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00개 언어에 담긴 다양한 인간의 삶

김효정 기자 teresa@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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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가 세계를 감각하는 법/케일럽 에버렛
인류학자이자 언어학자인 저자
환경 생태 따라 사용 언어 달라
언어는 사고 방식 형성 큰 영향
서구 중심 언어 연구 벗어나야

언어는 삶의 방식과 인식을 형성하는데 큰 영향을 미친다. 언어는 삶의 방식과 인식을 형성하는데 큰 영향을 미친다.

“신호등이 빨간색이면 기다려야 하고, 파란색으로 변하면 길을 건너야 해.”

아마도 어린 시절 가장 먼저 배운 사회 규칙인 것 같다. 습관처럼 익숙한 이 말로 인해 곤란을 겪은 적이 있다. 미국에서 운전면허 시험에 응시했을 때다. 먼저 색맹 검사를 하는데, 다양한 색 중 보행 신호등 색과 이름을 말하라고 했다. 자동으로 ‘파랑(블루)’이라는 답이 나왔다. 담당자가 ‘색깔 구분에 문제가 있느냐(color-blind)’라고 말하는 것이 아닌가. 뭐가 잘못된 건지 몰라 당황하는 순간, 함께 간 한국인 유학생이 한국어에는 신호등을 빨강, 파랑, 노랑으로 말한다며 문화 차이로 인한 오해라고 해명해 주었다. 물론 파랑과 녹색을 구분한다는 걸 증명해 시험은 통과했다.

'라떼' 이야기처럼 들리지만, 잊을 수 없는 경험이다. 나중에 찾아보니, 동양과 서양은 색을 인식하는 데 차이가 있었다. 동양에선 무지개를 5가지 색깔로 말했고, 서양에선 7가지 색으로 구분했다. 동양은 비슷한 색을 묶어 넓은 범주의 대표색으로 언급하는 반면 서양은 색을 좀 더 세분화했다. 한국어에서 '푸르다'는 파랑과 녹색을 모두 의미했다. 유치원생부터 영어를 배우고 세계 언어와 문화가 융합되는 지금 시대는 다른 상황이기는 하다.

언어는 삶의 방식과 인식을 형성하는데 큰 영향을 미친다. 언어는 삶의 방식과 인식을 형성하는데 큰 영향을 미친다.

인류학자이자 언어학자인 케일럽 에버렛의 쓴 <언어가 세계를 감각하는 법>을 읽으며 오래 전 경험이 떠올랐다. 이 책의 부제는 ‘다른 언어를 쓰는 사람은 생각하는 방식도 다를까’이다. 과거 언어학에선 세상 모든 언어에는 보편적인 규칙과 비슷한 의미가 있다는 주장이 지배적이었다. 실제로 언어학자들은 이런 규칙과 의미를 찾는 연구를 많이 했다.

그러나 저자는 언어학자인 아버지를 따라 어릴 때부터 아마존을 비롯해 여러 나라에서 살며 자연스럽게 다양한 나라의 언어를 접할 수 있었다. 기존의 언어 연구가 교육 수준이 높고 산업화되고 부유하고 민주적인 서구 사회(western, educated, industrialized, rich, and democratic/저자는 단어의 말 글자를 모아 위어드라고 말함) 중심으로 진행됐기 때문에 언어의 보편성을 찾아낼 수 있었다고 주장한다. 현재 지구상에 존재하는 것으로 추정되는 7000여 개의 언어로 연구 대상을 확대하면, 언어별로 인지 다양성이 두드러진다고 설명한다. 특히 아마존, 동남아시아, 태평양, 오세아니아 등지에 사는 사람들이 쓰는 ‘영어가 아닌 언어’는 삶의 방식과 인식을 형성하는 데 크게 영향을 미쳤다는 사실을 여러 실험과 예시를 통해 증명한다.

<언어가 세계를 감각하는 법> 표지. <언어가 세계를 감각하는 법> 표지.

영어와 한국어에서는 미래가 앞에, 과거가 뒤에 있다고 표현한다. 하지만 볼리비아와 페루 등 약 300만 명이 사용하는 아이마라어는 과거를 앞에, 미래를 뒤에 둔다. 과거는 이미 경험했고 아는 것이며, 미래는 보이지 않고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오스트레일리아 북부 토착어인 쿡타요르어는 태양의 움직임에 빗대 시간을 표현한다. 늦은 아침과 한낮은 ‘해가 중천에 솟을 때’라고 말하며 저녁은 ‘해가 식을 때’라고 말한다. 아마존 언어인 넹가투어의 구사자는 시간을 표현할 때 단어가 아니라 직접적 공간 묘사를 활용한다. 예를 들어 ‘그 사람이 오전 11시에 도착했다’라고 말하려면, 태양이 오전 11시쯤 있는 위치를 구체적으로 가리켜야 한다.

책에선 색 표현과 냄새를 표현하는 어휘, 자주 쓰이는 말이 축약되어 접두사와 접미사로 바뀌는 이유, 문장을 구성하는 필수 성분과 단어의 배열 순서 등 다양한 언어의 모습을 친절하게 설명한다. 언어가 장기간에 걸쳐 사회적, 물리적 환경에 적응하며 변화된 결과를 확인할 수 있다.

흔히 언어는 인류가 가진 가장 유별난 특징이라고 말한다. 이 특징을 잘 이해해야 인간에 대한 새로운 통찰을 알아낼 수 있다. 저자는 우리는 여전히 다양한 언어에 대해 아는 것이 많지 않고, 중요한 사실을 놓치고 있는 것 같다고 한다. 하지만 아쉽게도 7000여 개의 언어 중 21세기를 넘겨 살아남을 수 있는 것은 10%도 안 되는 600개에 불과할 것으로 추정한다.

일자리를 얻기 위해 다수가 쓰는 언어를 구사하는 것이 유리하기 때문에 소수 언어를 쓰는 이들은 다수 언어로 이주하고 있다. 구글 번역으로 대표되는 인공지능 학습 역시 다수 언어의 영향력을 강화하고 있다. 다양한 언어에 대한 기록과 연구가 얼마나 중요한지 느낄 수 있는 책이다. 케일럽 에버렛 지음·노승영 옮김/위즈덤하우스/376쪽/2만 2000원.


김효정 기자 teresa@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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