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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로365] 무사히 어른이 되기를
기록적인 폭염이 연일 계속되는 가운데, 부산에서는 마음을 얼어붙게 하는 비극적인 소식이 곳곳에서 들려왔다. 화재로 어린 자매들이 세상을 떠난 소식이 그 중 하나다. 부모가 일터로 나간 사이 화재로 목숨을 잃은 어린 남매를 애도했던 정태춘의 노래도 벌써 35년 전 이야기다. 믿어지지 않는 현실 속에서 시민들의 충격과 슬픔은 오래 지속되었다. 아직 살아갈 날들이 많이 남은 어린이들이 삶을 제대로 누리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는 사실이 어른으로서 견디기 어려운 슬픔이다. 이 재난이 되풀이되지 않기 위해서 돌봄 사각지대와 주거환경 문제까지 사회적 의제로 해결하고자 하는 움직임이 확대되고 있다.
그러나 비극은 이것으로 끝이 아니다. 아이들이 어른이 되지 못한 채 삶을 잃어버린 또 다른 사건이 얼마 전 부산에서 있었다. 같은 학교 세 명의 고등학생이 스스로 삶을 마감한 사건이 그것이다. 진로 고민과 입시 스트레스, 학교 운영의 구조적 문제 등이 원인으로 거론됐지만, 그 어떤 이유도 이 죽음을 온전히 설명하진 못한다. 가족에게 마지막 사랑을 전할 만큼 다정했던 이들이 정작 자신을 소중히 여기지 못했다는 사실이 안타깝다. 가족과 친구, 교사들이 겪고 있을 고통 역시 다 헤아리기 어렵다. 문제는 이와 같은 사건이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는 것이다. 사고로부터 아이들을 보호하지 못했다는 사실도 받아들이기 어렵지만, 청소년들이 스스로의 삶을 버리고 있다는 사실 역시 또 다른 종류의 재난이다.
우리는 이미 숫자를 통해 그 심각성을 접하고 있다. 한국은 OECD 국가 중 청소년 행복지수가 가장 낮은 나라인 동시에 청소년 자살률이 가장 높은 나라다. 여성가족부의 발표에 따르면 2023년도 청소년 자살 사망자 수는 인구 10만 명당 11.7명으로 13년째 청소년 사망원인 1위로 꼽히고 있다. 청소년의 자해·자살 입원율은 10년 새 86.7% 증가했고, 여자 청소년이 남자 청소년의 4배에 이르렀다. 한국 청소년의 학업 성취도는 선진국 최고 수준이지만 정신 건강 지표는 최하위권이다. 유엔아동기금(UNICEF) 아동연구조사기관인 이노첸티연구소가 지난달 발표한 보고서에 따르면 한국 아동의 종합적인 복지 실태는 36개 국 중 27위를 차지해, 역시나 하위권에 머물렀다.
교사단체와 시민단체는 청소년의 자살이 사회적 타살이며, 우리의 과도한 입시경쟁중심 교육체제가 한계에 달했음을 지적한다. 청소년의 삶이 얼마나 위태로운지, 교육이 이들에게 안전한 울타리가 되고 있는지 근본적인 점검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나종호 예일대 정신의학과 교수 역시 학벌 혹은 성공 등에 대해 획일화한 이상적 기준이 존재하고 그런 잣대가 문화 전반을 지배하는 사회일수록 줄 세우기가 쉬워지고, 끊임없이 비교하는 사회에선 열등감을 크게 느낄 수밖에 없다고 지적한다.
통계에 따르면 지난해 말 기준 한국 중고등학생의 47.3%가 학업이나 성적 때문에 불안하거나 우울하다고 답했다. 청소년 고민 상담의 유형으로는 정신건강과 대인관계가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반면 학령인구는 줄었지만 사교육비는 30조 원을 넘어서고, 4세 고시, 7세 고시, 초등 의대반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과도한 조기 사교육이 벌어지고, 향정신성의약품인 ADHD 치료제가 공부 집중력에 좋다는 이유로 품절 사태까지 빚는 오늘날 우리 사회의 모습을 보면 ‘교육 지옥’이라는 말이 왜 나왔는지 이해가 갈 정도다.
교육 개혁은 역대 정부의 오랜 화두로, 이재명 대통령 역시 대선 공약으로 ‘서울대 10개 만들기’를 제시했다. 지역의 국립대학에 대한 투자를 확대해 경쟁력을 높여 지방 소멸과 교육위기를 돌파해보겠다는 취지다. 교육을 중심으로 한 지역 발전은 가장 중요한 정책적 수단이기에 장기적인 비전으로 정책이 이어지기를 바란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아이들의 몸과 마음을 돌볼 수 있는 근본적인 정책이 수반되어야 한다. 교육의 현장에 막상 아이들이 보이지 않는다면 그것만큼 큰 비극은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바람이 분다, 살아야겠다.” 20대에 발견한 폴 발레리의 시 구절은 혼란스러운 10대 시절을 위로했다. 청소년기는 누구에게나 복잡스럽고 혼란한 시기로, 김소영 작가의 말처럼 마음이 골짜기를 지나고 산마루도 오른다. 그러나 지금의 한국을 살아가는 청소년들이 처한 상황은 재난상황임을 기억해야 한다. 이들이 살아갈 수 있도록 학교를, 지역을, 제도를 바꿔야 한다. 더 이상 아이들을 잃을 수 없다는 간절함이 우리 사회와 정책에 무엇보다도 필요하다. 아이들이 스스로의 존재를 긍정하고 삶을 살아갈 수 있기를, 혼란스러운 시간을 지나 무사히 어른이 되기를, 그저 바람이 불어서, 살아야겠다고 생각해주기를 간절히 바란다. 그런 마음을 먹도록 만드는 것은 무엇보다도 어른들의 몫이다.
2025-07-09 [17: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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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로365] 국민의힘, '차출 정치' 관행 끊어야
이재명 대통령의 시작은 제법 성공적인 걸로 보인다. 한국갤럽이 지난달 27일 공개한 정기 여론조사에 따르면 이재명 대통령 직무수행 긍정 평가 여론은 64%(부정 평가 21%)를 기록했다. 대선 당시 득표율인 49.4%를 훌쩍 웃돈다. 부산·울산·경남에선 56%의 응답자가 “잘하고 있다”, 29%가 “잘못하고 있다”고 답했다. 이 대통령의 거친 캐릭터에 반신반의하던 중도층 지지율도 높아졌다. 상법 개정, ‘민생회복 소비쿠폰’ 지급 등 민생·경제 이슈를 속도감 있게 밀어붙인 게 영향을 끼친 걸로 보인다. 인사에서 일부 논란이 있긴 하지만, 전반적으로 현재까지는 큰 잡음이 없는 편이다. 인사든 정책이든 기존에 예상됐던 데서 크게 벗어나지 않은 까닭이다.
국민주권정부의 안정적 출발은 처음부터 좌충우돌했던 3년 전과 대비된다. 윤석열 정부는 출범 전부터 대통령실 이전 문제를 놓고 혼선을 빚었다. 그는 원래 ‘광화문 대통령 시대’를 약속했었다. 현실적인 여건이 녹록지 않았다. 그러자 느닷없이 서울 용산에 있는 국방부 청사가 대안으로 떠올랐다. 윤 전 대통령의 고집에 국군은 졸지에 방을 빼야 하는 신세가 됐다. 어디 대통령실 이전만 그랬나. 초등학교 5세 입학, 수능 킬러문항 폐지, 홍범도 장군 흉상 이전 등 그의 임기 3년은 예측할 수 없는 국정 운영으로 점철됐다. 비상계엄은 클라이맥스였다.
권성동 전 국민의힘 원내대표는 지난달 12일 퇴임 기자회견에서 “지금도 왜 계엄을 했는지 이해할 수가 없다”고 했다. 윤 전 대통령이 오랫동안 정치에 몸담은 인물이었다면 이렇게 예측 불가능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입당한 지 4개월 만에 제1 야당의 대통령 후보로 선출됐고, 다시 4개월 지난 2022년 3월 대통령에 당선됐다. 정계에 데뷔하고 대통령이 되기까지 1년이 채 걸리지 않았다. 그가 어떤 사람인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주변에 누가 있는지 알기 어려웠다. 국민의힘은 스스로 비상계엄과 탄핵이라는 불확실성을 초래한 셈이다.
보수 정당은 예전부터 외부 전문가를 영입하는 식으로 인물을 충원해 왔다. 김영삼·이회창 등 당의 리더들은 이른바 ‘YS 키즈’, ‘이회창 키즈’를 영입, 이들을 당 쇄신의 밑거름으로 삼았다. 1990년대 후반 영입돼 오랫동안 당내 소장파로 활약한 ‘남원정(남경필·원희룡·정병국)’이 대표적이다. 외부 인재를 차출해 오는 건 기성 정치에 물들지 않은, 새 피를 수혈한다는 의미가 있다. 하지만 거기에도 정도가 있다. 위기를 맞을 때마다 바깥에서 답을 찾는다면 당 구성원들의 사기는 저하될 수밖에 없다. 외부에서 넘어온 사람들은 그들 나름대로 현실 정치에 적응하느라 황금 같은 시간을 허비한다. 인적 구성의 교체가 잦아지면 유산은 계승되지 못하고 단절된다. 보수 정당이 선거 때마다 빅텐트를 외치고 뜨내기 리더를 옹립하는 건, 역설적으로 그런 일이 반복되면서 남아있는 인재풀이 메말라 버렸기 때문이다.
더불어민주당의 인재 시스템은 국민의힘과 비슷한 듯하면서도 다르다. 기본적으로 민주당 근처에는 ‘상비군’이 많다. 2000년대 초반, 86세대 운동권 인사들은 언제든 차출돼 정치 현장에 투입될 수 있는 상비군들이었다. 이들에게서 더 이상 데려올 인물이 없어질 즈음엔 시민단체들이 그 역할을 대체했다. 같은 교수·변호사라 하더라도 오랜 세월 시민단체 활동을 통해 정치 근방에서 훈련된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 사이에는 정치에 대한 이해도나 추진력 측면에서 차이가 날 수밖에 없다. 2016년 제20대 총선 이후 계속되고 있는 더불어민주당의 전성기는 비단 국민의힘 대통령들의 연이은 탄핵 때문만이 아니다. 어떻게 보면 탄핵이라는 결과 자체가 국민의힘의 취약한 인적 토대에서 비롯된 측면이 있다.
1990년 3당 합당은 보수 정당의 압도적 우위 구도를 가져왔다. 신한국당·한나라당 때처럼 이들이 한국 정치를 주도하는 위치에 있을 땐 굳이 사람을 키우지 않아도 됐었다. 보수 정당으로 인물과 자원이 쏠렸기 때문이다. 이제는 상황이 달라졌다. 보수 정당의 지역적 기반은 점점 좁아지고 있다. 지지층의 인구학적 특성 역시 갈수록 불리해지는 중이다. 다른 무엇보다 총선에서 연달아 3번을 깨지고 대통령이 두 번 연속 탄핵당한 정당이지 않은가. 명망가가 총선을 앞두고 정당을 선택한다고 했을 때, 우선순위 앞에 놓이는 정당은 국민의힘이 아닌 더불어민주당이 될 가능성이 높다. 당장 수도권도 험지라며 기피하고 전통적 우호적인 부산·울산·경남 지역 지지율에서도 앞서지 못하는 정당에 누가 오려 하겠나. ‘차출 정치’의 관행을 끊고 내부에서 사람을 키우지 않는다면, 국민의힘이 겪고 있는 비상 상황은 언제든 다시 반복될 것이다.
