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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물썰물] "대선 꼭 투표" 86%
‘민주주의’하면 떠오르는 이미지가 나라마다 똑같지는 않다. 미국 출신의 북한학자 브라이언 마이어스 동서대 교수는 지난해 출간한 <사랑받지 못하는 공화국>에서 미국인은 ‘투표함’이나 ‘투표하기 위해 줄을 선 사람들’을 떠올린다며 한국과의 차이점을 비교했다. 실제 구글 이미지에 ‘democracy’(민주주의)를 입력하면 투표하는 손이나 투표장 유권자 행렬 클립아트가 대부분이다. 집회와 시위 같은 집단 행동의 표상은 전무하다. 서구에서 민주주의는 선거라는 제도적 행위로 수렴된다.
한국은 민심이 중시되는 경향이 강하다. 네이버 이미지에서 ‘민주주의’를 검색하면 ‘국민이 지켜낸 민주주의’ ‘우리가 바로 민주주의’ 등의 메시지가 읽힌다. 서구에서 제도로 자리잡은 민주주의가 한국에서는 투쟁과 쟁취의 대상이다. 이는 시민 저항과 대규모 시위가 한국 현대사의 분수령을 이뤘기 때문이다. 87년 체제, 즉 제6공화국도 1987년 6월 항쟁의 결과물이다. 투표만으로 바뀌지 않는 현실에 맞선 시민 행동주의를 빼고 오늘날의 대한민국을 설명하기는 어렵다.
제도 내의 참여(투표)와 제도 밖의 참여(저항)는 민주주의를 구성하고 유지하는 불가분의 요소다. 어느 쪽이 정답인가는 우문이다. 각 나라에서 민주주의가 성취되는 경로가 동일할 수 없어서다. 다만, 민심이 최고의 가치가 되면 자유민주주의의 본질인 타협 추구와 양립하기 어렵다는 마이어스 교수의 지적은 곱씹을 필요가 있다.
거리의 열정이 여전히 넘치는 한국이지만 선거 참여율은 상승 반전이 안 되고 있다. 과거 80%대였던 대선 투표율은 2022년 제20대 대선 77.1% 등 70%대에 멈춰 있다. 물론 지난해 미 대선(64.52%)과 2022년 일본 참의원 선거(52.05%)에 비하면 높지만 OECD(경제협력개발기구) 평균을 살짝 상회하는 수준이다.
뜬금없는 비상계엄령에 이어 9년 만에 대통령이 다시 탄핵되는 대혼란 속에 치러지는 조기 대선. 정치라면 진절머리가 날 법도 한데, 유권자 86%가 “반드시 투표하겠다”고 응답했다. 중앙선거관리위원회의 설문 조사에 따르면 적극 투표층 비율은 상승했고, ‘투표하지 않겠다’는 3%에 그쳤다. ‘선거를 통해 국가 전체의 미래가 달라질 수 있다’는 데 동의한 비율 84.9%에서 투표 참여 응답률이 높은 이유가 설명된다. 세상을 바꾸는 동력은 거리에서 축적되지만, 민주주의의 완성은 선거를 통해서 이뤄진다는 국민적 공감대로 읽고 싶다.
김승일 논설위원 dojune@
2025-05-18 [17: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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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물썰물] 통영과 나폴리
‘바람맛도 짭짤한 물맛도 짭짤한/전복에 해삼에 도미 가재미의 생선이 좋고/파래에 아개미에 호루기의 젓갈이 좋고/새벽녘의 거리엔 쾅쾅 북이 울고/밤새껏 바다에선 뿡뿡 배가 울고/자다가도 일어나 바다로 가고 싶은 곳이다’
모던보이 시인 백석(1912~1996)의 시 ‘통영2’의 일부분이다. 시인은 1936년 발표한 이 시를 통해 경남 통영시의 당시 먹거리와 볼거리, 아름다운 풍광을 서정적으로 묘사했다. 향수의 시인 정지용(1902~1950)은 ‘통영과 한산도 일대의 풍경, 자연미를 나는 문필로 묘사할 능력이 없다’는 소감을 담은 기행문을 남기기도 했다. 통영에는 다양한 스토리를 품은 관광 명소들이 즐비하다. 강구안이라고 불리는 통영항과 인근에 자리한 조선 시대 충청·전라·경상도 삼도 수군 본진인 삼도수군통제영, 통제영 동쪽 편에 자리한 벽화마을 동피랑, 서쪽의 서피랑 등은 통영 관광 1번지로 꼽힌다. 통영항 일원의 야경도 이색적이다. 이 밖에 세계 10개국 유명 조각가들의 작품을 전시 중인 남망산조각공원, 1932년 아시아 최초로 지어진 해저터널, 한산도, 미륵산, 케이블카 등도 필수 관광 코스로 꼽힌다. 욕지도, 비진도 등 섬과 해안선마다 제각각의 특색을 가진 해수욕장들이 대거 포진하고 있다.
