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을 여는 시] 반음계 / 고영민(196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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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소리가 높다

당신이 그리운 오후,

꾸다 만 꿈처럼 홀로 남겨진 오후가 아득하다

잊는 것도 사랑일까

잡은 두 뼘 가물치를 돌려보낸다

당신이 구름이 되었다는 소식

몇 짐이나 될까

물비린내 나는 저 구름의 눈시울은

바람을 타고 오는 수동밭 끝물 참외 향기가

안쓰럽다

하늘에서 우수수 새가 떨어진다

저녁이 온다

울어야겠다

-시집 〈사슴공원에서〉(2012) 중에서

해가 설핏 기우는 오후가 되면 세계는 글썽이는 풍경이 된다. 천지는 ‘꾸다 만 꿈처럼’ 몽롱하고 아득하여 구름마저 ‘물비린내’를 풍기기 시작하는 기이한 순간. 세상의 한 가운데에 들어있는 것 같은데, 자꾸 무엇을 잃어버리거나 잊어버린 것 같아 주위를 휘둘러본다. 허전함이 내내 사무치면서 막막함에 한없이 휘어지는 눈길.

아, 나는 사랑을 잃었구나! 생명의 정수를 잃어 세계가 이리 처연하구나! ‘바람을 타고 오는 참외 향기가 안쓰럽’고, ‘하늘을 날던 새도 우수수 떨어진다’. 나의 외로움이 세계의 쓸쓸함으로 전화되어 온 우주는 황홀한 슬픔을 연주해 내는 ‘반음계’의 장막! 정말 ‘저녁이 오고’ 있다. 잃어버린 그리움을 찾을 수 없는 시간의 문턱에 내가 서 있다. ‘울어야겠다’. 내 청춘의 시기에 늘 눈썹 끝에 달고 살았던 어스름으로 글썽대야겠다. 김경복 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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