2025-07-02 [17: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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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로365] 디지털 트윈으로 그리는 부산의 미래
매일 아침 출근길, 우리는 복잡한 교통 흐름 속에서 하루를 시작한다. 갑작스러운 폭우나 예기치 않은 땅꺼짐 현상에 도심 기능이 마비되지는 않을까 걱정하고, 늘어나는 에너지 소비와 기후 변화로 인한 환경 문제에도 깊은 고민에 잠기게 된다. 이렇게 복잡하게 얽힌 현대 도시의 문제들, 과연 기존의 방식만으로 해결할 수 있을까? 만약 우리가 사는 도시의 보이지 않는 이면을 들여다보고, 미래를 예측해 선제적으로 대비할 수 있다면? 바로 이 질문에서 디지털 트윈(Digital Twin)의 이야기가 시작된다.
디지털 트윈은 현실의 부산을 마치 쌍둥이처럼 가상 세계에 똑같이 복제하고, 사물인터넷(IoT) 센서와 인공지능(AI), 시뮬레이션 기술을 통해 실시간으로 데이터를 주고받는 ‘살아 있는 디지털 도시’ 시스템이다. 교통량 변화, 전력 사용량, 대기 오염 수치, 지반 침하 위험 감지, 재난 발생 시 최적의 대피 경로 예측 등 도시의 모든 움직임을 실시간 분석할 수 있다. 도시가 ‘보인다’는 것은 문제의 원인을 정확히 진단하고, 새로운 정책이나 개발 사업이 가져올 영향을 미리 시뮬레이션하여 최적의 ‘정밀 처방’을 내릴 수 있다는 의미다.
싱가포르는 ‘버추얼 싱가포르’를 구축해 도시 계획부터 에너지 관리, 전염병 확산 예측까지 폭넓게 활용하고 있다. 일본 도쿄는 ‘프로젝트 플라토(PLATEAU)’를 통해 3D 도시 모델 기반으로 재난 대응 훈련과 자율 주행 실험 등을 진행 중이다. 핀란드 헬싱키는 탄소 중립 도시를 목표로 에너지 사용 최적화에 디지털 트윈을 핵심 도구로 사용하고 있으며, 영국은 여러 분야 데이터를 연결하는 ‘국가 디지털 트윈 프로그램’을 통해 사회 기반 시설 효율성과 복원력을 높이는 혁신을 이끌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 부산은 지금 어디쯤 와 있을까? 다행히 부산은 국내에서 디지털 전환 실험을 가장 선도적으로 추진해 온 도시다. ‘에코델타 스마트시티’는 실시간 물 관리와 AI 기반 에너지 시스템 운영 등 디지털 트윈 기술 구현의 최적 시험장이다. ‘북항 재개발’ 또한 단순한 항만 기능 복원을 넘어, 스마트 항만 물류와 친환경 에너지가 결합된 복합 도시로 변모하는 과정에서 디지털 트윈의 잠재력이 크게 기대된다. 특히 부산은 글로벌 해양 물류 도시이자 기후 위기에 대응해야 하는 연안 도시라는 점에서, 디지털 트윈 기술을 항만 운영 효율화와 재난 예측·대응 강화에 직접 활용하여 그 효과를 체감할 수 있는 최적 조건을 갖추고 있다. 이와 함께 부산시는 부산진구 시범 사업으로 최근 시민 체감형 포털 ‘1365 트윈 부산’을 개설해 골목길 안전과 노후 건축물 관리 등 생활 밀착형 서비스를 제공하며 도시 문제 해결의 정밀성과 신속성을 높여가고 있다.
하지만 성공적인 안착을 위해서는 해결해야 할 과제들도 남아있다. 도시 곳곳에서 수집되는 방대한 데이터의 품질을 높이고, 해킹 등으로부터 안전하게 지키며, 서로 다른 시스템 간에 데이터를 원활하게 공유할 개방형 표준을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 이는 데이터 주권과 시민 신뢰 확보를 위한 제도적 뒷받침도 필요함을 시사한다. 또한, 첨단 기술의 혜택이 모든 시민에게 돌아갈 수 있도록 디지털 격차를 해소하고, 시민들이 기술을 이해하고 활용할 수 있도록 교육과 참여 프로그램도 병행되어야 한다. 나아가 산·학·연·관이 긴밀히 협력하는 ‘디지털 거버넌스’ 구축 역시 필수적이다.
결론적으로 디지털 트윈은 도시를 운영하고 문제를 해결하는 ‘방식의 대전환’을 의미한다. 부산이 이러한 변화를 성공적으로 이끌 수 있다고 믿는 이유는 잘 갖춰진 인프라 때문만은 아니다. 새로운 도전을 두려워하지 않는 부산 시민들의 개척 정신과 역동적인 문화, 그리고 동북아 해양 수도로서의 강점과 풍부한 산업 기반이 시너지를 창출한다면 부산은 기술 중심 도시를 넘어 데이터 기반 도시 혁신의 글로벌 모델로 도약할 수 있을 것이다.
부산에 필요한 것은 기술과 인프라를 넘어 추진력 있는 실행 전략과 명확한 도시 비전이다. 부산시가 중장기 로드맵을 주도하고, 시민, 기업, 학계가 함께 참여하는 공론장을 만들어 사회적 합의를 이끌어낸다면, 디지털 트윈은 도시 혁신과 성장의 핵심 동력으로 자리매김할 것이다.
부산은 지속 가능하고 포용적인 도시로 도약할 준비가 되어 있다. 디지털 트윈은 부산이 미래를 예측하며 대응하는 가장 강력한 수단이자 미래를 여는 열쇠다. 급변하는 시대에 데이터 기반의 도시 전환은 더 이상 선택이 아닌 생존과 성장을 위한 필수 과제다. 지금이야말로 모두가 함께 데이터로 부산의 새로운 미래를 설계하고, 담대한 항해를 시작해야 할 때다.
2025-06-30 [17: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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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로365] 한국만 모르는 디지털 화폐 전쟁
아침에 일어나 커피를 주문한다. 토스페이로 결제하고, 친구에게 밥값을 카카오페이로 보낸다. 점심시간엔 네이버페이로 배달 주문을 마친다. 하루 종일 현금 한 장 만지지 않았지만, 모든 거래가 순식간에 끝난다.
“이렇게 편한데 굳이 스테이블코인(달러, 원화 등 기존 화폐 가치에 연동되는 디지털 화폐)이 왜 필요해?” 최근 한 디지털 금융 포럼에서 나온 질문이다. 충분히 이해할 만하다. 우리는 이미 충분히 디지털 금융 세상에 살고 있으니까. 하지만 이 질문에는 우리가 놓치고 있는 중요한 사실이 숨어있다.
우리가 매일 쓰는 간편결제 시스템을 자세히 들여다보자. 겉으로는 번개처럼 빠르고 매끄럽다. 하지만 그 뒤에선 여전히 전통적인 은행 시스템이 돌아가고 있다. 중앙화된 금융기관들이 층층이 쌓여 있고, 모든 거래는 이들을 거쳐야만 가능하다.
스테이블코인, 중개 기관 없이 정산
해외 송금 혁신·금융 소외계층 기회
미국, 법적 기반 마련 위해 잰걸음
국내, 법안 발의됐지만 초기 단계
부산 블록체인 특구 통해 실험 가능
데이터·경험 쌓은 뒤 전국 확산해야
스테이블코인은 완전히 다른 접근이다. 중개 기관 없이 바로 정산되고, 금융 자체를 코드로 자동화한다. 쉽게 말해 금융을 소프트웨어처럼 설계하고 운영하는 시스템이다. 은행 직원이 승인 도장을 찍는 대신, 스마트 컨트랙트가 자동으로 거래를 실행한다.
이런 맥락에서 미국의 최근 행보는 예사롭지 않다. 지난 6월 미국 상원이 통과시킨 ‘GENIUS Act’를 보자. 민간 기업이 발행하는 스테이블코인에 대해 1대1 자산 담보, 준비금 투명 공개, 소비자 보호, 파산 시 환급 보장 등을 명문화했다. 미국 하원에도 ‘STABLE Act’가 계류 중이다. 두 법안은 조율을 거쳐 통합될 예정인데, 그 전략이 명확하다. 디지털 달러 인프라를 민간 혁신으로 실현하되, 공적 통제는 확실히 하겠다는 것이다.
반면 한국은 이제 막 입법 논의를 시작했다. 민병덕 의원의 디지털자산기본법, 안도걸 의원의 담보요건 법안이 발의됐지만 아직 초기 단계다. 기술도 있고 시장 수요도 있지만, 제도와 정책은 여전히 준비되지 않은 상태다.
그렇다면 스테이블코인이 도대체 왜 필요할까? 세 가지 이유를 들어보자. 첫째, 해외 송금의 혁신이다. 한국에서 일하는 외국인 노동자들은 매달 고향에 돈을 보낸다. 지금은 달러를 거쳐 환전 비용과 중계 은행 수수료를 내야 한다. 하지만 원화 기반 스테이블코인이 있다면? 달러를 경유하지 않고 본국 통화로 직접 송금할 수 있다. 빠르고 싸며, 복잡한 중개 과정이 없다. 금융 혜택이 노동자에게 직접 돌아가는 구조다.
둘째, 금융 소외계층에게 새로운 기회를 제공한다. 신용 점수가 낮거나 은행 계좌 개설이 어려운 사람도 블록체인 기반 금융 서비스를 이용할 수 있다. “은행은 고객을 평가하지만, 블록체인 금융은 프로토콜이 고객을 실행한다”는 말처럼, 기존 금융 시스템이 외면하던 사람들에게 문을 열 수 있다.
셋째, 국가 통화의 디지털 경쟁력이다. 현재 세계에서 가장 많이 쓰이는 스테이블코인은 달러 기반인 USDC와 USDT다. 디지털 세계에서도 달러는 패권을 확장하고 있다. 우리가 원화 스테이블코인을 만들지 못하면, 디지털 경제에서도 원화는 주변부로 밀려날 수 있다.
물론 우려도 있다. 준비금 부실, 투기적 남용, 빅테크 독점 가능성 등 스테이블코인은 분명 양날의 검이다. 테라-루나 사태처럼 잘못 설계된 스테이블코인이 폭락하며 시장 전체를 흔든 사례도 있다. 하지만 위험을 이유로 문을 닫는 순간, 기회도 함께 사라진다.
해법은 바로 우리 곁에 있다. 부산 블록체인 특구다. 현재도 이 특구 안에서는 디지털 자산 실증과 스테이블코인 관련 실험이 가능하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점은 시간이다. 국회에서 입법을 통과시키고 중앙정부가 전국적으로 시행하는 일반적인 방식으로는 너무 많은 시간이 흐른다. 그 사이 우리는 골든타임을 놓치게 된다.
