’(春曉)는 당나라 시대 맹호연이 자연의 삶을 노래한 시 제목이다. 양귀비와 환관에 휘둘려 국정이 문란해져 민심이 어지럽던 시대에 지은 노래였다. 이 제목을 가져다 쓴 뜻을 생각하면, 쓸쓸함이 왜 묻어나는지 알 수 있다. 다시 100년 뒤, ‘2025년 봄에 무슨 일로 광화문 광장이 난리였지’라며 궁금해하지 않을까?
부산현대미술관 학예실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