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감] 자식은 부모에게 행복을 주는 존재일까
이국환 동아대 한국어문학과 교수
진화 관점서 가장 중요한 건 생존
유아기 자녀 양육은 가혹하지만
부모 뇌엔 강력한 돌봄 회로 작동
소소하지만 잦은 행복 주는 존재
자식이 부모에게 행복을 준다는 믿음은 어느 나라든 강력한 힘을 지닌다. 진화의 관점에서 인류에게 이런 믿음이 없었다면 우리는 이미 멸종했을지 모른다. 그런데 소득이 늘고 교육 수준이 높아질수록 출산율은 낮아진다. 내가 결혼한 이후 집안 대소사에 참석하면, 우리 부모는 물론이고 일가친지까지 초읽기 하듯 아이는 언제 낳느냐고 물었다. 그 물음에 진저리 치던 아내는 딸에게 굳이 결혼과 출산을 의무로 강요하지 않는다.
분명한 것은, 이것은 진화가 원하는 방향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진화의 관점에서 인간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생존’이고, 행복마저 목적이 아니라 생존을 위한 수단이라는 연구들이 속속 등장하고 있다. 먹는 것과 섹스가 인간에게 큰 즐거움을 주는 이유는 이것이 생존을 위한 가장 중요한 수단이기 때문이다. 개체는 행복해야 이 두 행위를 지속할 것이고, 그 덕분에 집단은 생존하고 번식한다.
부모에게 자녀의 유아기는 얼마나 가혹한가. 아이가 기저귀를 차고 누워 있는 순간을 시작으로, 어디로 튈지 모르며 뛰어다니면, 부모는 위기를 맞는다. 대부분 여성은 양육보다 백화점에서 쇼핑하거나 친구를 만날 때 행복을 느낀다고 한다. 하지만 모임에 나가면, 자녀 양육이 얼마나 멋진 일이며, 아이가 주는 행복이 얼마나 큰지 모른다며 입을 모은다. 이것은 자신의 선택을 정당화하여 ‘인지 부조화’를 해소하려는 노력일 수도 있지만, 첼시 코나보이가 〈부모됨의 뇌과학〉에서 밝힌 ‘돌봄 회로’(caregiving circuitry)가 우리 안에 강력히 작동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러한 자녀 돌봄 회로는 간호사가 되었다, 요리사가 되었다, 운전사가 되었다가 결국 입시 전문가가 되는 초인적인 노력을 요구하며, 나아가 부모의 인생 자체를 바꾼다. 좋은 부모가 되고자 평소 읽지 않던 책을 읽고, 도서관이나 미술관도 가본다. “자식이 뭘 보고 배우겠어요!”라는 말이 듣고 싶지 않아 말투를 신경 쓰고, 거친 행동은 순화한다. 아이들은 가끔 부모를 미치기 직전까지 몰아갈 만큼 힘들게 하지만, 덕분에 우울해할 시간도 앗아간다.
고단한 일과를 마치고 귀가하는 부모는, 달려와 품에 안기는 자녀를 보며 느끼는 행복이 승진이나 적금을 털어 마련한 자동차보다 더 크다는 사실을 실감한다. 승진, 자동차나 명품 구매 등이 주는 행복은, 매우 강력하지만 자주 일어날 수 없다. 행복한 감정은 아무리 강해도 금세 사라지도록, 그렇게 초기화되도록 우리 유전자에 설계되어 있다. 그래야만 인간은 다음 행복을 위해 노력하며 생존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행복은 강도가 아니라 빈도’라는 행복심리학의 주장이 설득력을 얻는다. 승진이나 자동차 구매는 매일 할 수 없지만, 아이와 눈을 맞추고, 아이가 달려와 품에 안기는 소소한 행복은 매일 찾아온다.
유대인의 언어 ‘이디시어’에서 유래된 ‘나케스’(naches)라는 말이 있다. 자녀의 성취에서 비롯된 부모의 자부심과 기쁨을 이르는 단어로, 자식을 향한 부모의 행복한 마음을 표현할 때 사용한다. 기던 아이가 걷기만 해도 그 성취에 행복을 느끼며 주위에 자랑하는 것이 부모다. “우리 아이가 드디어 걸었어요!” 명문대 합격이나 대기업 입사가 아니라도, 꼭 의사나 변호사가 되지 않더라도, 자식의 모든 성취는 부모에게 나케스다.
이디시어는 ‘마메 로슨’(mame-loshn)이라 불리기도 했다. 이는 어머니가 자녀에게 전하는 ‘어머니의 언어’라는 뜻이다. 엄마는 아이를 가슴에 품고 토닥이며 나케스의 의미를 전한다. “너는 내게 큰 기쁨과 행복을 주는 존재란다.” 기던 아이가 걸을 것이고, 걷던 아이가 뛸 것이다. 어느 날 말을 배워 ‘엄마’라 부르고, 훗날 인생의 여러 관문을 힘겹게 통과할 것이다. 그러다 먼 훗날, 지팡이 짚은 부모를 부축해 병원에 데려다 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