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연가스·국제유가 올라도 에너지 관련주 지지부진
중동 군사 충돌 수혜 예상 불구
주가 변동성만 커 주주 한숨
트럼프 유가 억제 발언 영향
정부 기름값 인상 경고도 한몫
김정관 산업통상부 장관(오른쪽 두 번째)이 석유 최고가격제 시행 첫날인 지난 13일 서울의 한 주유소를 방문해 한국석유관리원 관계자들이 정량기준탱크를 이용해 유류 정량을 확인하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다. 연합뉴스
직장인 정 모(48) 씨는 미국-이란 전쟁 발발과 이란의 호르무즈해협 봉쇄 가능성 등으로 유가와 천연가스 가격이 급등할 것으로 보고, 지난 3일 국내 증시 개장과 동시에 정유주와 가스주를 매수했다. 전쟁 발발 소식에 주가는 전 거래일 대비 큰 폭으로 올랐다. 중동의 지정학적 위기가 심화되고 전쟁이 단기전에 그치지 않을 것이라는 소식에 정 씨는 더 높은 수익을 기대했다. 하지만 다음 날 장 초반 급등하던 주가는 장중 크게 하락했고, 이후에도 주가는 높은 변동률만 보였을 뿐 계속 하락해 전쟁 발발 전 주가 수준으로 되돌아가 한숨만 쉬고 있다.
미국의 이란 공습으로 촉발된 중동 지역 군사 충돌이 국제 에너지 시장을 뒤흔들고 있다. 전쟁 위기가 고조되면서 국제 유가와 천연가스 가격은 크게 올랐지만, 정작 국내 증시에서 정유주와 가스주 등 에너지 관련주 주주들은 웃지 못하고 있다. 일부 종목은 전쟁 소식이 전해진 직후 하루 또는 이틀 급등한 뒤 곧바로 급락했고,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발언과 이재명 대통령의 유가 억제 정책에 높은 변동성만 보이고 있다.
■“곧 끝날 것” 트럼프 발언, 상승 억제
통상 유가 상승은 정유주와 가스주에 큰 호재로 받아들여진다. 원유 가격이 오르면 재고 평가이익이 발생하고 정제 마진이 확대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번에는 이러한 시장의 공식이 작동하지 않았다. 금융투자업계에서는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잇따른 유가 관련 발언과 정부의 유가 억제 정책과 관련 규제에 유가 상승 폭이 제한되면서 에너지 관련주들이 수혜를 보지 못한 것으로 분석한다.
이번 유가 상승은 중동 지역의 지정학적 긴장이 직접적인 원인이다. 미국의 이란 공습 이후 전쟁이 중동 지역 전역으로 확대되면서 세계 원유 공급망의 핵심 통로인 호르무즈해협의 물류망이 위기에 봉착했다. 호르무즈해협은 전 세계 원유 물동량의 약 20%가 통과하는 전략적 요충지다. 원유 공급 차질 우려가 커지자 시장은 곧바로 이를 가격에 반영했고 국제 유가는 단기간에 큰 폭으로 상승했다.
그러나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유가 급등으로 인한 전 세계 경제 위기보다 전쟁과 안보가 더 중요하다는 강경한 태도를 보이면서도 “전쟁이 끝나면 가격은 떨어질 것이다. 이전보다 더 낮아질 수도 있다” “전쟁은 곧 끝날 것” “호르무즈해협 봉쇄 시 20배 보복하겠다” 등의 발언을 했다. 또 “전략 비축유를 방출하겠다”고 하거나, 이스라엘에 “이란의 에너지 시설을 공격하지 말라”고 요구하기도 했다. 이는 유가 상승을 억제하는 효과로 이어졌고, 정유주와 가스주 역시 이에 반응하며 장중 높은 변동성만 보였을 뿐 반등에는 실패했다. 실제로 지난 9일에는 군사 충돌 심화로 유가가 장중 배럴당 100달러를 넘었다가, 전쟁이 곧 끝날 것이라는 발언 이후 급락하기도 했다.
■정부 '석유 최고가격제'로 압박
정부의 유가 안정 발언이나 정책도 에너지 관련주의 상승을 억제하고 있는 요인으로 꼽힌다. 국제 유가 상승이 곧바로 국내 기름값 상승으로 이어지는 것을 막기 위해 정부가 정유업계에 가격 인상 자제를 요청하면서 투자 심리가 위축됐다는 것이다. 특히 이재명 대통령은 “기름값 바가지에 엄정 대응하겠다”는 경고 메시지를 내놓기도 했다.
여기에 정부가 석유 최고가격제를 지난 13일 전격 실시하면서 투자자들의 투심은 사그라들고 경계심은 커졌다. 최고가격제는 일정 수준 이상으로 판매 가격을 올리지 못하도록 제한하는 제도다. 투자자 입장에서는 정유사의 이익이 정책적으로 제한될 수 있다는 신호로 받아들여질 수밖에 없다.
아울러 국내에 비축 중인 전략 비축유를 방출하고, 해외 원유 수급선을 다변화하려는 정부의 움직임도 에너지 관련주의 상승을 억제하는 효과로 나타났다는 분석이다.
신한투자증권 PWM부산센터 이호석 팀장은 “전쟁 발발 직후에는 국내 에너지 관련 기업들의 수익이 늘어날 것이라는 기대감이 커지면서 주가가 일시적으로 급등했다”며 “하지만 전쟁이 장기화될 경우 정유주와 가스주가 실제 수혜를 입을지에 대한 의문이 커지면서 주가 상승세가 이어지지 못했고, 이 같은 불확실성 속에서 투자자들의 전망이 부정적으로 바뀌며 단기 매매가 늘어나고 주가 변동성만 확대됐다”고 설명했다.
그는 이어 “중동 지역 일부 석유 시설 파괴와 호르무즈해협 긴장 장기화로 국제 유가는 상승 압박을 지속적으로 받을 것으로 보인다”면서도 “다만 트럼프 대통령의 전쟁 조기 종식 가능성 언급과 정부의 석유 최고가격제 시행 등 기름값 상승을 억제하려는 국내외 정치·정책 변수도 존재하는 만큼 투자자들은 이러한 요인들을 함께 고려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이대성 기자 nmaker@busa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