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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감] 기억이 만든 기억
사람의 생각과 판단의 근간은 모두 기억이 아닐까 싶다. 당장 뭔가를 떠올려 봐도 그렇다. 어떤 모습, 대화, 단어, 현상, 뜬금없는 계획…. 무엇을 상상하든 과거의 기억을 토대로 떠올려진다. 아무 생각 없이 습관적으로 하는 행동도 결국은 오랫동안 쌓아온 기억의 결과가 아닌가. 그래서 개개인이 가진 기억은 삶의 방향을 정하기도 하고, 삶 자체의 증거가 되기도 한다.
까마득히 오래된 기억이 있다. 아마도 가장 오래된 기억일 것이다. 그래서 스틸사진처럼 순간의 장면만 떠오른다. 나는 엄마의 등에 업혀 있었고 막 잠에서 깨어나 눈을 떴다. 그때 보았던 것은 초가의 처마와 창이 뚫린 낮은 황토벽이었다. 그리고 벽 안쪽에서 소의 나지막한 울음을 들었다. 기억의 영상은 그것이 전부다. 하지만, 그 영상에는 또 다른 감각들, 이를테면 삭은 짚 더미 냄새와 뜨끈한 여물통에서 피어나는 증기가 뒤섞인 형언할 수 없는 냄새가 섞여 있었다.
내가 몇 살 때였는지는 모른다. 하지만 비슷한 시기의 정황으로 그곳이 외갓집의 어느 장소였음은 분명하다. 그래서 지금도 이끼 낀 시골의 오랜 담벼락을 보면 왠지 삭은 짚 더미 냄새가 느껴지기도 한다. 엄마의 친정, 즉 외갓집의 풍경은 내 유년의 기억에 크게 자리 잡고 있다. 나지막한 산 앞에 앉은 외갓집 앞에는 이삭을 피우기 시작하는 벼가 바다처럼 펼쳐져 있었다.
바람에 일렁이는 초록 물결은 구불구불 가로지른 개울둑에 막혀 되돌아오고, 그보다 더 까마득한 지평엔 기적을 울리며 나타나 어린 시선을 사로잡고 마는 동해남부선 기차의 행렬이 있었다. 어렸던 나는 외갓집 대청마루에 앉아 그것이 얼마나 오랫동안 내 기억의 바닥을 차지할지 모르고 마냥 바라보기만 했었다.
여름밤, 대나무 평상에서 외할머니 무릎을 베고 칭얼거리다가 문득, 숨 막힐 정도로 황홀한 밤하늘의 은하수를 목격했었다. 처음 보는 그 장관에 나는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나는 그런 은하수의 현기증을 두 번 다시 느끼지 못하리라는 것을 몰랐다. 그저 침묵으로 하늘의 끝과 끝을 더듬었었다.
기억의 단편은 뒤죽박죽이다. 바닷가에서 고둥을 줍다가 발견해 내 손바닥 위에 올린 성게의 보일 듯 말 듯 한 움직임. 그리고 따갑지도 간지럽지도 않은 아슬아슬한 손바닥의 느낌을 기억하고 있다. 무심코 휘둘렀던 내 잠자리채에 부딪혀 죽어 가던 제비의 까만 눈. 밤마실 가는 외할머니 따라 농로를 걷다가 내 옷에 앉은 반딧불이의 깜박이는 불빛. 그렇다. 그것들은 모두 일종의 신호였었다.
무엇을 뜻하는 신호인지는 나도 모른다. 하지만 그 신호에 따라 평범했던 사건이 전혀 다른 의미의 기억으로 변하기도 했었다. 또 그런 신호에 따라 불쾌했던 사건이 망각의 심연 속으로 가라앉기도 했다. 그래서 나는 나의 기억이 그다지 정확하지 않다는 것도 알고 있다. 기억은 언제나 기억을 만들어 내기 때문이다.
기억이 쉽지 않았던 만큼, 망각 또한 맘대로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다. 나쁜 기억은 지우려 문지를수록 더욱 선명해지고, 영원히 간직하고픈 기억은 나도 모르게 구멍이 숭숭 뚫린다. 기억이란 본디 그런 것이긴 하던데, 똑같이 체험하더라도 개인마다 다른 신호에 따라 다른 의미를 만들고 전혀 다른 기억으로 저장되는 것 또한 기억임을 깨닫는다.
그래서 나는 내가 가진 내면의 기억들이 궁금하다. 언제, 어떻게 나타나 지금 겪고 있는 사건에 의미를 부여하고, 현실을 채색해줄지 모르기 때문이다. 아무것도 모르는 나는 지금도 무심코 밤하늘을 올려다보고, 골목길 아래의 무성한 이끼에 눈길을 던지곤 한다. 그리고 늘, 초록의 물결을 그리워한다.
2024-09-12 [18: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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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감] 삶과 체험
예전에 ‘체험 삶의 현장’이라는 TV 프로그램이 있었다. 각종 노동 현장에 유명인들이 하루짜리 일꾼으로 투입되어 일을 하고 그날 받은 일당을 기부하여 불우이웃을 돕는 콘셉트였다. 평소 잘 모르고 있던 타인의 노동 현장을 들여다본다는 것, 몸으로 하는 일에 익숙지 않은 유명인들이 좌충우돌하며 일하는 장면을 지켜보는 것, 그리고 그날 번 돈을 어려운 이웃에게 기부함으로써 세상을 아름답게 만드는 데 일조하는 것. 시청자들의 관심을 끌 만한 요소는 충분했다.
그 프로그램의 하이라이트는 주인공이 받은 돈을 스튜디오로 들고나와 유니콘을 타고 공중으로 올라가서 하트 모양의 모금함에 넣는 것이었다. 그러면 그날의 일당과 그동안 쌓인 모금액이 화면에 커다랗게 나타났다. 나는 그 장면이 무척 의미심장하다고 느껴졌다. 날개와 뿔이 달린 하얀 유니콘, 현실에는 존재하지 않는 상상의 동물. 그 유니콘을 타고 높이 올라가 만나는 사랑의 하트. 그 설정 자체가 환상에 기대고 싶어 하는 우리의 마음을 보여주는 것 같았다.
그날 하루치의 고생으로 타인의 삶을 다 이해한 것 같은 착각, 잠깐 체험해 본 것으로 타인의 고충을 모두 헤아린 것 같은 오만함, 그리고 하루의 일당으로 인류에 대한 사랑을 실천한 것 같은 거대한 환상. 물론 그 프로그램이 나빴다는 것은 아니다. 다양한 직업의 세계를 시청자들에게 알려주기도 했고, 그렇게 모은 성금은 실제로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또 어떤 시청자에게는 봉사나 나눔에 대한 의지를 불러일으키기도 했을 것이다. 그렇지만 동시에 나는 불편하기도 했다. 타인의 삶의 현장을 단 하루 이벤트처럼 ‘체험’한다는 사실이. 내가 쓴 단편소설 ‘서로에게 좋은 일’에 이런 장면이 있다. 부유한 친구의 휴가에 따라온 주인공이 별장을 차지하기에 미안해서 텐트에서 자겠다고 하자 친구의 남편이 말한다. “방에서 편하게 지내세요. 저희는 텐트에서 하루 자면서 리아한테 불편하고 힘든 경험도 좀 시켜보려고요.” 그들에게 힘든 경험은 휴가용 이벤트이지만, 누군가에게는 매일같이 견디며 살아야 하는 삶이다. 요즘은 캠핑이 워낙 유행이고 나 역시 아이가 졸라대서 한두 번 가본 적이 있지만, 나는 사실 캠핑을 즐기지 않는다. 텐트처럼 불안전한 공간에서 자고 싶지 않다. 화장실에 가기 위해 집 밖으로 나가고 싶지 않다.
그런 경험이라면 청소년기와 대학 시절에 이미 충분히 했고, 그것은 전혀 낭만적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는 남의 집 주차장에 살았던 적이 있다. 주차장이었으므로 셔터가 출입문이었다. 안에서 자물쇠를 걸어 잠그고 자면 늦게 귀가하는 가족이 들어올 수 없었기 때문에 종종 잠금장치를 하지 않은 채 셔터만 내리고 자야 했다. 그럴 때면 누가 들어와 나를 해칠까 봐 불안했다.
무허가 판자촌에 산 적도 있었다. 얇은 합판을 통해 들어오는 모든 소리들이 나를 잠 못 들게 했다. 두 집 모두 화장실에 가려면 집 밖으로 나가야 했는데 그것은 하루짜리 체험이 아니고 나의 생활이었다. 누가 그 시절의 내게로 와서 단 하루 머물다 가며 좋은 경험이었다고 말하면 나는 모멸감을 느꼈을 것이다.
