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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로365] 여성의 서사, 새로운 K콘텐츠의 원동력
한강 작가의 노벨문학상 수상 소식으로 주말 동안 서점가가 뜨겁게 달아올랐다. 아시아 여성 최초의 노벨문학상 수상작을 원서로 읽겠다는 열풍이 한국어를 모국어로 삼은 많은 이들을 들뜨게 했다. 칸영화제 그랑프리 수상, K팝 빌보드 차트 1위로 한국의 영화, 음악이 세계적 수준임이 증명된 것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지만, 한국문학 역시 세계적 수준의 정점에 올랐다는 것을 확인해 주었다. 한국문학의 부흥과 세계화를 꿈꾸는 희망을 이야기하기도 하고, 세계적 성취에 비해 터무니없이 낮은 번역 예산이나 문화예술 분야의 심각한 예산 삭감 문제가 언급되기도 한다. 모쪼록 장기적 전망으로 더 나은 변화를 기대한다.
한편 많은 언론에서 노벨문학상 수상 소식에 뒤늦게 깜짝 놀랐던 이유는 아이러니하게도 이를 예상하거나 기대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매년 노벨문학상 수상 시기마다 해외 베팅업체에서 수상 후보로 점찍었던 시인의 집 앞에 기자들이 몰려가던 때와는 사뭇 다른 풍경이었다. 해외 언론 역시 이러한 현상에 주목했다. 뉴욕타임스는 ‘한 여성이 한국 최초의 노벨문학상을 수상했다. 그것은 많은 것을 말해 준다’는 제목의 기사에서 “가장 획기적이고 도발적인 한국 현대문학의 대부분은 여성 소설가들에 의해 쓰이고 있지만 언론과 문학계는 나이 든 남성 작가를 가장 유력한 후보로 여겨 왔다”고 꼬집었다. 더불어 “여성들이 정치, 경제, 뉴스 미디어에서 차별받는 한국 현실에서 한국 여성 작가들이 보여 주는 글쓰기는 여전히 매우 가부장적이고, 때로는 여성 혐오적인 한국 문화에 대한 저항의 한 형태”라고 보도했다.
여성이 쓰고 말하고 행동하는 것에는 그가 페미니스트이든 아니든 필연적으로 가부장제나 여성 혐오에 대한 인식과 저항이 깔려 있을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그러한 저항의 한 형태로서의 글쓰기가 가장 빛나는 세계적 성취로 인정되었다는 점은 여러 면에서 오늘날 한국 사회를 성찰하게 한다. 그간 성차별이나 여성 혐오에 대한 문제 제기는 오히려 갈등을 일으키는 원인으로 지목되거나, ‘구조적 성차별은 없다’며 외면당하는 골칫덩이로 취급되어 왔다. 조남주 작가의 〈82년생 김지영〉의 경우 ‘페미 묻은 소설’이라며 비난하거나 책 인증을 한 여자 아이돌을 저격하는 일조차 있었다. 그러나 2022년 한국문학번역원에서 조사한 결과 지난 5년간 세계에서 가장 많이 팔린 한국문학은 조남주 작가의 〈82년생 김지영〉이었다. 전 세계 18개 국가에 번역되었으며, 일본에서는 20만 부의 판매고를 기록하며 스테디셀러로 자리 잡았다. 중국과 대만에서도 선풍적 인기를 끌어 동아시아 여성들을 하나로 묶어 주는 공감대를 끌어냈다는 평을 듣기도 한다.
또 하나 생각해 볼 지점은 그동안 한국의 노벨문학상 후보에게 큰 기대를 걸어왔던 모습과는 달리 한국의 언론과 문학계가 여성작가에게는 기대조차 하지 않거나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김혜순 시인은 시집 〈날개 환상통〉으로 한국인 최초로 2024년 전미도서비평가협회상을 수상하며 또 하나의 유력한 노벨문학상 후보로 거론되기도 했다. 정작 국내에서는 이러한 사실이 생각보다 널리 알려져 있지 않다. 이러한 모습을 보며 바리스타 전주연 씨의 인터뷰가 떠올랐다. 전주연 씨는 세계 최고의 월드바리스타대회에서 한국인 최초, 여성으로서는 역대 두 번째로 우승컵을 거머쥐었지만 부산이 낳은 이 세계적 바리스타의 이름은 생각보다 널리 알려져 있지 않다. 그는 여성 바리스타가 왜 많이 없느냐는 한 기자의 질문에 말을 고르며 “아직 한국 사회에서는 여성에게 요구하는 역할이 명확하니까요”라고 답했다. 최근 가장 재미있게 본 요리 경연 프로그램인 ‘흑백요리사’에서 일부 출연자들이 여성 셰프에게 ‘이모님’ ‘어머님’이라고 칭하는 장면을 보며, 어떤 인식의 한계가 여성들에게 여전히 덧씌워져 있다는 느낌을 받았을 때와 같았다.
더 나아가 ‘젠더갈등’이라는 이름으로 여성 문제를 왜곡 축소하는 사회나, 7개월째 여성가족부 장관을 임명하지 않고 있는 정부나, 딥페이크 성범죄의 규모가 과장되었다며 사태의 심각성을 축소하려는 정치인들 역시 낡은 인식의 한계 속에서 여성의 목소리를 마주하고 있음을 말하지 않을 수 없다. 그보다는 한국 여성의 목소리와 서사가 미래의 성장동력이며 강력한 K콘텐츠가 될 수 있다는 발상의 전환이 이제는 필요하지 않을까. 세계는 여성의 체험과 감정이 갖는 보편성을 인정하고 있으며, 그 체험과 감정의 서사로부터 익숙한 과거와 결별하는 새로운 문화의 가능성을 보려 하기 때문이다. 여성의 서사는 개별적이거나 사적인 무엇이 아닌, 보편적 정서와 미래의 가치로 인정받고 있다. 무궁무진한 여성의 역사가 깃든 우리 부산에서도 이러한 여성의 서사를 기꺼이 새로운 미래의 콘텐츠로 환대하길 바란다.
2024-10-14 [17: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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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로365] AI와 관광 일자리의 행복한 공생
얼마 전 가을비가 내리고 날이 선선해지면서 여기저기 행사에 참여할 일이 잦아졌다. 오랜만에 찾은 광안리해수욕장과 국제시장에서 많은 외국인이 부산을 구경하고 있음에 깜짝 놀랐다. 스마트폰과 관광 지도를 들고 음식점이나 상점, 특정 거리나 장소를 돌아보며 사진을 찍고 한국 음식을 먹는 모습이 눈길을 끌었다.
우리 영산대학에도 외국인 학생이 전체의 60% 이상을 차지하고 있다. 특정 수업은 100%가 외국인 학생들인 경우도 많다. 외국인 학생들이 처음 들어왔을 때는 한국 학생들이 주인이고 외국인 학생들은 손님인 느낌이었는데, 지금은 외국인 학생들이 후배도 생기고 커뮤니티도 생기니, 이제는 캠퍼스의 주인공으로 각종 학교 행사에 참여하고 있다.
부산 관광지 곳곳 외국인 여행객 급증
영산대 외국인 학생이 60% 이상 차지
스마트폰 AI 번역 앱이 관광·학업 도움
관광 일자리도 AI·로봇과 공유 시대
항공업계 체크인 시스템 이미 무인화
과거 고집보다 기술 변화에 적응해야
올해 학기 초 학생들의 진로 설계와 취업 지원, 생활 멘토링을 해주는 18개의 부스가 설치된 행사가 교내 광장에서 열렸다. 참여한 외국인 학생들은 모두 스마트폰 번역 앱을 활용해 이 행사를 제대로 만끽하고 있었다. AI(인공지능) 기능이 강화된 번역기는 자동으로 언어를 감지하고 원하는 언어로 실시간 번역을 해준다. 학생들은 스마트폰만 있으면 캠퍼스 안뿐만 아니라 부산과 인근 지역, 서울과 해외까지도 마음껏 여행을 다닌다. 국제시장과 광안리를 즐기던 그 관광객들도 아마 번역 앱에 의지하며 부산 시내를 돌아다닐 것이다. 세상이 변해가고 있음을 느끼게 된다.
이처럼 외국인 관광객 유입은 점점 많아질 텐데 관광 일자리는 어떻게 될까? 호텔 경영 전공인 우리 학과에도 한국 학생 비율이 급격히 줄면서, 늘어나는 관광 일자리에 보낼 한국 학생은 조만간 한계를 맞이하게 되지 않을까 싶다. 외국인들에 대한 비자 제도가 개선되고 외국인 학생들을 대상으로 하는 기업 연계 장기현장실습 사업도 시범적으로 시작되었다. 이것은 정부나 산업 쪽에서도 이러한 인구 변화에 따라 경제 인구 구성을 변화시켜야 함을 느끼고 있다는 증빙이다.
관광시장의 AI 인력 대체 문제가 언급된 것은 코로나19 팬데믹 기간이었다. 식당에서는 테이블마다 마련된 미니 키오스크에서 주문하고 결제까지도 할 수 있는 시스템이 마련되었다. 로봇이 뜨거운 음식을 고객에게 주의까지 요청하며 테이블에 배달해 준다. 외식 산업체들은 높아진 시급 대신 자동화로 인건비 감축을 시도했고 드라마에서 할아버지 할머니들이 키오스크를 이용하는 모습과 초등학생에게서 사용법을 배워 이용하는 모습을 보여 줄 정도로 이제는 전 국민이 어렵지 않게 키오스크를 이용하고 있다.
항공업계는 이미 팬데믹 이전부터 체크인 시스템을 키오스크화하고 안면 인식이나 지문인식을 통해 체크인 수속을 대행하고 있다. 항공을 비롯한 여행산업과 외식산업에는 기술 서비스가 자리 잡고 있지만, 아직 호텔산업은 숙박 예약이나 홍보, 일부 부대시설 외에는 크게 AI 기술 서비스가 느껴지는 부분은 없다. 최고의 인적 서비스가 호텔 객실과 함께 상품으로 판매되는 호텔시장은 편리함만을 강조한 AI 기능으로 인간이 주는 감동 서비스를 대체할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AI 로봇이 발전한다면 어떨까?
2018년 우리나라에 처음 소개된 AI 로봇 소피아는 언뜻 보아도 로봇 같은 느낌이 많았지만, 2021년 소개된 소피아는 그동안 많은 발전이 있었음을 알 수 있을 정도로 표정과 표현이 세련되어져 있었다. 그것은 우리가 가장 손쉽게 이용할 수 있는 AI인 ChatGPT를 사용해 보아도 알 수 있다. 명령자가 하는 실수나 오타를 스스로 알아서 해결하고 답을 해주고 제안까지 하며 선택을 요구한다. 통계학에서도 2018년은 아직 형상 분석에 대한 부분 연구가 미흡했지만, 지금은 AI 덕분에 형상 분석 분야도 많은 연구가 이루어졌다. 2021년 소피아는 눈빛과 표정이 인간만큼이나 다양해졌고, 모두 형상 분석에 의한 인간의 감정에 따른 표정으로 연결되었음을 알 수 있었다. 소피아가 호텔 종사자가 된다면 호텔산업에서도 AI를 통한 서비스가 본격적으로 이루어질 것이다. 이러한 변화는 언어의 장벽을 없애고 더 이상 수급이 어려운 한국인 서비스맨을 고집하지 않고 외국인 서비스맨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게 될 것이다. 물론, 업무 분장에서는 좀 더 철저히 구분되지 않을까 싶다.