특히 통영은 국내에서 손꼽히는 예향이다. 국제음악제가 열리는 통영국제음악당 등 문화예술 인프라가 도시 곳곳에 가득하다. 통영은 한국 현대 연극계의 대부 동랑 유치진, 깃발의 시인 청마 유치환, 현대음악 거장 윤이상, 꽃의 시인 김춘수, 봉선화의 시인 초정 김상옥, 흙과 생명의 작가 박경리, 색채의 마술사 전혁림 등을 배출한 고장이기도 하다. 도시 곳곳에 설치된 지역 출신 작가들의 생가, 기념관, 미술관, 문학관, 시비 등을 돌아보는 것도 통영 나들이의 큰 즐거움이다.
통영은 ‘동양의 나폴리’라고도 불린다. 도시가 보유한 문화예술적 미학과 아름다운 항구 풍광이 이탈리아 나폴리를 연상시키기 때문이다. 세계 3대 미항인 나폴리는 유네스코 문화유산과 예술 자산을 다수 보유, 세계적인 문화예술의 도시로 꼽힌다. 그런데 최근 통영시와 나폴리시가 우호교류 협정을 체결했다. 동양의 나폴리와 진짜 나폴리가 사실상의 자매도시 관계를 맺은 것이다. 이번 협정을 계기로 통영이 명실상부한 국제 문화관광도시로 발돋움했으면 하는 바람이다. 통영과 나폴리가 다양한 분야에서 활발한 교류를 이어가길 기대한다.
2025-05-15 [17: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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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물썰물] 선물과 뇌물
올해도 어김없이 스승의 날이 돌아왔다. 스승의 가르침을 다시 한 번 되새기고 그 깊은 은혜에 감사하는 마음을 갖자는 의미로 제정된 이 법정기념일은 최근 사회문제화한 교권 추락 현상과 겹치며 빛이 많이 바랬다. 소위 ‘김영란법’이라 불리는 청탁금지법이 2016년 하반기 본격 시행에 들어간 때와도 시기가 겹치는 것 같다.
공직자와 언론인, 사립학교 교직원 등을 대상으로 하는 김영란법은 직무와 관련해 1회 100만 원, 연간 300만 원을 초과한 금품을 수수하면 처벌한다는 게 핵심 내용이다. 국민권익위원회는 법 시행 당시 타 학교로 간 교사가 아니라면 직무 관련성이 인정될 수 있으므로 학생이나 학부모의 금품 제공이 불가능하다는 해석을 내 놓았다. 학부모들이 교사들에게 수고한다고 캔커피 하나도 쉽게 건네지 못하는 세상이 됐다는 푸념이 나온 건 그 즈음이다.
순수한 마음으로 건네는 선물을 모조리 뇌물로 규정하면 곤란하다는 여론이 나오자 사회 각계에서는 선물과 뇌물을 가르는 기준을 자체적으로 마련하느라 분주한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이 가운데 대한상공회의소가 2007년 제시한 기준은 아직까지도 유머와 위트가 있으면서도 타당한 견해가 반영돼 있는 것으로 꼽힌다. 대한상공회의소는 선물과 뇌물의 가장 큰 판별 기준으로 받고 잠을 잘 잘 수 있느냐를 꼽았다. 그 다음으로는 언론에 보도가 돼도 문제가 없느냐 여부였다. 마지막 기준은 다른 직위에 있어도 받을 수 있었느냐였다. 금품을 받을 때 이 세 기준을 되새겨 본다면 상식적인 수준에서 선물과 뇌물을 가릴 수 있으리라 본다.
최근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카타르 정부로부터 한화로 무려 5600억 원 상당의 초호화 비행기를 선물받은 행위를 놓고 미국 내에서도 선물이냐 뇌물이냐를 놓고 논란이 한창이다. 트럼프 대통령의 행위를 대한상공회의소 기준에 적용하면 어떤 해석이 가능할까.
우선 트럼프 대통령 본인은 구형 에어포스원을 대체하기 위해 무료 항공기를 안 받는다면 오히려 ‘루저’(패배자)라 할 정도이니 잠을 잘 잘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언론에 연신 보도가 됐는데도 논란을 넘어선 수사 등의 얘기가 나오지 않는 걸로 보아 두 번째 기준도 통과할 듯 싶다. 하지만 마지막 기준을 넘어서기는 쉽지 않을 듯하다. 카타르가 과연 트럼프가 미국 대통령이 아니었어도 초호화 비행기를 건넸을까. 상식적으로는 아닐 듯하지만 최근 미국의 행보가 상식과는 많이 동떨어져 있어 판단이 무척 어렵다. 이상윤 논설위원 nurumi@busan.com
2025-05-14 [18: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