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모룡 칼럼] 개항 150주년을 맞는 부산항의 기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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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평론가 한국해양대 명예교수

1902~1908년 북항 매축 실시
부산세관 등 공공·상업시설 들어서

식민지 축항 공사로 부산항 재편
귀환과 전쟁으로 국제항 도약

1부두 세계유산 잠정 목록 등재
근대 항만이 달려온 ‘시간의 켜’

내년이면 부산항 개항 150주년을 맞는다. 1876년 강화도조약으로 조선은 쇄국을 걷고 해역으로 나라를 열게 되었다. 이즈음이 범선 시대가 막을 내리고 기선 시대가 시작되는 시점이라는 사실도 기억돼야 한다. 중일 간의 기선 항로를 두고 영국, 미국, 프랑스가 경합하는 상황에서 일본도 1875년에 요코하마, 고베, 시모노세키, 나가사키와 상해를 잇는 항로를 개설했다. 이러한 사정에서 조선의 부산이 네트워크의 주요한 결절지로 인식됐다. 메이지 정부는 이미 쓰시마 소씨(宗氏)로부터 조선 외교의 권한을 박탈하고 1872년 외무성 관리를 왜관에 파견해 관리했다. 조선 정부는 소씨에서 메이지 정부로 왜관을 빌리는 주체가 바뀌는 정도로 간주했다. 일본이 요구한 개항은 초량 왜관에서 쓰시마로 향하는 항로를 나가사키나 시모노세키로 돌리는 일과 무관하지 않다. 항로의 변경으로 쓰시마는 주식인 쌀 등을 수입할 수 없어 곤경에 처하게 된다. 한편 왜관의 7000평 규모 선유장은 기선의 정박을 감당하기엔 이미 힘든 상황이었다. 증기선은 외항에 정박할 수밖에 없었는데 물동량을 감당하기 위한 시설을 설비하기 위한 매축과 매립이 시급했다. 개항 이후 접안시설이 미비한 상태는 1906년 부산항 잔교 부두 설치까지 지속한다. 1905년 취항한 관부연락선조차 외항에 정박하고서 선박과 물량을 통선이 실어 나르는 형편이었다.

조선 정부로부터 북빈(北濱, 지금의 부산 북항) 매축이 허가 난 해는 1897년이다. 공사는 1902년 부산매축주식회사가 설립되면서 1908년 9월까지 실현돼 부산역, 부산세관 등의 공공시설과 해운회사, 운송회사, 창고, 여관 등의 상업시설이 들어섰다. 선박 정박과 물자 수송을 위한 잔교 부두가 1906년 준공되면서, 이 시설은 주로 관부연락선의 거점으로 활용됐다. 이렇게 부산항은 어느 정도 근대적인 면모를 갖추어 갔으나 아직 본격적인 부두 건립은 시작되지 않았다. 1910년 조선을 병합한 일본은 본격적인 식민 지배를 위해 조선총독부 토목국을 통해 부산항 매축에 박차를 가한다. 1909년 영선산을 깎아 경부선 철도와 부두를 연결한 착평 공사는 1917년까지 진행된 부산진매축공사로 더욱 확대된다. 이를 통해 철도 관련 시설과 창고 그리고 화물 시설 등이 늘어난다. 축항 공사는 부산항의 준설과 방파제 축조, 연안 무역 설비 등을 확충해 부산 항만시설을 크게 변화시켰다. 돌제(突堤) 매축 부두 남측에 제1잔교가 1912년 2월에 만들어지고 북측에 제2잔교가 1917년에 완공된다. 1936년부터 일제가 패망하는 1945년까지 축항 공사가 이어지며 제3부두, 제4부두, 중앙부두가 건설돼 1940년 당시 요코하마, 다롄, 기륭 등을 포함한 일본제국의 14개 무역항 가운데 나고야, 고베 등에 버금가는 항구시설을 갖추었다고 한다.

태평양 전쟁에서 일본이 패망하면서 부산항이 차지하는 비중과 위상은 다시 커진다. 조선인 귀환자와 일본인 귀환자가 1945년 하반기부터 1946년 상반기까지 넘쳐났다. 1944년 5월 당시 부산 거주 인구는 33만여 명인데 이중 20%가 일본인이었다. 부산항이 미군정당국에 접수된 1945년 9월 23일 이후에 연락선을 이용해 귀환이 진행됐다. 해방은 부산항을 신생 한국의 제일 국제항만이 되게 했다. 이는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하면서 더욱 그 위상이 중요하게 부각한다. 1950년 7월 말 미군은 전쟁에 대한 확신이 뿌리째 흔들려 차라리 한국에서 완전히 철수하는 편이 낫지 않을까 자문하면서 아직 투입하지 않는 새 병력을 되돌려 보낼 각오까지 하고 있었다. 미국, 영국, 네덜란드, 오스트레일리아, 캐나다, 프랑스가 보낸 함정과 통보함 등이 도착했고 마침내 8월 2일 미 해병을 가득 실은 첫 번째 빅토리호가 부산항으로 들어오게 된다. 물자를 실은 거대한 증기선과 군함이 부산항 제1·2부두를 내왕하면서 전시 상황이 전환하게 된다. 이로써 부산이 세계적 토포스(topos)의 위상을 갖는다.

1955년부터 1959년까지 제1부두에서 제4부두에 이르는 정비 공사가 진행됐다. 이때 조명과 급수시설이 복구되고, 도로 포장과 간선도로 정비도 함께 이뤄졌다. 특히 국제개발처의 원조로 제1부두 남측에 4000평 규모의 어시장 부지를 정해 1963년 부산종합어시장이 열리면서 운영되다 1971년 명칭이 부산공동어시장으로 바뀌었고 1973년 남부민동으로 이전했다. 제1부두 북측은 그대로 무역 부두로 사용되었으나 남측은 1974년부터 진행된 부산항 제1단계 개발 사업에 따라서 콘크리트 잔교, 국제여객선터미널 건물, 컨테이너 야적장 등이 새로 만들어졌다. 1980년까지 진행된 국제여객터미널 건립으로 제1부두의 본래 기능을 회복했다. 하지만 2015년 국제여객터미널이 중앙부두로 이전하면서 국제항으로서의 위상을 상실하고 말았다. 현재 1부두는 피란수도 유산 가운데 하나로 유네스코 세계유산 잠정 목록에 등재돼 조사와 발굴이 진행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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