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을 여는 시] 길 위에서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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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병률(1967~)

길 가던 고슴도치가

밤송이를 만나서 말했다

이봐 그딴 가시 좀 치워주지 그래

길 가는 데 방해가 되는구먼

밤송이는 말이 없고

그 옆에서 밤껍질을 갉작이고 있던

다람쥐가 말했다

너도 그 곤두세운 가시 좀 치워보지 그래

그 속에 무엇이 들었는지 확인해보게

고슴도치가 지나가고

다람쥐도 사라지고

길 위엔 알맹이 없는 밤송이만 남았다

지나가는 바람에 밤송이가

중얼거리는 말이 새어 나왔다

내가 스스로 익어 벌어지기 전까진

내 몸에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못하던 것들이

시집 〈누군가를 이토록 사랑한 적〉 (2024) 중에서

거리 어느 한 귀퉁이에 군밤장수 리어카가 등장하는 가을이 왔습니다. 부드러운 속살을 가진 밤들은 가시로 무장한 껍질을 벗겨낸 것이었지요.

이 시는 한 편의 동화를 보는 듯합니다만 시의 말미에 있는 밤송이의 일침에 통쾌하기도 하고, 마음 어딘가를 찔린 듯한 기분이 들기도 합니다. 내가 가진 가시는 모르고 남의 가시만 탓했던 일들이 많았을테니까요.

산짐승들의 귀한 양식. 맛있는 건 벌레가 벌써 알고 먹기 시작한 밤. 한겨울 비상식량으로 묻어둔 밤송이가 봄이면 싹을 틔울지도 모를 일, 언젠가 한그루 밤나무가 될지도 모를 일입니다.

허약체질에 좋다는 밤. 다이어트에 좋다는 밤. 성장발육에 좋다는 밤. 어릴 적 성묘 가는 길에 밤나무가 떨어뜨린 밤을 줍곤 했는데 지금은 추억 속의 일입니다. 신정민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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