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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병철의 인사이트] 의료 대란, 지역에서 던지는 질문
지난해 10월 정부가 의과대학 정원을 늘리겠다고 발표한 뒤 벌써 1년이 흘렀다. 이후 전공의 대부분이 병원을 떠나면서 8개월째 의료 대란이 지속되고 있다. 대표적 3차 진료 의료기관인 서울 ‘빅5’(서울대·서울아산·삼성서울·세브란스·서울성모) 대학병원은 파행 운영 중이다. ‘응급실 뺑뺑이’는 늘어나고, 배후 진료도 붕괴하고 있다. 그 사이에 전국 39개 의과대학의 2025학년도 수시모집은 마감됐다. 전공의가 병원을 떠난 사이에, 의대생 증원 입시 열차도 플랫폼을 떠났다.
뜻하지 않은 긍정적인 변화도 나타나고 있다. 일시적일 수도 있지만, 지역 2차 의료기관의 존재감이 두드러지는 형국이다. 경증 환자들이 2차 종합병원으로 몰리면서, 빅5 위주의 3차 의료기관으로 집중됐던 의료 전달체계가 정상화하는 조짐이다. 3차 대형병원이 전공의 부족으로 중증 환자만 가려 받으면서, 경증 환자들이 2차 종합병원으로 분산된 덕분이다. 대형병원 응급실을 찾는 경증 환자는 30% 이상 줄었다고 한다. 실제로 부산의 성모병원, 대동병원, 봉생병원, 온종합병원, 부민병원, 순병원 등 2차 의료기관 실적이 호전되는 양상이다. 불행 중 다행인 소식이다.
의료 대란 이전에는 감기만 걸려도, 혈압이 140만 넘어가도 대학병원을 찾았다. 상급종합병원·권역의료센터 응급실 환자 중 중증 환자는 10.6%에 그쳤을 정도다. 빅5 병원이 서울 SRT수서역에서 셔틀버스를 운행하며 경증 환자까지 박리다매로 영업하면서 하루 환자 1만 명에 연 2조 원 매출을 올리는 공룡병원까지 탄생했다. 병원 주변에는 월세 ‘환자촌’이 생길 정도다. 하지만, 그런 파행적 현상이 조금씩 무너지고 있다. 빅5 병원은 40% 가까이 차지하던 전공의가 떠나면서 병원 기능이 마비됐지만, 전문의가 81% 이상을 차지하는 지역 2차 종합병원은 크게 흔들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대형병원급의 의료 인프라를 구축하고 있는 곳도 많아 의료 대란의 공백을 메우고 있다. 실제로 중소병원 의사 수는 2만 2401명으로, 3차 대형병원의 2만 3346명과 맞먹는 상황이다.
이런 변화는 앞으로 지역 대학병원을 빅5 병원 정도로 업그레이드하고, 쉬운 전원이 가능하다는 전제 하에서 지역으로서 굉장히 바람직한 추세다. 첫 번째가 의료 접근성 때문이다. 상당수가 앓는 질병은 췌장암이나 심장이식 등 중병도 있지만, 폐렴 같은 호흡기질환이나 고혈압 등 만성질환, 맹장수술 등 2차 종합병원에서 처리가 가능한 경우가 많다. 전문가들은 경증의 경우 집에서 가까운 병원에서 체계적이고 지속적인 진료를 받는 게 효율적이라고 조언한다.
두 번째는 지역 의료 수준의 강화이다. 국가와 지역의 의료 서비스가 강해지려면 허리층인 지역 종합병원의 수준이 탄탄해져야 한다. 낮은 수가와 금융 부채, 잦은 의료 분쟁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지역 2차 종합병원이 수익을 올리고, 그 병원에 수준 높은 의사가 몰려야 지역민의 의료복지도 함께 높아진다. 이로 인해 지역 환자들이 서울 대형병원보다 저렴한 비용으로, 건강한 의료 혜택을 집 근처에서 받을 수 있다. 그것이 의료 정상화이다. 경증 환자가 대학병원 응급실을 차지하면서 정작 치료가 필요한 중증·응급 환자는 치료받지 못하게 되는 사례가 비일비재했다. 지역 2차 종합병원의 기능 강화는 생명을 살리는 일이다.
