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필남의 영화세상] 인간다움을 위한 처절하면서도 처연한 행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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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평론가

60대 여성 킬러의 이야기 '파과'
생의 마지막 순간 선택한 길은…
스크린 압도 '이혜영 연기' 주목

영화 '파과' 스틸컷. NEW 제공 영화 '파과' 스틸컷. NEW 제공

구병모 작가의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한 ‘파과’는 60대 여성 킬러의 이야기를 다룬 영화다. 킬러물이라 하면 남성들의 전유물이었고, 그것도 젊고 잘생긴 배우의 몫이었다. 민규동 감독은 뻔한 고전 서사를 담백하면서도 흡입력 있게 풀어낸다. 특히 나이나 성별의 한계를 뛰어넘으며 지금까지 본 적 없는 여성 킬러를 구현했다는 점에서 인상적이다. 영화는 한 여자가 킬러가 될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설명하는 데서 시작한다. 온몸에 멍이 든 소녀가 위태롭게 걷고 있다. 소녀를 보고도 무심히 지나치는 차들 사이로 남자 ‘류’의 차가 멈춘다. 소녀는 어딘지 비밀스러운 남자와 그의 아내가 있는 집으로 가고, 난생처음 가족의 사랑을 느끼나 그 행복은 짧다.

소녀는 살기 위해 살인을 저지르고, 살아남기 위해 킬러 ‘손톱’이 된다. 소녀의 삶에는 어둠과 죽음만 있을 뿐 좀처럼 나아지지 않는다. 이때 소녀 곁에 남은 단 한 사람의 죽음은 소녀를 완전히 무너지게 만든다. 소녀는 스승이자 은인이 준 이름 손톱을 버리고, 스스로 부여한 이름 ‘조각’(爪角)으로 다시 태어난다. 손톱이 인간으로 살고자 가진 이름이라면, 조각은 인간으로 살기를 체념한 이름이다. 조각은 미래도 희망도 꿈꾸지 않는다. 철저한 고립과 외로움을 선택한 그는 아무도 곁에 두지 않고, 아무것도 가지지 않았지만 아무렇지 않아 보인다.

조각이 몸담고 있는 조직 ‘신성방역’은 바퀴벌레 같은 인간들의 죽음을 의뢰받고 처리하는 곳이다. 그곳에서 40여 년 동안 단 한 번의 실수도 없었던 레전드 킬러가 바로 조각이다. 그러나 이제 조각은 늙었고 몸에 문제까지 생기면서 퇴물로 취급당한다. 모두가 그의 은퇴를 바라지만 조각은 떠날 마음이 없다. 킬러의 자질을 갖춘 그는 빠르고 증거를 남기지 않으며 냉철하다. 특히 그는 인간이 가지는 두려움이나 분노, 슬픔 등의 감정이 없다. 오래 함께 일한 동료의 뒤처리를 자신이 맡는 것으로 동료의 죽음을 애도하면서도 불필요한 감정을 낭비하지 않는다. 감정을 배제한 채 살아가는 조각은 마치 기계 같다. 하지만 그에게 감정이 없는 것이 아니다. 감정을 깊숙이 눌려두고 있을 뿐이다. 감정을 내보일 때가 자신의 죽음을 의미한다는 것을 숱한 죽음들 속에서 배웠기 때문이다.

자신의 감정을 봉인해두던 조각이 변한다. 가족도 친구도 만들지 않았던 조각이 죽어가는 개 한 마리를 살리고 그 개를 집으로 데려오면서부터다. 그 무엇에도 관심을 기울이지 않던 그가 변한 이유가 퇴물 취급을 받기 때문인지, 몸에 탈이 생겼기 때문인지, 조직을 떠나야 한다는 불안감에서 기인한 것인지 알 수 없다. 다만 지금까지 한 번도 하지 않았을 연민 혹은 동정의 감정으로 조각의 일상이 뒤틀린다는 것이다.

흠집 난 과실(破果) 또는 여자 나이 16세(破瓜)를 일컫는 영화 제목 ‘파과’는 조각의 생애를 뜻한다. 평범한 10대 시절을 보낼 수 없었던 소녀는 상처받고 고통받으며 어른이 되었고, 흠집 난 인간으로 살았다. 영화는 파과를 의미하는 조각의 과거와 현재의 삶을 교차해서 보여주며, 그가 살아남기 위해 한 선택과 행동에 집중한다. 그리고 영화의 하이라이트는 생의 마지막 순간, 삶의 의미를 찾고 인간다움을 회복하기 위한 처절함을 그린다.

이 영화에서 조각을 연기한 배우 이혜영을 빼놓을 수 없다. 기억해보면 이혜영은 누군가의 엄마나 아내를 연기해도 누군가의 그 무엇으로 남지 않는 연기를 펼쳤다. 온전히 자신만의 서사를 쓰며, 특유의 카리스마와 고혹적인 목소리로 스크린을 채웠다. 그런데 영화가 끝나면 배우가 아니라 그가 연기한 캐릭터만이 기억된다. ‘당신 얼굴 앞에서’의 무료한 듯 지적인 얼굴, ‘피도 눈물도 없이’의 강렬함, ‘파과’의 지친 듯한 무표정까지 모두 그이지만 매번 다른 얼굴로 자신을 지우는 이혜영의 연기는 주목할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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