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인권의 핵인싸] 기초가 무너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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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대 물리학과 교수

고민 없이 “첨단학과 신설”
핵심 기술 원천 기초과학
정부 무원칙에 고사 위기

광속에 가깝게 가속된 두 개의 핵이 서로 충돌하면 순간적으로 엄청난 에너지가 ‘수천조 분의 1㎥’에 집중된다. 그 에너지는 순식간에 양성자보다 훨씬 무거운 입자들을 포함한 수많은 소립자들을 생성시키고, ‘백만 분의 1초’도 지나기 전에 모두 분열하여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양성자·중성자·전자를 비롯한 여러 중간자가 되어 사방으로 퍼져 날아간다. 이는 우주 최초에 일어난 일과 거의 같을 것으로 추정되기 때문에, 충돌 시 생성된 입자들의 질량과 속도 분포 등 각종 물리량들을 통하여 우주 최초의 물질 생성과 상태를 연구할 수 있다.

그래서 생성된 입자들의 물리량을 측정하기 위해서 이 충돌 지점(입자들의 생성 지점)은 수많은 검출기들로 둘러싸여 있다. 이 검출기들은 통과한 입자들의 궤적과 시간, 에너지를 측정한다. 마치 엑스선이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인화 필름에 투과된 흔적을 남기듯 여러 종류의 입자들은 검출기에 흔적을 남긴다. 입자들이 통과하면서 남긴 흔적을 우리가 알아볼 수 있는 신호로 잡아내는 일은 결코 간단치 않다. 오늘날 스마트폰으로 아무렇지도 않게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디지털카메라도 결국 이런 검출기들이 개발된 과정을 통해서 나온 것이다. 빛의 밝기에만 민감했던 흑백필름에서부터 시작하여, 마침내 다양한 색깔을 재현해 낸 디지털 영상에 이르기까지, 엑스선에 민감한 필름에서부터 여러 가지 입자들의 에너지를 검출해 내기까지, 연구와 개발의 엄청난 시행착오를 피할 수 없었다.

필름과 검출 센서에 나타난 정보들을 노이즈와 중요 정보로 구별하여, 각 픽셀 단위의 디지털 정보로 컴퓨터 저장장치에 기록한다. 이렇게 기록된 엄청난 양의 정보들을 분석하여 마침내 생성된 입자들의 궤적과 속도, 질량을 알아낸다. 생성된 입자들의 종류와 양, 각 입자들의 속도 분포와 상관관계를 통해 그 입자들이 생성될 당시의 온도와 같은 물리적 환경을 추적한다. 측정된 입자들의 질량 조합을 통하여 이 입자들이 어떤 다른 입자로부터 붕괴한 결과물이라는 것을 밝혀내고, 마침내 충돌 순간부터 여러 입자들로 측정되기까지의 시나리오를 구성해 낸다.

이 실험과 데이터들은 몇 개의 연구실과 몇 명의 연구자들로는 소화해 낼 수 없는 규모로, 전 세계의 검출기 및 데이터 전문가 수천 명을 필요로 한다. 이들이 실험 데이터와 의견의 교환을 위해서 월드와이드웹(WWW)을 개발했으며, 스마트폰의 터치패드를 비롯한 각종 신물질(섬광체, 반도체) 센서는 물론, 오늘날 컴퓨터의 새로운 패러다임이 된 클라우드와 그리드 컴퓨팅의 시대를 열었다.

우주 최초의 물질 상태를 연구하는 일은 이처럼 우리의 일상과 직접적인 연관은 없을지 모르지만 결과적으로 현재 우리의 일상을 채우고 있는 생각과 각종 문명의 이기들은 물론 인류가 아직까지 경험해 보지 못한 새로운 패러다임을 개척하고 있다. 오늘날 전 세계적인 국가경쟁력의 핵심이 된 반도체와 양자기술, 기계학습과 인공지능 등 모든 기술은 이같이 거의 하나도 빠짐없이 기초과학의 부산물로 얻어진 것들이다. 기초과학자들이 연구개발한 각 부산물들에 특허권을 걸었으면 어떤 일이 일어났을까. 새삼 부자가 되는 일이 과학자들의 바람이었다면, 인류의 역사는 어찌 됐을까.

나는 물리학자다. 물리학 중에서도 우주 최초의 물질상태를 연구하는 기초과학자다. 운 좋게도 사이언스와 네이처 같은 논문에 공동저자로 참여한 덕분에 나름 언론 등에 보도된 적이 있지만, 인터뷰에서 대뜸 이 연구가 우리의 일상생활에 어떤 영향을 미칠 것인지에 대한 질문을 받을 때면 무척 곤혹스러워지곤 한다. 우주 최초의 물질상태가 어떻든 도대체 우리의 일상생활과 무슨 상관이 있단 말인가. 하지만 그 연구 자체로 얼마나 엄청난 일인가. 감히 우리가 우주 최초를 이해하려 들고 있다니. 덕분에 우리는 인류의 새로운 지평을 개척하고 있지 않은가.

기초과학을 바탕으로 응용학문이 있고, 응용학문을 바탕으로 기술과 경제가 피어난다. 우리의 일상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는 완제품을 얻기 위해서는 투자된 기계설비와 인력을 바탕으로 이 제품을 대량생산하되, 이 기계설비와 이 제품에 대한 아이디어는 이보다 훨씬 앞서 수행된 수많은 연구와 개발이라는 인고의 시간을 거쳐야 한다. 바로 이 연구와 개발의 근본 동인이 되는 것이 ‘기초’다. 언어가 없이는 생각을 할 수 없고, 기본적인 원리에 대한 이해 없이는 연구를 할 수 없으며, 원리가 작동하는 이유와 근원적인 질문에 대한 도전 없이는 새로운 것이 있을 수 없다. 나무를 심고 물과 양분을 주어 살뜰히 가꾸는 과정을 모두 방기한 채, 정작 국가 연구개발(R&D) 예산은 축소시켜 기초학문이 고사되고 있는 마당에, 첨단학과를 새로 만들고 증원시킨단다. 거위의 배를 갈라 황금알만 꺼내겠다는 발상에 도대체 무슨 말을 어디서부터 어떻게 해야 할지 난감한 시국이다. 기초가 없이는 미래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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