이제 조만간 관광 서비스의 형태도 많이 변할 것으로 예상된다. 그리고 그 변화에 우리도 점점 익숙해질 것이다. 요즘은 과거만 고집해서 될 일이 아님을 사회적 변화를 통해 절감하고 있다. 스마트폰을 손에 쥐고 태어난 세대와 함께 살아가야 하는 아날로그 세대는 불평보다는 이들과 어떻게 행복하게 공생할 수 있을까를 고민해야 한다. 이 행복한 공생에는 AI 로봇도 함께할 것임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2024-10-09 [18: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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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모룡 칼럼] 부산문화를 보는 다중 스케일
세계적인 미술관 퐁피두센터 부산 유치를 둘러싸고 논란이 적지 않다. 대체로 지역문화 현실과 거리가 있고 충분할 만큼 토론 과정이 부족했다는 지적이다. 혹자는 ‘지역문화진흥법’이 명시한 협의 절차를 제대로 거치지 않았다고 따진다. 차제에 부산시립미술관이나 현대미술관을 더 지원해 지역 미술을 발전시켜야 한다는 주장도 적지 않다. 마침 서울 63빌딩에 한화그룹이 2025년 ‘퐁피두센터 한화 서울’을 운영하기로 하였는데 부산이 불필요한 투자를 하고 있다고 문제를 제기한다. 퐁피두센터 한화 서울이 한시적으로 끝나는 시점에서 부산이 이어받게 되므로 이는 잘못된 지적이다. 한편 인천은 유치에 나섰다가 한화와 부산에 밀린 일로 당국이 시민사회의 비판을 받기도 했다. 과연 무엇이 문제인가?
무엇보다 찬반양론으로 단순화하는 과정은 크게 우려할 일이다. 더 많은 토론이 필요한데 질문을 더하고 구체적인 답을 구하는 노력이 있어야 한다. 가령 퐁피두센터 부산 유치를 지역문화진흥법으로 접근하는 경우를 들 수 있는데, 이는 무엇보다 범주 착오를 노정하고 있다. 이 법이 국가 스케일에서 각 지역의 문화를 진흥하기 위한 법적 장치라는 사실을 모르는 이는 없을 터이다. 하지만 퐁피두센터 부산은 글로벌 스케일에서 추진되는 네트워크 사업이다. 이를 통해 서울 중심의 일극 문화집중을 극복하고 부산 스스로 세계 속에 위치하려는 정책 의지로 보아야 한다. 따라서 부산시립미술관과 현대미술관을 더 발전시켜야 한다는 로컬 스케일의 요구와도 다른 맥락이다. 더 나아가 지역 미술인의 낮은 생산력을 높이기 위한 부양책이 급선무라는 로컬주의와 논리의 층위를 달리한다.
퐁피두센터 부산 유치 둘러싸고 논란
지역문화진흥법 차원 접근은 범주 착오
글로벌 규모 네트워크 사업으로 봐야
일극의 국가 체제 극복할 대안으로
세계로 나아가는 진취적 기상 필요
단일 아닌 여러 시선으로 지역 이해를
우리는 부산문화를 로컬 스케일, 국가 스케일, 동아시아 지역 스케일, 세계 스케일이라는 다중의 눈으로 볼 필요가 있다. 예를 들어 ‘영도문화도시’ 사업은 로컬 스케일에서 발전시켜 가야 할 대상으로 인식할 수 있다. 부산문학관이나 부산시립박물관은 로컬의 문화기반시설이다. 그렇다면 로컬리티를 발현하는 데 주안점을 둘 필요가 있다. 다중 스케일의 관점에서 근현대역사관이 동아시아 혹은 아시아라는 지역주의를 표방하면 어떨까 제안해 본다. 부산이 제국의 통로였고 아시아 지중해의 네트워크 도시이며 동아시아 평화의 증인이라는 점에서 시립박물관과 역할 분담이 가능하지 않을까 한다. 또한 국립해양박물관은 해항 부산을 기반으로 하면서 연안을 넘어 대양을 접속하는 거점이므로 로컬에서 아시아의 바다를 경유해 세계에 이르는 중층의 해양문화를 두루 아우를 수 있는 중추기관이다.
물론 로컬 스케일에 기반한 장르 단위의 문화시설이 로컬주의를 표방해야 한다는 말은 아니다. 언제든지 아시아와 세계를 호흡할 수 있는데, 그 토대가 로컬이어야 한다는 사실을 몰각하지 않아야 한다. 범주 착오나 과잉 의욕에서 비롯한 각 스케일 간의 중첩과 갈등은 협의와 조정을 통해 해소해야 한다. 그러니까 앞으로 조성할 부산문학관의 규모를 줄이면서 퐁피두센터 부산을 유치하려 하는가라는 형태의 질문은 오류를 낳는다. 부산비엔날레를 더욱 육성하는 일이 시급하다고 해서 퐁피두센터 부산을 유치하지 않아야 한다고 주장할 수는 없다. 영국에서 ‘리버풀 효과’를 만든 계기는 비틀스라는 세계적 문화 상징이 있었기 때문이다. 지역 문화예술의 생산력은 그만큼 문화예술인의 노력을 요청한다.
2030 부산엑스포 유치 실패가 남긴 상실감이 아직 가시지 않았다. 무엇보다 이를 계기로 한 부산의 도약을 생각했기 때문이다. 지금 한국 사회는 서울 중심 혹은 수도권 일극체제의 폐단이 갈수록 심화하고 있다. 물론 서울과 수도권에도 강남과 같은 ‘중심의 중심’이 있어서 로컬이 왜곡되는 모순이 적지 않다. 국가 스케일에서 일극체제를 극복할 거처는 모든 로컬의 활성화이지만 지역소멸이 운위되는 현실이 힘겹다. 여기에서 서울 일극을 향한 힘의 움직임에 부산을 맞세우는 일이 중요한데 메가시티와 글로벌 허브가 그동안 대안으로 떠오른 셈이다. 아시아와 세계를 연결하는 글로벌 허브의 대안은 연안을 넘어 대양과 만나고 있는 부산의 미래 전망으로 절실하다. 글로벌 시티로 가는 일은 경제와 문화, 교육과 산업의 모든 영역에서 추진되어야 한다. 한편으로 로컬을 두텁게 인식하고 이를 책임지는 시민의식이 선행되어야 하고 다른 한편으로 일극의 국가 체제를 극복할 대안을 찾으면서 아시아와 세계로 나아가는 진취적인 기상이 요구된다. 자기중심의 나르시시즘에 빠져 로컬의 가능성을 단순화하는 일이 없어야겠다. 다중 스케일로 여러 겹의 시선으로 지역을 이해하는 가운데 생산적인 출구가 마련되기를 기대한다. 그래서 나는 2030 부산엑스포를 기대하였고 가덕도 국제공항 건립을 찬동하였듯이 퐁피두센터 부산 유치를 희망한다.
2024-10-07 [17: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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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로365] 자기 지역구에 살지 않는 정치인들
충청북도 청주시 흥덕을 지역구에서 3선 국회의원을 지낸 노영민 전 대통령 비서실장은 아파트가 두 채 있었다. 자신의 지역구에 하나, 서울 서초구 반포에 하나. 문재인 정부는 수십 차례 부동산 정책을 발표하면서 고위공직자들에게 1주택을 권고했다. 대통령 최측근인 노 비서실장도 정부 정책 기조에 맞추어 보유 중이던 아파트 두 채 중 한 채를 팔았다. 청주에 있던 걸로. 그 아파트는 134.88㎡(신고액 1억 5600만 원)짜리 널찍한 아파트였고 반포 아파트는 45.72㎡(신고액 5억 9000만 원)짜리 좁은 아파트였지만 네 가족이 부대끼며 살더라도 강남 아파트를 지키는 게 낫다고 판단한 것이다. 비슷한 시기 이시종 충북지사와 대전 서갑을 지역구로 둔 박병석 국회의장도 서울 송파·서초에 있는 집 대신 자기 지역에 있는 아파트를 처분했다. 그들은 ‘권불십년’ 그리고 ‘강남 불패’라는 세간의 믿음을 몸소 실천한 것뿐이겠지만 손꼽히는 고위공직자들마저 자기 지역구를 버리고 강남을 선택하는 현실은 씁쓸했다. ‘똘똘한 한 채’ 앞에 정치적 도의나 지역 유권자들에 대한 예의는 없었다.
지방대학이 ‘벚꽃 피는 순서대로 망한다’는 말이 나온 지는 오래됐다. 이젠 아파트도 그런 시대에 접어들고 있는 듯하다. 인구 감소 충격은 전국적으로 고르게 다가오지 않는다. 서울 아파트값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고 있지만 서울 밖에서는 ‘악성 미분양’이라고 할 수 있는 준공 후 미분양이 속출하고 있다. 국토교통부에 따르면 6월 말 기준 악성 미분양 주택은 전국에 1만 4856호 있었는데 그중 1만 1965호가 비수도권 주택이었다. 80.5%다. 일본도 인구 감소와 젊은 층의 도심 회귀 여파로 도쿄 인근 위성도시들이 유령 도시화한 전례가 있다. 도쿄 도심에서 약 30㎞ 떨어져 있는 다마(多摩) 뉴타운이 대표적이다. 이름은 뉴타운이지만 노인이 많아 ‘올드타운’이 된 다마 뉴타운은 우리나라 많은 도시의 미래일지도 모른다.
인구가 줄고 덩달아 주택 수요도 줄면 빈집이 는다. 지역 경제의 활력은 떨어진다. 사람들은 더 나은 주거 환경을 찾아, ‘똘똘한 한 채’를 찾아 큰 도시로 떠난다. 그 정점에 서울이 있고 강남이 있다. 지역구를 둔 정치인이라면 이런 시대에 서울 강남에 맞서 제 지역을 어떻게 살릴지 고민에 고민을 거듭해야 하는 게 정상이다. 그런데 요즘 정치인들은 지역구에 말뚝 박고 그곳을 살리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대신, 월세살이로 대충 사는 시늉이나 하면서 권력자에 줄 잘 서서 다음 공천을 받으려고 한다. 전체 지역구 초선 의원 89명 중 41.6%에 해당하는 37명이 서울 강남 3구(서초·강남·송파)를 비롯한 부동산 규제 지역에 아파트 등을 소유한 채, 정작 자기 지역구에선 셋방살이하고 있다는 뉴스가 그걸 방증한다. 책임감과 사명감으로 똘똘 뭉쳐 있어도 모자랄 초선부터 이 모양이라면 우리 정치의 미래는 암담할 따름이다.
전남 영광군수 재선거를 놓고 치열하게 다투고 있는 더불어민주당과 조국혁신당은 때아닌 호텔 논쟁을 벌였다. 조국혁신당 관계자가 먼저 자신들은 영광의 아파트를 빌려 ‘한달살이’ 선거운동을 펴고 있는데 한준호 민주당 최고위원은 호텔에 머물며 호화롭게 선거운동을 하고 있다는 식으로 저격한 것이다. 이에 한 최고위원은 하루 6만 원대 3성급 호텔에 머문다며 반격했다. 선거를 도우러 온 사람들이 호텔에서 지내든, 아파트에서 지내든 무슨 상관이랴. 눈길을 사로잡은 건 정작 군수 후보로 나선 이도 영광에서 월세살이를 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장현 조국혁신당 영광군수 후보는 서울 강남구 청담동에 아파트를 소유하고 있으면서도 정작 영광에선 아무런 주택도 소유하거나 임차하고 있지 않다고 신고했다.
