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기의 미술 미학 이야기] 개천절에 다시 읽는 박수근 환대의 미학
10월 3일 개천절. 단군신화에서 개천은 그저 새로운 나라의 출발이 아니라, 인간 공동체가 함께 살아가는 길이 열렸음을 뜻한다. 곰과 호랑이가 인간이 되기를 염원한 이야기는, 인간이 아닌 존재가 ‘다른 삶의 가능성’을 얻어 새롭게 세계에 들어오는 서사다. 신화에서 곰의 인간됨은 타자의 얼굴을 맞이하는 환대의 가능성을 신화적으로 보여준다. 따라서 개천절은 민족적 기원일 뿐 아니라, 타자에게 열린 세계라는 보편적 의미를 담고 있다.
레비나스는 서양 철학이란 존재론 중심의 이성주의 철학으로서 모든 존재자의 타자성을 제거하여 동일자로 환원하는 것이라고 포착한다. 그런데 이러한 동일성 중심의 사고는 그 극단에서 타자에 대한 폭력으로서 파시즘으로 귀결되었고, 그 극단적 현상 형태가 아우슈비츠와 같은 집단수용소였다. 레비나스는 이러한 동일성 사고, 동일성 철학을 넘어서는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환대’를 내세운다. 레비나스에게 환대란 타자를 주체의 동일성 속에 흡수하는 것이 아니라, 타자성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이 타자 또는 타인은 우리에게 얼굴의 모습으로 나타나는 사람이다.
얼굴은 숨김없이 드러나며 위협 앞에 노출되어 있다. 얼굴은 우리가 대면하여 마주 보고 경험하는 얼굴이다. 이렇게 숨김없이 드러나는 얼굴, 살갗인 그대로 드러나는 얼굴이 ‘벌거벗은 얼굴’이다. 벌거벗었다는 것은 이 타인이 모든 상황과 맥락에서 벗어났다는 것을 말한다. 이 벌거벗음 상태의 타인은 고통과 위협에 노출되어 있는 자이며, 이러한 타인을 환대하는 주체는 상처받을 수 있는 타인, 고통을 받는 타인을 책임지는 주체, 타인을 대신해서 고통받는 윤리적 주체이다.
박수근은 전후의 격변기 속에서 노점상, 애 보는 소녀, 실직자 등 다양한 타자를 시각적으로 포착한다. 인물들은 가난하고 고단한 서민들이지만, 그는 이들을 단순한 연민의 대상으로 만들지 않는다. 대신 나에게 벌거벗은 얼굴로 다가오고, 그래서 내가 표상하지 못했던 타자를 마주하여 나를 윤리적으로 각성할 수 있게 해 준다. 이것은 레비나스가 말하는 “타자의 얼굴을 맞이하는 윤리적 순간”과 맥을 같이 한다. 그의 화폭은 이웃과 서민을 통해 ‘예술 속 환대의 장’을 열어준다.
개천절의 ‘하늘 열림’은 민족의 기원을 넘어, 타자에게 열린 세계로도 해석될 수 있다. 박수근의 하늘은 모든 이에게 공평히 열린 하늘이다. 그 하늘 아래, 우리는 서로를 환대하는 공동체를 상상할 수 있다. 박수근의 그림은 소박한 숭고일 뿐 아니라, 소박한 환대이기도 하다. 그의 화면은 타자를 밀어내지 않고, 그 평범한 얼굴들을 통해 관람자를 부드럽게 맞이한다. 이는 레비나스적 의미에서 “타자에게 열린 환대의 공간”이라 부를 수 있을 것이다. 미술평론가·철학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