디지털 금융은 국경이 없는 전쟁터다. 미국, 유럽, 싱가포르가 빠르게 움직이는 동안 우리만 회의실에서 토론만 하고 있을 수는 없다. 부산 블록체인 특구의 샌드박스 규제는 이런 딜레마를 해결할 열쇠다. 일단 실행하고 문제점을 찾아 보완하는 방식으로 접근해야 한다.
부산에서 시범적으로 원화 스테이블코인을 실증하고, 충분한 데이터와 경험을 쌓은 후 전국으로 확산하는 전략이 바로 그것이다.
한국만 아직 디지털 화폐 시대의 문 앞에 머물러 있다. 편리한 현재에 안주하며 미래를 놓칠 것인가, 아니면 새로운 금융 질서의 주역이 될 것인가. 선택의 시간이다. 그리고 그 시작점은 바로 부산이 될 수 있다. 바다를 바라보며 새로운 항로를 개척해 온 부산의 DNA가, 이번에는 디지털 금융의 새 항로를 여는 열쇠가 될 수 있다.
지금이 바로 그 문을 열어야 할 시간이다.
2025-06-25 [18: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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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로365] 선악과(善惡果)와 선과 악
구약성경에 아담과 이브가 뱀의 유혹을 받아 선악과를 따먹고, 선과 악을 알게 되었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이 일로 아담과 이브는 에덴동산에서 쫓겨났고, 하느님은 영원한 삶을 누릴 수 있는 생명나무 열매를 그들이 따먹지 못하게 했다고 한다. 둘은 카인과 아벨을 낳았으며, 카인은 밭을 가는 농부가 되었고 아벨은 양을 치는 목자가 되었다. 이러한 성경의 내용은 종교적 관점이 아니라 역사학의 관점에서 보면 인류 역사에 대한 은유이다.
우리의 단군신화도 역시 역사적 은유이다. 곰과 호랑이는 동물에 대한 토템신앙을 보여주고, 신석기 단계를 가리킨다. 하늘에서 풍백, 우사, 운사를 거느리고 내려온 환인은 청동기와 농경문화를 가진 우월한 집단을 상징한다. 단군신화가 신석기에서 청동기 단계로 변화하는 과정을 보여주는 것이라면, 에덴동산이라는 낙원을 상실한 이야기는 인류가 채집, 수렵, 어로의 구석기 단계에서 농경과 목축의 신석기 단계로 이행하는 과정을 보여주는 셈이다.
아담과 이브는 에덴동산에서 나무 열매를 마음대로 따먹을 수 있었고, 짐승도 잡고 물고기도 잡을 수 있었다. 채집, 수렵, 어로 생활이다. 그러나 에덴동산을 나온 단계에 이르러 그 자식들은 농경과 목축에 종사하게 되었다. 에덴동산이 인류문명의 발상지라고 할 수 있는 티그리스, 유프라테스 지역에 있었다는 사실에 주목하자. 농경이 가장 먼저 시작된 곳이 바로 이곳이다.
실낙원 이야기가 역사적인 사실을 반영하고 있는 것이라면, 선악과도 무엇인가를 은유하고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결론부터 말하면, 선악과가 열리는 나무는 하느님이 심은 것이 아니라, 우리 인류가 선악이라는 개념을 만들어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아담과 이브는 알몸으로도 서로 부끄러운 줄을 몰랐다. 그러나 선악을 구별하게 되면서 옷을 입게 되었다. 과연 인류는 어떻게 세상을 선악으로 구별하게 되었을까? 이것은 자연의 순환에 대한 지식을 바탕으로 한 농경과 목축을 영위하게 된 결과이다.
지금의 농사와 목축도 자연의 조건에 크게 좌우된다. 초보적인 농경·목축 단계에서는 그 영향력이 지대하였을 것이다. 홍수, 가뭄, 이상 기온 등은 농경민 전체의 삶을 좌지우지할 만큼 강력하였으리라. 순조로운 자연의 순환과 삶을 위협하는 자연의 순환을 경험하면서, 인류가 볼 수 없는 세상 저편에서 자연을 순조롭게 운행하는 선한 존재와 자연을 흉폭하게 만드는 악한 존재가 있다고 여기게 된 것이다.
이 순간 인류는 역사상 가장 획기적인 변화를 맞는다. 드디어 추상적인 관념을 갖게 된 것이다. 세상의 모든 것을 이분법으로 나누어 보고, 마침내 눈에 보이지 않는 세계조차 선과 악으로 나누는 거대한 이분법(Grand Dichotomy)에 도달한 것이야말로 현생인류의 정신적 원점이라고 할 수 있다. 기독교 문화권에서 볼 수 있는 선한 신과 악마의 대립이 대표적이다.
동일한 이분법은 우리에게도 있다. 음양의 이분법이다. 선과 악의 이분법이 극한 대립을 초래하는 관념이라면, 음과 양의 이분법은 조화와 균형의 이분법이다. 태극기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양의 세력이 강해지다 보면 이미 그 속에서 음이 나타나고, 음이 커지고 있는 중에도 양이 모습을 드러낸다.
우리는 음양의 상호보완적이고 조화로운 대립조차도 원래 나눌 수 없는 하나였다고 생각해 왔다. 동시에 세상을 선과 악으로 극단적으로 나누어 보지 않았다. 선의 건너편에는 불선이 있을 뿐이다. 즉 선의 반대편에 악한 존재가 아니라, 선을 행하지 않거나 선을 행하지 못하는 존재를 상정한 것이다. 그러기에 한 시대 전에는 구걸하는 거지도 “적선합쇼”라는 품격을 갖춘 말을 썼다.
그러나 지금의 우리는 나는 선, 상대는 악이라는 극단적인 이분법에 너무나 익숙해져 있다. 상대가 나와 왜 다른지를 생각하지 않고, 나만 선이라고 확고하게 단정하는 순간 대화와 타협이 설 자리를 잃는다. 조선시대에도 당쟁이 있었고, 그 당쟁이 조선이라는 나라를 좀먹었다고 생각하기도 한다. 그러나 처절한 당쟁의 과정에서도 우리는 군자이고, 상대는 소인이라고 생각하였을 뿐, 선과 악으로 구분하지는 않았다.
어찌 보면, 보수와 진보도 각각 자유와 평등, 그리고 파이 키우기와 파이 나누기 중 어느 쪽을 우선할 것이냐는 정도만 다를 수 있다. 양쪽 모두 중요한 가치이자 과정이다. 어느 한 쪽을 중시한다고 해서, 상대를 악으로 단정해서는 안 된다. 새로운 대통령은 선과 악의 이분법을 넘어서서, 태극기에 그려진 음과 양의 세계, 그리고 나아가 대동(大同) 세계를 만들기를 기대해 본다.
2025-06-23 [18: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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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로365] 사랑이 끝나고 남은 빚… 법정으로 간 연인들
“그땐 정말 결혼할 줄 알았어요.” 사랑이 끝난 자리에 돈 문제가 남는 것만큼 씁쓸한 일이 또 있을까. 사랑을 속삭이던 연인이 이별 후 원수보다 못한 사이가 되어 법정에서 서로를 할퀴는 모습을 보면, 안타까움을 금할 수 없다. 최근 SNS에는 젊은 연인 사이에 고가 명품을 선물하거나 사업자금을 지원하는 등 ‘통 큰 사랑’을 과시하는 모습이 넘쳐나지만, 그 이면에는 관계 파탄 후 금전 문제로 법원의 문을 두드리는 이들이 많다. ‘사랑’이라는 이름 아래 이루어진 수많은 약속과 금전적 지원이 ‘빚’이라는 현실의 무게로 돌아온 것이다.
문제는 연인 사이에서 금전 거래를 할 때 명확한 서류를 작성하거나 구체적 증거를 남기는 경우가 드물다는 점이다. 서로 사랑하고 믿는다는 이유로 굳이 그런 형식을 취하지 않는 경우가 대다수다. 연인 사이에 오간 돈이 ‘차용’인지 ‘증여’인지를 구별하는 건 사건의 핵심이다. 차용이라면 반환 의무가 있지만, 증여는 그렇지 않은데, 법적 분쟁에서 가장 어려운 부분은 바로 ‘입증책임’이다. 계좌이체 내역이 있으면, 대여 사실을 입증할 수 있다고 생각하면 큰 오산이다. 이체 내역은 돈이 건네졌다는 것만을 입증할 뿐이다. 상대방이 그 돈이 증여나 호의로 준 돈이라고 주장할 때 반박 증거를 제시해야 한다. 법원은 ‘다른 사람의 예금계좌에 금전을 이체하는 등으로 송금하는 경우 그 송금은 소비대차, 증여, 변제 등 다양한 원인에 기하여 행하여질 수 있는 것이므로, 그러한 송금이 있었다는 사실만으로 소비대차에 관한 당사자의 의사합치가 있었다고 쉽사리 단정할 수 없다’는 입장이다. 또한 두 사람이 연인 관계에 있는 남녀 간이라고 하여 금전 수수의 원인을 곧바로 증여라고 단정할 수는 없고, 그 원인이 대여인지 증여인지는 돈을 주고받은 경위와 용도, 당사자들의 경제 사정 및 구체적 생활 관계, 액수, 반환 의사 유무 등을 종합하여 판단하여야 한다고 판시했다.
관계 파탄 뒤 법정 공방 사례 많아
금전 거래 물증 남기는 경우 적고
차용·증여 가릴 증거 제시 쉽지 않아
로맨스 스캠 사기까지 기승 피해 늘어
법원은 송금 메모 등 정황 통해 판단
금품 오고간 기록 남기는 성숙함 필요
필자가 맡았던 사건이 떠오른다. 남자는 여자에게 환심을 사기 위해 많은 선물과 용돈을 줬고, 어느 날 남자는 돈을 불려 결혼 자금으로 사용하자며 여자에게 투자를 권했다. 여자는 남자를 믿고 대출까지 받아 돈을 건넸지만, 수익금을 주겠다는 남자는 소식이 깜깜했고, 알고 보니 투자금은 도박 자금으로 사용되어 결국 그 관계는 파탄이 났다. 여자는 투자금을 돌려달라고 요구했고, 남자는 그동안 줬던 용돈으로 퉁치자고 응수하면서 법정 다툼이 시작된 것이다. 장기간에 걸쳐 두 사람이 주고받은 돈 액수는 비슷했지만, 엄밀히 말하자면 남자가 준 돈은 증여였고, 여자가 준 돈은 투자금이었다. 게다가 도박 자금으로 사용된 그 투자금은 사기 편취금이 되어 형사사건에까지 나아가게 되었다.
