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년 된 1000평 공장에서 여는 설치미술, 경계와 불안을 껴안다
설치 예술 작가·건축가 한원석 개인전
‘지각의 경계: 검은 구멍 속 사유’ 주제
11월 16일까지 동일고무벨트 동래공장
“8년째 작업실 지원해 준 감사함에 제안”
가동을 멈춘 1000여 평 규모의 산업 공간이 전시장으로 탈바꿈했다. 부산 출생으로 영국(런던)과 한국을 오가며 활동하는 한원석 작가의 개인전 ‘지각의 경계: 검은 구멍 속 사유’가 지난 17일 부산 동래구 옛 동일고무벨트(DRB) 동래공장에서 개막했다. 1945년 문을 연 동래공장은 현재 비어 있고, 바로 옆 부지엔 유관기업인 수안커피컴퍼니가 들어섰다. 전시는 동래공장 1, 2층과 야외 공간을 활용해 이뤄진다. 한 작가는 영국 첼시 예술 디자인 대학 예술학 석사와 일본 도쿄대 건축학과 건축학 박사과정을 수료한 건축가이자 설치미술가이다.
■80년 된 공장, 그 자체가 설치작품이 되다
한 작가의 이번 전시는 한국문화예술위원회(아르코) 2025 다원예술창작산실에 선정된 프로젝트이다. 원래는 서울화력발전소(당인리 발전소) 프로젝트로 기획되었지만, 당인리 발전소 사정으로 전시가 어렵게 되자 ‘부산행’을 결정했다. 부산 작업이 이번이 세 번째이다.
“작가로서 정말 힘든 시기가 있었어요. 그땐 붓을 꺾고 싶을 정도였으니까요. 세상을 정처 없이 떠돌다가 고향 부산으로 돌아와야겠다 싶어서 작업실을 알아보던 중 DRB의 사회공헌 플랫폼 ‘캠퍼스 디’(Campus D)와 연결됐고, 거기서 부산 작업실을 지원받아 8년째 쓰고 있어요. 작가에게 작업실은 50% 이상 작품을 했다고도 볼 수 있을 만큼 중요하죠. 요새 핫하다는 성수동에서 해 볼까 하는 마음도 없지 않았지만, 보답하는 마음으로 DRB의 모태가 된 동래공장 전시를 제안하게 된 겁니다.”
정식 전시 공간이 아닌 데다 오랜 시간 공장으로 사용하다 비어 있던 곳이어서 설치작업이 쉽지 않았다. “공장의 오래된 질감과 구조를 존중하는 것이 곧 예술의 시작이어서 가능하면 못 하나도 박지 않으려고 애썼어요. 2층 전시 공간인 폐목욕탕 영상(송지훈 작가의 ‘정화’)을 보면 아시겠지만, 먼지 하나도 치우지 않으려고 노력했으니까요. ‘예술이 무엇이냐’ 경계를 논하기는 어렵지만, 저는 이번 전시 공장 자체가 예술이라고 생각해요. 80년을 쉼 없이 꿈틀대던 시간이 한순간에 멎었지만, 거기엔 작가들이 담지 못하는 수많은 이야기가 있을 테니까요. 최소한의 개입으로 저 공간과 하나가 되고자 노력했던 부분이 좀 힘들었어요.”
전시장인 1층 공장에 들어서면 어둠이 밀려온다. 그리고 들려오는 영상 소리. 눈은 저절로 화면으로 옮겨가서 멈춘다. 한원석·송지훈의 영상 ‘여향’이 상영 중이다. 그때 그 시절, 이 공장에서 청춘을 불살랐을 노동자들도 나오고, 물난리를 겪었는지 그 모습도 보인다. 그 위로 투영되는 한 작가의 모습. 이제 발걸음은 공장 안으로 향한다. 지름 크기가 각각 다른 111개의 폐지관을 설치해 울림통을 삼은 ‘검은 구멍 속 사유’(한원석·유영은) 가변 설치를 만날 수 있다. 재생 종이로 만든 폐지관 안에는 원통형 스피커를 수십 개나 심었다. 각 기둥에서 재생되는 사운드는 고무벨트 제품의 실제 작동 주파수와 rpm을 기반으로 설계돼 관람객이 일정 거리에 접근할 때만 소리를 낸다. “광복 이후 한국 산업화 시대의 소리를 재연”한다더니 사라진 노동의 숨결 같기도, 멈춘 시간의 진동 같기도 하다. 벽 쪽으로 보이는 각종 기기도 이번 전시에 맞춰 한 작가가 재배치했다는데 원래 있던 것처럼 자연스러웠다. 산업과 기억, 감각과 예술이 교차하는 현장이다.
한 작가에게 있어서 사운드(소리) 작업은 매우 중요하다. “저는 오브제와 건물이 하나가 되는 작업을 하는 거고, 음악은 본드 역할을 하는 거죠. 그 사이가 저한테는 ‘경계’라고 할 수 있어요. 경계의 확장을 저는 음악, 즉 소리로 하는 거죠. 이번 전시 역시 시각적 유혹에서 벗어나 소리를 형상화하고 싶었어요.”
