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선비의 사랑과 상실의 기록

김효정 기자 teresa@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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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볼 수도 들을 수도 없구나/신정일
조선 최고 문장가들이 남긴 애도문 44편
절제의 시대에도 감정은 사라지지 않아
글로 쓴 슬픔, 애도의 첫 걸음일 수도

가족, 지인을 잃은 선비의 슬픔을 담은 책 <이제 볼 수도 들을 수도 없구나>의 삽화. 에이콘 제공 가족, 지인을 잃은 선비의 슬픔을 담은 책 <이제 볼 수도 들을 수도 없구나>의 삽화. 에이콘 제공

성리학의 시대인 조선의 선비는 흔히 절제와 체면의 문화 속에서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걸 미덕으로 삼았다. 조선을 배경으로 한 드라마에는 가문의 번성을 위해 지인을 냉정하게 내치거나 예법을 깐깐하게 따지는 양반의 모습이 흔하게 등장한다.

 그러나 이들이 남긴 기록을 보면, 그들 역시 모든 감정을 느끼는 인간이었다. 가족·지인의 죽음에 선비가 남긴 애도문에는 말로 다 설명할 수 없는 슬픔과 그리움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 격정적으로 감정을 폭발시키기도 한다. 사랑하는 이를 잃은 순간만큼은 누구보다 깊이 울었고, 슬픔 앞에서 한 인간으로 무너졌다.

 <이제 볼 수도 들을 수도 없구나>는 조선 선비가 남긴 44편의 애도문을 현대에 맞게 해석한 책이다. 각각의 기록에는 저마다 울림과 여운이 깊다. 어떤 글은 조용히 눈물을 머금은 듯 담담하지만, 또 다른 글은 마음을 쏟아 내며 절규한다.

 책의 제목은 명종부터 인조까지 관리로 출사했던 현곡 조위한의 글에 나오는 문장이다. 강원도 간성으로 발령이 난 그는 아픈 아들을 두고 가는 것이 마음에 걸렸다. 아비의 이런 마음을 안 아들은 자신은 괜찮다고 웃으며 배웅했다. 그런데 간성에 도착하자마자 아들의 부음을 듣고 통곡하며 서둘러 집에 도착했지만, 이미 아들은 염이 끝난 상태였다.

 조위한은 “아아 슬프다. 다시는 이 세상에서 네 모습과 네 목소리를 볼 수도 들을 수도 없단 말이냐. 네가 책 읽던 소리가 귓가에 선명하게 들리는 것 같고, 마당을 지나던 네 모습이 눈앞에 선연하다. 하지만 이제 볼 수도 들을 수도 없음에 눈물이 끝도 없이 흐른다”라는 애도문을 남겼다. 시대와 신분을 초월해 부모가 자식을 먼저 떠나보내는 마음의 무게는 동일한 것이다.

 추사체를 만든 그림·글씨의 대가 김정희도 제주에서 유배 중 부인의 부고를 듣고 밀려오는 슬픔을 이렇게 기록했다. “아아, 산과 바다도 내 마음을 흔들지 못했는데, 한낱 아내의 죽음에 가슴이 무너졌다.” 이 짧은 고백 속에는 유배지 제주의 바람보다 더 차가운 슬픔이 서려 있다. 그가 평생 견고하게 쌓아 올린 ‘선비의 자존심’은 이렇게 무너진다.

 벽오 이시발은 문신으로서 드물게 전장을 누비며 임진왜란, 정유재란, 이괄의 난 등 나라의 위기 속에서 공을 세운 무장형 관료였다. 평생 나라를 위해 한 몸을 바치며 강단 있고 냉철한 인물로 기억된다. 하지만 그 역시 측실 덕수 이씨가 세상을 떠나자 비통함이 가득한 한 편의 제문을 남겼다. 덕수 이씨는 신사임당의 손녀이자 율곡 이이의 조카딸로 이시발은 그녀를 처음 본 순간 반했다고 한다.

 평생 객지를 떠돌았던 이시발을 묵묵히 따라다니며 보살폈고, 병든 몸으로도 남편을 돌보았다. 남편이 사신을 맞이하러 떠난 사이 그녀가 홀로 눈을 감았고, 임금의 명을 거역할 수 없었던 이시발은 임종조차 지키지 못했다. 심지어 장례도 타인에게 맡겼다. 제문에는 그 죄책감과 이별의 참담함이 녹아 있다.

 “아름답던 그대의 얼굴을 이제 다시는 보지 못하게 되었네. 그대 목소리, 그대 얼굴이 아른거려서 애달프기가 한이 없네. 언제나 잊을 수 있겠는가. 이제 오직 바라기를 꿈속에서라도 그대를 한 번씩 만났으면 싶네. 죽으면 서로 만날 수 있다는 말이 사실이라면 얼마 지나지 않아 그대를 다시 만날 수 있을지도 모르겠네. 그대는 떠났으나 나는 아직도 그대를 향해 산다.” 이 세상에서 사라졌지만, 우리는 죽은 이를 부르며 오늘도 살아간다는 사실이 느껴지는 글이다.

 윤선도는 아들을 떠나보낸 후 “눈물이 수저에 흘러내린다”라며 슬픔이 가득 찬 일상을 표현했다. 18년이라는 긴 유배형을 산 정약용은 천주교인으로 셋째 형은 사형당했고, 둘째 형은 유배지에서 죽었다. 여섯 명의 자식을 홍역, 천연두 등 질병으로 먼저 보내며 그때마다 추도문을 썼다. 아무리 배움과 철학이 쌓여도 인간이 감당할 수 없는 운명의 장난 앞에서 속수무책으로 당하는 아픔을 드러낸다.

 이 책은 과거의 글을 단순히 소개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는 이를 잃는 순간, 우리가 어떻게 슬픔을 견디고 살아갈 힘을 얻는지 말한다. 수백 년 전 선비가 남긴 애도문에서 우리는 슬픔과 공존하는 법을 배울 수 있다. 신정일 지음/에이콘/396쪽/2만 3000원.


김효정 기자 teresa@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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