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트북 단상] 함무라비 법전과 사적 제재

이대성 기자 nmaker@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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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대성 기획취재부 차장

함무라비 법전. 고대 바빌로니아를 통치한 함무라비왕이 기원 전 1750년께 반포한 법전이다. 현존 최고(最古)의 성문법이며, 이후 동서양을 막론하고 많은 법전 제정에 영향을 미쳤다. 함무라비 법전은 동해보복법의 전형이기도 하다. 동해보복법이란 피해자가 입은 피해와 같은 정도의 손해를 가해자에게 가하는 것을 원칙으로 한 법을 말한다. ‘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의 눈을 멀게 했다면 그 자신의 눈알을 뺄 것이다’ 등이 함무라비 법전의 대표적인 동해보복법 조항들이다.

함무라비 법전 얘기를 꺼내든 건 최근 사회적 이슈로 떠오른 사적 제재 논란이 갈수록 증폭되고 있어서다. 사적 제재가 논란이 된 건 어제오늘 일이 아니지만 근래만큼은 아닌 듯하다. 범죄자 신상 정보를 공개하는 사적 제재 사이트인 ‘디지털 교도소’가 2020년 문을 열었다 폐쇄된 뒤 4년 만에 재등장했다. ‘극악무도한 범죄자에 대한 관대한 처벌에 한계를 느끼고, 신상 정보를 공개해 사회적인 심판을 받게 하려 한다’는 취지는 사적 제재 논란에 불을 지폈다. 이를 두고 헌법이 보장하는 무죄 추정의 원칙에 어긋나는 데다, 무분별한 신상 공개가 피해자와 유족의 ‘잊힐 권리’를 앗아간다는 문제점이 있지만, 한편으론 신상 공개를 지지하는 양가적 감정을 느끼는 국민들이 많다.

이어 20년 전 ‘밀양 여중생 집단 성폭행 사건’ 가해자들이 소셜 미디어를 통해 공개되면서 사적 제재 논란에 기름을 부었다. 당시 솜방망이 처벌을 받은 가해자들의 신상과 일상이 공개되면서 국민들은 과거의 충격을 떠올리며 또다시 공분하고 있다. 폭로전을 응원하는 댓글도 이어진다.

디지털 교도소가 재등장하고 20년 전 밀양 사건이 소환된 지금, 우리의 사법 체계는 얼마나 달라졌을까. 과거보다 더 피해자들의 편에 서 있는지, 가해자들을 엄벌하고 있는지 묻고 싶다. 흉기를 이용한 교제 살인이 난무하고, 납치·강도·강간·살인과 묻지마 칼부림 등 충격적인 강력 범죄가 줄을 잇고 있다. 피해자나 유족의 엄벌 요구에도, 재판 과정에서 가짜 반성문 제출, 기습 공탁, 정신 질환 호소 등의 감형 시도나 국민 법 감정에 어긋나는 판결 등에 국민들의 분노는 치솟고 있다.

SNS의 발달로 강력 범죄자의 신상을 공개하는 사적 제재는 앞으로 더욱 늘어나고, 전파 속도도 빨라질 것으로 예상된다. 국민 알 권리와 공익을 위한 것인지, 사회적 심판으로 포장해 조회수를 늘리거나 상업적으로 이용하려는 목적인지 논란 속에 사적 제재는 위태로운 외줄타기를 계속하고 있다. 신상 공개를 통한 사적 제재에 많은 국민들이 열광하지만, 사적 제재가 난무하는 사회가 바람직하고 정의로운 사회라고 말하긴 어렵다.

뻔한 결론이겠지만, 형법 개정을 통한 처벌 규정 강화, 검찰과 법원의 엄격한 법 집행 등으로 사법 체계에 대한 불신을 해소하는 것이 가장 근본적인 해결책이다. 극악무도한 범죄를 접한 많은 국민들은 동해보복형 형법 규정과 엄벌주의로 잘 알려진 함무라비 법전과 같은 강력한 처벌과 법치를 원한다. 함무라비 법전도 결국 사적 제재의 악순환을 막고 법치를 통해 사회 질서를 유지하기 위한 수단이었음을 되새겨본다.


이대성 기자 nmaker@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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