전시 제목에도 포함되지만, 한 작가에게 있어서 ‘경계’란 정체성과 다름없다. “‘검은 구멍’을 영어로 표현하면 ‘블랙홀’(black hole)인데, 저한테 검은색은 흰색보다 더 따뜻하고 휴식을 주는 색이에요. ‘구멍’도 경계의 공간이고요. 그 경계로 사람들을 초대하고 싶어요. 예전에는 어디에도 속하지 못하는 게 불안했지만, 이제는 어디에 속하려 애쓰기보다 경계 그 자체에서 편안함을 느끼고 있습니다.”
■“건축과 오브제, 하나 되는 작품” 하고 싶어
사실 그의 원래 전공은 건축이다. “작가가 되려고 노가다를 하다가 건축가가 됐어요. 작가를 하고 싶은데, 한국에 있으니까 자꾸 건축 일만 들어오고….” 그렇게 할 수 없이 영국으로 건너갔다. 물론 건축이 싫지는 않았고, 소소하게 설계 작업도 한다. “작업을 못 하게 된 환경이 싫었어요. 영국에서 5년 동안 있으면서 건축과 오브제를 하나로 합치는 작업을 해 보자 싶었어요.”
2003년 10만여 개의 담배꽁초를 모아서 커다란 꽃(조지아 오키프의 꽃)을 그린 한국 첫 전시를 비롯해, 2006년 청계천 복원 1주년 기념 ‘환생’(還生, 폐헤드라이트 1450개를 쌓아 만든 첨성대), 2008년 부산비엔날레에서 공개된 ‘형연’(泂然, 폐스피커 3650개로 제작한 성덕대왕신종), 2019년 부산국제영화제와 부산은행 후원으로 만들어진 부산 원도심 상징물 ‘도경’(到耿), 쌍용양회의 폐사일로 조각으로 만든 ‘달의 창’(月窓), 그리고 2025 경주 APEC 기념 조형물 ‘환영’(環影)에 이르기까지 그에게 건축과 오브제는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였다.
그러고 보니 한 작가의 작업 대부분이 ‘모아서, 쌓는 것’이다. 인고와 노력을 보여주고 있다. “미술관 전시를 초대해 주는 것도 아니어서 남들이 쓰지 않는 공간, 남들이 쓰지 않는 재료를 찾게 된 것 같아요. 그것을 좀 더 체계적으로 만드는 건 제가 건축을 공부한 게 많은 도움이 됐고요. 사실, 형태가 중요한 건 아닙니다. 쓰레기를 모아서 불을 켰다는 데 의의가 있어요.”
공장 바깥으로 나왔다. 1층 실내에서 2층으로 통하는 계단이 있지만 안전 문제로 막아놨다. 대신, 2층 외부 계단을 통해서 올라가면 텅 비어 있는 공간을 만난다. 그곳에선 AR 기기를 착용하게 돼 있다. 그러자 바닥에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 검은 구멍(한원석·송지훈 ‘지각의 경계’)이 나타났다. 가상의 구멍은 착시를 넘어 현실의 불안정성과 새로운 가능성을 동시에 느끼게 한다. 포토 슬라이드(한원석·송지훈 ‘행적’)가 돌아가는 공간을 지나면 폐목욕탕으로 연결된다. 낡은 샤워기와 욕탕이 예전 그대로이다. 욕탕 안에선 프로젝션 매핑된 빛의 물고기가 뛰논다. 물 대신 채운 빛이다. 결핍을 회복으로 시각화한 과정이 재미있다.
이제 마지막으로 2층 공간 오른쪽 끝 지점에 ‘위험! 그러나’가 표시된 쪽문으로 향했다. 관람 순서는 상관없다. 안전 문제로 차단한 1층 계단을 통해 연결되는 2층 공간이다. 한 작가의 ‘검은 구멍’이 설치돼 있다. 온통 붉은색이지만, 새소리 사운드와 함께 묘하게 차분해진다. 작가의 사유가 태어난 곳이라고 강조할 만큼 각별하다. 안전 문제로 가까이 다가갈 순 없고, 먼발치에서라도 볼 수 있도록 작가가 임시 발코니를 만들었다.
외부에도 한 작가 작품이 있다. 금속 수도관과 스피커로 만든 ‘소리나무 2025’는 공장 야외 부지에 세웠다. 원형의 굴뚝 조각 ‘The black chimney’도 있다. 80년 전 동일고무벨트를 상징하던 콘크리트 굴뚝 조각으로 만들어 글씨(당신의 경계를 찾아서)를 써넣었다. 전시장 입구에는 폐헤드라이트로 만든 달항아리인 ‘환월 2025’가 세워져 있다. 3분의 2 정도 만들었다가 마음에 들지 않아서 부수고 다시 작업 중이다. 다가오는 12월엔 서울 청계천 전시도 예정돼 있다. 전시장을 방문했을 때 운 좋으면 작업 중인 작가를 만날 수 있을 것이다.
전시는 내달 16일까지이고, 전시장(공장) 주소는 부산 동래구 충렬대로 238번가길 13이다. 관람 시간은 화~일요일 낮 12시~오후 7시(매주 월요일 휴무)에 무료입장이다.
김은영 기자 key66@busa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