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동윤의 비욘드 아크] 12·12로 보는 건축 단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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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상지엔지니어링건축사사무소 대표이사

건축, 권력 메시지 담은 기념비 될 때
도시는 특정 집단의 공간으로 전락
더 나은 삶 꿈꾸는 공공선에 기여해야

1979년 12월 12일에 일어났던 군 내부의 반란은 전두환 군사 정권 탄생의 직접적인 계기가 되었다. 12·12 반란의 주모자들은 군과 정보 조직을 장악하고 국가 실권을 장악했다. 한국 현대사에서 권력이 한순간에 전복된 날이다. 총칼로 정당성을 대신했던 그날 이후, 한국 사회는 오랫동안 ‘권위’라는 이름의 질서 속에서 재편되었다.

독재 정권이나 정당성 없는 권력은 늘 스스로를 과장하거나 정당화해 왔다. 그들은 자신의 위세를 시각적으로 드러내기 위해 건축물을 이용해 왔다. 불안한 정권일수록 건축을 향한 욕망은 더 커질 수밖에 없다. 자신들이 만든 시대를 ‘눈에 보이게’ 남기려는 욕망 때문이다. 이를 역사적 사례에서 확인할 수 있다.

‘전체주의 건축’은 20세기 이탈리아, 독일, 소비에트 등에서 전형적으로 나타난다. 무솔리니는 고대 로마 제국의 위엄을 재현한다는 명분으로 기념비와 대규모 축선을 도시 위에 그었고, 히틀러 역시 세계를 지배할 경우 그에 어울리는 수도인 ‘게르마니아’를 상상하며 알베르트 슈페어에게 설계를 맡겼다. 1939년에 리모델링된 히틀러의 신총통 청사는 히틀러가 청중들에게 연설할 수 있도록 발코니를 추가해 히틀러가 크게 만족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총통 관저는 긴 면에 출입구를 두는 일반적인 건물과 달리 건물의 좁은 측면에서 진입하게 만들어져 긴 복도를 지나게 되어 있다. 기능적으로는 별 쓸모가 없던 건물이지만, 겉모습과 내부 공간이 사람을 주눅들게 만드는 나치의 전체주의에 아주 잘 부합하는 건물이었다. 건축의 형식은 고전주의였으나 내용은 권력과 권위주의의 과시였다. 건축이 통치의 도구가 되었던 셈이다.

우리나라에도 비슷한 역사가 있다. 박정희 정권은 국가 주도의 산업화와 함께 ‘국가적 개발’이라는 이름으로 도시 공간을 대대적으로 재편했다. 고속도로, 산업단지, 수출을 위한 항만이 건설되며 경제 성장을 이끌어냈지만, 도시계획은 사회적 합의라기보다 위계적 명령에 가까웠다.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도시 불균형의 일부는 그 시절의 결정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전두환 정권은 86아시안게임과 88올림픽을 앞두고 국가 이미지를 재정비한다는 명목으로 거대한 도시개발 프로젝트를 밀어붙였다. 이는 공공성을 토대로 한 도시개발이 아니라 국가 이미지와 권력의 안정성을 위한 ‘장식적 규모’가 우선이었고 도시는 이벤트를 위해 조정되었다.

대규모 아파트 단지, 거대한 도로망, 고층 업무시설 등은 효율과 근대화의 상징이면서 동시에 시민 개개인의 삶이 권력 맞춤형으로 재편된 결과이기도 하다.

택지개발과 대규모 아파트 중심의 주거 공급은 기존의 마을, 골목 등 삶의 공동체를 해체했다. 원주민, 세입자, 철거민들은 새로운 아파트 입주권을 받지만, 현실적으로 이들에겐 과도한 부담이었다. 결국 그들은 삶의 공간을 내어주고 더 구석으로 내몰리게 된다. 이런 도시 재편은 지역 간, 계층 간 격차를 만들었고, 공간의 불균형은 사회적 불평등의 표현으로 나타났다.

이런 역사적 경험은 과거의 유물이 아니다. 민주주의 체제에서도 건축은 여전히 힘의 함수로 움직인다. 특정 개발 사업이 여론보다는 거대한 자본의 논리에 따라갈 때나 초고층 건물이 도시의 상징이 되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는 것은 지금의 도시 정책과 건축이 반영한 자본의 욕망이다.

건축이 시민의 삶을 담는 공간이 아니라 권력의 메시지를 담은 기념비가 될 때 도시는 특정 집단의 공간이 된다. 민주주의 사회에서도 대규모 개발, 고층 빌딩, 재개발, 뉴타운, 신도시 등은 단순히 주거 해결책이 아니라 권력과 자본의 결합으로 나타나기 쉽다. 그럴 때마다 도시의 공간성은 정치적 선택의 결과가 된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건축과 도시는 한 번 완성되면 쉽게 되돌릴 수 없다는 점이다. 권력이 남긴 흔적은 도시 속에 박제되어 다음 세대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시민과 사회가 어떤 기준으로 비판하고 감시할지가 중요하다. 사회적 공감과 공공성의 원칙이 반드시 따라야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12·12 사태 후 전두환은 5·18 광주민주화운동을 비롯한 국민들의 저항을 무력으로 진압하고 1980년 8월 대통령으로 취임했다. 5·18 광주민주화운동 당시에는 공수부대가 헬기를 타고 광주로 갔다. 지난해 12월 3일에도 공수부대가 헬기를 타고 국회에 진입했다. 만약, 그날 비상계엄이 그대로 진행되었다면, 오늘 우리는 어떤 시공간을 맞이하고 있을까.

한 해를 보내는 12월이다. 차가운 공기 속에서도 우리가 다시 서로를 돌아보게 되는 이유는 도시도, 기억도 사람의 온기로 유지되기 때문이다. 부디 새해에는 우리의 도시와 건축이 더 나은 삶을 꿈꿀 수 있는 공공선에 기여했으면 하는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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