그래서 며칠 전 기사에서 접한 퍼스트레이디의 미담에도 나는 마음이 불편했다. 4시간 동안 쪽방촌의 청소와 도배를 하고서 “어려운 이웃들과 함께하는 이 시간이 너무나 소중하다”고 한 그녀의 말에 얼굴이 달아오르는 것 같았다. 누군가가 힘겹게 겪어내는 매일의 생활이 누군가에게는 하루짜리 ‘체험 삶의 현장’이구나, 그런 생각. 이웃을 돕는다는 것은 좋은 일이지만, 그것이 자신의 선행을 전시하는 일로 끝나버리지는 않았으면 좋겠다. 타인의 고통을 잠시 체험하고 빠져나와 ‘소중한 경험’이었다고 쉽게 말해버리지는 않았으면 좋겠다.
2024-09-05 [1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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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감] 또 다른 어둠 앞에서
지금, 내 눈에는 한 사진이 들어온다. 1945년 11월 26일 〈조선일보〉에 수록된 사진이다. 기사와 함께 게재된 사진은 건물에서 나오는 사람을 포착한 사진인데, 중절모를 눌러쓴 인물의 표정도 어둡지만, 건물에 드리우는 어둠 역시 만만치 않다. 그날의 사진은 그날의 어둠과 역사의 어둠 그리고 곧 일어날 우리 민족의 비극을 보여 주는 것처럼 어두컴컴하다.
사진 밑에는 다음과 같은 설명이 달려 있다. "사진은 정동 예배당에서 예배를 보시고 문밖으로 나오시는 김구 선생". 이 설명은 환국(귀국) 3일 차 김구 선생의 동선과 활동을 추적한 기사에 부기되어 있다.
빛바랜 이 사진이 생각난 것은 지금 우리 주변에서 일어나는 '반역사 세력'과 그들의 왜곡된 가치관 때문이었을 것이다. 김구로 대표되는 항일 인사의 업적을 깎아내리고 고의적일 정도로 보수 세력 몇몇을 상찬하는 움직임부터, 청문회에 나온 기관장 후보가 독도가 분쟁 지역이라느니 혹은 위안부 문제는 답변할 사안이 아니라느니 하며 뱉어냈던 수상한 말들, 김구를 테러리스트로 지칭하고 그를 비난하는 책을 출간한 인사가 앉지 말아야 할 요직을 차지한 기현상, 게다가 대놓고 친일을 넘어 숭일(崇日)을 지향하는 정부 자세에 이르기까지, 최근 대한민국에는 정상 범주를 넘어선 기류와 행보가 넘쳐나고 있다.
대한민국 국민 중에서 독도 영유권이 일본에 있다고 믿는 극소수의 세력이 있다고 했는데, 작금의 문제는 그러한 소수가 늘어나고 있기 때문에 생기는 문제만은 아니다. 작금의 문제는 수면 아래에서 암약해야 할 문제 세력이, 오히려 권력 위로 부상하면서 자신들의 의지대로 대한민국을 다시 조종할 수 있다고 믿고 있다는 점에서 문제적이다.
언제부터인지, 정부의 발언과 요직 인사의 동향은 반일을 경계하고 있고, 일본을 따르지 않는 이들을 오히려 문제적 인물로 몰아붙이는 성향이 강해졌으며, 친일의 논리를 편드는 강경 발언이 힘을 얻고 있는 실정이다. 이것은 전반적으로 이 세상의 한 축이 무너지고 있고, 그 무너진 축에 다른 축을 끼워 넣으려는 일들이 늘어나고 있다는 위험 신호이다.
최근 국방 백서에는 일본의 주장을 따르는 문구가 삽입되었고, 육군사관학교에서는 홍범도의 흉상을 제거하려는 움직임이 감지되었으며, 김구를 테러리스트라고 부르는 이의 발언을 들어야 하는 세상이 도래했다. 이 모든 것이 우연의 산물일까. 갑자기 이러한 일들이 확산되는 것이 우연이고, 그 확산을 두려워하지 않은 이들이 권력을 장악하는 일이 단지 우연일 뿐이라면, 우리는 이제 그러한 우연의 확률을 줄이는 일에 매진해야 할 것이다. 만일 이러한 일들이 계획된 일이라면, 그 원인과 그 배후를 밝히고 도대체 이러한 뻔뻔한 생각과 무책임한 발언을 확산하는 근본적인 이유를 따져 물어야 할 것이다.
김구는 자신의 시대에서 그러한 이유를 찾았고, 그 이유를 제거하기 위하여 자신의 삶을 걸었다. 우리도 마찬가지여야 하지 않을까. 그 원인이 어디에 있는지를 찾아야 하며, 만일 일각에서 주장하는 것처럼 그 축의 근원이 '용산총독부'라면, 이제 그 총독부를 처리할 방안을 더 이상 미룰 수는 없어 보인다. 모든 사태의 근원을 밝히고 문제적 상황을 원점으로 되돌려 놓으려 한다면, 그때는 또 다른 독립운동과 마주해야 한다고 믿는다. 그것은 잘못된 역사와 그릇된 선택에 대한 독립운동일 것이다. 그날 사진 속 김구의 얼굴이 어두웠다고 느낀 것은 아마도 그 선택이 김구 선생의 얼굴에 드리워졌기 때문이 아닐까. 그의 표정에서 또 다른 세상의 어둠을 다시 읽어야 한다는 사실이, 너무나 미안하다.
2024-08-29 [18: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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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감] 내일(來日)
30대 때의 일이니, 아주 오래된 일입니다. 그렇지만 나는 그날을 지금까지 잊지 못합니다. 그때는, 고향에 갈 때는 하루일과를 마치고 막차를 탔으므로, 마치 어둠 속을 잠행하는 것 같았습니다. 그날은 늦가을의 찬비가 내리고 있었습니다. 고향이 가까워져 오자 버스의 창으로 흐릿한 불빛이 보였고, 나는 유리창에 낀 뿌연 습기를 손바닥으로 닦았습니다.
고향 마을은, 마치 어둠 속에 웅크린 고독한 짐승 같아 보였습니다. 버스에서 내린 나는, 두꺼운 뿔테 안경을 낀 주인이 지키는 책방에 들러 책 한 권을 사고는, 어머니가 혼자 지키는 집에 들었습니다. 책을 펴들고 자리에 누웠을 때, 뒤뜰 대나무 숲에 내리는 늦가을 빗소리가 가슴을 차갑게 적시었습니다. 고향집은 고적함으로 가득했습니다. 그날의 귀향은 그 추적거리는 늦가을 비처럼 썰렁하고 외로웠습니다. 그때 긴 마당으로 저벅거리는 발자국 소리와 함께 들리는 목소리가 있었습니다.
“어이!…, 니가 고향에 와서 우째 내한테 신고도 없이 혼자 잔단 말이고! 대체 누구 허락받고 하는 짓이고….” 그 못 말리는 오지랖과 장난기가 서 말이나 담긴 목소리의 주인은 내 초등학교 친구였습니다. 막차에서 내리는 나를 본 누군가로부터 나의 귀향을 신고받은 모양이었습니다. 뜻하지 않은 친구의 방문으로, 그때까지 집을 지키던 적요(寂寥)가 놀라서 도망을 가버리고, 나의 외롭던 귀향은 갑자기 정신없이 시끌벅적해져 버렸습니다, 나는 그에 이끌려 시내로 나갔고, 그는 친구들을 불러내었습니다. 그에게 불려 나온 우리는 밤새 같이 술집을 돌았습니다. 우리는 그 밤을 정다운 담소와 폭소로 보냈습니다.
그러나 그 얼마 후, 그는 우리 친구들 중 제일 먼저 친구들의 배웅을 받으며 그 젊고 아까운 나이에 세상을 떠났고, 그 후 그 밤은 내게 평생 잊을 수 없는 밤이 되었습니다. 그 밤이 그 친구와의 마지막 술자리가 될 줄은 아무도 몰랐습니다. 나는, 그가 세상을 버릴 때까지, 앞으로의 삶이 팍팍하게 많이도 남았다고, 그런 밤은 앞으로 얼마든지 더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 친구를 술 초대 한번 해보지 못하고 보냈습니다.
사람에게는 기약된 내일이란 없는 데도 나는 많은 내일을 믿고 있었습니다. 내일이란, 마치 흘러간 어제처럼 사람의 생각에만 존재하는 허구이지만, 사람들은 매일 내일을 만들어 동행하면서, 귀찮은 것들은 전부 내일에 맡겨버립니다. 나도 그 친구에게 권할 술잔을 매일 내일로 미루다가 끝내 권하지 못하고 보냈습니다.
이 하염없는 우주 중 먼지같이 작은 지구 중에서도 그 작은 골짜기에서, 이 하염없는 세월 중 찰나 같은 이 육체의 시간 중에, 친구라는 인연으로 만나는 것은 불가사의한 기적일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모두의 만남의 경험은 그런 기적일 것입니다. 가을비가 추적거리던 고향의 늦은 가을밤, 그의 뜻하지 않는 방문은 내가 잃어버렸던 따뜻한 고향을 되찾게 하였으며, 늘 곁에 두고도 무감각하던 친구의 넉넉한 정을 발견하게 하였습니다.
