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물썰물] 편지를 불태운 까닭

이상윤 논설위원 nurumi@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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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후한 위·촉·오 삼국 정립 직전인 서기 200년에 벌어진 관도대전은 중국의 요지 중 요지인 화북대평원의 주인을 가리는 전쟁이었다. 신흥 군벌로 샛별처럼 떠오르는 조조와 대대로 명문 가문이었던 원소가 벌인 이 관도대전은 원소의 군량을 태워버린 조조의 승리로 끝을 맺었다. 어떤 역사학자는 이 관도대전으로 중국의 80%가 조조의 손에 들어갔기 때문에 이후 촉이나 오의 등장과 삼국 정립은 무의미하다는 평가를 내놓기도 한다.

이처럼 엄청난 전쟁이었던 관도대전이 끝난 뒤 조조는 원소의 군영에 들어갔다가 자신의 군영과 오간 엄청난 양의 편지 꾸러미를 발견한다. 편지 겉면을 훑어보던 조조는 편지의 양으로 미뤄 볼 때 측근까지 원소와 내통하는 편지를 주고받았을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경악을 금치 못했다. 조조의 군영에서는 곧 엄청난 피바람이 불어닥치리라 예상하고 공포감이 극에 달했다.

평소 냉혹한 조조의 성격을 감안하면 무자비한 숙청이 이어졌을 것 같지만 조조는 예상과는 다른 선택을 한다. 조조는 편지 꾸러미를 읽어보지도 않고 모두 불태우라고 명령했다. 내통자들을 적발하고 숙청해야 정권이 안정된다는 주변의 조언에 조조는 “원소가 강성했을 때는 나조차 이길 수 있을지 확신하지 못했거늘 뭇사람들이야 오죽했겠는가”라고 일갈했다. 물론 조조의 이 같은 퍼포먼스는 화북 일대에 뿌리 깊은 친원소 세력을 포용해야 할 필요성을 염두에 둔 냉정한 계산이라 볼 수도 있다. 하지만 아무나 그런 통합의 리더십을 보이기 어렵다는 점에서 높이 평가받아야 마땅하다.

최근 이재명 정부는 계엄 가담자 적발을 특검에만 의존할 수 없다는 이유를 들며 행정부 안에 ‘헌법존중 TF’를 운영하겠다고 나섰다. 국무위원도 제대로 몰랐던 계엄의 가담자가 얼마나 적발될지는 알 수 없다. 반면 상호 감시와 상호 신고를 하는 방식 때문에 공직사회에 밀고가 횡행하지나 않을까 하는 우려는 매우 크다.

이 대통령은 취임 30일 기념 기자회견에서 “직업 공무원들은 최종 인사권자가 시키는 대로 한다”고 지적하고 “한쪽만 골라내면 남는 게 없다”며 성향에 관계 없이 모두 포용해 쓰겠다는 말로 큰 박수를 받은 바 있다. 당시의 박수는 포용과 화합을 원하는 국민들의 진심어린 여론이었을 것이다. 대통령과 여권은 취임 초 큰 박수를 받았던 그 포용의 정신을 잊지 않았으면 한다. 포용의 리더십을 쓴 조조가 결국 중국을 제패했다는 사실도.


이상윤 논설위원 nurumi@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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