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설위원의 시선] 고개 드는 개헌론, 화두는 ‘분권’
대통령 권한 분산과 함께 지방분권 규정 강화가 핵심
1987년 이후 없었던 개헌은 한국 정치의 숙명적 과제다. 윤석열 대통령에 대한 헌법재판소의 탄핵심판이 마무리 국면에 접어들면서 정치계, 학계, 시민단체 등을 중심으로 헌법 개정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고개를 들고 있다. 이미 비상계엄과 대통령 탄핵 사태를 겪은 지난해 연말부터 ‘87년 체제’가 시효를 다했다는 인식은 널리 퍼졌다. 개헌의 필요성을 누구도 부정하기 힘든 변곡점의 시기. 개헌 논의의 방향성을 위해 개헌의 과거와 현재, 미래를 살피고자 한다.
■9번 중 5번이 정권 연장용
한국에서 이뤄진 개헌은 좋지 않은 기억이 대부분이다. 1948년 제헌헌법 제정 이후 9차례의 개헌이 있었는데, 이 중 5차례가 정권 장악 또는 정권 연장이라는 불순한 목적에 따른 것이었다.
1954년 2차 개헌이 그늘진 헌정사의 시작이다. 투표 결과 개헌에 필요한 표가 딱 1표 모자라자 집권 여당이 ‘사사오입’이라는 기상천외의 방법으로 부결을 의결로 뒤집었다. 1969년 6차 개헌은 ‘3선 개헌’으로 유명하다. 박정희 대통령의 3번째 연임이 가능하도록 헌법 규정을 바꾸기 위해 여당이 국회 본회의장이 아닌 별관으로 옮겨 날치기 통과 기술을 선보인 게 바로 그때다. 1972년 7차 개헌은 유신헌법의 선포였다. 개헌 작업은 철저히 비밀에 부쳐져 헌정사상 처음으로 공론화 과정이 생략됐다. 정체불명의 체육관 선거에서 대통령 지지율은 99%라는 전대미문의 기록을 낳았다.
1980년 신군부가 체육관 선거를 모방한 8차 개헌은 유신헌법의 아류였다. 개헌을 논의할 국회가 존재하지 않았던 게 가장 큰 특징이다. 행정·입법권을 장악한 국가재건최고회의와 국가보위대책회의라는 불법조직이 개헌 작업을 도맡았기 때문.
개헌 역사의 대부분은 어둠으로 가득했지만, 1980년대 두 차례의 개헌은 달랐다. 1980년 봄의 개헌 논의는 민주적인 대통령을 선출하는 문제와 함께 대통령 권한에 대한 견제를 중점적으로 다뤘다. 대통령 직선제와 4년 중임제 방안이 그때 나왔다. 안타깝게도 이런 노력들은 신군부 집권으로 모두 물거품이 되고 만다.
1986년 개헌 논의는 국민과 야당의 거센 요구가 정부 여당을 견인해 낸 결과다. 1987년 9차 개헌은 군부독재 종식과 형식적 민주 체제의 구축이라는 성과를 거뒀다. 하지만 당시 분출했던 다양한 의견들을 흡수하지 못한 한계도 분명하다. 그로부터 40년 가까이 우리 헌법은 동면 상태다.
■협력·견제를 통한 민주적 공동체로
‘87년 헌법’은 민주항쟁의 결실이지만 군사정권 시절의 잔재도 섞여 있다. 행정부 수반인 대통령에게 국가원수 자격을 부여하고 계엄 선포권과 주요 인사 임명권, 법률안 재의요구권과 제출권 등 막강한 권한을 몰아준 게 대표적이다. 집중된 권력이 무능과 부패를 만날 때 어떤 참담한 결과를 낳는지 국민들은 똑똑히 보았다. 계엄·내란 사태는 하나의 사례일 뿐이다. 국정 운영의 민주성을 해치고 국민의 삶과 미래를 옥죈 권력 남용의 사례는 차고도 넘친다.
향후 개헌의 화두가 ‘분권’일 수밖에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분권은 대통령 1인에게 집중된 권력과 역할을 분산하고 협력과 견제를 통해 민주적 국가 공동체를 만들자는 의미다. 그런데 개헌은 정치권의 이해관계에 휘둘려 매번 좌초되곤 했다. 현실적인 결과를 도출하기 위해서는 대통령의 역할 축소 문제를 먼저 논의하는 게 바람직하다.