그의 방문은 새삼스레 내 주위를 둘러보게 만들었고, 사소한 만남조차 두 번 다시 되돌려 경험할 수 없는 소중한 순간들이란 사실을 일깨워 주었습니다. 나는 그가 살았던 삶의 길이보다 두 배나 더 긴 삶을 살았습니다. 그가 산 삶의 길이보다 더 많이 산 삶은, 그의 삶에 비하면 덤입니다. 나는 이렇게 오래 살면서, 그가 나를 눈뜨게 해 준 것처럼, 누구에겐가 친구의 의미에 대하여 눈뜨게 해준 적이 있는지 내게 물어보았습니다.
2024-08-22 [17: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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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감] 지구의 면역력
며칠간 몸 상태가 심상찮더니 결국 코로나로 진단받았다. 지나갔다고 생각했던 전염병이 다시 유행하는 조짐이다. 이 바이러스는 제 몸을 변형시켜 끊임없이 자신의 명맥을 유지하려 한다. 이들의 좌우명은 숙주를 옮겨 다니는 것이며, 그 숙주는 인간이다. 기생 생물이 무엇인가? 한마디로 다른 종에 붙어살면서 그 종만 피해를 보게 하는 생물이다. 그런 기준으로 보면 우리를 병들게 하는 세균이나 바이러스도 기생 생물이다. 기생 생물이라는 명칭이 당장 혐오스럽지만, 서적이나 다큐멘터리 영상으로 살펴보는 기생충의 생태는 나름 흥미롭고 신비하다.
저녁이 되면 감염시킨 개미를 풀잎 끝으로 올라가게 해 초식동물에게 잡아먹히도록 조종하는 창형흡충이라든지, 물속에 새끼를 풀어놓기 위해 숙주를 물가로 가게 만드는 메디나충. 고양이에게 잡아먹히기 쉽도록 쥐에게 두려움을 없애버리는 톡소포자충 등을 보면, 기생 생물이 자신의 생존을 위해 얼마나 기발한 방법을 쓰고 있는지도 알게 된다.
한데, 당장 약을 처방받아 먹어야 하는 처지에 직면하니 마냥 재미있게 볼 수만은 없다. 새삼 심각하게 살펴보니 문득, 의구심이 든다. 인간은 늘 기생 생물들에게 당하기만 하는 숙주였을까? 그렇지는 않다. 인간들 또한 지금까지 번성하는 과정에서 일방적으로 얻어내기만 했던 대상이 있다.
만약에 지구가 생명체라 가정한다면 인간은 분명히 지구에 기생하는 생물이다. 개인적으로 필자는 지구를 생명체로 본다는 가정이 그다지 억지스럽지 않다. 인간을 살펴봐도 그렇다. 인간의 바깥 피부는 죽은 세포이다. 하지만 그 외피가 없으면 인간은 살아갈 수 없다. 즉, 생명체를 구성하기 위해 모든 영역이 살아 있어야 하는 게 아니다. 오히려 생명체는 살아 있는 것과 무생물의 절묘한 조화와 융합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러니 인간이 지구에 기생한다는 말이 어쩌면 냉정하게 판단한 현실일 수도 있다. 기생이라는 단어 자체로 혐오할 필요는 없다. 남의 살을 먹어야 살 수 있게 태어난 걸 어쩌겠는가. 기생 생물의 원칙만 잘 지키면 되는 것이다.
기생 생물의 원칙은 바로 이것이다. 숙주의 면역체계를 필사적으로 피해야 하며, 또한 자신이 원할 때까지 숙주가 살아 있게 해야 하며, 또 다른 숙주로 이동할 수 있게끔 숙주를 조종할 수 있어야 했다.
한데, 숙주인 지구의 건강 상태가 심상찮다. 팬데믹 이후로, 이상 기후가 세계를 뒤덮고 있다. 폭염과 홍수. 그로 이한 산림화재까지 빈번하게 일어난다. 지구 온난화로 해수 온도가 올라가고 해수면의 급격한 상승으로 국토가 위협받는 국가도 있다.
그래서 지구가 걱정되냐고? 천만의 말씀이다. 지구는 잠깐 앓을 뿐이다. 독감에 걸려 열이 나듯 평균 기온을 한 50도쯤 올릴 수도 있겠다. 그렇게 100년쯤 지나면 현재의 생명체는 대부분 멸종할 것이다. 나쁜 세균이 사멸하듯 깨끗이 청소된다. 지구는 다시 멀쩡하게 회복될 테고, 곧 새로운 생명체로 가득 채울 것이다.
지구 면역력에 비하면 인간의 생명력은 정말 보잘것없다. 그러니 온난화로 인한 지구의 위기가 아니다. 바로 인간의 위기인 것이다. 그것도 멸종의 위기이다. 한껏 예민해진 지구의 면역체계를 어떻게 속일 수 있을지, 기생 생물 인간의 비장한 생존 본능에 기대를 걸어본다. 저녁을 먹고 코로나 경구약 4알을 물과 함께 삼켰다. 기생 생물 속에 기생하는 생물이라니…. 아무쪼록 적당히 뺏어 먹고 물러나길 바란다. 몸속에서 탐욕만 부리지 않았으면 저도 좋고 나도 좋았을 텐데 말이다.
2024-08-15 [1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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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감] 한계선
계속되는 폭염으로 밤마다 푹 잠들지 못한다는 사람들이 많다. 나 또한 그렇다. 사실 열대야가 아니더라도 잠을 자주 깨는 편이고, 한 번 깨고 나면 그때부터 수면의 질이 매우 낮아지는데, 요즘은 더위 때문에 한 시간에도 몇 번씩 ‘자다 깨다’를 반복하는 것 같다. 그러다 보니 늘 피곤하고, 피곤하니까 커피를 자꾸 마시고, 커피를 많이 마시니까 밤에 또 깊이 못 자고…. 악순환이 이어진다.
얼마 전 새벽녘에는 요란한 천둥과 번개 때문에도 잠이 깼다. 아마 많은 사람들이 그 시간에 깨어버렸을 것이다. 어두운 집안이 클럽의 무대처럼 번쩍거리며 빛났고 천연 조명이 켜질 때마다 사물들이 환영처럼 나타났다가 사라졌다. 나는 어떤 신비한 존재에 홀린 듯 창밖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러면서 생각했다. 지금 나는 누군가와 동시에 깨었겠지. 이렇게 비현실적인 빛과 소리의 향연을 함께 보고 있는 사람들이 어디엔가 까만 점처럼 박혀 있겠지. 그런 생각을 하니 그날의 불면은 어쩐지 외롭지 않고 오히려 묘한 위안이 되었다.
한참을 그렇게 있다가 시간을 확인하려고 휴대폰 화면을 켰다. 그런데 대체 무슨 영문인지, 휴대폰 화면에도 번개가 내리꽂혀 있는 것이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화면 우측에서 사분의 일 정도 되는 지점에 세로로 길게 분홍색 선이 생겨 있었다. 마치 초등학교 시절 짝지가 책상 위에 불공평하게 그어놓은 금처럼 아주 선명하고도 단호하게 말이다. 휴대폰을 껐다 켜 보고 화면을 이리저리 터치해 보았지만 선은 사라지지 않았다. 인터넷으로 검색을 하니 친절한 누군가가 이미지까지 올려가며 설명을 해둔 내용이 있었다. “이것은 라인 디펙트 현상입니다. 디스플레이 패널과 메인보드를 연결하는 부위에 이상이 생긴 것이죠. 당장 사용하는 데에는 문제가 없지만 점점 화면이 보이지 않게 될 겁니다. 스마트폰이 시한부 판정을 받은 거라고 보시면 됩니다. 미리 대비하세요. 화면이 전부 잠식되기 전에요.” 대략 이런 내용이었다.
시한부. 생각지도 못했던 그 단어가 눈에 쏙 박혀 내 마음을 데굴데굴 굴렸다. 보통은 불치병 판정을 받고 죽음을 앞둔 상황에서 흔히 쓰이는 말이지만, 사전적 의미는 이러하다. ‘어떤 일에 대해 일정한 시간의 한계를 둠’. 사실 따지고 보면 인생 자체가 시간의 한계를 가지고 있으므로 우리에게 벌어지는 모든 사건들은 시한부일 것이다. 다만 그 끝이 언제인지를 대체로 알지 못하기에 그 모든 게 영원할 것처럼 어리석게 행동할 뿐. 그런데 만약 끝을 예감하고 있다면? 어떤 일에 시한부 판정을 받고 내게 주어진 시간의 한계를 명확히 받아들여야 한다면?
모든 순간이 어쩌면 마지막일 수도 있다는 사실을 잊지 않는 일. 제한된 시간을 분명하게 인식하는 일. 그것은 우리로 하여금 다분히 체념하는 태도를 갖게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현재 상황에 더욱 몰입하고 집중하게 하는 동력이 되어주기도 한다. 단 한 번뿐인 순간이므로 한눈을 팔 겨를이 없다. 그 순간의 아름다움, 그 순간의 특별함, 그 순간의 기쁨…. 그런 감정을 온전히 느끼는 것만으로도 시간이 부족하니까. 그리고 그 모든 것들을 결국 상실하게 되더라도 의연히 견딜 수 있는 마음의 준비를 차근차근히 해야 하니까.
