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을 여는 시] 장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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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상학(1962~ )

세상 살기 힘든 날

비조차 사람 마음 긁는 날

강가에 나가

강물 위에 내리는 빗방울 보면

저렇게 살아 갈 수 없을까

저렇게 살다 갈 수 없을까

이 땅에 젖어 들지 않고

젖어 들어 음습한 삶내에 찌들지 않고

흔적도 없이 강물에 젖어

흘러가 버렸으면 좋지 않을까

저 강물 위에 내리는 빗방울처럼

이 땅에 한 번 스미지도

뿌리 내리지도 않고

무심히 강물과 몸 섞으며

그저 흘러 흘러갔으면 좋지 않을까

비조차 마음 부러운 날

세상 살기 참 힘들다 생각한 날

강가에 나가 나는

-시집 〈오래된 엽서〉(2003) 중에서

힘들다는 것은 무언가를 무겁다고 느끼는 것이다. 생활의 중압감에 마음조차 추처럼 무겁게 생각될 때가 그런 경우다. 내 존재마저도 ‘음습한 삶내에 찌들’어 버겁게 느껴질 때 우리는 ‘세상 참 살기 힘들다’라고 탄식한다. 생의 중력에 연일 먹구름이 천지를 암울하게 내리누르고 있는 것만 같은 ‘장마’의 날들!

그럴 때 우리는 ‘흔적도 없이’, ‘이 땅에 한 번 스미지도 뿌리내리지도 않고’ 사라져버렸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그저’ ‘무심히’ 아무런 발자취도 남기지 않고 ‘강물에 젖어 흘러가 버렸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아, 깨끗하면서도 시원한 잠적! 어지럽고 무거운 ‘장마’의 기압골을 유유히 빠져나가 버리는 상상은 얼마나 짜릿한가! 흐르는 것은 자유로워지는 것이다. 강가에 나와 생의 짐을 부리고 나도 한 방울의 강물이 되어 흘러갈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몸을 바로 세우고 흐린 눈을 밝게 하는 일이다. 김경복 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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