이창용 한국은행 총재는 8월 말 우리나라의 고질병인 부동산 문제 해결을 위해 “서울대 등 주요 대학이 학생을 선발할 때 지역할당제를 적용하자”고 제안했다. 대학 진학에 경제력과 거주 지역이 절대적인 영향력을 끼치고 있고 그게 수도권 인구 집중과 집값 상승의 주요 원인으로 작용하는 만큼 인위적으로라도 지역 안배를 해 해소하자는 것이다. 이 총재의 주장은 극심한 서울 집중과 지역소멸로 골병들고 있는 우리 사회가 고민해 볼 문제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윗물이 더러운데 아랫물이 맑을 수는 없다. 지역구 국회의원부터가 강남으로 향하는데 어찌 국민에게 그러지 말라고 할 수 있겠나. 이참에 출마 지역에 살지 않거나 강남 아파트같이 딴 주머니 차고 있는 정치인들은 공천부터 배제하는 방안을 논의해 보면 어떨까. 중이 제 머리 못 깎는 꼴이라면 유권자들이 나서서 그런 걸 중점으로 살펴봐도 좋겠다. 예로부터 돈이든 권력이든 하나만 가지라고 했다.
2024-10-02 [17: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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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로365] 부산글로벌허브특별법 제정에 동참을!
‘부산 글로벌 허브도시 조성 특별법’(글로벌특별법)이 국회에서 발의되었다. 국가균형발전을 위해 부산을 글로벌 혁신도시, 대한민국 남부권 거점도시, 국제적 기준이 적용되는 글로벌 허브도시로 조성하기 위해 부산 전역을 규제 혁신과 특례 부여를 위한 법적 근거를 만들겠다는 것이 주요 내용이다.
글로벌특별법은 왜 필요한가? 부산으로 기업과 투자를 유치하기 위해서이다. 기업을 만나 부산에서 사업을 해 보라고 권유하면, 서울과 다른 점이 무엇이냐고 묻는다. 부산이 가진 아름다운 자연환경과 도시 인프라만으로는 부족하다. 사업 전망은 밝지만, 서울에서는 규제 때문에 시도조차 해보지 못하는 비즈니스가 부산에서는 가능해야 기업과 자본, 사람이 부산으로 온다. 현재까지는 부산시가 기업이 원하는 규제 완화와 특례를 지원하기 위해서는 중앙정부와 협의해야 한다. 시간이 걸리고, 지원 여부도 불투명하다. 기업 입장에서 시간은 돈이다. 부산이 중앙정부와 협의하는 동안, 시간은 흐르고, 기업과 자본은 다른 도시를 찾아 떠난다. 이렇게 부산시가 유치한 기업은 떠나고, 일자리는 사라진다. 그리고 부산 청년들도 일자리를 찾아 고향을 떠나고, 인구는 줄어든다.
현재 부산의 상황을 살펴보자. 부산시는 가덕신공항 조기 개항을 추진하고 있으나, 신공항 부지 공사 계약은 4차례 유찰되면서 사업자 선정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국토교통부는 결국 수의계약을 통해 사업자를 선정하기로 하고, 관련 절차를 준비 중이다. 부산시의 핵심 사업이지만 중요한 의사 결정은 중앙정부에 의해 이뤄진다. 이런 무기력한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서는 부산시를 위한 특별법이 필요하다. 글로벌특별법이 필요한 이유다.
윤석열 대통령이 공약으로 약속하고 추진한 ‘산업은행 부산 이전’ 역시 불투명하다. 산업은행 본점을 부산으로 이전하기 위해서는 관련 법률(한국산업은행법)을 개정해야 하는데, 여야 대치로 국회의 문턱을 넘지 못했다. 차선책으로 산업은행의 남부권 조직 신설을 통해서 부산 이전을 시도했지만, 산업은행 노조의 강한 반발에 부딪혔다. 산업은행 직원들은 국가 금융 경쟁력 훼손을 막기 위해 부산 이전을 반대한다고 하지만, 진짜 반대 이유는 생활 기반 때문이라고 보는 시선도 있다. 산업은행 직원들도 한 가정의 가장이다 보니, 가족을 더 나은 환경에서 지내게 하고 싶은 마음은 이해가 간다. 근본적인 해결책은 부산을 서울 못지않은 교육·의료·문화 환경을 갖춘 도시로 만드는 것뿐이다. 이런 현실 인식을 기반으로 글로벌특별법은 기업과 자본 유치를 위한 제도 기반 시설뿐만 아니라 생활 인프라를 글로벌 허브도시 수준으로 조성하여 누구나 살고 싶어 하는 주거 환경을 만들겠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부산 디지털자산거래소를 비롯한 블록체인 특구의 다양한 사업을 위해 필요한 제도적 지원 역시 중앙정부의 금융위원회와 협의가 필요하다. 부산시가 아무리 기업을 유치하려고 노력해도 기업의 요청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중앙정부와 협의해야 한다. 부산시가 블록체인 특구를 발전시키기 위해서 규제를 완화하고, 제도적·행정적 지원을 하고 싶어도 중앙정부와의 협의 없이는 불가능하다. 이렇게 부산시가 지방 도시로서 가진 한계점을 뛰어넘기 위해서는 중앙정부와의 협의가 없어도 규제 완화 및 제도적 지원을 할 수 있는 글로벌특별법이 필요하다.
글로벌특별법이 제정되면 규제 자율화, 개발사업에 대한 행정규제 예외 및 완화 적용, 행정절차의 신속성 확보, 인센티브 지원을 부산시가 기업에 할 수 있게 된다. 그렇게만 된다면 부산시는 현재 벽에 부딪혀 있는 가덕신공항, 산업은행 본점 이전뿐만 아니라 부산 디지털자산거래소를 비롯한 부산 블록체인 특구의 핵심사업도 빠르게 추진할 법적 근거와 힘을 가질 수 있다.
부산시에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글로벌특별법 제정을 위해서는 부산 시민의 지지와 국민적인 관심이 필요하다. 부산시 주도로 서명운동이 진행돼 100만 명을 넘었다. 국가적 관심을 불러서 일으키기에는 모자라는 숫자다. 글로벌특별법의 혜택을 보는 것은 부산 시민, 특히 부산 청년이다. 부산 청년은 일자리를 찾아 서울로 가지 말고, 기업들이 부산으로 와서 부산 청년을 채용하도록 해야 한다. 글로벌특별법이 바로 서울 기업이 부산으로 올 수 있도록 지원하는 법이다. 부산 시민의 조직화된 힘이 필요한 시점이다. 부산 시민은 단결된 힘으로 글로벌특별법 범시민 운동을 전개하자. 부산시가 대한민국의 특별한 도시로서 기업에 인센티브를 지원하고 기업과 자본, 사람을 부산으로 모을 수 있도록 부산시에 실질적인 힘을 주자. 부산이 잘 되는 것이 대한민국이 잘 되는 길이다. 대한민국의 미래를 위해 다 함께 힘을 모아야 한다.
2024-09-30 [18: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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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로365] 귀성과 차례는 종교적 열정이다
유달리 더웠던 올해 추석 명절을 보내면서 많이 들은 이야기가 올해를 마지막으로 더는 추석 차례를 지내지 않기로 했다는 것이다. 필자의 집안에서도 선친의 묘소를 국립영천호국원으로 옮기자는 말이 나왔다. 벌초에 따라갔던 식구들이 현장에서 진드기에게 물렸고 그 진드기들이 집까지 따라온 게 화근이었다. 진드기가 있다는 사실을 알고 살충제를 사서 몸과 옷, 가방은 물론이고 차 안까지 모두 뿌렸는데도 진드기는 없어지지 않았다. 결국 해충 퇴치 전문 회사에 의뢰해 온 집안을 소독하는 등 한바탕 소동이 일었다. 그런데도 아직 집안에 진드기가 보인다고 한다. 위험해서 더는 벌초하러 갈 수 없으니, 이참에 이장을 하자는 것이다.
농촌에 사는 사람들이 줄어들면서 말벌, 진드기, 뱀이 확실히 늘어났고, 사람의 손길이 미치지 않는 산은 나무와 풀이 무성해져 과거보다 훨씬 위험한 공간이 되었다. 실제로 벌초나 성묘 때 벌에 쏘이거나 진드기에게 물려 죽는 경우도 있다.
유달리 덥고 힘들었던 올해 추석
차례 등 생략하는 집안 부쩍 늘어
하지만 차례는 차례 이상의 무엇
조상신 부활 관련한 종교적 의례
현대에도 지속되는 이유 살펴야
단순한 관습으로 치부해선 안 돼
그렇다면 왜 우리는 이런 위험을 무릅쓰는가. 경제적 합리성을 중시하는 우리 사회가 왜 명절이면 전국의 도로를 주차장으로 만들면서 성묘와 귀성에 나서는가. 대한민국에서 여자들이 싫다는 일은 다 사라졌는데, 명절 신드롬을 불러일으키는 차례는 왜 없어지지 않는가. 설명이 필요한 대목이다.
해답은 차례 속에 있다. 주부들이 열심히 차례상을 차리면, 제주는 비로소 향을 피우고 술을 붓는다. 차례나 제사에서 처음 쓰는 술은 원래 땅에 부어 조상의 백(魄)을 불러오기 위한 것이다. 종묘 제사에선 실제로 바닥에 구멍을 뚫어 놓고 술을 붓는다. 지금은 아파트나 주택에 바닥을 뚫을 수 없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향로나 퇴주 그릇에 부을 뿐이다. 향은 당연히 하늘에서 후손을 돌보고 있는 혼(魂)을 모셔 오는 수단이다. 이러한 차례나 제사의 첫 단계를 강신이라고 한다.
강신 다음에는 차례에 참여한 모든 사람이 함께 절하여 영신의 의례를 행한다. 지방에는 신위 즉, 신의 자리라고 쓰여 있다. 바로 조상신이 앉아 계시는 곳이다. 향과 술로 살아 돌아오신 조상께 술과 여러 가지 음식을 대접하고, 끝난 뒤에는 조상신이 내려주신 복을 함께 나누는 음복을 한다. 이것이 차례이고 제사다. 차이가 있다면 차례에서는 술을 한 잔만 올리고, 제사에서는 기본적으로 석 잔을 올린다. 더 많은 술을 올려야 할 경우에만, 첨잔을 행한다. 술과 음식을 먹는 일이야말로 살아있는 존재만이 할 수 있는 일이고, 또한 가장 중요한 일이다. 차례와 제사의 본질은 우리들의 정성으로 혼백이 결합해 다시 살아나신 조상신께 정성을 표하는 일이다.