국가 권력구조에는 기본적으로 세 가지가 있다. 대통령제와 의회제(의원내각제), 이를 절충하는 이원집정부제(분권형 대통령제). 어떤 것을 선택할 것인지가 가장 중요하다. 권력구조에 따라 여러 가지 세부적인 선택지가 있다. 권력구조를 먼저 결정하고 대통령 임기나 중임 여부를 논의하는 것이 합리적인 방향이라는 뜻이다.
각각의 권력구조에 대해서는 충분한 논의가 이뤄져야 한다. 대통령제를 유지했을 때의 위험성과 내각제나 이원집정부제를 채택했을 때의 위험성을 심도 있게 비교·숙고할 필요가 있다. 이원집정부제나 내각제의 경우 우리가 제대로 경험해 본 적이 없다. 대통령제의 폐해 때문에 마냥 좋은 면만 봐서는 안 된다는 주장도 귀 기울일 만하다.
대통령제 자체보다 5년 단임제의 부작용에 주목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나온다. 5년 단임 대통령제는 급히 만든 87년 헌법안의 결함인데, 전 세계적으로도 희소하다. 대통령 임기 중간에 치러지는 총선이 여소야대 현상을 빚는 것도 이 때문이다.
■지방분권 개헌은 시대적 과제
분권 개헌의 의미는 대통령 권한의 분산뿐만 아니라 중앙정부 권한을 지방정부로 이양하는 지방분권까지 포함한다. 1991년 지방의회가 부활하고 1995년 민선 1기 지방자치단체가 출범했지만 지방자치 관련 내용이 헌법에 반영된 적은 없다. 현행 헌법의 관련 조항은 제117조와 118조가 전부다. 그마저도 정부의 법률이나 법령에 따라야 한다는 규정이 사실상 지방자치의 손발을 묶고 있다. 이 규정을 바꿔 지방정부의 법적 지위를 명확히 해야 한다. 나아가 실질적 지방자치와 분권을 내용으로 하는 헌법적 보장이 강화돼야 한다.
지금 수도권 일극주의와 중앙집권적 국가 체제는 근본적 한계에 직면했다. 지방분권형 개헌은 대한민국의 새로운 성장 동력을 만드는 최선의 해법이다. 가장 중요한 것은 지역이 독자적으로 발전 전략을 수립하고 입법·행정과 세입·세출 권한까지 갖는 실질적 권한이다. 제헌국회 당시, 수도권과 비수도권 의원 비율은 19.5% 대 80.5%. 제22대 국회에서는 56% 대 44%로 완전히 역전돼 있다. 중앙집중 현상이 얼마나 심화했는지 여실히 보여주는 수치다. 헌법에 국가균형발전 규정을 만들고 지방분권 확보를 위한 지역 대표형 상원제를 도입해야 한다는 주장이 그래서 나온다.
지방분권 확립은 재정분권의 뒷받침이 필수적이다. 우리나라 총조세 중 국세와 지방세 비중은 2023년 기준으로 각각 75.4%와 24.6%. 지방은 여전히 막대한 재원을 중앙에 의존한다. 스위스(54.9%), 캐나다(54.8%), 독일(53.7%), 미국(41.6%), 일본(37.5%) 등 주요 국가에 비해 현저히 낮은 지방세 비중을 높여야 한다.
개헌은 더는 미룰 수 없는 과제다. 탄핵 정국에서 더불어민주당과 이재명 대표는 개헌에 소극적인 입장이고, 국민의힘은 개헌을 국면 전환용으로 활용하려는 기색이 역력하다. 정치 논리가 개입하면 개헌은 또다시 기회를 잃게 된다. 이렇게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국가 내부 갈등과 대립은 커지고 국가 경쟁력은 약화될 게 뻔하다. 지역의 경쟁력 회복도 늦어질 수밖에 없다. 국가 시스템 전반의 과감한 개혁이 ‘분권 개헌’의 성공 여부에 달려 있는 것이다.
김건수 논설위원 kswoo333@busan.com
김건수 논설위원 kswoo333@busa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