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감] 겨울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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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정아 소설가

빈손으로 터덜터덜 걷는 사람에게 겨울은 냉담하다. 가난한 밥상 앞에서 우는 사람에게 겨울은 비정하다. 차가운 방에서 잠들어야 하는 사람에게 겨울은 혹독하다. 겨울은 그런 계절이다. 무언가의 부재를 더욱 뼈저리게 체감하는 계절. 잃어버린 것들의 빈자리에 칼날 같은 바람이 통과하는 계절. 크리스마스트리의 조명이 빛날수록, 거리에 캐럴송이 신나게 울려 퍼질수록, 세상이 화려하고 소란해질수록, 그 반대편에 있는 누군가는 더욱 외롭고 쓸쓸해지기도 하는 계절.

어떤 말이나 행동은

시간을 훌쩍 넘어서고

공간의 온도와 공기의 흐름을 바꾸고

사람의 마음을 어루만진다

부산에서 멀리 떨어진 북쪽의 추운 도시에 머리가 하얗게 센 남자가 살고 있다. 그의 집은 도시 외곽의 주택가 초입이다. 작고 허름한 그의 단층 주택에는 담벼락이나 울타리가 없어서 집의 창문과 외부 벽면이 행인들에게 그대로 노출되어 있다. 그는 어느 날 하얀 벽면에 스케치를 하고 물감과 붓을 주문해 여러 날에 걸쳐 벽화를 그리기 시작했다. 마을 입구 거주자로서의 책임감을 가지고, 사람들이 그곳을 오갈 때 잠깐이나마 웃음을 지었으면 하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벽화를 그리는 한 달여 동안 그 집 앞을 지나다니던 사람들은 걸음을 멈추고 신기한 듯 쳐다보다가 사진을 찍거나 그에게 말을 걸었다. 그의 그림이 누군가에게는 쉼이 되고, 누군가에게는 즐거움이 되었으며, 누군가에게는 대화가 되었다. 12월이 되자 그는 창문 바깥쪽에 자그마한 트리 장식을 하고 전구를 달았다. 그가 집에 있든 없든 해 질 녘이면 전구에 불이 들어오고 다음 날 동이 트면 불이 꺼지도록 자동 온오프 장치를 만들었다. 노인 거주자가 대부분인 그 마을에 유일하게 여섯 남매를 키우는 젊은 부부가 있는데, 그 집 아이들을 위한 크리스마스트리라고, 아버지는 작업을 마무리한 후 내게 벽화와 창문 사진을 찍어 보내고는 그렇게 말했다. 도심과 시내 중심지 곳곳에 있는 거대하고 화려한 크리스마스트리에 비하면 너무나도 작고 소박했지만, 해가 지면 금세 어둡고 스산해지는 그 마을의 입구를 매일 밤 고요하게 밝히는 작은 불빛이 있다는 것을 생각하면 내 유년의 어떤 순간들도 다시금 따뜻하게 데워지는 기분이 들었다. 그 마을의 여섯 남매를 위한 트리라고는 했지만, 어쩌면 우리 가족에게 차갑고 혹독했던 지난날들, 과거 우리의 겨울을 위한 것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스쳐갔기 때문이다.

며칠 전 갑작스런 추위가 찾아온 어느 날, 나는 일을 끝내고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만원 버스에 몸을 구겨 넣었다. 특별히 힘든 일이 없더라도 그런 시간대에는 누구나 고단해지고 예민해지기 마련이다. 무거운 가방을 멘 채 흔들거리는 버스 손잡이를 잡고 한참 동안 서서 가야 하는 일도, 낯선 타인과 몸을 부딪치며 각자에게 배인 생활의 체취를 좁은 공간 안에서 나누게 되는 일도, 하루치의 고단함에 덤벨 하나를 더 얹는 것만 같다. 그렇게 어깨는 점점 더 아래로 처지고 온몸이 딱딱하게 굳은 빵처럼 느껴질 무렵, 버스 기사님이 마이크에 대고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오늘 하루도 애쓰셨습니다.” 그 순간, 시끌시끌하고 복작거리던 만원 버스 안이 숭고할 정도로 고요해졌다. 기사님은 그 뒤에 다른 말을 덧붙이지 않았는데, 그랬기 때문에 “오늘 하루도 애쓰셨습니다”라는 말이 버스 안에 있던 사람들 모두에게 각자의 무게로 다가왔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떤 이는 가볍게 미소 지었을 것이고, 어떤 이는 눈물이 났을 것이고, 어떤 이는 하루를 더 버틸 힘을 얻었을지도 모른다. 나는 그 한마디에, 이미 지나가 버린 어떤 날들을 위로받았다. 시간은 선형적으로만 흐르지 않고 어느 순간 과거로 회귀하기 때문이다. 어떤 말이나 행동은 그처럼 시간을 훌쩍 넘어서고, 공간의 온도와 공기의 흐름을 바꾸고, 사람의 마음을 어루만진다. 겨울은 냉담하고 비정하고 혹독한 계절이지만, 그렇기에 서로의 미약한 온기마저 소중히 껴안을 수 있는 아름다운 계절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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