위험을 무릅쓰고 행하는 벌초와 성묘도 차례를 위한 것이다. 유교에서는 사람이 죽으면 혼과 백으로 분리된다고 했다. 혼은 우리 정신으로 대표되는 기(氣)이고, 백은 우리 몸으로 대표되는 기이다. 백은 흰 속성을 가진 귀(鬼)라는 뜻의 글자이고, 죽으면 땅에 묻는 시신을 상징한다. 산소는 바로 백의 집이다. 돌아가신 조상의 백이 온전히 있는지 확인하고서야 비로소 혼과 백을 온전히 결합할 수 있다. 동시에 차례를 지내기 위한 종교적 순례이기도 하다.
종교는 삶과 죽음에 대한 설명 체계이다. 가톨릭, 개신교, 이슬람교와 같은 서아시아의 종교는 근본 교리가 공통으로 부활 영생이다. 사람은 죽지만 그것으로 끝이 아니다. 언젠가 부활해 심판받고 영생의 길로 들어선다. 브라만교, 자이나교, 불교와 같은 남아시아의 종교는 윤회전생을 주장한다. 수레바퀴가 돌 듯이 이런저런 모습으로 다시 태어난다는 것이다. 죽음은 결코 죽음으로 끝이 아닌 셈이다. 불교의 또 한 가지 교리는 대승불교가 설하는 극락왕생이다.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은 서방정토로 가기 위한 치명적인 주문이다. 도교는 명약관화하게 불로장생이다.
그렇다면 동아시아의 유교는 무엇일까. ‘초혼복백 재생’, 혼을 부르고 백을 소환하면 다시 살아날 수 있다고 설명한다. 줄이면 초혼재생이다. 혼과 백을 신으로 재생시키는 의례가 바로 차례와 제사의 강신이다. 유교는 종교가 아니라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적지 않다. 그러나 조선 멸망 후 100년이 훌쩍 지났어도 아직 계속되고 있는 차례와 제사, 벌초와 성묘, 귀성과 역귀성과 같은 행위를 종교적 열정이 아니고 무엇으로 설명할 수 있을까. 제사와 차례를 차마 그만두지 못하는 것을 조상신의 노여움을 두려워하는 우리의 마음이 아니고 무엇으로 설명할 수 있겠는가. 어리석어 보이기까지 하는 우리들의 행위가 종교적 의례라고 한다면 마음이 석연해지고 숙연해지지 않는가. 이슬람교의 메카 순례 못잖은 인구 대이동이 일어나는 현상을 그저 미풍양속이나 관습으로 치부하지 않도록 하자. 우리가 우리를 모르면 누가 우리를 알아주겠는가.
2024-09-25 [17: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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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로365] 형사미성년 만 14세, 그 기준에 대하여
“우리 애는 아직 생일이 안 지나서 만 14세 미만이에요.” 집단 폭행 사건으로 조사를 받던 중학생 부모가 상담 전 처음 꺼낸 말이다. 함께 싸운 상대방은 만 14세가 되었지만, 아직 생일이 지나지 않아 다행이라는 거다. ‘헌법 위에 촉법 있다’라는 웃지 못할 말까지 나오는 가운데, 촉법소년 연령이 마치 면죄부를 주는 마냥 언론에서 보도되는 것이 영 불편하다. 형법이 만 14세 미만의 자는 벌하지 아니한다고 하지만, 소년법은 이러한 형법과는 달리 형사처벌을 받지 않는 사각지대에 놓인 10세에서 14세 미만의 소년까지 각종 보호처분으로 필요한 처우를 확대하기 위한 것인데, ‘촉법소년’이란 죄를 지어도 아무런 조치를 할 수 없는 애들이라는 잘못된 인식이 팽배하다.
엄밀히 말하면 지금 논의되는 문제는 ‘촉법소년 연령 하향’이 아니라, ‘형사미성년 연령 하향’으로 지칭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학령기 학생은 점점 줄어드는데, 형사미성년 범죄는 해마다 급증하고 있다. 과거에는 주로 절도, 폭행 범죄가 다수였는데, 최근에는 살인, 방화, 강도, 강간 등 점차 5대 강력 범죄로 확대되는 경향이 있다는 점에서, 더 이상 철부지 어린애들의 방황으로 보기는 어렵다. 촉법소년으로 분류되는 10세, 형사미성년자로 분류되는 14세라는 나이는 도대체 어떤 기준으로 나뉘게 된 걸까. 우리나라는 1991년 유엔 아동권리협약에 비준해서, 헌법 제6조에 따라 아동권리협약은 국내법과 같은 효력을 가진다. 유엔 아동권리협약 제40조 3항은 ‘형법 위반 능력이 없다고 간주되는 최저 연령을 설정하도록 노력할 것’을 규정하고 있는데, 유엔 아동권리위원회는 ‘아동사법제도에서의 아동의 권리에 대한 일반 논평’을 발표해 ‘세계적으로 가장 일반적인 형사책임 최저 연령은 14살’이라고 명시했다.
세계 각국의 형사미성년자 연령기준 및 관련 법령을 살펴보면, 미국은 아동 범죄를 가장 엄하게 처벌하는 국가로 손꼽힌다. 미국은 주마다 다르지만, 워싱턴주는 8세 미만의 아동에 대하여는 형사책임능력이 인정되지 않고, 8세 이상 12세 미만의 아동에 대하여는 그 아동이 범죄 행위가 무엇인지 이해하고 그것이 잘못된 행위임을 알 충분한 능력이 있었던 것으로 증명되지 않는 때에만 책임능력이 없는 것으로 추정한다. 영국은 7세 미만으로 형사책임 무능력자로 간주했다가 1963년부터 이를 10세로 유지하고 있다. 프랑스의 경우 만 13세 미만을 최저 연령으로 두고서 이들에 대해 형벌은 부과할 수 없지만 교육적 처분은 가능하도록 하고 있다.
이처럼 해외 사례들을 보면, 형사책임능력의 최소 연령을 우리나라보다 더 낮게 정하면서도 개별 사안에 따라 형사책임능력 인정 여부를 판단할 수 있도록 재량을 두고 있다는 점에서 참작할 부분이다. 독일, 일본, 대만은 우리나라와 같이 14세 미만으로 정하고 있지만, 소년 강력 범죄가 발생함에 따라 우리나라처럼 법 개정에 대한 활발한 논의가 이루어지고 있는 상황이다. 법무부는 2022년 촉법소년 연령을 현행 14세에서 13세로 낮추는 내용의 ‘소년법’ ‘형법’ 개정을 추진하였지만, 국회 다수 의석을 차지하고 있는 야권이 움직이지 않은 관계로 21대 국회에서 임기 만료로 통과되지 못한 채 폐기되었다.
법무부가 13세 하향을 추진했던 것은, 촉법소년 중 13세가 차지하는 비중이 약 70% 상당이고, 13세 기준으로 초등학교와 중학교를 구분하고 있는 학제를 고려한 것이다. 1953년에 정해진 14세의 형사미성년자 연령 기준은 시대의 변화와 미디어의 발달로 현재의 소년들은 그 시절보다 변화하였음에도 70년간 그대로 유지되고 있다. 이제는 논의에서 그칠 게 아니라 법개정 절차로 나아가야 한다. 형사미성년 나이를 14세에서 13세로 낮출 것인지, 촉법소년의 범위를 10세보다 더 하향할 것인지, 아니면 일부 해외 사례처럼 최저 연령을 더 낮게 설정하고, 개별 사안에 따라 책임능력을 달리 판단할 재량을 둘 것인지를 다각적으로 고려해야 한다.
또한 5대 강력범죄를 저지른 경우에는 어떻게 처벌과 교화를 할 것인지, 학계와 법조계가 머리를 맞대고, 국회는 더 이상 손 놓고 있어서만은 안 될 일이다. 혹자는 연령 하향을 두고 처벌만이 능사가 아니라고 주장하지만, 현재 만 14세 이상 19세 미만의 소년범도 판사의 재량에 따라 형사처벌이 아닌 보호처분을 할 수 있도록 정하고 있기에, 형사미성년 연령을 낮춘다고 해서 무조건 형사처벌을 받게 하자는 의미는 아니다. 그 어떤 범법행위를 해도 형사처벌을 받지 않는 나이의 기준이 현실에 맞는지, 그 기준으로 더 범죄를 양산하는 것은 아닌지, 그로 인해 피해자를 사각지대로 모는 것은 아닌지 고민하자는 것이다.
2024-09-23 [17: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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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30 칼럼] 모국을 떠나는 일
〈한국이 싫어서〉라는 장강명 작가의 소설을 원작으로 한 영화가 상영 중이다. 직관적인 제목 덕분일까, 한국에서의 삶이 고단한 청년들의 주목을 끌었다. 영화는 아직 보지 못했지만 동명 소설 속 줄거리에서 주인공 계나는 한국사회에 염증을 느끼고 새로운 삶을 찾아 호주로 워킹홀리데이를 떠난다. 호주의 삶은 한국보다 자유롭고 평화로우나 외국인으로서 신분장벽을 느끼기도 한다. 소설은 자신의 행복을 찾아 떠나는 주체적인 용기를 보여주지만 동시에 한국이 싫어서 떠났다면 여태껏 지녀왔던 가치관도 함께 떠나보내야 행복할 수 있다고 넌지시 알려준다. 예컨대 계나가 보여주는 물질적인 욕구나 남과 비교하는 습관, 효율성만을 판단기준으로 삼는 가치관 등을 버리지 못하면 어디에서 살든 한국에서의 삶과 별로 다르지 않을 수 있다고 말하는 듯하다.
워킹홀리데이는 협정을 맺은 국가의 청년들에게 자국에서 1년간 일할 수 있는 워킹비자를 발급해 부족한 노동력을 보충하는, 일종의 관광취업 제도다. 참여자의 입장에서는 제도의 이름처럼 일하며 돈도 벌고, 휴식과 여행도 즐기며 외국에서 장기로 살아보는 경험을 누릴 수 있다. 만약 다시 20대로 돌아가서 워킹홀리데이에 참가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다면 이탈리아나 스페인으로 떠나보고 싶다. 언제 여기서 살아보겠나 싶은 국가를 가보는 것도 워킹홀리데이의 묘미가 아닌가. 그곳의 말을 모르기 때문에 어쩌면 올리브 농장이나 포도밭에서 언어 대신 몸을 사용하며 일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그럼에도 두 국가 모두 구경거리, 먹거리, 즐길 거리가 많아 홀리데이는 어느 곳보다 보장될 것 같다. 하지만 이런 상상은 계나의 고민과는 결이 다르다. 앞선 것들은 비자가 보장하는 최대 1년 동안만 살아볼 곳을 찾는 것이었다. 그러나 계나는 한국을 아예 떠나 이민을 가고자 했다.
대개 사람들은 태어나고 자란 곳에서 자신의 정체성과 가치관을 형성하고 주요한 관계들을 맺어 나가며 모국이라는 감각을 얻는다. 이와 결별하여 계나처럼 혈혈단신으로 언어도 통하지 않는 외국으로 떠나 새로운 사회에 정착하고 적응하는 일은 분명 낯설고 때론 외롭다. 이런 두려움과 불편함을 무릅쓰는 용기에는 각자의 내적 동기가 있을 것이다. 그 이유가 한국이 싫어서라면 한국사회에 대한 실로 큰 실망과 분노가 필요하다. 소설이 출간된 2015년은 한국사회에 ‘헬조선’ ‘이생망’과 같은 단어들이 유행하고 있었다. 한편 지금은 ‘오히려 좋아’나 ‘가보자고’ ‘원영적 사고’와 같은 긍정적인 유행어들도 돋보인다. 그동안 한국의 위상 역시 꾸준히 높아져 이제 한국은 외국인들에게 살아보고 싶고 일하려고 찾아오는 국가가 되었다.