물론 우리 삶에는 어떤 예고도 없이 한순간에 끝장나 버리는 일들이 더 많다. 휴대폰도 경고 신호 없이 그냥 먹통이 되어버리는 경우가 더 흔할 것이다. 그렇게 되면 저장해 두었던 사진도 연락처도 모두 사라져 버리고 정말 ‘멘붕’이 오겠지. 그 새벽녘, 천둥·번개와 함께 시한부를 알리는 한계선이 생겨줘서, 담아둔 것들을 차곡차곡 정리할 시간을 내게 마련해 줘서, 다시 오지 않을 이 순간을 온전히 감각하게 해 줘서, 나는 끝을 아쉬워하기보다 차라리 그 모든 것에 고맙다는 말을 해야 할 것 같다.
2024-08-08 [17: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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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감] 수평선이 사라지는 도시
부산에서 산 지도 거의 20년이 되어 간다. 20년을 살고 보니, 눈에 보이는 것이 저절로 생겨난다. 그중 하나가 수평선이었다. 부산에 와서 가장 좋았던 점은 바다와 수평선을 볼 수 있었다는 점이었다. 고개를 들면 바다가 보였고, 그 바다를 끝까지 훑어가면 수평선이 보였다. 낮에도 보였지만, 밤에 보는 수평선은 더욱 아름다웠다. 때로는 외롭기도 했지만, 수평선이 보이는 경관에서는 감수해야 할 외로움이라고 생각했다.
부산에서의 거처는 비교적 바다가 보이는 곳에 정하고자 했다. 멀리서나마 바다를 볼 수 있고, 그 평온함과 웅대함을 즐길 수 있는 곳을 선호했다. 주변에서 말리는 목소리도 만만치 않았다. 빨래가 마르지 않고, 태풍이 올 때 위험하고, 자동차와 가전제품이 빨리 부식된다는 충고였다. 바다가 보고 싶으면 그때마다 바다에 갔다 오면 되지, 무엇 때문에 바다 근처에 살면서 그 어려움을 감수하려느냐고 되묻는 이도 적지 않았다.
바다·수평선이 매력인 도시
빌딩숲이 수평선 잠식해가
"바다, 공터, 조망 공존해야"
2005년 부산에 올 때, 서울에서는 한강이 보이는 조망을 찾아다니는 사람이 생겨나고 있었다. 부동산 가치 때문만은 아니었다. 소위 말하는 영구 조망으로 남아서 눈앞에 무언가가 탁 트인 느낌을 주는 곳은 한강 강가가 유일했기 때문이다. 어쩌면 한강마저 메우고 그 위에 무언가를 지을 수 있었다면 한강 역시 남아 있지 않았겠지만, 그럴 수 없는 마지막 보루였기 때문에, 그곳은 트인 전망으로 남을 수 있었다.
그런데 부산에 오자 탁 트인 전망이 곳곳에서 발견되었다. 부산은 인구 400만에 육박하는 대도시이면서도, 곳곳에 영구 조망이 흘러넘치고 있었다. 적어도 그 시절에는 그 조망이 계속될 줄 알았다.
그때와 지금을 비교하면, 영구 조망은 확실히 줄었다. 도시와 바다가 만나는 곳에 건축물이 늘었고, 대부분이 아파트인 이 건축물들은 수평선을 잠식하기 시작했다. 어떤 경우에는 바다가 오션뷰 아파트에만 남아 있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더 놀라운 것은 상황이 이러한 데도 여전히 수평선을 쪼개는 일을, 여전히 그리고 강력하게 추진하고 있다는 점이다.
재직하고 있는 학교는 과거에 학교의 절반이 바다에 면한 곳이었지만, 지금은 늘어난 아파트와 건물에 둘러싸여 이제는 육지의 섬처럼 변해 있다. 어디까지가 바다였는지는 드문드문 남은 해송 잔해로만 확인될 뿐, 주위는 모두 빌딩 숲으로 변해 버린 후였다. 그런데도 혹여 남은 땅이 있다면 여전히 건물을 짓는 일이 우선이고, 바다나 공터 혹은 자연은 밀어내어야 할 무엇으로 치부되었다. 그러니 바다인들 남아날 리 없었다.
우리는 지금 단순히 수평선을 없애고, 바다가 풍경을 없애고, 익숙했던 과거의 정취를 없애고 있는 것만은 아니다. 우리는 주체못할 욕심으로 멈추어야 할 것을 멈추지 못하고 있고, 침범하지 말아야 할 곳을 침범하고 있다. 바다가 그 자리에 있다고 해서, 공터가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고 해서, 그곳을 침범하고 그곳을 파괴하는 행위가 용납될 수는 없다. 그것은 수평선이 사라지고, 어쩌면 바다마저 위협받는 미래의 시점에서는 분명 재앙일 수밖에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아파트 가격이 떨어지자, 더 높은 전망 선호도를 보이는 곳을 골라, 더 좋은 오션뷰를 갖춘 부지를 물색하고, 그 위에 아파트를 짓겠다는 건설사와 투자가가 늘어나고 있는 줄 안다.
바다를 그리고 자연을 마음대로 할 수 있다고 생각한 이들은 '발전'이라는 명목으로 환경을 파괴하는 일에 몰두한 적이 있었다. 하지만 곧 그들은 생각을 바꿔 먹어야 했다. 자연은 무한하지 않았고, 인간은 전능하지 않았다. 자연이 인간에게 해악을 끼치기 이전에 인간은 인간만으로는 살 수 없다는 사실을 알아버렸다. 그 누구보다 인간은 함께 있어야 하는 존재였고, 이를 위해서는 바다도, 공터도, 조망도 이 세상에 함께 있어야 할 것들이었다.
2024-08-01 [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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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감] 손님
몇 달간 집을 비운 사이에도 세월은 어김없이 집을 다녀갔습니다. 목단꽃 봉오리에는 꽃 대신 투박한 씨앗이 달렸고, 환한 웃음으로 나를 맞아 주기를 기대했던 능소화는, 그런 나의 바람 같은 것에는 아예 관심이 없는 듯 벌써 갈 채비를 하고 있었습니다. 화단의 꽃들은 그들 마음 내키는 대로, 그들의 시간에 맞추어 화단을 방문하는 손님들이었습니다.
능소화는 늙어 가는 사람처럼 조금씩 짓무르고 있었고, 어떤 송이는 벌써 땅에 떨어져 처연한 모습으로 썩고 있었습니다. 능소화는 7월의 불꽃 같은 햇살과 경쟁이라도 하듯, 주황색 화려한 옷을 입고 고개를 치켜들고 있었으므로, 매사에 자신이 없는 나는 그 오만스러운 몸짓조차 마음에 들었습니다. 능소화는 한여름의 짧은 일생을 살다 가지만, 자신의 아름다움에 너무도 흡족하여, 그런 지극한 만족감으로 일생을 살아내는지, 질 때는 단 한 가닥 아쉬움도 남아 있지 않다는 듯, 정말 미련 같은 건 남아 있지 않다는 몸짓으로 그냥 “툭” 떨어집니다. 나도 저렇게 헌 옷 한 벌 벗어 던져 버리듯 떠날 수 있을까? 떠나는 날 붙잡을 한(恨) 같은 것은 없을까?
달빛 아래서 세레나데를 부르던 안타까운 젊음이 있었고, 정체를 알 수 없는 외로움과 불안에 사로잡혀 불면으로 새던 밤도 있었습니다. 가족들과의 영원한 이별, 뼈저린 회한(悔恨), 그것들은 곱고, 슬프고, 밉고, 분노한 모습으로 내 마음에 살면서 나를 끌고 다녔습니다. 나는 애증(愛憎)에 사로잡힌 포로였고, 그것들을 사랑할 줄 몰랐습니다. 그것들이 내 삶의 실제 내용물이었지만, 나는 그런 것들은 기꺼이 그대로 받아들인 사실이 없었습니다. 하나하나에 대하여 갈증과 증오라는 원망의 이름을 달았습니다. 그런 것들은, 나의 초대나 허락에 아랑곳하지 않고 마음대로 내 마음에 차고 들어와, 주인이 되어 마음대로 짓밟고 괴롭히는, 불청객들이었습니다.
그러나 부정할 수 없는 것은, 그것들은 내 마음의 나무에서 피어나는 꽃과 같은 것들이었습니다. 그것들 전부, 이 화단에 소리 없이 찾아왔다 떠나는 온갖 꽃들처럼, 내 삶에 찾아온 손님들이었습니다. 어떤 것은 저 능소화처럼 거만을 떨고, 어떤 것은 제비꽃처럼 슬프고, 어떤 것은 독초처럼 아프기도 했지만, 그러나 그것들은 전부 내 마음에서 피었다 지는, 모양과 색깔이 각기 다른 꽃들이었고, 그 꽃들이 없었다면 내 삶은 텅 빈 쭉정이이었을 것입니다.