법원은 문자, 송금 메모, 통화 녹취 등 주변 정황을 통해 실제 의사를 판단한다. “나중에 꼭 갚아줘”, “이건 빌려주는 거야” 같은 표현이 있었다면 반환의 가능성이 더 높게 인정된다. 반대로 기념일, 생일, 이벤트 등 특별한 날에 보내진 금전이나 선물은 증여로 인정될 가능성이 높다. 그 외에도 교제 기간, 금전의 규모, 경제력 차이 등도 고려 대상이다. 명의신탁 문제도 복잡한 쟁점이다. 차량을 연인 명의로 등록하거나, 공동 창업을 하며 한 사람 이름으로 사업자 등록을 해두는 경우, 관계가 틀어진 뒤엔 실소유권을 놓고 법적 다툼이 불가피해진다. 단순히 “돈은 내가 냈다”는 말만으로는 부족하다. 거래 내역, 명의자와의 문자, 사용 권한 등이 모두 입증 자료로 활용되어야 한다.
최근에는 연애 감정을 악용하는 ‘로맨스 스캠’ 사기 범죄까지 기승을 부리면서, 순수한 마음을 이용당하는 피해자들이 더욱 늘고 있다. 사랑과 사기의 경계가 모호해지는 씁쓸한 세태다. 법정에서 만난 전 연인들은 종종 이렇게 말한다. “그땐 서로 믿었으니까요.” 하지만 법은 믿음을 요구하지 않는다. 법은 증거를 요구한다. 그래서 연인 사이에도 ‘기록’이 필요하다. 반드시 차용증까지는 아니더라도, 문자나 이체 메모 같은 작은 흔적이 큰 역할을 할 수 있다. 사실 사랑하는 사람에게 돈을 건네면서 메모를 남긴다는 건 다소 삭막하게 느껴질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이 신뢰를 지키는 방법일 수도 있다. ‘혹시 헤어지면 어쩌지?’라는 불안감에 차용증을 쓰는 것이 아니라, ‘혹시 모를 상황에서 서로에게 부담을 주지 말자’는 성숙한 배려의 표현으로 인식을 전환해야 한다.
사랑이 끝나면, 감정은 사라지지만 돈거래는 남는다. 남은 돈을 두고 다시 법정에서 마주하게 되지 않으려면, 감정과 거래는 분리되어야 한다. 감정으로 맺어진 관계라도, 돈이 오간다면 그 순간부터는 기록이 필요하고, 그 끝이 법정에서 가려질 수 있다는 것을 우리는 인정해야 한다. 법정에선 감정보다 증거가, 믿음보다 문서가 더 큰 힘을 가진다.
2025-06-18 [18: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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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30 칼럼] 국민주권이라는 법의 정신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 기술한 헌법 제1조 2항은 대한민국이 국민주권 국가임을 분명하게 밝히고 있다. 주권은 국가의 의사를 결정하고 질서를 유지하는 궁극적인 권위를 나타낸다. 이러한 권위를 국민에게 귀속함은 국가의 주인이 국민임을 말하는 것과 다름없다. 주권은 공(公)법에 속하고 주인이라는 것, 혹은 그러한 소유권은 사(私)법에 속하기에 법학에서 둘은 엄밀히 구분된 영역이다. 그러나 ‘배제’하는 권리라는 궁극적 속성에서 둘은 공통점을 가진다. 즉, 주권과 소유권은 권리자 외에 타자를 배제함으로써 지배권의 행사가 성립한다.
지배란 자신의 의사를 강제하는 행위다. 반대로 지배받는다는 것은 내 의사가 아닌 의사를 강제받는 것이다. 우리는 누구도 예외 없이 법의 지배를 받는다. 법치는 법의 의사를 모두에게 강제하고 모두가 법 앞에서 평등해지는 강제행위다. 국민뿐만 아니라 국가도 법의 지배를 받는다. 국가의 의사를 강제하는 행위가 법에 근거하지 않을 때 국가의 지배는 불법으로 정당화될 수 없다. 강제하는 행위는 합법적일 때에만 정당한 지배라고 인정된다.
주권이 국민에게 있는 대한민국
국가는 국민들의 공동소유 대상
누구도 특권적 국가 소유 안 돼
삼권분립도 국민이 위임했을 뿐
국민주권 대상서 타국민은 배제
따라서 '식민지배=불법' 성립돼
지배는 물건에 대하여 지배관계를 정하는 물권과 연관 지어볼 수 있다. 본 글에서는 물권 중 소유, 점유, 공유라는 개념구분을 살펴보려 한다. 점유권을 적극적으로 해석하는 영미법 체계에 근거하여서 대륙법 체계 구분과 약간 다를 수 있다. 소유는 물건을 전면적으로 지배하는 것이며 점유는 물건을 사실상 지배하고 있는 상태다. 공유는 2인 이상이 한 물건을 공동으로 사용하고 있는 경우다. 예컨대 볼펜이 하나 있다고 하자. 볼펜이 나의 것이고 내가 사용하고 있다면, 볼펜은 나의 소유물이다. 나의 볼펜을 사실상 철수가 사용하고 있다면, 볼펜은 철수의 점유물이다. 나와 철수가 볼펜을 함께 사용하고 있다면, 볼펜은 나와 철수의 공유물이다.
소유권은 물건을 사용, 수익, 처분할 수 있는 전면적인 지배권리와 함께 소멸시효가 없는 항구적인 권리다. 점유권은 물건, 영역, 지위 등을 실질적으로 차지한 상태로부터 파생된 권리이며 점유기간에 한하여 인정된다. 공유권은 지배권을 공동으로 가지기에 특정한 권리자가 독점할 수 없다. 세 지배형태에서 구분되는 개념적 특징을 참고삼아 국민주권의 의미를 해석해보면 흥미로운 논의가 열린다.
국가의 주인은 국민이다. 그런데 어떤 국민을 말하는가. 한 국가의 개별적인 국민 한 명도 국민이고 국가의 모든 국민을 묶은 추상집합적 국민도 마찬가지로 국민이다. 개별 국민과 집합 국민, 두 국민의 공통점이 있다면 국가를 소유하지 않는 국민이라는 것이다. 개별 국민과 집합 국민은 모두 국가의 실질적인 주인으로서 점유권자다. (동시에 대륙법 체계상 점유를 정당화하는 법률권리인 본권을 가지기에 제한물권에도 해당한다.) 또한 국가를 공동으로 소유함으로써 누구도 특권을 가지고 독점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공유권자다. 전면적이고 항구적인 지배형태로 국가를 소유하는 무언가 존재한다면 아마도 그것은 국가를 언제라도 지배하는 오직 법뿐일 것이다.
〈법의 정신〉에서 몽테스키외는 법을 ‘사물들의 본성에서 생기는 필연적인 관계’라고 정의한다. 헌법이 국가의 본성에서 생기는 필연적인 관계라면 민주공화국의 본성은 누구에게도 소유되지 않으며 항상 점유되고 공유된다는 점이다. 특정 주체가 국가에 대한 소유를 말할 때 이는 법의 정신에 어긋난다. 예컨대 선출권력이 국민의 이름으로 국가에 대한 전면적인 지배를 주장할 때 이는 오히려 불법이 된다. 민주주의를 실현하기 위한 제도인 삼권분립은 입법부, 행정부, 사법부로 구성된 권력이 동등하게 국가권력을 공유하고 있는 제도로서 공동의 지배권을 가지기에 상호 견제할 수 있다. 권력의 선출과 임명 역시 국민이 위임한 점유권력이다.
민주정의 지배관계는 국가에 대한 소유권을 지우고 국민에게 점유권과 공유권을 부여함으로써 모든 국민을 주인으로 만든다. 〈통치론〉에서 로크가 국가를 시민사회의 ‘수탁자’로 구상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신탁계약의 세 주체인 위탁자, 수탁자, 수익자를 떠올려보면, 최초의 건국자(사회계약 설정자)를 위탁자로, 국가를 수탁자로, 건국 이래 모든 국민을 수익자로 고안한 것이다. 신탁에서 법적 소유권을 갖는 수탁자는 국가 자체로 하고 수익자인 국민에게 실질적 소유권인 점유권과 공유권을 부여한 것으로 해석하면 누구도 독점하지 않기에 모두가 주인이 된다.
한편 국가의 주인이 국민이라는 것은 자국민과 타국민을 구분하고 권리자 외에 타자를 배제함으로써 지배권 행사를 자국민으로만 한정한다. 따라서 국가에 대한 타국민의 지배를 주권침해로 판단하고 식민지배가 불법이 된다는 점에서도 국민주권은 국가의 주인이 국민임을 명시한다.
2025-06-16 [1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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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로365] 글로벌허브 도시와 문화적 접근
대통령 선거가 끝났다. 이제는 소란과 정쟁을 멈추고, 국가와 지역발전을 위한 여러 정책을 차분히 추진할 때다. 오늘은 지난해 1월 21대 국회에서 최초 발의되고 올 5월에 22대 국회 개원과 함께 재발의된 ‘부산 글로벌허브 도시 조성에 관한 특별법’(이하 특별법)의 앞날과 그 접근법을 걱정해보고 싶다. 특별법은 국회의 비협조로 제대로 논의조차 되지 못하고 계속하여 국회에 계류 중이다. 이 법은 민주당의 ‘부울경 메가시티 조성계획’안이나 대통령 선거 과정에 불쑥 불거진 ‘북극항로 개척 추진’안에 밀려 법안 자체가 아예 ‘휴지 조각’ 신세가 될 수도 있다. 혹은 지금까지의 여야 대치 국면을 고려해볼 때 크게 기대를 걸 바는 아니지만, 혹여나 특별법안의 큰 틀 안에서 메가시티와 북극항로가 대승적으로 조화를 이루는 상생 국면이 조성될 수도 있을 것이다.
특별법은 우선 물류, 금융, 첨단산업 3개 분야에서 각종 특례 제도를 적용하고 특구와 투자 진흥지구를 지정함으로써 부산에 글로벌허브 도시 조성을 위한 거점 기반을 확충하겠다는 것이다. 이어 교육 환경, 생활 환경, 글로벌 문화관광 환경 등 도시의 정주 환경을 싱가포르, 두바이, 뉴욕, 로테르담, 도쿄 수준으로 끌어올리겠다는 계획이다. 이렇게 되면 저출생, 고령화, 청년 인구의 유출로 야기된 부산의 구조적 위기도 어느 정도 개선되고, 남부권 거점도시의 발전에 따른 지역 균형발전도 같이 도모할 수 있다고 한다.
특별법 통과에 공을 들이고 있는 ‘글로벌허브 도시 범 여성 추진위원회’의 부산포럼에 초대되어 ‘글로벌허브 도시 부산과 문화 간 소통능력’이라는 주제로 강연을 하고 왔다. 많은 분이 도시와 문화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 주셨지만, 포럼이 열린 부산진구 양정의 부산 시민운동 지원센터를 나오면서 드는 생각은 “여기서도 경제적 관점이 압도적으로 대세구나!”라는 느낌이었다. 상공회의소와 부산시 관광협회, 한국 국제물류협회와 어느 정당 주최로 지난 4월 부산광역시 의회 대회의실에서 ‘글로벌허브 부산 특별법’ 대토론회가 있었다. 거기서도 마찬가지였다. 발제나 토론이나 부산의 국제금융, 국제물류, 디지털 첨단산업의 육성을 위한 특례 얘기만 가득했다. 관광산업 육성을 제외하곤 특별법에서 담고 있는 교육과 생활환경 선진화 이야기마저 거의 나오지 않았다. 말하자면 경제적 관점과 접근법에 압도적으로 밀려 문화적 관점, 문화적 담론은 특별법 논의에서 거의 배제되고 소외되어 있다는 게 필자의 시각이다.