실제로 외국에 나가보면 한국이 살기 좋은 나라라는 걸 깨닫는 경우도 많다. 외국 생활은 여행객으로 잠시 머물 때까지만 환상적일 뿐 정주한다는 건 종국엔 일상의 반복과 권태와 불만을 피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터전의 변화는 삶을 정말로 변화시키기도 한다. 지역의 기후와 지형 조건, 자원, 영토 크기, 인구밀도, 인구 구성 등에 따라 사람들의 가치관과 성격, 행동 패턴, 문화, 규범, 국가의 산업구조까지 모두 달라지곤 한다. 인간을 포도에 비유하는 것은 과할 수 있지만 와인을 생산할 때 포도가 보여주는 ‘떼루아’의 중요성을 떠올리면 지리적 공간의 절대적인 영향력은 더욱 와닿는다. 하지만 동시에 포도나무가 메마르는 조건은 어디서든 비슷하다. 직사광선을 너무 강하게 쬐거나 비바람이 너무 자주 내리치는 가혹한 환경은 작가가 앞서 지적한 어디서든 삶을 황폐화시키는 사고방식과 태도들이다.
한국에서의 삶이 만족스럽다면, 혹은 불만스럽더라도 모국을 떠나고 싶은 욕구가 아니라면 굳이 계나와 같은 선택을 따를 필요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속한 사회와 내가 근본적으로 괴리된다고 느껴진다면 새로운 환경에 자신을 노출시켜 보는 건 괜찮은 대안이 될 것 같고 워킹홀리데이는 그런 면에서 청년만이 누릴 수 있는 저비용·저위험의 좋은 기회라고 생각한다.
인간을 물고기에 비유하는 건 포도보단 덜 과할 것이다. 물고기를 보면 냇가에, 호수에, 어항에, 얕은 물에, 심해에, 난류에, 한류에, 떼로, 홀로, 저마다의 특성대로 사는 수많은 물고기들이 있다. 우리는 종종 막막함과 걱정으로 주변에 열심히 조언을 구하기도 한다. 예컨대, “외국에서 살아보고 싶은데 괜찮을까요?”라는 질문에 “거기 너무 소금물이라서 나는 못살겠더라”고 민물고기가 답해줬는데 정작 본인은 바닷물고기 타입이었다면 어떤가. 내가 어떤 물고기인지는 나 자신이 가장 정확히 알아야 한다. 또 일단 부딪혀봐야 결과를 알 수 있다. 대체로 일반적인 건 그만한 이유가 있지만 일반이 전체는 아니기에 일반적이지 않은 선택이 행복을 가져다주는 경우도 우리는 자주 보게 된다.
2024-09-18 [18: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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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로365] 바르샤바에서 만난 안나
폴란드 수도 바르샤바에서 23세 여성 안나 코시악을 만났다. 안나의 고향은 우크라이나 중남부의 중공업 도시 드니프로다. 그는 우크라이나 난민으로, 바르샤바 SWPS대학 동아시아학부에서 중국어를 전공하고 있다. 처음부터 난민은 아니었다. 그냥 평범한 유학생이었다. 4년 전에 폴란드로 유학 온 안나는 대학을 졸업하면 우크라이나로 돌아가서 중국과 거래하는 모국 기업에서 일하면서 고국에 어떻게든 보탬이 되고자 했다고 한다.
폴란드식 만두인 피에로기와 생맥주 한 잔을 시켜놓고, 백야에 물든 바르샤바 구시가지의 노천카페에 그와 나란히 앉았다. 우크라이나에 있을 때 고려인 청년 이웃 덕에 한국 드라마를 많이 봤다는 안나는 “한국 영화에서는 부산이 범죄 도시로 많이 소개되던데, 지금도 부산에 깡패가 많아요?”라고 묻기도 했다. 안나의 소박한 꿈은 유학 온 지 2년 뒤에 전쟁이 터지고 그 전쟁이 장기화하면서 산산조각 났다. 조국 발전에 도움 되기는커녕 돌아갈 집마저 폭격으로 없어진 상태다. 폴란드는 대학 학제가 3년제여서 곧 실습을 마치고 논문을 내면 계속해서 대학에 적을 둘 수도 없다.
폴란드 정부가 우크라이나 난민을 잘 대해주고 사회적으로도 별다른 차별이 없기는 하다. 그러나 남의 땅은 결국 남의 땅이다. 언어와 문화의 장벽, 생활고가 만만하지 않다. 우크라이나에 아직 남아있는 할아버지, 할머니, 고모, 삼촌의 안부도 걱정이다. “제 고향은 돈바스나 자포리자 원전에서 제법 떨어져 있어서 얼마 전까지만 해도 피해가 덜했어요. 그랬는데 지금은 달라요. 전국 어디에나 러시아의 미사일과 드론 폭탄이 떨어져요.”
안나는 바르샤바에서 어머니와 단둘이 살고 있다. 어머니는 밤새워 여기저기 병원을 돌며 의료 폐기물을 수거한다. 하도 험한 일이라 폴란드인들이 꺼려해서 그동안은 그럭저럭 버텼지만 언어소통 문제 등으로 언제 잘릴지 모른다. 이렇게 어머니가 잠도 못 자고 버는 약간의 돈과 안나가 중국어 통역 아르바이트를 하고 가끔 받아오는 사례금이 이들 모녀의 수입 전부다. 이 돈으로 숙소 임대료와 전기세 등 공과금을 내고 한 달짜리 정기 교통권을 사면 남는 게 없다. “왜 서유럽처럼 형편이 좋은 다른 나라로 가지 않느냐”는 질문에 안나는 “많은 우크라이나 난민들이 좀 더 나은 일자리와 보금자리를 찾아 독일로 떠났어요. 그래도 저같이 어렵게 생활하면서도 여기 폴란드에 남아있는 사람들이 아마도 100만 명은 넘을 걸요?”라고 말했다.
이른바 약소국 정권이 ‘줄타기’ 외교를 잘못하면 나라가 순식간에 거덜난다. 우크라이나 전쟁이 지금처럼 장기화하는 데는 여러 요인이 있지만, 일단 내부 요인을 먼저 꼽지 않을 수 없다. 우크라이나의 젤린스키 정부는 2019년 5월 정권을 잡자마자 친서방 편중 외교로 급격하게 돌아섰다. 1991년 8월 독립 이후 지난 30여 년간 이전 정부가 어렵사리 유지해 왔던 ‘균형 외교’를 일시에 버린 것이다. 결국엔 미국과 북대서양조약기구(나토)의 군대를 안방까지 끌어들여 러시아에 침략의 빌미를 제공했고, 그 결과 지금 이렇게 수년째 나라를 나락으로 몰아넣고 있다.
책임 있는 정부라면 적어도 지난해 ‘6월 대공세’ 실패와 오늘날 상황에 결과적인 책임이라도 지면서 평화협상에 나서는 게 옳다고 본다. 그런데도 젤렌스키는 정권을 내놓지 않겠다며 대통령 임기가 끝났는데도 계속 세계를 돌며 ‘구걸 외교’를 벌이고 있고, 러시아의 내륙 영토로 쳐들어가는 모험을 감행하면서 항전 의지를 꺾지 않겠다는 태세를 보인다. 그새 민생고 등 우크라이나 내부 사정은 하루가 다르게 악화하고 있다. 방위세를 1.5%에서 5%로 올리고 징수 대상을 확대하면서 올해 112조 원이나 되는 세수 확보를 위해 이리저리 발버둥 친다. 하지만 국가재정은 이미 파탄이 났다. 러시아 쪽도 마찬가지지만, 전쟁 피로감으로 애국주의 물결도 시들해지면서 탈영병이 속출하고, 일부 국민은 병무청 앞에 몰려가 불법 징집 중단을 촉구하는 시위를 벌이기도 한다. 다른 데도 아닌 우크라이나 극우 ‘반데라주의’의 본고장인 서부지역 볼린에서 일어나고 있는 현상이다.
윤석열 정부가 젤렌스키 정부를 닮아가는 건 아닌지 아주 많이 걱정된다. 서울 지하철역에서 독도 조형물이 없어지고, 극우 성향의 인사들이 정부 요직과 학술기관에 전진 배치되고, 지나치게 미일 해양 편중 외교가 벌어진다. 그러나 대륙과 등지지 말아야 우리가 살 수 있다. 1990년대 초의 북방정책 이후 지난 30여 년간 축적된 북방 유라시아 대륙과의 모든 관계망과 자산을 버리고 어디를 향해 가겠다는 건가. 균형 외교만이 살 길이다. 우리의 젊은이들이 우크라이나의 안나 코시악처럼 훗날 미래를 잃고 눈물짓는 일이 없도록 지혜롭게 미리 대비해야 할 것이다.
2024-09-11 [17: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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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로365] 8·15와 한일 관계의 새 출발점
지난 8월 15일 광복 79주년 기념 경축식은 독립기념관장 인선을 둘러싼 갈등 속에 둘로 쪼개져 치러지는 사상 초유의 일이 펼쳐졌다. 윤석열 대통령과 국민의힘 지도부는 서울 세종문화회관에서 행정안전부가 주관한 행사에, 광복회를 비롯한 상당수 독립운동단체와 더불어민주당은 효창공원 내 백범기념관에서 열린 행사에 참여했다.
경축식이 이렇게 양분된 근저에는 일제 식인지 지배에 대한 평가와 대한민국 건국일을 둘러싼 진영 논리가 작용하고 있다.
광복절은 일본 제국주의의 압제로부터 주권을 되찾은 기쁨을 함께 나누면서 미래를 생각하는 국민통합의 날이어야만 한다. 그러나 이번 광복절은 한국이 두 개로 분열되고 여기에 북한을 더해 한반도가 3개 나라가 되는 게 아니냐는 우려마저 나오는 날이 돼버렸다.
광복절, 미래 생각하는 국민통합의 날
행사 둘로 쪼개져… 진영 논리 벗어나야
일본은 종전일로 칭하고 피해자인 척
식민지 시기 조선인 차별 반성 필요
자신들이 가해자였음을 인정해야
양국 간 ‘역사 청산’ 비로소 이루어져
한편, 한반도를 식민지배하고 전쟁을 일으킨 일본은 8월 15일을 패전일이 아니라, 2차 세계대전이 끝난 날이라는 점을 강조하는 종전일로 칭한다. 그리고 1963년부터 매년 일본 정부는 동경무도관에서 전몰자 310만 명을 대상으로 ‘전국전몰자추도식’을 실시해오고 있다. 변함없이 올해 추도식도 천황 부부, 총리와 정부 관계자, 그리고 유가족 대표 등 6000여 명의 참석하에 엄중하게 진행되었으며, 이는 일본 전역에 생중계됐다. 가해자가 아닌 피해자의 모습으로 국민통합을 이루고 있는 것이다.
1910년 8월 29일 일본은 대한제국을 병합한 이후 1945년 8월 15일까지 대일본제국이라는 하나의 국가 틀 안에서 식민지 조선을 철저히 짓밟고 차별했다. 일본은 조선인에게 일본 국적을 부여했다. 그러나 일본 관점에서 내지인은 ‘일본 호적’, 외지인은 ‘조선 호적’으로 구분하고, 이에 대한 변경을 원칙적으로 금지했다. 1등 신민 일본인, 2등 신민 조선인이라는 차별 정책을 법제화한 것이다.