고운 것은 고운 것대로, 추한 것은 추한 것대로, 괴로운 것은 괴로운 것대로, 아픈 것은 아픈 것대로, 그것들은 전부 나를 찾아온 손님들이었고, 그것들이 나를 찾아온 것에는, 내가 모르는 어떤 까닭이 있었을 것입니다. 부모님은 나와 형제들을 가족으로 초대하여 서로에게 귀한 손님이 되었습니다. 꽃들이 화단에서 이슬과 햇살을 공유하듯, 우리는 한 공간, 같은 시간대를 공유한 세상의 손님이었습니다. 그렇게 모두 손님이었던 까닭에, 그들의 예정된 시간에 따라, 나의 헤어질 준비 같은 것은 헤아리지 않고 그렇게 내 곁을 떠났을 것입니다.
가슴 떨리던 젊은 날의 환희, 사랑의 상실이 가져온 아픔도, 모두 세월 따라 나를 찾아와 잠시 머물다 간 손님들이었습니다. 지금 남아 있는 손님들-그리움과 외로움, 늙음에 대한 분노-도 때가 되면 떠나겠다고 손을 내밀 것입니다. 손님은 자기가 가야 할 때는, 아무리 붙잡아도 뿌리치고 홀연히 떠나기 마련입니다. 세상을 연초록 그 아름다운 빛깔로 물들이고, 자취 없이 사라지는 봄날 훈풍처럼 말입니다.
아마, 내 곁의 세사(世事)도 그렇게 흘러갈 것입니다. 이제 나는, 화단의 꽃들이 사라지는 것을 바라보듯, 모든 인연이 만든 얽매임도 그렇게 바라볼 것입니다. 그도 잠시 나를 찾아온 손님일 테니, 그냥 태연히 맞았다가 애쓰지 않고 보낼 것입니다.
2024-07-25 [18: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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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감] 인간이여 분발하자
저녁 먹고 운동 삼아 동네를 한 바퀴 돌다 보면 개와 함께 산책하는 사람을 심심찮게 볼 수 있다. 모퉁이를 돌다가 강아지들끼리 마주치면 서로 냄새 맡고, 왈왈 짖기도 한다. 그 틈을 이용해 주인들은 서로 대화를 나눈다. ‘아휴, 털이 참 곱다. 어디서 미용시켜요?’, ‘얘는 몇 살이에요?’, 그렇게 친목을 쌓은 주인들은 자연스럽게 동네 학부모가 된다. 모찌 엄마, 율콩이 엄마. 아빠도 있다. 하몽이 아빠. 그렇게 불릴 때마다 하몽이 아빠는 객쩍게 웃는다.
그렇다. 내가 바로 하몽이 아빠다. 귀여운 아기로 꼬물대던 두 딸을 키웠고, 장성한 딸들은 버젓이 직장생활하고 있지만, 아이들은 어디로 가고, 나는 강아지 아빠가 되고 말았다. 어쩌면 우리 집안엔 개와 족보가 꼬이는 고대의 비밀이 있는지도 모른다. 어렸을 때, 할머니는 ‘아이고, 우리 강아지 인물이 훤하네.’ 하며 내 머리를 쓰다듬으셨고, 지금은 내가 ‘우리 애가 제일로 이쁘네.’ 하며 강아지를 쓰다듬고 있으니 말이다.
사실, 요즘엔 반려동물과 함께 사는 사람들이 참 많아졌다. 농림축산식품부가 2022년에 집계한 반려견의 수가 이미 302만 마리가 넘는다고 했다. 지금은 1000만이 넘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반려견뿐만 아니라 고양이, 새, 거북이, 열대어 등등 다양한 동물까지 생각하면 대단히 많은 사람이 반려동물과 함께 생활한다고 볼 수 있다.
덕분에 반려동물에 대한 인식도 많이 달라졌다. 어떤 항공사에서는 기내에서 반려견과 나란히 여행할 수 있는 상품을 발표하는가 하면, 또 어떤 대형 할인점에선 반려견과 함께 식사할 수 있는 공간을 따로 마련하기도 했다. 반려동물 전용 카페는 우후죽순으로 늘어나고 있다. 반려동물을 가족의 일원으로 여기는 추세에 맞춰진 상업적 대응이라 할 수 있겠지만, 또 한편으로 사람과 동물을 구분하는 어떤 경계가 허물어지고 있다는 느낌도 크게 와닿는다. 최근에 젊은이들이 이용하는 커뮤니티에서 아주 흥미로운 내용을 읽은 적이 있다. 만약에 자신이 키우던 개와 낯선 사람이 동시에 물에 빠졌을 때 누구를 구하겠냐는 물음이었다.
그런데, 의외로 많은 사람이 자신이 키우던 개를 구하겠다고 답변했다. 사랑하는 가족을 구하는 게 당연한데, 그게 무엇 잘못되었냐고 반문하기도 했다. 어떤 댓글에선 사람을 구하긴 하겠는데, 그 선택이 옳았는지 확신할 수 없겠다는 대답도 있었다. 인간의 가치는 여타 동물들과 비교할 수 없으며, 그 가치는 절대적이라는 의견에는 공격적인 댓글이 많았다. 인간 생명이 동물 생명보다 더 가치 있다는 근거가 무엇이냐는 반론부터 해서, 동물은 사랑을 베풀면 거짓 없이 그 사랑을 되돌려 주는데, 인간이라는 족속은 과연 그렇게 하고 있냐고 따지기도 했다.
나도 나 자신에게 그 질문을 던져 봤다. 나는 인간의 형상을 가진 생명을 위해 내가 사랑하는 식구의 죽음을 선택할 수 있을까? 솔직히 말해, 나는 인간과 반려동물 중 어느 생명이 더 소중하냐는 질문으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우리가 각자의 삶에서 인간에 대한 환멸을 얼마나 겪었을까, 라고 묻는 문제로 보였다. 나는 여전히 인간만의 특별한 가치를 믿고 싶기 때문이다.
하지만, 거짓으로 이득을 취하고, 폭력으로 빼앗고, 훔치고, 죽이고, 심지어 누군가의 약점을 이용해 착취하려는 사람들까지 북적이는 뉴스 속에서도 굳건히 그 믿음을 유지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사람에 대한 의심이 깊어질수록 인간 고유의 가치는 모호해질 것이며, 그 불신은 부조리의 악순환으로 되돌아올 것이다. 분명한 것은 나도 인간이며 누군가에게는 일면식 없는 타인이다. 자신의 가치조차 믿지 못하게 되어 버린 우리 인간들이여 부디…분발하자.
2024-07-18 [18: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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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감] 한 가지 작은 다행
올해 중학교에 입학한 아들은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즐겁게 한 학기를 보내고 있다. 자유학기제 덕분에 시험공부에 대한 스트레스가 없는 데다 각종 스포츠 활동, 문화예술 체험, 진로 체험 등 다양하고 흥미로운 활동들을 학교에서 하고 있기 때문이다. 어떤 날엔 석고 방향제나 도자기 컵 같은 것을 만들어 오고, 어떤 날엔 먼 나라의 전통춤을 배워 오고, 또 어떤 날엔 종일 축구를 했다면서 자기가 어떤 활약을 했었는지 저녁 내내 자랑한다. 그런 이야기들을 늘어놓을 때 아이 얼굴에 가득 채워지는 해맑은 웃음. 그 웃음이 오래 지속되었으면 좋겠다고, 그걸 지켜주고 싶다고 나는 생각한다. 2학기부터는 성적이 산출되는 지필평가가 있겠지만 시험 점수로 스트레스 주지 말자. 저렇게 행복하고 즐거운 표정, 그거면 되지 않나. 다른 건 부차적인 문제다, 그런 생각.
공식적인 시험은 없어도 학습 확인 차원에서 수업 중에 시험을 치기도 하는 모양인데, 큰 관심을 두지는 않았다. 그런데 얼마 전 아이가 학교에 다녀와서 말했다. “엄마, 나 오늘 국어 시험 쳤는데 38점 받았어.” “그렇구나. 만점이 50점이야?” 나는 미소를 띠고 물었다. 50점 만점에 38점이면 딱히 잘한 건 아니지만 그래도 나쁘진 않네, 라고 생각하면서. 시험 점수로 아이를 압박하지 않겠다고 늘 생각했으니까, 썩 만족스러운 점수가 아니더라도 칭찬하고 격려해 줘야지, 하고 다시 한번 다짐하면서.
“아닌데. 100점이 만점인데?” 아이는 천진난만하게 대답했는데, 그 순간 내 동공은 흔들렸던 것 같다. 100점 만점에 38점이라고? 영어도 수학도 아닌 국어 점수가? “그건 너무 심한데. 충격인데. 공부를 좀 해야겠다. EBS 강의를 들어볼래? 엄마랑 문제집을 하나 풀어볼까? 차라리 학원 다닐래?” 등등의 말을 횡설수설 늘어놓는 나에게 아이는 또박또박 말했다. “엄마, 진로 탐색 시간에 선생님이 그러셨는데 시험 점수 같은 것보다 내가 행복한 게 제일 중요한 거래.”