문화는 그 도시의 얼굴이며, 품격이다. 문화가 바다라면, 경제는 그 바다에서 노니는 물고기에 비유할 수 있겠다. “경제적 관점과 논의만으로 우리가 바라는 수준 있는 부산, 글로벌허브 도시로서의 부산을 이룰 수 있을까?” “안정적이고 지속적인 도시 발전이 경제만으로 담보될 수 있을까?”라는 문제의식이 어디를 가나 항상 머릿속을 맴돈다. 글로벌허브 도시 부산은 21세기의 시대 과제에 맞추어 이질적인 문화 간의 소통능력이 고도화되고, 자기중심성과 우월성이 자취를 감추며, 세계인과 편견 없이 쌍방향으로 소통하는 다중문화 공동체로서의 부산이었으면 한다. 부산일보 논설실장을 역임한 임성원 박사(예술학)는 저서 〈미학, 부산을 거닐다〉에서 부산의 미적 특성으로 혼종성, 역동성, 저항성 등을 꼽는다. 대한민국의 다른 도시는 몰라도 부산은 방향만 잘 잡고 시민 합의와 정책 지원이 이를 잘 뒷받침하면 국제도시로 도약할 수 있다. 다른 것을 하나로 섞을 줄 아는 힘, 그리고 새로움을 향한 강한 열정과 저항 정신으로 새로운 다중문화 공동체를 건설할 수 있다고 본다. 마르크스는 “생산 관계와 생산력의 모순이 세계의 토대이며, 법이나 종교 혹은 계급 문화 등은 그 토대가 만들어낸 상부 구조다”라고 했다. 필자는 거시경제와 사회문화의 상호 관계에 관한 한, 거꾸로라고 본다. 도시 문화가 토대이며, 물류, 첨단산업, 금융 등은 그 공동체 문화 위의 상부 구조라고 생각한다. 정권이 바뀌어 ‘부산 글로벌허브 도시 조성에 관한 특별법’이 앞으로 어떠한 운명을 맞을진 알 수 없다. 그러나 얼마 전 이 특별법 통과에 시민 100여만 명이 순식간에 서명한 이상, 그 논의는 끊임없이 이어나가야 할 것이다. 이때 기존의 이야기와 함께 문화 이야기도 무성했으면 좋겠다. 자리만 폈다 하면 물류, 금융, 첨단산업 얘기뿐이다. 이젠 더 시야를 넓혀 도시의 열림, 다양성 추구, 시민 국제의식의 선진화 방안, 비판적 저항적 다중문화 사회의 구현, 제3의 도시문화창조를 통한 경제 활성화 이런 이야기도 같은 비중으로 다루어졌으면 한다. 문화적 안목과 수준이 부산 경제를 더욱 안정적이고 장기적으로 받쳐줄 것이기 때문이다.
2025-06-11 [18: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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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로365] 신정부의 외교·안보 정책과 선결 과제
지난 6월 4일, 내란 종식과 민생 회복을 내걸고 대선에서 승리한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후보가 대한민국 제21대 대통령에 취임했다. 그는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14번째 대통령이며, 1987년 민주화 이후 4번째 진보 진영 출신 대통령이다. 이재명 대통령의 당선은 단순한 정권 교체를 넘어, 윤석열 전 대통령의 비상계엄으로 흔들렸던 헌정 질서를 복원하고, 이번 조기 대선에서는 8.27%포인트에 달하는 확실한 승리를 거둠으로써 진보 진영의 정당성을 재확인했다는 데 의미가 있다. 또한 기득권과 거리가 먼 소년공 출신이라는 입지전적 배경은 한국 사회에 새로운 지도자상을 제시한다. 따라서 이 대통령의 책무는 정치 혼란과 사회 갈등을 해결해 ‘이제부터 진짜 대한민국’을 구현하는 데 있다.
국회의사당 로텐더홀에서 행한 취임사에서 이 대통령은 “진보도 보수도 아닌, 국민 중심의 실용 정부”를 내걸고 ‘모두의 대통령’으로 민생과 경제 회복을 최우선 과제로 제시했다. 외교·안보 정책과 관련해서는 국익 중심의 실용 외교를 통해 글로벌 경제·안보 환경의 대전환이라는 위기를 오히려 국익 극대화의 기회로 만들고, 굳건한 한미동맹을 토대로 한미일 협력을 다지면서 주변국과의 관계도 국익과 실용의 관점에서 접근하겠다고 언급했다. 즉 한미동맹을 중심으로 미국과의 관계를 더욱 강화하고 일본과는 경제·안보 분야에서는 협력하되 과거사 문제는 피해자 중심주의에 입각해 해결하겠다고 밝혔다. 중국과는 경제와 안보를 분리하면서 전략적 소통을 확대하고, 우크라이나 전쟁과 관련한 국제사회의 대러시아 제재에는 참여하되 동시에 러시아와의 실무 대화도 지속하겠다는 것이다. 북한에 대해서는 ‘싸울 필요 없는 평화가 가장 확실한 안보’라는 인식에 입각해 세계 5위의 군사력과 굳건한 한미군사동맹을 기반으로 북핵과 군사도발에 대응하면서 동시에 대화의 문도 열어두겠다는 입장이다. 이러한 이 대통령의 외교·안보 정책 기조는 한미동맹을 우선시하면서도 한국 외교의 자율성을 넓히고자 애써 온 역대 민주당 대통령들의 외교·안보 정책 계보를 이으면서도 악화일로에 있는 국제 정세 속에서 한국의 국익을 최대화하려는 유연하고도 전략적인 정책이라고 평가할 수 있다.
이재명 정부가 출범 후 직면한 첫 번째이자 최대 외교 현안은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전 세계를 대상으로 촉발한 관세 협상이다. 이 대통령이 취임하자, 백악관은 축하에 앞서 대선이 자유롭고 공정하게 치러졌다고 평가하면서 중국의 민주주의 간섭 가능성에 우려를 나타냈다. 이어 미 국무부는 한미일 3자 협력을 한층 심화시키겠다고 표명했다. 대통령 후보자 시절의 “셰셰(謝謝)” 발언으로 형성된 이 대통령의 대중 친화적 이미지에 견제구를 넣은 것이다. 그로부터 이틀 뒤인 6월 6일 밤 트럼프 대통령은 이 대통령과 첫 통화를 하고 관세 협상의 조기 재개와 관세 유예 조치 마지막 날인 7월 8일까지의 협상 타결 그리고 견고한 한미동맹을 확인했다. 이와 함께 유세 당시의 피습 경험을 공유하면서 자신의 최애 취미인 골프 라운딩을 제안하고 방미를 초청했다. 트럼프식 정치·전략적 메시지를 보낸 것이다. 중요한 점은 ‘7월 패키지’로 불리는 한미 관세 협상이 단순한 관세 조정을 넘어 경제와 안보를 연계한 복합 패키지 협상이라는 사실이다. 따라서 이재명 정부는 국익 실현뿐만 아니라 안정적인 정국 운영을 위해서도 단기적 관세 완화는 물론, 미국과의 신뢰를 강화하면서 글로벌 경제 변화에 대응하는 포괄적 성과를 반드시 확보해야만 한다.
이어 한국의 평화 안보와 직접 관련된 북한과의 관계 설정이다. 이미 김정은 정권은 남북 관계를 국가 간 관계로 설정하고 교류를 단절하겠다는 입장을 취해 왔다. 그리고 이 대통령에 대해서도 당선과 취임 소식을 조선중앙통신 등 국영 매체를 통해 짧게 보도하는 신중한 기조를 유지하고 있다. 그러나 이 대통령은 군사력에 의한 억제와 대화의 병행에 입각해 단계적 비핵화와 실무 채널의 우선적 복원을 제기하고 있다. 다만 북한과 대화를 개시하고 또 북미정상회담이 재개될 경우 한국이 참여하기 위해서는 북한이 주장하는 두 개의 국가 관계를 심도 있게 논의할 필요가 있다. 설문조사에 따르면 이미 70%의 국민은 남북한 국가 간 관계를 선호하고 있다.
이처럼 역대 정부와 마찬가지로 이재명 정부의 외교·안보 정책 역시 미국을 전략적 고정축으로 북한을 안보와 평화의 보조축으로 해 전개될 수밖에 없다. 따라서 “안보와 번영을 동시에 확보하는 실용 외교”가 단순한 수사로 끝나지 않고 현실적 성과를 내기 위해서는 미국은 물론 북한과의 안정적인 관계 구축을 선결적으로 이루어야 할 것이다.
2025-06-09 [17: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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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로365] 디지털 자산, 정책 변화 기대한다
제21대 대통령 선거가 막을 내렸다. 이번 대선은 정치적 의미를 넘어 블록체인 기술이 꽃피우는 디지털 자산 분야에 대한 대선 주요 후보들의 긍정적 태도가 두드러졌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주요 후보들이 모두 디지털 자산 관련 공약을 핵심 어젠다로 제시한 것은 가상자산이 더 이상 일부 투자자들의 투기 수단에 머무르지 않고 국가 경제의 전략적 자산으로 인식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는 디지털 자산이 금융, 산업, 기술, 국제무역 등 다양한 분야에서 본격적으로 제도권에 편입될 수 있는 전환점임을 의미하며, 향후 수년간 한국이 글로벌 가상자산 허브로 도약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할 수도 있다. 이러한 흐름은 미국 트럼프 정부 시기의 정책 변화와도 맥락을 같이한다는 점에서 정치권의 이러한 변화가 단순한 우연이라고 보기 어렵다.
그동안 디지털 자산 시장은 법적 불확실성과 정책 공백 속에서 과세, 투자자 보호, 거래소 규제 등의 문제로 혼란을 겪어왔다. 특히 중앙정부 차원의 통일된 정책 부재는 지역 단위의 실험과 성과 확산을 제약하는 주요 요인이었다. 하지만 이번 대선에서 여야 후보들이 앞다퉈 디지털 자산 기본법 제정, STO(증권형 토큰) 합법화, 투자자 보호 체계 강화, 커스터디(수탁 서비스)와 같은 인프라 구축 등을 공약으로 내세워 향후 디지털 자산 산업이 기존 금융과 병행 가능한 제도권 산업으로 자리 잡을 가능성이 한층 높아졌다. 이는 지난 정부까지의 투자자 보호와 투기 억제 중심의 수동적 관리 정책을 넘어, 정치권이 Web3, 탈중앙화, 디지털 주권 등 차세대 산업구조 전환에 본격적으로 대응하기 시작했다는 신호로 해석할 수 있다.
이러한 흐름 속에서 부산은 기존에 블록체인 특구로 지정되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실질적인 산업 유치나 제도적 실험 측면에서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그 원인은 실증사업 중심의 국지적 시범 운영, 중앙정부와의 협력 부족, 글로벌 플레이어 유치의 한계 등에서 찾을 수 있다. 그러나 이번 대선에서 여야 모두가 디지털 자산을 전면에 내세우면서 부산이 다시 한번 제도 실험지로서의 위상을 확보할 기회가 마련됐다.