중일전쟁이 전면화되자 신사참배, 한글사용 금지, 창씨개명 등 조선민족 말살 정책을 강력히 추진하면서, 1938년 4월 국가총동원법에 근거해 조선인 남자는 징용과 징병으로, 조선인 여자는 근로정신대와 일본군 위안부로 강제 동원했다. 그리고 사망자와 부상자 통계가 알려주듯이, 조선인을 일본인보다 위험한 환경에 배치하고, 한층 가혹하게 다루었다.
차별정책은 전쟁이 끝난 후에도 지속됐다. 일본 정부는 귀환 정책에서 조선인을 완전히 제외했다. 이 과정에서 발생한 대표적 비극이 지난 7일 기시다 후미오 총리의 방한에 앞서 일본 정부가 조선인 승선자 명단의 일부를 공개한 ‘우키시마호 침몰 사건’이다. 또 1947년 5월에는 외국인 등록령을 선포해 일본 거주 조선인을 외국인으로 변경시켜 관리했으며, 1953년부터 제정된 일련의 전쟁 희생자 지원 관련 법에 일본인이라는 국적 조항을 달아 조선인 희생자를 배제했다. 그리고 1965년 한일기본조약 체결 시 한국에 독립 축하금 명목으로 지불한 유상·무상 5억 달러로, 조선인의 개인 청구권 문제는 모두 해결되었다는 태도를 보이고 있다.
이런 일본과 대조적인 모습을 보인 나라가 바로 미국이다. 1941년 12월 일본이 진주만을 공격하자, 미국 정부는 약 12만 명의 일본계 미국인을 안보위협으로 간주하고 서부 내륙의 수용소에 강제 억류했다. 그러나 1944년 12월 미국에 충성하는 시민에 대한 구금을 지속할 수 없다는 ‘엔도사건’의 판결이 나오자, 일본과의 전쟁이 한창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들을 석방하고 수용소를 폐쇄했다. 그리고 40여 년 뒤인 1988년 당시 로널드 레이건 미국 대통령은 차별에 대해 공식 사과하고, 생존자에게 각각 2만 달러의 보상을 지급했다. 그런데도 8월 15일이 되면 일본의 방송사는 강제 격리를 당한 일본계 미국인의 비극을 반복하지 않기 위해서는 역사를 기억해야 한다는 내용을 담은 프로그램을 방영하고 있다.
대다수 한일 양국 국민은 한일 협력의 필요성에 동의하고 있다. 하지만 윤석열 대통령과 기시다 총리의 지도력에 기댄 관계 개선에는 한계를 느낀다. 정상 교체와 상관없이 앞으로 양국 간 협력이 흔들리지 않기 위해서 한국은 일본 식민지 지배 평가를 둘러싼 분열적 정쟁을 그쳐야 하며, 대통령은 적어도 일본에 식민지 시기 조선인 차별에 대해 인권 회복의 차원에서 당당히 반성을 요구해야 한다. 일본은 자신들이 가해자였음을 인정하고, 최소한 일제강점기 일본의 신민이었던 조선인에게 행한 차별을 인정하고 사과하는 모습을 보여야 할 것이다.
역사 청산이라는 물컵은 유린된 조선인들의 인권 회복을 한일 양국이 함께 추진할 때 비로소 가득차게 될 것이다.
2024-09-09 [18: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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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로365] 디지털 자산 업계, 미 정치권 변화 주시할 때
지난 4월 총선 이후 우리나라에서는 당분간 국민적 관심을 끌 선거는 없어 보인다. 경기침체 우려와 함께 미국 연방준비제도(연준)의 기준금리 인하에 대한 기대감이 커지면서 국민의 관심은 해외로 옮겨가고 있다. 특히 미국의 경기 흐름과 대통령 선거 결과에 촉각을 세우고 있다. 호사가들 사이에서는 차기 미국 대통령이 누구일지에 대한 다양한 전망과 예측이 오간다. 미국 대선 결과는 우리나라 경제 정책, 외교·군사 정책과 맞물려 있어, 선거를 2개월 앞둔 시점에서 관심을 갖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이는 디지털 자산 업계도 마찬가지이다. 오히려 더 높은 관심을 보인다. 미국 공화당의 트럼프 후보가 일찌감치 디지털 자산에 우호적인 친 크립토 정책으로 방향을 선회함에 따라 그동안 반 크립토 성향을 보여 왔던 민주당에서도 긍정적인 변화가 감지되기 때문이다. 바이든 대통령을 대신해 민주당 대선 후보로 확정된 해리스는 타협점을 찾으려 하고 있다. 트럼프처럼 명시적으로 친 크립토 정책으로 선회했다고 보기는 어렵지만, 민주당의 반기업적 이미지를 변화시키기 위해 디지털 자산 업계와의 접촉을 강화하고 있다고 말한다. 여러 정황을 종합해 보면, 해리스가 적어도 디지털 자산에 대한 정책 변화에 대해 고민하는 건 분명해 보인다.
‘반 크립토’ 정책 견지해 온 미국 민주당
최근 대선 앞두고 긍정적 움직임 감지
관련 업계, 규제 파악해 해결 모색 주효
금융 중심 도시 부산, 발전 원한다면
지역 기업인·정치인 서로 만나 대화를
디지털 촉진 위한 시 차원 역할도 기대
이렇게 디지털 자산이 미국 정치권에 변화를 불러온 원인은 다양하다. 먼저 미국의 디지털 자산 업계가 자신들을 얽매는 규제와 불확실성을 제거하기 위한 효과적인 방법을 찾았기 때문이다. 이들은 미국 정치에 영향을 미치는 방식을 이해한 것이다. 공무원들이 자신의 커리어를 고려할 때, 위험을 감수하며 정책을 변화시키기는 어렵다. 반면 정치인이 의제를 설정하고 법률을 제정하거나, 혹은 정권이 설정한 목표라는 명분이 있다면 공무원들도 훨씬 수월하게 움직일 수 있다. 이에 디지털 자산 업계는 복지부동의 공무원을 붙잡고 설득하기보다는 톱다운 방식의 변화를 끌어낼 수 있는 정치인을 공략하기 시작한 것이다. 미국 증권거래위원회(SEC)와 소송 중인 코인베이스와 리플이 상당한 정치 자금을 기부한 것이 그 대표적인 예다. 이런 점에서 미국이나 우리나라 모두 종국적인 민원 해결 방법은 유사해 보인다.
다음으로, 디지털 자산 업계는 해결하고자 하는 이슈를 명확히 하고, 이들 문제를 해결함으로써 얻을 수 있는 이점과 발생할 비용을 비교 분석하기 시작했다. 이게 변화를 가져왔다. 이전에는 규제가 모호하거나 발전을 저해한다는 식의 막연한 민원이 주를 이루었고, 세계적인 콘퍼런스에서 진행되는 패널 토론도 불평과 불만의 반복이 그치지 않았다. 그러나 이제는 각 업체가 사업이나 프로젝트 진행에 장애가 되는 구체적인 규제나 정책을 파악해 해결 방안을 모색하고 있다. 전체 산업에 대한 규제 완화보다는 특정 사업을 위한 허가나 승인을 얻기 위해 관련 기관과의 대응에 더 큰 비용을 지출하고 있는 상황이다.
마지막으로, 디지털 자산 업계는 이제 소수의 개인이 코인 상장을 통해 행운의 자본을 축적하던 시기를 지나 산업 차원에서 거대한 자본이 형성된 상태다. 과거에는 코인이나 토큰을 거래소에 상장시켜 일확천금을 노리는 시기가 있었고, 이로 인해 블록체인과 디지털 자산에 대한 부정적인 선입견이 자리 잡았다. 이러한 오명을 벗기 위해 실물 자산에 기반한 토큰이나 증권 성격을 갖춘 디지털 자산이 등장했다. 이는 디지털 자산이 규제의 범위에 편입되기 위한 거대한 혁신을 의미하며, 이러한 혁신은 파편화된 프로젝트들을 하나의 산업으로 통합하는 데 기여하고 있다. 디지털 자산은 각종 실물 자산과 직접 연계되며, 인터넷상에서 무형으로 존재하던 블록체인 정보를 금융 자본으로 변모시키고 있다. 즉, 디지털 자산이 경제적 힘을 갖게 된 것이다. 블록체인을 기반으로 한 실물 연계 자산(RWA)과 토큰형 증권(STO)에 자금이 몰리고 있는 것이 바로 그 증거다.
이에 반해 우리나라 정치권은 디지털 자산에 대한 논의에 소극적이다. 디지털 자산이 앞으로 금융 혁신의 중요한 요소로 여겨지고 있음에도 ‘김남국 의원의 코인 사태’ 이후로 오히려 후퇴해 버린 느낌이다. 부산이 블록체인 특구를 발판으로 금융 중심 도시로 발전하고자 한다면, 지역의 정치인들이 먼저 업계 목소리에 귀 기울이고 관심을 가져야 한다. 반대로, 기업인들도 규제 기관에 대한 불만만을 토로할 게 아니라, 유권자이자 민원인으로서 정치인들과 만나 적극적으로 의견을 전달하고 그들의 공감을 끌어내야 할 책임이 있다. 나아가, 부산시가 이 둘의 교류를 중개해 디지털 자산 산업의 발전을 촉진할 수 있는 혁신적인 역할을 수행했으면 한다.
2024-09-04 [18: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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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로365] ‘딥페이크 성범죄’라는 오래된 미래
딥페이크 기술을 이용한 성범죄로 전국이 발칵 뒤집혔다. 인공지능(AI) 기술을 이용해 딥페이크 성 착취 영상물을 공유하는 국내 텔레그램 채널 가입자 규모는 22만 명에 달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해외 보안 서비스 업체는 ‘2023 딥페이크 현황 보고서’에서 한국 국적의 피해자가 가장 많은 것으로 드러나 한국이 딥페이크 성 착취물에 가장 취약한 국가라고 밝혔다. 정부와 여야가 한목소리로 심각한 범죄에 대한 대책 마련을 다짐했다. 그런데 어쩐지 똑같은 뉴스를 되풀이해서 보는 것만 같다. 불과 5년 전인 2019년, ‘N번방’으로 알려진 텔레그램 성 착취방 참가자 규모가 26만 명이었다. 디지털 성범죄의 심각성은 그때에도 우리 사회에 커다란 충격을 주었고, 각종 대책이 쏟아져 나왔었다. 도대체 이 기시감은 무엇인가.
2021년 전국 최대 규모의 성매매 포털사이트 운영자가 필리핀에서 검거되었다. 사이트 회원 수는 약 70만 명, 후기 글은 98만 개에 달했다. 해당 사이트에서 광고했던 성매매 업소만 2613개로 전국의 고등학교 숫자보다 많다고 알려져 있었다. 업소별 게시판에서는 성 구매 후기가 올라왔고, 각종 성범죄와 불법 촬영을 통해 어떤 식으로 여성을 능욕했는지 적나라하게 드러낼수록 환호를 받았다. 심지어 조건 만남의 대상이 된 성 착취 피해 아동·청소년과 여성을 다른 남성에게 거래하는 ‘분양’ 게시판도 있었다. 성범죄 후기를 쓰면 오히려 포인트를 적립 받고 업소에서 성 구매 비용으로 사용할 수 있었다. 불법 합성 성 착취물을 만들어 공유하면 환호받고 오히려 크레딧이 적립되어 또 다른 성 착취물에 접근하는 데 현금처럼 사용할 수 있는 지금의 상황과 다르지 않다.