물론 나도 아이들을 대상으로 강의를 할 때마다 그렇게 말했었다. 다른 사람들이 획일적인 가치에 매몰되어 허황된 목표를 향해 달려가고 있을 때 자신이 진정으로 좋아하는 소박한 일들을 하루하루 기쁘게 해내는 주인공의 모습이 담긴 그림책을 읽어주면서 “여러분도 남들이 다 좋다고 말하는 것 말고 자기가 진심으로 좋아하는 걸 찾아가면서 그 과정에서 행복하기를 바랍니다”고 말해 주었다. 사춘기에 접어든 아이들은 그 이야기에 눈빛을 반짝였고, 그때의 내 마음도 가식은 아니었다. 하지만 국어 점수 38점을 받아온 아이에게 나는 끝내 그 말을 해주지 못했다.
그날 나는 내 안의 모순을 마주하고 밤새 괴로웠다. 아이가 원하지 않으니까, 라며 세상 쿨한 엄마인 것처럼 학원도 안 보내고 있지만, 그 저변에는 아이가 학원에 가지 않고도 평균 이상의 학업 성취를 이룬다는 전제가 있었나 보다. 어쩌면 나는 사교육 없이 명문대에 간 아이들의 인터뷰 답변을 내 아이에게 기대했을지도 모른다. “학원은 안 다녔고요, 교과서 위주로 공부했어요.” 나는 초연한 태도를 취하되 아이는 알아서 잘했으면 하는 더 큰 욕망. 차라리 닦달하는 것만 못한 속물성과 이중성.
내가 했던 말과 행동의 저변에 깔린 마음을 가만히 들여다본다. 대외적으로 나를 포장한 언어들을 벗겨내면 결국 드러나고 마는 것은 비루함이었다. 내 안에 가득 찬 모순과 자아의 민모습을 마주하는 순간이 오면 고작 이런 인간으로 살다 죽게 된다는 것이 슬프고 한심하다. 다만 한 가지 작은 다행은, 그런 나에 대해 글을 쓴다는 것. 쓰기 위해 내면의 밑바닥까지 내려가 마주하기 싫은 스스로의 모습을 오래도록 우두커니 바라본다는 것이다. 고통스러워도 자신을 직면하고 계속 쓰는 일, 그것이 나를 조금은 나은 사람으로 만들어 줄 수 있을까.
2024-07-11 [17: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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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감] 차별 없는 처벌, 처벌 없는 차별
한 남자가 밥상의 맞은편에 앉은 남자에게 느닷없이 설명한다. “헌법 제11조 1항, 모든 국민은 법 앞에 평등하다. 누구든지 성별·종교 또는 사회적 신분에 의하여 정치적·경제적·사회적·문화적 생활의 모든 영역에 있어서 차별을 받지 아니한다.” 맞은 편의 남자는 뜨악한 표정으로 듣고 있지만, 결코 부인하거나 반발하지 않는다. 그들의 식사 풍경 뒤에서, 그들을 바라보고 있는 우리도 결코 부인하거나 반발하지 않는다.
헌법 제11조에는 이 외에도 제2항과 제3항이 더 있다. 제2항은 “사회적 특수계급의 제도는 인정되지 아니하며, 어떠한 형태로도 이를 창설할 수 없다”이고 제3항은 “훈장 등의 영전은 이를 받은 자에게만 효력이 있고, 어떠한 특권도 이에 따르지 아니한다”이다. 하지만 2년 전부터 한국 사회에는 인정되지 말아야 할 ‘특수계급’이 버젓이 인정되고 있으며 결코 창설할 수 없다는 ‘사회 제도’가 이미 창설되어 있다.
우리 사회 특수계급의 탄생
영화 속 현실과 비슷해져
처벌 없는 차별의 결과물
특수계급으로 부상 중인 여인은 ‘여사’라고도 불리는데, 지금까지 연루된 범죄만 해도 상당하다. 금품 수수, 허위 경력, 논문 표절이 그것이고, 주가 조작, 사기 행위 등에 대해 의심을 받고 있다. 많은 이들은 막연한 의심을 넘어 합리적 의심을 품고 있으며, 이를 해명하기 위하여 여사에 대한 수사와 소환이 이루어져야 한다고 믿고 있다. 그럼에도 여사는 무사했다.
영화 ‘내부자들’에서 헌법 제11조 1항을 읊어 준 남자는 검사(우장훈)였다. 그 검사는 공정했고 상식적이었다. 자기가 먹은 밥값은 자기가 계산해야 한다고 믿었지만, 오갈 데 없는 남자에게는 밥을 내주었다. 출세에 대한 욕심이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편법과 모략과 결탁으로 출세하고 싶은 마음은 품지 않았다. 그는 어떻게 하든 간에, 검사로서 범인을 잡고 범죄를 수사하고 그래서 얻은 실적으로 더 높은 곳을 향하여 올라가고 싶어 했다.
하지만 우장훈의 세상은 달랐다. 검사가 높게 올라가고 올라가지 않고는 사전에 정해져 있었다. 검사가 하는 노력 이외에도 많은 것들이 변수로 작용했다. 그래서 검사는 끊임없이 발버둥 쳐야 했다. 하지만 그러면 그럴수록 검사의 입지는 좁아졌고, 출세는커녕 범죄자에 대한 단죄조차 어려웠다. 그는 내부자가 되기로 마음먹고 범죄자의 소굴로 들어갔고, 그곳에서 강력한 범죄자 그룹도 부인하기 어려운 강력한 증거를 얻었으며, 그 증거로 세상을 조금 변화시켰다.
지금, 여사를 필사적으로 보호하는 남자도 과거에는 검사였다. 그 남자는 제법 의기로운 적도 있었고, 무모할 정도로 과감한 적도 있었다. 검사였던 이 남자 역시 출세에 대한 욕구는 강력했지만, 어느 정도까지는 사회 정의와 맞물려 있기도 했다. 검사였던 그 남자 역시 적들의 소굴로 들어갔고 그곳에서 강력한 힘을 얻어 자신이 생각하는 단죄를 내리고자 했다. 그렇게 영화 속 남자와, 현실 속 남자는 비슷한 길을 걷는 것 같았다.
하지만 결정적인 차이가 있었다. 영화 속 남자는 검사의 직위를 버렸고, 친구의 구속도 감내했다. 하지만 현실 속 남자는 검사의 직위를 이용했고, 여인의 구속을 막았다. 그리고 자신에게, 자신의 가족에게, 자신이 속한 그룹에게 더욱 엄중했어야 할 칼을, 타인에게, 자신의 상대에게, 자신에게 불복하는 그룹에게만 휘두르는 참극을 빚어냈다. 영화 속 야인이 된 남자는 공정하고 상식적이고자 했지만, 현실 속 대통령이 된 남자는 편파적이고 이기적이었을 따름이다. 그래서 영화로 이미 구경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 사회는 영화가 경고했던 그 세계로 돌아가고 말았다. ‘차별 없는 처벌’을 하지 않고, ‘처벌 없는 차별’을 한 마땅한 결과였다. 그렇게 우리는 20년은 뒤로 가야 했다.
2024-07-04 [18: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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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감] 금빛 개울의 전설
군자(君子)가 위정(爲政)하고, 철인(哲人)이 통치하는 사회는, 아무도 살아보지 못한 미지의 세상이다. 사람들은 이 현실을 부정하며 그 아무도 살아보지 못한 세상을 추구한다. 이상적(理想的) 사회라 부르며.
큰 산 아래 작은 호수가 있었다. 산 아래 위치한 까닭에 비가 내리면 산과 논밭으로부터, 황토, 거름과 비료 찌꺼기, 썩은 동물 사체가 흘러들어, 호수 바닥은 부토(腐土)로 쌓여 있었고, 물은 언제나 흐렸다. 그러나 이 부식물 찌꺼기로 인하여 큰 수초 더미가 형성되고, 그 속에 플랑크톤과 물이끼가 풍성하게 자랐다. 그래서 그것을 먹고 사는 새우 등 온갖 작은 곤충들이 서식했고, 그것을 먹이로 하는 크고 작은 물고기들이 어울려 살았다.
어느 날 큰비가 내려, 산 위 개울에 살던 산천어 한 마리가 물살에 쓸리어 이 호수로 떠내려왔다. 평생을 산 위 맑은 물과 깨끗한 모랫바닥에서 살던 산천어는 온갖 더러운 찌꺼기들이 부유하는 호수에 들어오자 숨이 막힐 것 같았다. 그래서 산 위 개울로 돌아가려 했지만, 호수와 개울 사이에는 몹시 높은 언덕이 가로 놓여 있어 여의치 못했다. 호수에 살게 된 산천어는 고향인 개울을 그리워하며, 호수의 물고기들에게 고향인 산 위 개울을 이야기했다.
“내가 살던 고향인 산 위 개울은 물이 너무 맑아! 햇살이 금빛 모래에 반사되어 반짝반짝 빛났지! 그곳에는 작은 고기들이 모여 사는데, 몸이 늘 깨끗해, 그런데 이 꼴을 보아! 아무리 씻어도 이 더러운 냄새는 가시지 않아! 그리고 개울에서 먹던 작은 올갱이는 얼마나 맛이 있었는데! 이곳에는 그런 깨끗한 먹이가 없네!” 호수의 물고기들은 산 위 개울을, 햇살이 금빛 모래에 반사되어 찬란하게 빛이 나고, 맛이 별난 올갱이 같은 것들이 살고 있는 낙원으로 상상했다.