부산이 이러한 정치적 전환점을 실질적 이점으로 전환하기 위해서는 몇 가지 전략적인 접근이 필요하다. 첫째, 단기적 규제 유예에 그치는 규제 샌드박스를 넘어 ‘디지털 자산 특구법’과 같은 과감한 입법 조치를 통해 보다 상시적이고 안정적인 제도 환경이 구축되도록 중앙정부와 협력해야 한다. 둘째, 단순한 블록체인 기술 테스트가 아닌, 커스터디, OTC(장외거래), 토큰화 자산 유통 등 실제 산업 수요가 있는 분야를 중심으로 정책 방향을 전환해야 한다. 셋째, 글로벌 수준의 파트너십을 통해 해외 디지털 자산 기업 및 금융사 유치를 적극 유도해야 한다. 특히 중동, 동남아, 유럽 지역과의 투자 유치 및 협업은 부산의 국제적 위상 제고와 동시에 국내 산업의 경쟁력 향상에도 기여할 수 있다.
아울러 부산은 제도적 인프라 구축뿐 아니라 민간 중심의 저변 확대를 위한 실질적 노력도 병행해야 한다. 디지털 자산에 관한 관심과 참여를 유도하기 위해 연례 콘퍼런스, 글로벌 해커톤, 대학 및 스타트업 대상의 창업 경진대회 등 다양한 공개 행사를 적극 유치하거나 자체적으로 기획할 필요가 있다. 이는 디지털 자산 산업에 대한 대중의 이해도를 높이고, 신진 인재와 기업의 참여를 촉진하는 기반이 될 것이다.
이와 관련해 주목할 만한 대표적인 사례로는 중동의 두바이를 들 수 있다. 아랍에미리트 연방을 구성하는 일곱 개 토호국 중 하나인 두바이는 2022년 가상자산규제청(VARA)을 설립하고, 디지털 자산 전담 규제 체계를 마련해 글로벌 디지털 자산 기업들의 본사 및 운영 거점 유치를 적극 추진해 왔다. 이를 통해 바이낸스, 크라켄, OKX 등 주요 글로벌 플레이어들이 두바이에 진출했고, 다양한 디지털 자산 라이선스를 기반으로 제도화된 생태계를 빠르게 조성하고 있다. 또한 두바이는 디지털 자산 콘퍼런스와 전시회, 기업 유치를 위한 인센티브 제도를 운영하며, 국제적 허브로서의 입지를 강화하고 있다. 이러한 두바이의 접근은 규제 명확성, 정책 일관성, 민간과의 파트너십을 결합한 전략으로 평가 받는다.
결론적으로 이번 대선을 계기로 디지털 자산이 정치적, 제도적 공론장에 본격적으로 진입한 것은 환영할 만한 변화다. 이제 중요한 것은 이러한 공약이 단순한 선거 전략에 그치지 않고, 실제 법제화와 행정적 실천으로 이어지느냐에 달려 있다. 부산은 그 변화의 최전선에 설 수 있는 기회를 다시 얻었다. 선거는 끝났지만 우리에게 더 큰 도전이 기다리고 있다.
2025-06-04 [17: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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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30 칼럼] 진정한 청년 정치
시간은 흐르고 상황은 변한다. 불과 6개월 전만 하더라도 대한민국이 조기 대통령 선거를 치르고 있을 줄 몰랐다. 정치는 ‘생물’이라는 말이 있다. 국민의 뜻에 따라 끊임없이 변화하는 정치의 본질을 설명하는 말이다. 결국 정치권력도 영원하지 않다. 국민의 뜻이 모일 때, 그 어떤 권력도 뒤로 밀려날 수밖에 없다. 이처럼 시대와 국민의 변화를 반영해야 하는 정치에, 여전히 갈등을 부추기는 후보가 있다. 바로 개혁신당 이준석 후보다.
이준석 후보는 청년 정치를 내세우며 젊은 세대의 목소리를 대변하겠다고 말해왔다. 그러나 그의 정치적 언어와 태도가 청년들의 고민과 갈등을 해소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분열을 만든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이준석은 오래전부터 여성할당제와 여성가족부를 폐지하겠다고 이야기했다. 그때부터 이준석은 20대 남성들을 겨냥한다는 이미지를 굳혀왔다. 실제로 이준석 후보는 많은 20대 남성의 지지를 받았다. 특정 후보를 지지하는 20대 남성들을 비난하고자 하는 생각은 없다. 그러나 이준석이 정말 20대 남성들을 위한 정치를 펼치고 있는가는 한번 생각해 볼 문제다. 그는 정책을 통해 문제 해결을 위한 구체적 공약을 발표하기보다는 ‘이대남’의 불만을 이용해 정치적 이익을 취해왔다고 생각한다. 지지율은 점점 높아지는데 구체적인 미래는 없는 정치, 그것이 이준석의 현주소다.
이준석 후보 공약집 '청년' 많이 언급
청년 창업 지원·공공 주택 확대 공약
재원 현실성 부족·실질적 혜택 의문
미래가 있고 모두를 위한 정치는
세대·성별 초월하는 통합적 정치
정치 성향 떠나 혐오·갈등 해소를
이번 대선을 앞두고 이준석 후보는 공약집에 ‘청년’이라는 단어를 많이 썼다. 가령 청년들을 위해 공정한 경쟁 사회를 구축하겠다거나, 청년 창업 지원 등 청년을 위한 경제 정책을 확대하겠다거나, 청년 공공 주택을 확대하겠다는 등의 공약이다. 여성가족부 폐지 및 성비 공정 역시 이준석 후보의 대표적 공약 중 하나다. 게다가 청년 창업가를 지원하고 청년 정치인을 많이 발굴하겠다는 정책까지. 이준석의 공약집은 온통 ‘청년’으로 도배가 되어 있다. 그러나 잘 들여다보면 실현 가능성이 매우 부족하다.
공정한 경쟁 사회를 구축하겠다는 이준석 후보의 대표 공약은 다소 추상적이고 현실성이 부족하다. 이준석은 공정성을 주장하며 주로 남성 차별 문제를 제시했지만, 구체적인 법적·제도적 해결책을 제시하지는 않았다. 과연 여성가족부를 폐지한다고 해서 남성 인권이 실제로 신장될 수 있을까? 이준석의 정책에는 두 성별 간의 갈등을 부추기기만 할 뿐, ‘인권’이라는 파이 자체를 늘리려는 노력은 보이지 않는다. 또 청년 창업 지원을 핵심 공약으로 내세웠지만, 구체적이고 실현 가능한 재원이 마련되지 않은 채 청년 창업을 독려하는 것만으로는 문제를 해결할 수 없을 것이다.
최근 이준석 후보는 유튜브 채널 ‘공부왕 찐천재’에 출연해 취업 준비를 하는 청년의 고민 상담을 진행했는데, 시의원으로 출마해 보는 것은 어떻겠냐는 생뚱맞은 해결책을 내놓았다. 이것이 이준석의 ‘청년 정치인 발굴’ 공약의 일환이라면 매우 곤란하다. 또한 이준석은 청년 주택 문제를 해결한다고 주장했지만, 주택 가격 상승과 같은 구조적 문제에 대해 토지 공급 확대나 주택 시장의 실질적 규제 강화와 같은 대책은 부족하다. 청년들에게 제공되는 주택 혜택이나 대출 지원 등이 실제로 청년들이 받을 수 있는 실질적인 혜택이 될 수 있을지 또한 의문이다. 특히 저소득층 청년들이나 중소도시 청년들에게 실질적인 혜택을 줄 수 있는지도 궁금하다. 결론적으로 이준석의 공약들은 청년들의 모든 문제를 나열한 목록에 불과하며 그 어떤 속 시원한 해결책을 주지 못한다.
이런 미비한 공약을 앞세운 그가 오로지 이대남의 분노에 불을 붙였다고 ‘청년 정치’ 꼬리표를 달고 있다고 생각하면, 여성과 남성을 떠나 대한민국 청년의 한 사람으로서 매우 불쾌하기 짝이 없다. 얼마 전 대선 토론 당시 온 국민을 경악케 했던 이준석 후보의 여성 혐오적 발언을 굳이 언급하지 않더라도, 이준석은 지속적으로 갈등을 부추기는 발언을 일삼아왔다는 것을 모르는 이는 없다. 더 나은 대한민국을 희망하는 마음으로 소중한 한 표를 행사하려는 국민들의 마음을 오히려 낙담케 하는 정치인의 출현이 매우 안타깝다.
이준석 후보에게 앞으로의 정치 인생에서는 ‘청년 정치’의 꼬리표를 뗄 것을 간곡하게 부탁한다. 이준석 후보가 내세운 혐오와 갈등의 프레임은 청년들이 원하는 미래지향적 변화와는 점점 더 거리가 멀어지고 있다. 분노만 집약하는 정치는 한계가 뚜렷하다. 진정한 청년 정치는 이준석이 보여준 방식이 아니라, 혐오와 갈등을 해소하고 세대와 성별을 초월하는 통합적 정치다. 성별이나 정치적 성향을 떠나서 대부분의 청년은 그 사실을 알고 있다. 다만 이준석 후보만 그 사실을 모르는 것 같다. 미래가 있는 정치, 그리고 모두를 위한 정치. 그것이 진정한 청년 정치라는 것을 강조하고 싶다.
2025-06-02 [17: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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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로365] 대선에서 사라진 관광
조기대선이 눈앞으로 다가오면서 각 후보들의 선거공약과 정책에 대한 국민들의 관심이 날씨만큼이나 뜨거워지고 있다. 탄핵 정국 이후 급속히 치러지는 선거전 속에서, 각 후보들은 경제와 민생을 중심으로 공약을 쏟아내고 있다. 후보들의 공약을 보노라면 경제를 중심으로 한 일자리 창출이 현 대한민국의 최우선 현안이라는 점을 다시금 깨닫게 된다.
하지만 시간을 들여 꼼꼼히 경제와 관련한 공약을 들여다 보는 순간 이상한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제조업을 필두로 하는 전통적 2차 산업에 방점을 둔 점은 이해할 수 있다고 하더라도 3차 산업의 꽃이라고 할 수 있는 관광 분야의 정책과 공약은 어느 후보에게서도 찾아보기가 어려워서였다. 후보들의 캠프에는 관광 분야에 관심을 두는 전문가가 아예 없다는 말인가. 선거 인력을 구하는 것도 후보들의 관심사가 반영된다고 봤을 때 후보들의 관심이 없거나 부족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듯하다. 관광을 전공한 필자의 입장에서는 이해하기 힘든 대목이었다.
얼마 전 부산 관광산업 관련 단체에서는 관광 실무자들의 의견을 반영한 정책을 모아 특정 정당의 국회의원에게 전달하는 행사를 한 바 있다. 또 다른 당은 관광 관련 대학교수들을 모아 지역 정책위원 간담회를 가진 것으로 기억한다. 이렇게 관련 정책 마련을 위한 움직임을 하고도 정작 대선 후보가 발표한 관광 관련 공약은 전혀 없는 것이 현실이다.