2016년이 되어서야 폐쇄된 소라넷도 마찬가지였다. 오프라인에서 벌어진 성범죄가 온라인에서는 남성들의 놀이 문화로 당연시되었다. 마치 평행 우주처럼 똑같은 일들이 매번 반복된다. 그 때문에 여성계와 교육계는 각종 성명서와 기자회견을 통해 여성과 아동을 성적 대상화하는 온라인 남성문화를 ‘딥페이크 성범죄’ 사태의 핵심으로 지적하고 있다. 여성을 모멸하고 지인을 능욕하는 폭력을 쾌락이라고 여기고, 이를 집단으로 공유하는 데서 더 큰 쾌락을 얻는 남성문화가 주범이라는 것이다.
남성들만의 커뮤니티에서, 대화방에서, 채널에서 여성과 아동의 신체를 성적 대상화하고 조롱하는 범죄가 놀이처럼 일어난다. 이러한 남성문화는 폭력과 착취를 상업적 행위로 둔갑시켜 돈벌이가 가능하도록 만든다. 수익을 얻는 업자들이 생겨난다. 엄청난 수익이 창출되고, 또다시 범죄를 조장하는 판이 만들어진다. 첨단 AI 기술을 재료 삼고 세계 최고 수준의 보안 플랫폼을 방패 삼은 폭력은 또다시 세계 최대 규모의 성범죄로 드러나고야 만다. 이러한 온라인 남성문화는 어느 날 달나라에서 뚝 떨어진 게 아니다. 온라인 성범죄는 오프라인을 기반으로 한 성범죄다. 폭력적 온라인 남성문화는 우리 사회에서 아주 오랫동안 뿌리내려 상업적 성 착취를 가능하게 했던 남성문화의 온라인 버전인 셈이다.
영화 ‘헤어질 결심’의 박찬욱 감독은 한때 자신의 영화사 이름을 ‘NRS(NO 룸살롱)’라 지으려 했다고 한다. 룸살롱 문화는 영화계에만 있었던 관행이 아니라, 한국 사회 전반에 걸쳐 광범위하게 퍼져 있었다. 처음 성매매방지법이 만들어졌을 때, 성 구매 행위를 강력히 처벌하는 것을 골자로 하는 것이 법의 핵심이었다. 그러나 당시 남성 정치인으로부터 “대한민국 남성을 전부 범죄자로 만들 셈이냐”는 답변이 돌아왔다고 한다. 성 구매 범죄가 너무나도 자연스러운 남성문화, 여성을 유흥과 소비 거리로 취급하고, 모욕하는 것이 너무나도 자연스러운 남성문화, 그토록 관대한 성매매 문화는 대한민국 사회의 거대한 성 산업을 낳았고, 온라인 환경에서 폭력적 남성문화로 이어졌다.
9월 성매매방지법이 시행된 지 20주년을 맞았다. 은폐된 룸살롱 방 안, 성매매 업소 정보와 성 착취 영상을 공유하는 커뮤니티 게시판, SNS 대화방과 텔레그램 채널에서까지 누군가의 딸이나 여자 형제일 수도 있는 존재에 대한 성적 모욕과 폭력으로 쾌락을 추구하는 그 행태는 바뀐 적이 없다. 성매매 문화에 관대한 사회, 유독 이러한 성범죄에만 솜방망이 처벌을 내린 사법부, 성범죄 형량 감경으로 수임료를 올리는 법조인에 이르기까지 국가와 사회의 책임이 더없이 크다. 무엇보다 돈을 지불했다는 이유만으로 그러한 폭력을 마음대로 누릴 수 있는 권리를 획득한다는, 이 사회에 만연한 야만적 갑질 사고 패턴 자체가 바뀌지 않는 한 비극은 계속될 것이다. AI가 기존 데이터를 학습하듯, 딥페이크 성범죄 역시 이 사회를 학습한 결과물이다.
2024-09-02 [18: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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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로365] AI시대, 대한민국 관광수도 부산을 향하여!
초등학교 시절, 부산 남천동 광남국민학교에서 서울 서초국민학교로 전학 간 기억이 떠오른다. 서울 아이들이 부산 촌에서 왔다고 놀리는 통에 오기가 나서 “부산도 옛날에는 대한민국 임시수도였고, 바다도 있고…”라면서 언쟁을 벌였다. 갑자기 옛 추억을 소환한 것은 얼마 전 글로컬 교육 테크 세미나 참여를 위해 서울 강남구 선릉역 인근 아마존 웹서비스(AWS) 한국지사를 방문하면서다. 요즘 뜨고 있는 AI 이슈 관련 클라우드 사업의 주요 건물 시스템에 내심 놀라고 말았다. 건물로 들어서니 복도 인테리어나 1층 안내 데스크가 부산에서는 흔치 않은 느낌의 디자인이었다.
온라인으로 세미나 신청을 한 뒤 교육 1일 전 문자로 일정과 출입용 QR코드 주소를 받았다. 대학 입시 업무로, 별로 신경을 못 쓰고 있었는데 이 QR코드에는 모든 환대서비스 절차가 포함되어 있었다. 건물 입구에서 출입증 교환을 위해 신분증을 꺼냈지만, QR코드로 바로 내부 출입문을 열고 들어갈 수 있었다. 나의 코드를 게이트에 들이대는 순간 숫자가 하나 뜨는데 그것은 나를 태우고 교육장으로 올라갈 승강기 번호였다. 출입문을 열고 승강기 근처로 접근하는 동안 승강기는 나를 태우기 위해 내려오고 있었다. 별다른 기다림 없이 바로 고층에 위치한 테크 세미나 교육장에 도착할 수 있었다. 전철역부터 교육장에 도착할 때까지 그 어떠한 번거로움이나, 나의 움직임을 방해하는 아무것도 없었다. 이 경험은 AI 관련 교육을 받으러 온 나에게 AI가 우리 실생활에 미친 영향을 그대로 생생하게 전해주었다.
세미나를 주관했던 회사는 미국 기업이었고, 우리나라를 방문하는 외국인 방문객들의 첨단기술에 대한 인식 수준이 어느 정도 될 것인가를 유추해 볼 수 있는 근거가 될 수도 있었다. 초연결 시대 기술의 변화는 우리의 생활을 이렇게나 변화시키고 있는데 이런 흐름을 타고 있는 외국인 방문객들을 위해 부산은 어떤 준비를 하고 있을까를 자문하게 되었다. 지난 7월 천주교 서울대교구는 대통령실 시민사회 비서관, 문화체육관광부 차관, 서울시장, 교황대사, 교황청 평신도 가정생명부차관 등 주요 인사들과 함께 ‘2027 서울세계청년대회’ 발대식을 개최했다. 2027년 전 세계에서 청년 신자 80만 명이 대한민국을 방문할 예정이다. 이 기회를 잡기 위해 부산은 어떤 준비를 하고 있는가?
답은 모든 관광인프라는 온라인으로 승부를 걸어야 한다는 것이다. AI의 도움을 받아 관광객들의 여정에 걸림돌이 없는 여행을 선사할 수 있는 온라인 플랫폼이 이 시대의 새로운 관광인프라이기 때문이다. 항공, 호텔, 내국 교통 및 전국 방방곡곡 숨어있는 한식 맛집들과 대한민국, 혹은 특정 지역에서만 가능한 체험 상품을 제대로 진열해 놓아야 한다. 온라인에 익숙한 젊은이들은 서울을 방문하기 훨씬 이전에 대한민국 전역을 살펴보고 자신이 원하는 체류 도시를 찜해 놓고 입국할 것이다. 방문객들은 어디에 머물든 찜해 놓은 지역에서 새로운 알림이 갈 때마다 얼른 그 지역을 방문하고 싶어서 맘이 설렐지도 모른다. 마치 우리가 즐거운 여행을 떠나기 전에 잠을 못 이루는 것처럼….
혹시라도 부산시는 2027년인데 아직 시간이 많이 남았다거나, 종교 행사이니 종교단체에서 부산시에 협조 요청이 와야 움직이겠다고 생각한다면 큰 기회를 놓치는 것이다. 종교단체는 자신들의 시스템에 맞추어 종교 행사에 집중하면 그들의 역할과 임무는 끝이다. 굳이 행사에 참석한 청년들이 부산을 구경하든, 경주를 구경하든 괘념할 일이 아니다. 종교단체가 그들의 행사를 통해 모은 청년들을 어떻게 자기 지역에서 남은 시간을 보내게 할지는 각 지역의 문제이다.
온라인의 가장 큰 장점이자 단점은 영역의 구분이 없다는 점이다. 벌써 발대식을 한 서울시가 먼저 대대적인 온라인 플랫폼을 만들거나, 이미 교황이 방문했던 해미국제성지가 있는 충청남도가 이런 플랫폼을 만든다면, 부산은 기회를 놓치게 되는 셈이다. 플랫폼을 통한 거대한 수익 창출의 기회를 놓쳐버리는 것이다. 전 세계에서 오는 80여만 명 청년들이 지역을 돌며 여행할 경우 지역마다 엄청난 경제적 수익을 거둘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이를 통한 무료 도시 홍보까지 생각하면 효과는 대단하다.
이것이 온라인 관광인프라의 힘이다. 온라인 콘텐츠는 ‘누가 먼저 만드는가’가 제일 중요하고, 다음은 ‘어떤 콘텐츠를 싣는가’이다. 지금까지 온라인에서 돌아다니지 않았던 콘텐츠, 부산시가 만든 플랫폼에서만 예약할 수 있는 콘텐츠가 이 관광플랫폼의 승부를 좌우하게 된다. 이제 ‘대한민국 제2의 도시 부산’이란 말을 더 이상 쓰지 말자. 왜 우리는 늘 제2 도시여야 하는가. 초연결 시대 AI를 활용한 관광플랫폼을 통해 ‘대한민국 제1의 관광도시’ ‘대한민국 관광수도 부산’이 되어보자.
2024-08-28 [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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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30 칼럼] MZ세대도 장기근속하고 싶다
1년 미만으로 근무하고 퇴사하는 청년층이 31.8%에 이른다는 통계청 발표가 공개되자마자 MZ세대의 노동문화를 분석하는 기사들이 쏟아졌다. 대부분 경직된 조직 문화에 적응하지 않는 청년들이 많고, 회사 생활이 아니더라도 다른 방법으로 생활 수익을 얻는 청년들이 많아지고 있다는 등의 분석들이었다.
이같은 MZ세대 기업 이탈 현상은 다만 사기업에 국한된 이야기는 아닌 듯 보인다. 올해는 매년 늘어났던 공무원 숫자가 줄었다고 한다. 재직 기간 5년 미만 공무원 퇴사자가 2019년 6663명이었는데 지난해 1만 3500명으로 늘었다. 공직은 평생직장과 다름없다던 통념은 이제 옛말에 불과하다. 입사 시험을 통과해 어렵게 들어간 회사라도 자신과 맞지 않으면 과감히 퇴사를 선택하는 것이 요즘 MZ세대다.