벌레가 우글거리고
수초 더미가 있고
지렁이가 기어다니는 호수에
왜 하필 여기 정착했는지 알고는
그제서야 이주 계획을 포기했다는
그러자 호수의 고기들은, 지금까지 아무 생각 없이 숨 쉬고 먹어온 호수의 물이 냄새가 나는 썩은 물이고, 바닥은 온갖 더러운 찌꺼기들로 채워진 짓무른 흙이어서 지렁이 같은 더러운 것들이 기어다닌다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작은 고기들은 큰 고기들이 먹이를 다 먹어 치우는 바람에 늘 배가 고프다는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
“이 호수에는 웬 놈의 큰 고기가 이렇게 많아! 그 큰 고기들이 먹이를 다 먹어 치우는 바람에 우리 같은 작은 고기들은 항상 배가 고프잖아! 저 산 위 개울에는 작은 고기들만 산다던데, 그곳에 가면 큰 고기가 없으니 우리는 항상 배부르게 먹을 수 있을 텐데.” 이런 말들이 호수에 퍼지자, 큰 고기인 잉어는 이런 생각을 했다. “개울에는 큰 물고기들이 살지 않는다고? 그렇다면, 내가 가면 대장 하겠네!”
그래서 잉어는 산천어를 찾아가 개울의 사정을 자세히 묻었다. “개울에 나보다 큰 놈 있어?” “개울에 가면 자네가 제일 크지. 아마 자네가 대장이 될걸.” 잉어는 산 위 개울로 가면 대장이 되어 먹이를 마음대로 먹을 수 있다는 꿈에 부풀었다. 그래서, 산 위의 개울은 작은 고기와 큰 고기 모두에게 꿈의 장소가 되었다. 자기들의 조상들이, 왜 저리 아름다운 산 위 개울에 자리 잡지 않고, 이 더러운 호수에 자리를 잡았는지 알 수 없다며, 조상을 원망하기 시작했다. 결국, 호수의 고기들은 모두 산 위 개울로 이주하기로 결정하고, 큰비가 내리면 그 물결을 타고 산 위 개울로 터전을 옮기기로 했다.
큰비를 기다리던 어느 날, 호수에서 새우를 잡아먹던 잉어는, 산천어에게 산 위 개울에는 어떤 새우나 지렁이가 살며, 이끼와 수초의 맛은 어떤지 물었다. 산천어가 말했다. “그런 것들은 이런 더러운 물에나 사는 것들이야! 산 위 개울에는 그런 것은 없어.” 잉어는 깜짝 놀랐다. “그런 개울에 가면 우리는 무얼 먹고 살지?” 개울에는 먹을 것이 별로 없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호수의 고기들은 한탄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아름다운 곳에 그렇게 먹을 것이 없다니 믿을 수 없어!” 그제야 호수의 고기들은, 조상들이 왜 벌레가 우글거리는 수초 더미가 있고, 지렁이가 기어다니는 더러운 호수에 터를 잡았는지 알게 되었고, 산 위 개울로 이주하는 계획을 포기했다.
세월이 흘러, 산 위 개울로 이주하려다 포기한 고기들이 모두 죽자, 산 위의 금빛 개울은 전설로 남았다. “저 산 위 높은 곳에 금빛이 나는 아름다운 개울이 있데! 맛있는 올갱이라는 것도 살고….” 그러나 그곳에는 호수처럼 먹이가 많지 않다는 내용도 없고, 그래서 조상들이 그곳으로 이주하는 것을 포기했다는 내용도 없었다.
2024-06-27 [18: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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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감] 단 한 번이라도
한 번이라도 해 보고 싶은데 쉽게 할 수 없는 것들이 있다. 쉽지 않다는 기준은 개인마다 다를 것이다. 용기가 없어, 건강이 허락지 않아, 시간이 없어, 혹은 큰 비용 때문일 수도 있다. 아무튼, 뭔가 대단한 결심이 필요한 것들임은 분명하다. 필자는 세계 여행을 하고 싶었다. 아프리카 대륙을 횡단하고, 북극의 오로라를 보고, 패러글라이딩도 해 보고 싶었다. 낚시로 40㎝가 넘는 돔을 잡아 보고 싶기도 했다. 30대엔 그랬었다.
50대 후반이 된 지금은 밤하늘에 환한 별을 보고 싶다. 모닥불을 피워 놓은 어느 황량한 초원의 밤 풍경을 TV로 본 적이 있었다. 그곳의 밤하늘엔 눈부시게 밝은 별이 설탕처럼 뿌려져 있었다. 하늘엔 정말 온통 별이었다. 사실, 실제로 그런 별을 보는 건 불가능에 가깝다. 거리가 멀어서가 아니라, 시력 때문이다. 백내장 수술 후에 시력이 더 나빠져 이젠 별을 보기가 힘들어졌다. 그래서 여름밤, 평상에 누워 은하수를 보고, 또 별똥을 보며 소원을 빌었던 유년의 기억이 더욱 애틋해졌다.
그런 감상 덕분에 버킷 리스트라는 것을 흉내 내어 몇 줄 끼적거리게 되었다. 패러글라이딩은 지금이라도 가능할 것 같다. 그리고 전문 강사에게 배워 가수 뺨치게 노래를 잘 불러 보고 싶다. 덧붙여 전자기타를 배워 게리 무어의 ‘스틸 갓 더 블루스(Still Got the Blues)’를 멋들어지게 연주해 보고 싶다. 그렇게 하나씩 꼽아가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든다. 이런 게 왜 하고 싶지? 이게 내 삶에 무슨 의미가 있어 꼭 해보고 싶다고 고집하는 걸까? 그냥 멋있어 보여서 해 보려는 것은 아닐까? 스스로 그런 질문을 던지고 보니 당장 대답이 궁했다. 하지만, 내 삶에 별 의미가 없다고 단정하기엔 뭔가 억울하다.
그래서 그림을 떠올렸다. 내가 지금까지 그려냈던 내 삶의 그림. 어떤 곳은 색칠되어 있고 어떤 곳은 비어 있다. 색칠된 곳은 내 삶의 일부였다. 어떻게 경험했느냐에 따라 색깔은 다를 것이다. 하얀 여백은 내가 한 번도 발을 디디지 않은 영역이다. 그렇게 경험한 것과 비워진 것들로 그려진 내 삶의 그림은 얼마나 근사한 모습일까? 문득, 이진법에서 사용하는 1과 0이라는 개념이 생각난다. 1은 있다는 것. 즉, 존재하는 것이고, 0은 아무것도 없다는 의미다.
나는 세상의 중요한 법칙 중의 하나가 바로 0과 1의 교차라고 생각한다. 미래에 펼쳐질 것이라는 AI, 즉 인공지능도 결국은 1과 0만을 사용하는 이진법으로 작동되지 않은가. 뭔가를 구분하는 선을 긋더라도 그것을 확대하면 수많은 ‘있다’와 ‘없다’의 집합이고, 결국 최종적으로 영역을 구분하는 것은 ‘있다’와 ‘없다’의 차이가 된다. 거기까지 생각하다가 나도 모르게 어? 하는 소릴 냈다. 그림이라는 것에도 당연히 여백이 있어야 하는 것 아닌가. 그렇다면 내가 칠한 ‘했다’라는 영역 못지않게 ‘해 보지 않았다’라는 여백도 똑같이 중요하다. 특히, 하얗게 표현되어야 할 부분은 어떠한 색으로도 얼룩지지 않아야 한다.
한데, 내 그림을 되짚어보니 회색으로 번진 부분이 정말 많았다. 그것은 한 번이라도 하지 말아야 할 것을 해버렸을 때 생겨난 얼룩이다. 운이 좋다면 그 얼룩을 다른 선의 음영으로 활용할 수 있을지는 모른다. 그 음영과 구분될 새하얀 여백이 있다면 말이다. 다행히, 여백으로 쓸만한 것이 아직은 꽤 남아 있다. 나는 써 내려가던 노트의 줄을 바꿔 또 한 줄의 메모를 했다. ‘단 한 번이라도 하지 말아야 할 것…안 하기.’
2024-06-20 [18: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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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감] 날개
요가를 배우면서 내 몸의 다양한 뼈와 근육의 위치를 새삼스럽게 인지한다. 내전근, 대퇴근, 척추기립근…. 그런 단어들을 들으면 피부 속에 숨은 근육들의 존재를 모처럼 개별적으로 인식하게 된다. 할라아사나 동작을 취했다가 바닥으로 몸을 내릴 때 선생님은 늘 호통을 친다. “한 번에 내려오지 말고! 흉추, 요추, 꼬리뼈 순으로!” 그러면 나는 뼈들의 위치와 순서를 생각하며 몸을 움직이려고 애쓴다. 얼마 전에는 선생님이 날개뼈 쪽 근육을 강화하기 위한 운동을 해보자면서 이렇게 말했다. “날개뼈가 유독 많이 튀어나와 있는 사람이 있는데, 전생에 천사였다느니 그런 말 같잖은 소리 하지 말고 운동하세요. 천사가 아니고요, 본인 견갑골에 이상이 있는 겁니다.”