혹시 미처 발견하지 못한 팩트가 있을지 몰라 인공지능에게 물어보니, 후보들이 관광산업을 ‘언급’은 했다는 답변이 돌아온다. 하지만 역시나 세부적으로는 눈에 띄는 전략도, 실행력 있는 구체안도 보이지 않는다. 그나마 문화나 콘텐츠 분야를 통해 간접적으로 관광과 연결되는 공약이 있을 뿐이다. 디지털 전환(DX)이나 생성형 AI를 기반으로 한 관광 정책은 전무하다. 미래 먹거리로 관광산업을 키워야 한다는 ‘언급’만 반복된다.
부산을 예로 들면 더욱 걱정스럽다. 가덕신공항과 GTX 연결, 초광역 관광권 구축 같은 메가 인프라에 대한 후보들의 ‘언급’만 연일 계속되고 있다. 이 같은 인프라와 함께 어떤 콘텐츠로 지역 관광의 승부수를 던질 것인지에 대한 논의는 아예 없다. 이번 대선 과정만 놓고 본다면 부산 관광산업의 미래는 점점 깜깜이가 되어가는 듯해 심히 걱정스럽다.
2000년대 초반 태국과 싱가포르는 ‘의료관광’을 내세워 관광의 새 지평을 열었다. 기존 관광자원의 경쟁력을 유지하면서 이를 뒷받침할 인프라로 공항, 컨벤션센터 등 기반 시설을 대대적으로 개선한 결과다. 콘텐츠와 인프라가 함께 가야 한다는 교훈이다.
이번 대선이 끝나면 곧바로 지방선거가 기다리고 있다. 이번 대선 결과에 따라 지방선거에서 나올 정책이나 공약들의 방향이 구체화할 것이다. 부산은 과연 어떤 준비를 하고 있는지 궁금하다. 관광은 부산의 10대 전략산업에 항상 포함돼 있으면서도 관련 연구실도 관광 전문 연구원도 거의 없는 실정이다.
부산의 관광은 2030 엑스포 유치 실패 이후 뚜렷한 비전이 없다. 외국인 관광객 유치에 나섰다고 하지만 실행력 있는 전략은 잘 보이지 않는다. 디지털 전환에 대한 논의는 있어도 현장 실무자나 자영업자가 체감할 수 있는 실행 방법론은 부재하다. 데이터 활용과 관련해서도 ‘가능성’만 이야기할 뿐, 어떻게 수익을 만들 것인가에 대한 구체성은 없다. 그렇기에 이번 대선에서 이와 관련한 정책이나 공약이 전무한 점이 더더욱 안타깝다.
관광은 단순한 서비스산업이 아니다. 교육, 외식, 숙박, 교통, MICE, 콘텐츠, 부동산까지 복합적으로 융합된 미래 전략산업이다. 이 산업이 살아야 상인들은 장사가 되고, 기업은 활기를 띠며, 청년은 돌아온다. 부산이 관광도시로 지속 가능한 성장을 이루기 위해서는 전문적인 연구기관과 산업 지원센터 설립, 관광DX 예산 확대, 지역형 콘텐츠 전략 마련이 필요하다.
이번 대선에서는 관광이 실종됐다. 그렇다면 이제 다가올 지방선거에라도 기대를 걸어야 한다. 관광산업에서 생산되는 데이터와 이를 활용한 지역경제 자생력 강화 전략이 정책과 공약으로 등장하기를 바란다. 산업 전반에 걸친 디지털 전환의 기로에서 관광산업이 뒤처질 수는 없을 것이다. 제조업 기반이 빠진 자리에 관광산업이 앞장서서 경제적인 파급효과를 가져올 수 있는 정책이 만들어져야 ‘다시 태어나도 살고 싶은 부산’을 만들 수 있다.
관광 산업은 교육, 외식, 숙박, 교통, MICE, 부동산, 콘텐츠 등 모든 것이 복합적으로 융합되어 있기에 미래 전략산업의 가치는 무궁무진하다. 디지털 전환(DX)의 시대에 걸맞은 산업으로 재창조 되기 위해 부디 다음 선거에서는 관련 공약과 정책을 볼 수 있길 간절히 바라 본다.
2025-05-28 [18: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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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로365] 대통령이라는 시대정신
대통령 선거가 일주일 앞으로 다가왔다. 계엄과 탄핵의 결과로 이어진 이번 선거는 민주주의의 위기 극복, 경기 침체와 불황의 돌파구로서 더욱 남다른 의미로 다가온다. 전문가들은 이번 선거의 핵심 키워드로 사회통합과 갈등해소를 꼽았고, 개헌 논의까지 굵직한 정치 과제들이 많은 만큼 변화에 대한 기대와 열망도 크다. 그러나 역대 선거 중 가장 늦은 공약집 제출, 통합이라는 키워드가 무색할 정도의 네거티브 공방전으로 실망을 안겨주고 있다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역대급 ‘노잼’ 선거라는 일각의 평가와 달리 선거운동 기간 내내 한국 사회의 축소판이나 다름없는 모습을 보여주어 마지막까지 조금의 긴장도 늦출 수 없다.
우선 시대착오적 발언들이 오갔다. 첫 신호탄은 김문수 후보가 쏘아 올렸다. 동료 여성 정치인을 ‘미스 가락시장’ 운운하며 낮은 성인지 감수성으로 여론의 뭇매를 맞았다. 후보와 직접적으로 관련된 사안은 아니지만 판사의 룸살롱 접대 의혹을 두고 벌어진 공방에서 개혁신당의 함익병 공동선대위원장은 “내 나이 또래면 룸살롱 안 가본 사람이 없다”고 공개 발언하여 논란을 일으켰다. 2004년 성매매 방지법이 시행될 당시 한 정치인이 성구매자 처벌에 반대하며 “(그렇게 되면) 남자들이 대부분 감옥에 갈 것”이라고 말한 것을 연상시킨다.
이번 대선의 또 다른 특징으로 전반적인 ‘보수화’와 ‘여성정책의 실종’을 꼽는 전문가들도 있었다. 광장의 주역이 2030세대 여성들이라는 평가와 별개로 각 후보 캠프에서 발표한 10대 공약에 ‘여성공약’이라고 할 만한 정책은 잘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여성정책의 실종은 적어도 이번 선거에서의 문제의 핵심은 아닌 것 같다. 우리 모두는 역대급 불황이라는 경제적 위기 속에 이 위기를 돌파할 수 있는 힘이 민주적인 정치제도라는 것을 공감하는 보통의 시민들이기 때문이다. 2030세대 여성들은 물론 남성들이 당면한 문제는 똑같이 주거와 일자리와 같은 공통의 문제이며, 여성들의 경우 거기에 더해 안전의 문제까지 정책적 고민이 더 필요한 상황일 뿐이다.
사실 여성정책은 애초 진보나 보수의 의제로 뚜렷하게 구분하기 어렵다. 박근혜 정부에서 성폭력이나 가정폭력 대응 정책이 강화되었던 것처럼 보수적 성격의 정부에서 더 적극적인 여성정책을 내어놓는 경우도 있다. 성폭력 문제에 대한 적극적인 해결이 보다 성평등한 사회를 앞당겨줄 것이 자명하다면 여성의제는 진보 프레임으로만 접근할 수 있는 사안은 아니다. 여성의 정치세력화나 평등 의제를 적극 주장하는 여성운동 역시 좌우를 가리지 않는다.
문제는 여성정책을 고민하고 생산하는 정치 주체들의 가치관 실종이다. 성별은 표 계산을 위한 정치공학적 수단으로만 등장하는 것 같다. 보수든 진보든 각자의 가치 속에서 어떻게 여성과 돌봄, 안전과 같은 사회적 이슈들을 정책화할 것인지에 대한 진지한 고민이 없을 때 그 결과는 상상력의 빈곤으로 드러난다. 더불어민주당은 비공식적으로 ‘출산가산점제’ 공약을 언급하여 여론의 질타를 받았다. 국민의힘은 위헌적인 ‘군가산점제’를 다시 띄우며 채용갈등을 부추긴다는 비난을 받았다. ‘새로운 시대’를 슬로건으로 내세우며 젊은 대통령 후보로서 기대감을 불러일으킨 이준석 후보는 굳이 1호 공약으로 여성가족부 폐지를 내세우며 여전히 반여성주의와 성별 갈등을 정치적 지지기반으로 삼고자 하는 것 같다.
지난달 여성가족부에 따르면 ‘2023년 국가성평등지수’는 65.4점으로 2022년(66.2점) 대비 0.8점 줄었다. 윤석열 정부 집권 1년 만인 2023년에 사실상 처음으로 하락했다. 지난 3월 영국 시사주간지 이코노미스트가 발표한 선진국 ‘유리천장 지수’에서도 한국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29개국 중 최하위를 기록했다. 각자의 우선순위는 다를 수 있지만, 여기에 문제의식을 갖고 어떤 방향이 더 나은지 고민하는 모습을 보여주어야 한다. 이를테면 같은 여성가족부 폐지를 주장하더라도 성평등 정책을 더 잘 수행할 수 있는 정부 부처 개편의 필요성에 공감하는 쪽도 있을 수 있다. 여성가족부에서 추진해 온 정책들의 더 나은 방향 모색을 위하여 새로운 그릇에 담아보겠다는 의지적 표현이라면 그때서야 비로소 우리 사회에서는 건강한 토론과 정책 생산이 시작될 것이다.
비상계엄과 탄핵의 결과로 이어진 대선인 만큼 민주주의가 흔들려서는 안 된다는 것은 전 국민의 염원이자 의지일 것이다. 시대의 열망에 부응하는 방법은 어떤 사회의 대통령이 될 것인가를 보여주는 후보들의 가치관과 사상이다. 대통령 후보들과 진정으로 소통하고, 유권자로서 투표를 통해 “이 세상 속에서 반복되는 슬픔 이젠 안녕”(‘다시 만난 세계’ 가사 중)이라고 말할 수 있기를 바라는 희망도 함께 가져본다.
2025-05-26 [18: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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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모룡 칼럼] 떨어져 갈라진 종이 울릴 때
지난달의 산불은 도처에서 무서운 기세로 타올랐다. 엄청난 산림을 태우고 민가와 축사를 덮쳤다. 많은 사람이 죽거나 다치고 삶의 터전을 잃었다. 주변부 주민의 안위가 소멸하는 극한 상황을 보여주었다. 산사나 암자도 불길을 피할 수 없긴 마찬가지였다. 수목과 동물 등의 뭇 생명체와 집과 가게와 사찰이 한꺼번에 잿더미가 되었다. 이러한 비참의 국면에서 내게 유독 오래도록 사라지지 않고 뇌리를 맴도는 이미지가 있었다. 바로 잔해 위에 덩그렇게 내려앉은 고운사의 범종이다. 고운사는 경북 의성에 있으며 681년 신라시대 의상대사가 창건했다. 주지하듯이 의상은 멀고 먼 서역으로부터 전해져 당나라의 장안에서 번역돼 들어온 〈화엄경〉을 요약해 〈법성게〉를 만들어 전파한 고승이다. 불교학에 어두운 만큼 그 세세한 내력을 알 길이 없으나, 온갖 꽃들이 만발할 화엄의 도량이 상당 부분 폐허가 되고 종루가 불타면서 추락한 종의 모습이 가슴을 때렸다.