MZ세대는 왜 이렇게 끈기가 없을까? 만약 이런 생각이 든다면, 이번엔 MZ를 이해하기 위해 생각의 틀을 과감히 깨보자는 제안을 하고 싶다. MZ세대가 끈기가 없는 것일 수도 있지만, MZ세대가 근속하고 싶어 하는 회사 환경이 그만큼 없다는 뜻일 수 있다. 청년층의 퇴사율에 주목하기 전에 청년들이 어떤 가치관으로 일에 임하는지 그리고 일로 무엇을 얻고자 하는지를 살펴봐 주었으면 한다.
사실 MZ세대는 ‘프로이직러’가 아닌 ‘장기근속러’가 되고 싶어 한다. ‘캐치’라는 채용 플랫폼에서 Z세대 취준생 1713명에게 물어본 결과, ‘한 직장 오래 다니기’를 선택한 응답자가 53%를 차지했다. 장기근속러가 되고 싶은 가장 큰 이유는 ‘안정된 직장생활이 가능해서’로 68%를 차지했고, 그 뒤를 이어 ‘이직하면 새롭게 적응해야 해서’가 13%를 차지했다. 퇴사와 이직은 세대를 불문하고 모든 노동자들에게 부담이다. 기존에 하던 일을 정리하고, 다음 단계를 준비하고, 새로운 일자리를 찾는 일을 가외 시간에 해야 한다.
그럼에도 MZ세대가 이직과 퇴직 과정에 과감히 뛰어드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자신에게 맞는 조직 문화와 일을 찾기 위해서 다양한 경험을 쌓고 시간을 지불하는 것을 자연스럽게 느끼기 때문이다. 적성이 맞지 않고 조직 문화가 맞지 않아도 한 번 얻은 직장을 계속해서 다니면서 우직한 충성도를 보여주던 과거의 문화와는 달리, 일이나 문화가 자신과 맞지 않으면 그 시간을 견디기보다는 자신과 맞는 곳을 향해 떠나는 것이 더 합리적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MZ세대의 가치관인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나라 회사들은 이런 MZ세대 직원이 원하는 조건들을 갖추고 있을까? 같은 설문조사에서 Z세대에게 장기근속을 가능케 하는 요인을 물었다. 그러자 대답으로 ‘연봉’을 꼽은 이들이 66.0%(복수 응답)로 가장 많았다. 다음으로는 ‘워라밸’(40.0%), ‘커리어 발전’(33.0%), ‘상사·동료와의 관계’(29.0%), ‘조직 문화’(18.0%), ‘담당 업무’(18.0%) 순이었다.
통계에서도 알 수 있듯, 사실은 이 회사 저 회사 옮겨 다니는 것보다 한 회사에서 오래 경험을 쌓고 싶어 하는 MZ 사원들이 더 많을 것이다. 그렇지만 자신과 맞지 않는다고 느끼면 과감하게 떠나는 세대 역시 MZ세대다. MZ세대의 입맛대로 회사의 모든 규칙과 문화를 재정비하자는 말은 아니다. 다만 회사 발전에 청년층 인적 자원이 필수적이므로 청년 사원들이 원하는 요건을 갖추고 있는지를 다시 한번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는 뜻이다.
심층 인터뷰 진행도 좋은 방법이다. 이 회사를 선택한 이유가 무엇인지 인터뷰하고 그 이유에 걸맞은 보상을 지원해 주어 근속률을 높이는 것이 장기적으로 봤을 때 이득이다. 이와 같은 인사개혁 부분에 있어서는 우리나라보다 일본이 훨씬 앞서 있는데, 일본은 현재 직장 상사를 직접 고를 수 있는 조직 문화를 도입하는 추세라고 한다. 원하지 않는 부서나 지방 근무지로 발령받은 직원들 중 자신을 괴롭히는 동료를 만나 어려움을 겪고 퇴사와 이직을 하는 사례가 발생하자 회사가 그 대처 방안으로 직원이 선호하는 상사의 부서로 옮길 수 있도록 아이디어를 낸 것이다.
우리나라도 일본처럼 상사를 직접 고를 수 있는 문화를 도입하자는 얘기는 아니다. 다만 우리나라 노동환경 개혁은 너무나 더디며 그 사이에 많은 인적 자원들이 노동시장을 빠져나가고 있기에, 이 정도의 파격적인 방안이 필요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다. 통계청 조사에 따르면, 청년층 비경제활동인구가 44만 3000명에 육박하고 구직 의사가 있지만 노동시장의 불합리함으로 일을 하지 않는 인원이 점점 늘어나고 있다고 한다. MZ세대를 다시 노동시장으로 유인하기 위해서는 개혁적인 결단이 필요하다. ‘K회사’가 죽었다 깨나도 절대 하지 않을 것 같은 특별한 결단 말이다.
2024-08-26 [18: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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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모룡 칼럼] 여름의 낭만이 사라지고 있다
여름이 편한 시절이 끝난 것일까? 지난해에 이어서 폭주하는 더위가 멈출 기세를 보이지 않는다. 기후 전문가 가운데 앞으로 해를 거듭할수록 30도를 훌쩍 넘는 여름 더위는 피할 수 없는 현실이 되었다고 진단하는 이들이 적지 않다. 일시적인 현상이 아니라 이전과 다른 여름의 장기 지속을 예고한다. 두루 알고 있듯이 더위는 갑자기 찾아오는 현상이 아니다. 우리가 알게 모르게 서서히 기온을 높이면서 사회를 바꾸어 놓는다. 우선 휴가철이면 북새통을 이루던 해수욕장과 계곡의 풍경이 달라지고 있다. 산으로 바다로 향하던 피서 행렬도 크게 줄었다. 나무 그늘을 찾고 계곡과 바다의 물을 찾기보다 에어컨이 있는 실내에 머무르는 경향이 커졌다. 집에서 가까운 송정, 해운대, 광안리 등의 해수욕장을 가보더라도 낮보다 밤에 그 주변을 배회하는 사람들이 더 많다. 마치 밤이 되어야 활동하는 흡혈귀처럼 어둠이 내릴 즈음에 바닷가를 향하는 행렬이 놀라울 정도이다.
폭주하는 더위 이젠 멈출 기세 안 보여
해 거듭할수록 피할 수 없는 현실 돼
산불에 전염병까지 지구 열탕화 심각
탄소 배출 줄여야 하는 일 인류 직면
기후 변화 염려해도 생활 쉽게 못 바꿔
자기 합리화 속 서서히 생태계는 파멸
확실히 이제 여름은 나들이하기 좋은 계절이 아니다. 낭만을 구가하던 시대가 끝난 듯하다. 하는 수 없이 견디고 이겨 내어야 하는 기후가 되었다. 머잖아 일상과 극한의 구별이 사라지는 일을 맞을 수도 있겠다. 폭염은 홍수와 가뭄, 해수의 상승을 동반하기도 한다. 재난을 일으키고 생태계 전반의 변화를 불러올 수도 있다. 양식장의 고기가 떼죽음하고 더위를 견디지 못하고 병을 얻거나 죽는 사람도 적지 않게 나타난다. 이와 같은 폭염은 그저 지나갈 한때의 자연현상에 그치지 않으며 중대한 사회적 문제가 될 수 있다. 더 뜨거워지는 바다와 도시를 어떻게 생명유지시스템으로 가꾸어가야 하는가? 단지 더 많은 전력을 끌어다 쓰는 일로 가능한 사태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폭염은 우리 사회만의 문제가 아니다. 이미 40, 50도를 오르내린 세계의 도시도 허다하다. 이런 도시에서 사람들은 여름이 아니라 죽음의 지옥을 맞닥뜨리고 있다. 제프 구델의 보고서 〈폭염 살인〉을 보라. 지난해만 하더라도 전 세계적으로 폭염 사망자가 50만 명을 넘었고 전력난과 물가 폭등에 시달린 나라나 도시가 한두 곳이 아니다. 슈퍼 산불에서 전염병까지 지구 열탕화의 참상이 매우 심각하며, 좀 과장해 어떤 이는 단테의 〈신곡〉에 나오는 지옥에 견주기도 한다. 이처럼 우리 사회보다 훨씬 심각한 사례가 적지 않은데 결코 강 건너 불구경 거리로 그칠 일은 아닌 듯하다. 지구가 더 더워지고 바다 열기가 증가하고 있다는 사실은 이제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빈번한 폭염과 홍수 등이 단순한 예외적 현상으로 그치지 않으리라 생각된다. 하지만 이러한 사실을 알고자 하는 마음은 턱없이 부족하다. 오히려 당장 먹고살기 급한 마당에 기후 문제를 고민할 겨를이 없다. 더군다나 설사 이게 탄소 배출이 원인이라는 사실을 안다고 해도 나 한 사람이 이를 해결할 방도가 없다는 당착에 빠지고 만다.
더 뜨거운 지구의 원인 가운데 그 첫째는 말할 필요도 없이 대기 중 이산화탄소의 농도가 높아진 데 있다. 온실 효과가 더 커지니 전반적인 기온이 상승할 수밖에 없다. 두 번째로 엘니뇨 현상을 들 수 있다. 이게 나타나면 적도 부근 바다는 평소보다 훨씬 따뜻해지고 심각한 무더위를 유발한다. 세 번째로 지구 온도와 마찬가지로 상승하는 바다가 있다. 바다가 뜨거워지면 빙하가 녹고 해류 흐름이 바뀌어 많은 지역의 기후 변동을 초래한다. 무엇보다 탄소 배출을 줄여야 하는 일은 인류가 직면한 급선무이다. 하지만 지금까지 뚜렷한 대책이 나오지 않고 있다. 지식인들조차 우리가 사는 자본주의 시스템이 망하기 전에 인간 세상이 먼저 끝장날 것이라고 탄식을 늘어놓기도 한다.
사실 알면서도 행하기 어렵고 알고 싶지 않은 마음이 작동하는 영역이 적지 않다. 습관과 사회적 관행을 따라서 자동으로 움직이고 실행하는 일상화된 행동 양식이 그렇다. 우리가 기후 변화를 염려하는 생각을 품고 있으나 기후 파괴적인 생활 양식을 바꾸기는 어렵다. 당장 에어컨을 끄기가 쉽지 않다. 소비 선택에서 생각과 행동 사이의 괴리와 모순을 피할 수 없다. 탄소 배출을 줄이기 위해 이동 수단을 바꾸고 비행기 여행을 줄이거나 육식을 금하고 채식으로 전환할 수 있을까? 그만큼 기후 위기 앞에서 진실과 용기를 갖기 어렵다. 자연과학과 기술이 문제를 해결하기를 기대하는 한편, 근본 원인인 경제와 사회 시스템을 어찌할 수 없다고 체념한다. 또한 당장 눈앞에 할 일을 두고 미래를 걱정할 겨를이 없다고 생각한다. 쓰레기 문제를 분리수거 정도의 타협점에서 자기 합리화 기제를 찾는 것처럼 선량한 기후 파괴자가 된다. 이러한 가운데 일상의 몰락과 지구 생태계의 파멸이 서서히 뜨거워지는 더위처럼 다가올 수 있다. 더 이상 여름의 낭만은 없다.
2024-08-21 [17:5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