‘나는 천사가 아니다. 운동을 하자.’라고 머릿속으로 되뇌는 동시에, 날개뼈의 존재를 생각하면서 자세를 취하다 보니 예전 7차 교육과정 때 중학교 2학년 국어 교과서에 실렸던 ‘아기 장수 우투리’ 설화가 떠올랐다. 그때 나는 보습학원에서 국어를 가르치고 있었기 때문에 교과서에 나오는 문학 작품들을 수없이 읽고 해석해야 했다. 시험 대비가 목적이었으나 어떤 작품들은 그렇게 읽어도 마냥 좋았는데, 그중 나는 날개가 달린 채로 태어난 우투리의 이야기에 깊이 매료되었다. 인간 몸에 날개라니, 얼마나 매혹적인가. 게다가 비극적 영웅 서사! 나는 예전부터 한 인간이 온갖 어려움을 이겨내고 끝내 승리하는 해피엔딩보다는 독자들의 기대를 저버리고 슬픔을 안겨주는 서사에 더 빠져들었다.
그 이야기에서 왕은 영웅적 면모를 지닌 채 태어난 아이를 죽이려고 혈안이 되어 있다. 군사들을 피해 사라졌던 우투리가 어머니 앞에 나타나 콩 한 말을 내밀며 볶아달라고 부탁하자 그녀는 아들을 위해 콩을 열심히 볶는다. 그러다 한 알이 튀어 바닥에 떨어지게 되고, 너무 배가 고팠던 그녀는 바닥에 떨어진 콩 한 알을 주워 먹고 만다. 우투리는 어머니가 볶아준 콩으로 갑옷을 만들어 입고서 군사들과 싸우는데, 한 알이 모자랐기 때문에 왼쪽 겨드랑이 날갯죽지 아래를 가리지 못한다. 군사들이 쏘는 모든 화살이 갑옷에 맞고 튕겨 나가지만 결국 마지막 화살이 우투리의 날갯죽지 아래를 명중해 그는 죽게 된다. 한 인간이 죽음을 무릅쓰고 거대한 세계와 대결하는 것. 끝내 죽음을 맞이했을지언정 그 비장함 자체가 위대하며 아름답다고 느껴졌다.
그런데 나는 한편으로, 주인공의 비극적 결말뿐만이 아니라 우투리 엄마의 마음이 어떠했을지 자꾸만 생각하게 되었다. 자신이 무심코 주워 먹은 콩 한 알이 아들 죽음의 원인이 되었을 거라는 자책. 우투리가 과연 콩 한 알이 부족해서 죽었을까. 엄마가 콩을 한 알도 빼놓지 않고 완벽하게 다 볶아 주었더라도 왕은 어떻게든 우투리를 죽였을 것이다. 그렇지 않고 우투리가 영웅이 될 만한 시대적 상황이었다면 설령 엄마가 콩을 다 먹어버렸더라도 그는 살았을 것이다. 우투리의 죽음이 단지 엄마의 실수 탓은 아닌데, 언젠가 포털 사이트에 우투리 엄마 안티카페까지 생겼었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꽤 충격이었다. 콩 한 알에 아들을 팔아먹었다느니 그런 말들은 아무리 설화 속 인물에 대한 이야기라도 너무 가혹하지 않은가.
세상의 수많은 비극은 개인의 노력과 관계없이 벌어지기도 한다. 그런 일들을 개인의 탓으로 돌리는 것은 쉬운 일이지만 우리가 서로를 비난하고 있을 때 잘못된 시스템은 신나게 돌아가고 우투리들은 그 시스템에 깔려 또다시 죽음을 맞이할 것이다. 비장한 서사에 매혹되는 내 취향은 문학으로 족하다. 나는 천사도 아니고 영웅도 아니지만, 내 주변 어딘가에 우투리가 있다면 그가 혹독한 싸움 끝에 마침내 날개를 펼칠 수 있는 세상이라면 좋겠다.
2024-06-13 [18: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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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감] '파묘'의 파격과 관객의 위력
‘파묘’의 위력은 심상치 않았다. 일반 관객들에게 선호되는 장르가 아니었음에도 흥행 면에서 전혀 위축되지 않았고, 오히려 예상을 뛰어넘는 국내외 흥행 성적을 보여 주었다. 해외에서 나타난 ‘파묘’의 흥행 성적은 비단 누적 관객 수의 증가에만 있지 않았다. 더 중요한 것은 ‘파묘’를 바라보는 다른 나라 이들의 시선이었다.
한국 영화는 2003년 중요한 정점을 보여 주었다. 이 해에는 ‘올드보이’와 ‘살인의 추억’이 산출되었는데, 두 작품은 완성도와 작품성으로 세계적 문제작에 오른 경우였다. 한국 영화 역사 전체를 통틀어도 주목되는 작품으로, 이미 세계적으로도 그 우수성을 인정받는 경우였다. 하지만 그 시기, 한국 영화는 놀라운 우수성을 동시대 전 세계 관객과 함께 할 수는 없었다. 개별적으로 해외 시장에 진출하는 일도 어려웠지만, 그때는 전 세계적으로 한국 영화에 대한 인식이 그다지 높지 않은 시기였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다른 나라 사람들은 한국 영화에 대해 거의 알지 못했다.
20여 년이 지난 지금은 상황이 달라졌다. 한국 영상 콘텐츠는 전 세계적인 인지도를 자랑하고 있다. ‘올드보이’와 ‘살인의 추억’도 점차 알려져 다른 나라 사람들도 한국 영화의 고전 혹은 명작으로 인정하고 있다. 해외 영화제에서 수상 경력이 늘어났고, 한국 영화(영상 콘텐츠)에 대한 팬이 늘어났고, OTT를 통해 공개되는 작품도 늘어났다. 이에 한국형 영상 콘텐츠에 대한 일정한 잠재적 수요 또한 형성되었다고 볼 수 있게 되었다. 그러니까 한국형 영상 콘텐츠가 우수하기만 하다면, 언제든지 볼 준비가 되어 있는 관객들이 생겨난 셈이다.
‘파묘’의 흥행은 잠재적 지지층의 존재를 확인시키는 일종의 리트머스 시험지였다. 영화 자체가 지닌 개성과 독특함도 관객들에게 호소하는 바가 컸지만, 그동안 누적된 한국 콘텐츠에 대한 신뢰와 기대 역시 그러한 호소력의 한몫을 담당했다. 관객 지지층의 주목되는 특성 중 하나는, 영화를 통해 한국의 상황과 역사 그리고 주변 관계를 이해하려는 노력이 포함된 점일 것이다. 과거 한국 콘텐츠는 역사적·사회적·지정학적 특수성으로 인해, 외국인들 사이에서 이해가 곤란한 텍스트로 전락할 것을 스스로 우려해야 했다. 이른바 자발적 시청을 기대하기 곤란했던 셈이다.
그래서 외국 수출 혹은 해외 시장을 겨냥하는 이들은 한국적 특수성, 예를 들면 고유한 역사나 분단의 상황 혹은 전래 문화(예술) 등을 영화 내에서 부각할 수 없었고, 인류적 보편성이나 문화적 통용성 위주로 영화를 정리해야 했다. 어찌 보면 ‘파묘’는 이에 정면으로 도전한 사례이다. 물론 ‘파묘’에서 풍수지리와 일제 강점 그리고 친일파 문제를 거론한 것이 처음부터 해외 시장을 염두에 둔 전략은 아니었다. 그런데 오히려 잠재적 관객층이 이러한 제약을 해소하며, 이 영화에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한 것이다. 이러한 변화는 사실 놀랍고, 다시 생각하면 두렵기도 하다.
우리는 무엇을 만들기 전에, 누가 그 무엇을 보고 평가하고 즐길 것인가를 생각해야 한다. 아무리 영화 제작이 개인적 기호와 역량에 기반한다 해도, 더 많은 사람이 더 다양한 시선으로 작품을 볼 수 있다면 만드는 사람으로서는 고민하지 않을 도리가 없기 때문이다. 이 고민은 행복한 고민이겠지만, 문화 예술의 속성상 이제는 이 고민도 함께해야 할 시기가 되었다. 더구나 이 점을 고민해야 했을 때 고민하지 않으며, 기껏 거둔 문화적 높이 또한 망실되는 사례 역시 나타나곤 했기 때문이다. 언제나 그렇지만, 무엇을 만드는 일은 늘 어렵다. 그럼에도 한국 영화의 새로운 도약이 ‘파묘’를 기점으로 다시 이루어질 수 있었으면 하는 마음이 가득하다. 지금은, 그때 가지지 못했던 관객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니 더욱 그런 마음을 감추기 어렵다.
2024-06-06 [18: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