새로운 생태적 재앙 ‘메가파이어’
그 잿더미 속 떨어져 갈라진 종
우리 사회의 일그러진 얼굴 봐
인간의 욕망과 자본 중심의 문명
자연의 질서 배반하며 파국 초래
은총의 빛 회복 사회로 나아가야
사월 초파일에 여러 불자가 떨어져 갈라진 범종을 둘러싸고 두 손을 모은 광경을 볼 수 있었다. 한시바삐 복원돼 심금을 울릴 종소리를 듣고자 하는 마음이 간절한 표정이다. 따져 생각하면 붓다의 은총을 땅바닥에 떨어뜨린 이는 결국 대중이다. 실수로 저질러진 산불이라고 하지만 이토록 무섭게 타오른 연유도 인간이 기후를 붕괴한 데서 찾아야 한다. 이제 산불은 사람이 통제할 수 있거나 자연의 순환하는 현상으로 치부할 수 없는 양상에 이르렀다는 진단이 크다. 기후 위기와 함께 이전과 다르게 그 규모에서 본질 자체가 심각하게 변화한 양상이 되었다는 말이다. 그래서 생태철학자 조엘 자스크는 그의 책 〈숲이 불탈 때〉에서 이 새로운 생태적 재앙을 ‘메가파이어’로 지칭한다. 이미 그린란드, 미국 캘리포니아, 그리스, 호주, 캐나다, 스페인 등 세계 도처에서 발생한 초대형 산불인 메가파이어는 매우 극단적인 현상이며 인간의 힘으로는 통제할 수 없는 사회적 문제가 되었다. 인간의 ‘나쁜 삶의 기술’이라는 중력이 파국을 부르고 있다는 생각이다.
유독 떨어져 갈라진 종에 더욱 눈길을 둔 까닭은 자연과 신의 은총을 배반하는 인간의 욕망이라는 중력 때문이다. 제국 문화와 자본주의적 경제가 공포가 되었다. 이 대목에서 미국의 시인이자 소설가인 헨리 워즈워스 롱펠로가 쓴 〈성탄절에 종소리를 들었네〉라는 시편을 또한 상기하게 된다. 그도 남북전쟁으로 불에 타 쓰러진 교회의 잔해 위에 떨어진 종을 보면서 참혹한 인간의 비극을 외면하는 신의 존재를 부정한다. 집이 불타면서 아내가 죽자, 그의 비애와 우울은 더욱 깊어지는데 전쟁에서 부상을 입고 생환한 장남이 치유되는 과정과 더불어 서서히 그는 영혼의 종소리를 들을 수 있게 된다. 우연히 그의 생애를 다룬 영화 〈나는 종소리를 들었네〉를 볼 수 있었다. 전쟁과 재앙을 겪으면서 사람은 시몬 베유가 말한 ‘중력의 비극’에 그만 쉽게 사로잡히고 만다. 우리 또한 이처럼 은총의 빛을 외면하고 난파하는 맹목이 되고 있지는 않은가?
나는 잔해 위에 떨어져 갈라진 고운사의 범종에서 나 자신을 포함해 우리 사회의 일그러진 얼굴을 본다. 어쩌다 은총을 잃고 무례하고 품위 없으며 저급하게 되었을까? 말의 바른 의미를 왜곡하고 다른 이에게 거짓을 씌우며 배척하고 공격하는 현상이 일반화되었을까? 물론 권력은 오랜 역사 속에서 사슴을 말이라고 우기는 폭력을 행사해 왔다. 근대 독일에서 히틀러의 등장으로 1920년대의 10년 안에 사회가 급작스럽게 변화하며 평범한 사람들이 공격을 당하거나 서로 미워해 제대로 삶을 영위할 수 없는 사태를 직면한 역사적 사실이 있다. 편을 가르고 다른 한편에 낙인을 찍거나 악마화하는 현실이 되었다. 물론 우리 사회를 이와 같은 최악의 예외에 견줄 수는 없다. 하지만 사회적 분노를 감추느라 우울한 사람들이 하나둘이 아닌 형국이 되었는데 지난 6개월의 사태가 이를 더욱 심화했다.
마치 떨어지거나 갈라져 소리를 낼 수 없는 종처럼 우리 사회는 서로를 잇고 만나고 대화하는 장소를 상실한 듯하다. 절차적 정당성을 잃은 권력이 폭력으로 변질되면서 붕괴했다. 다시 근본을 살려 종탑을 재건하고 삼천리강산에 종을 울려야 한다. 자유, 민주주의, 법치주의 등의 말이 왜곡되거나 잘못 구축된 시스템과 엘리트주의 체제의 민낯이 드러난 모순된 현실을 개조해야 한다. 모든 국민이 분노와 우울, 증오와 혐오에서 놓여나 평화와 희망의 주권을 추구하는 과정이 요긴하다. 드론으로 내려다본 산불 현장은 너무 참혹해 바로 보기 힘들 지경이다. 그렇지만 긴 겨울을 지나고 더딘 봄을 겪으면서 매화 피고 벚꽃 지며 철쭉에 이어 장미가 만발하는 자연을 통해 은총의 종소리를 듣는다. 정치권력이 바뀌는 일이 곧 미래를 보장하는 일은 아니다. 장미 대선을 지나서 화엄의 연꽃이 제대로 우리 사회의 광명이 되기를 기원한다.
2025-05-21 [18: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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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로365] 앞뒤가 안 맞는 대선 공약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경제 책사’로 불리는 스티븐 미란 백악관 경제자문위원회(CEA) 위원장은 얼마 전 큰 곤욕을 치렀다. 블랙록, 시타델 등 주요 자산운용사 및 헤지펀드 대표 15명과의 회의에서다. 그는 트럼프 행정부의 관세 정책으로 미국 채권시장이 크게 흔들렸던 사실을 해명하려 했다. 그런데 결과적으로 그 자리는 미란의 역량에 대한 참석자들의 의문만 커지게 했다. 그가 추구하는 정책 방향이 앞뒤가 안 맞았기 때문이다.
트럼프 미 대통령의 무역·통화 정책은 스티븐 미란이 지난해 11월 발표한 보고서인 ‘세계 무역 시스템 재편을 위한 가이드(A user’s guide to restructuring the global trading system)’를 토대로 한다. 이른바 ‘미란 보고서’로도 불리는 이 보고서에는 미국의 무역 불균형을 해소하고 제조업을 부흥하기 위한 그의 아이디어가 담겼다. 그는 자국 제조업을 무너뜨리고 무역적자를 심화시킨 주범으로 ‘강(强)달러’를 지목했다. 달러가 강하면 미국의 수출품 가격은 상대적으로 오른다. 반면 미국에서 수입하는 제품 가격은 내려간다. 수입품의 매력이 커지니 무역적자가 심화할 수밖에 없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미란은 달러를 약세로 만들어 자국 수출품의 경쟁력을 높이고, 관세를 인상해 수입을 억제해야 한다고 말한다.
트럼프의 목표는 만성적인 무역·재정 적자를 줄이고 제조업을 되살리는 것이다. 그러면서 물가도 안정시켜야 한다. 그의 핵심 지지층인 블루칼라 노동자, 서민층을 위해서다. 이들은 지난 수십 년간 진행된 세계화로 제조업이 쇠퇴하며 일자리를 잃었고, 팬데믹 당시 가파르게 치솟은 물가로 생계에 큰 어려움을 겪었다.
안타깝게도 트럼프가 주어진 과제를 온전히 달성할 가능성은 거의 없다. 목표들이 서로 상충하기 때문이다. 관세를 인상하면 자국 제조업은 보호할 수 있다. 그러나 그만큼 수입품 가격이 올라 인플레이션을 자극한다. 1인당 GDP가 8만 달러가 넘는 미국에서 대체품을 생산하는 것도 무리다. 약(弱)달러도 마찬가지다. 달러가 약해지면 수출 경쟁력은 높아지겠으나 수입 물가가 오르는 것도 감수해야 한다. 제조업 기업과 소비자, 어느 한쪽은 손해를 볼 수밖에 없다.
흔히 정치를 ‘사회적 자원을 배분하는 과정’이라고 말한다. 자원은 한정적이기에 정책 결정권자들은 우선순위를 짜고 중요한 걸 먼저 선택한다. 그 과정은 거센 반발을 동반한다. 욕먹는 게 두렵다고 이것저것 다 약속하다 보면 트럼프와 미란처럼 모순에 봉착하게 된다. 수도권 표심도 잡아야 하고, 비수도권 표심도 잡아야 하는 대선 후보들이 지금 그 상황에 놓였다.
후보들은 하나 같이 균형 발전을 외친다. 동시에 수도권 확장 정책을 꺼낸다.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후보는 서울 재개발 조건 완화 및 용적률 상향을 공약으로 내걸었다. GTX 노선 연장·확대는 이 후보와 김문수 국민의힘 후보 모두 약속한 사안이다. 수도권의 극심한 주거·교통난을 해소하자는 측면이 있지만 이들 정책은 균형 발전이라는 과제와 배치된다. 용적률을 높여 주택이 늘어나면 더 많은 사람이 ‘똘똘한 한 채’를 찾아 서울로 몰릴 것이고, GTX 노선이 연장되는 만큼 서울 일자리가 갖는 매력도도 증가할 것이기 때문이다. 수도권 팽창을 도모하는 정책과 지역 균형 발전이라는 가치는 양립하기 어렵다. 결국 중앙에 집중된 자원을 나눠야만 하는데, 정치인들은 전체 50%를 넘는 수도권 유권자들의 표를 의식하여 이런 일에는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는다.
여기저기 남발되는 선심성 공약이 지켜지는 경우는 거의 없다. 그럼에도 이러한 공약들이 반복되는 건 차라리 지키지 못할 약속을 하는 게 반대에 부딪히는 것보단 득표에 도움이 되어서다. 하지만 정책 결정권자들이 표 떨어지는 불편한 선택을 하기 싫다고 서로 충돌하는 목표를 동시에 내걸면, 세상은 흘러온 대로 흘러갈 뿐이다. 수도권과 비수도권의 격차는 더욱 벌어질 것이다. 그 폐해는 양쪽 국민 모두에게 돌아간다. 반발이 두렵다고 ‘구조적 배분’을 외면하는 정치인들의 미필적 고의를 방관해선 안 되는 이유다.
요즘 ‘뜨거운 아이스아메리카노’라는 표현이 자주 보인다. 형용모순이라는 의미다. 현실에서 ‘뜨거운 아이스아메리카노’는 없다. 우리는 아메리카노를 마실 때 뜨거운 걸로 마실지 차가운 걸로 마실지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 둘 다 마시고 싶다고 양쪽을 섞었다간 이도 저도 아닌 어중간한 아메리카노를 마시게 될 뿐이다. 지역 균형 발전이 그렇다. 수도권 팽창을 보조하면서 지역의 발전도 도모할 순 없다. 반대를 무릅쓰고 많은 공공기관을 지역으로 이전했던 노무현 전 대통령처럼, 용기 있는 결단이 필요하다.
2025-05-19 [18: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