세 번째는 산업적 측면이다. 비교적 시내에 위치한 지역 2차 종합병원은 연간 500억~1000억 원 상당의 매출을 올리는 서비스 기업이다. 500억 원대 병원은 500명, 1000억 원대 병원은 1000명 안팎의 의사, 간호사, 물리치료사, 행정직원 등을 고용한다. 지역에서 대학을 졸업한 젊은이들을 대거 채용할 수 있는 소중한 지역 기업이다. 지역 종합병원이 건재하면, 약국·제약유통·의료기기 등 연관 산업과 고용 시장도 동반성장한다. 지금처럼 빅5로 환자가 집중되면, 관련 산업도 함께 고꾸라진다. 올 상반기 지방 환자의 서울 상급종합병원·종합병원 진료비는 2조 3871억 원. 빅5 병원에만 1조 5603억 원이 들어갔다. 약값과 숙식비, 교통비는 별도다. 이 중 상당수는 지역에서 거둘 수 있는 매출이었다. 산업으로서 지역 2차 종합병원의 가치를 중요시해야 한다.
기자도 몇 년 전부터 매년 대학병원에서 하던 건강검진을 시내 종합병원으로 옮겼다. 전공의가 아닌, 수십 년 경력의 전문의가 내시경 시술과 뇌 MRI 진단을 직접 하면서, 훨씬 상세한 설명과 처치를 받을 수 있었다. 정부도 상급종합병원은 중증·응급 환자에 집중하고, 웬만한 질병은 2차 병원에서 해결하는 방안을 제도화한다고 한다. 이번 기회에 걸어서 15분 거리의 지역 종합병원이 보다 활성화되기를 소망한다. 의료 대란의 와중에 지역에서 던지는 질문이다.
2024-09-26 [18: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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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병철의 인사이트] ‘서울 사는 부모’가 스펙이 된 세상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남사읍에는 고려시대 토성인 ‘처인성’이 있다. 1232년 용인으로 남하한 몽골군에 대항해 승장 김윤후와 부곡민들이 적장인 살리타이를 화살로 사살하면서 대승을 거둔 곳이다. 고려시대 지명은 ‘처인부곡’이었다. 고려시대 행정 체계상 경(京)·목(牧)·주(州)·부(府)·군(郡)·현(縣) 아래에 향(鄕)·소(所)·부곡(部曲) 같은 행정구역이 있었다. 당시 향·소·부곡 백성들은 천민 취급을 받아 조세와 군역 외에도 갖은 부담을 다 떠안았다. 지난주 휴가를 맞아 오랜 친구들과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일대를 찾았다. 처인구 남사읍과 원산면 일대에 들어선 신규 아파트마저도 ‘쇠똥 냄새난다’는 놀림을 받을 정도로 오랜 기간 개발에서 소외당한 지역이었다. 하지만 지난 17일 찾은 그곳에는 산봉우리마다 송전탑이 빽빽하게 들어서고 있고, 반도체 클러스터 단지를 위한 포크레인 작업이 한창이었다. 인근 식당 주인들은 “SK하이닉스·삼성 첨단 메모리 반도체 공장이 처인구 원삼면~남사·이동읍 일대에 들어서고 있다”라면서 "농사짓던 할아버지들이 부자가 되었다"라고 귀띔했다.
‘생거진천 사거용인(生居鎭川 死居龍仁)’, 즉 ‘살아서는 진천, 죽어서는 용인에 거한다’라고 할 정도로 용인은 묏자리 명당으로 유명하다. 웬만한 기업인이나 권력가들이 죽어서 이곳에 터를 잡을 정도다. 하지만, 지금은 ‘살아서는 용인’이라는 말이 더 어울린다. 1980년대 10만 명 수준이었던 인구는 2010년 87만 명, 2024년에는 107만 명을 넘어섰다. 삼성전자가 최첨단 파운드리 공장 등 총 300조 원을 투자할 계획이다. 생산 유발 효과 700조 원, 고용 유발 효과는 160만 명으로 전망된다고 한다. SK하이닉스도 처인성에서 20분 거리 원삼면에 121조 8000억 원을 쏟아붓고 있다. 국내외 반도체 장비·소재·부품 협력업체까지 입주하면, 일자리 창출과 인구 유입 효과는 어마어마하다.
전국의 아파트 가격이 내리지만, 유독 이곳만 거래량과 가격이 폭등하고 있는 이유다. 오죽했으면, ‘반세권(반도체+세권)’이라는 신조어가 인터넷 부동산 커뮤니티에서 등장할 정도다. 여기다 GTX(수도권광역급행철도) 조기 개통 등 134조 원대 수도권 교통정책과 반도체 설비에 100조 원을 투자하면, 세금 15조 원을 돌려주는 K칩스법까지 발표되면서 이런 흐름을 더욱 부추기고 있다. 반도체 전쟁 와중에 ‘반도체 공장 수도권 설립’에 어깃장을 놓으면 매국노가 되는 세상이긴 하다.
SK하이닉스는 광활한 옥수수밭 한 가운데 위치한 미국 중부 인디애나주의 인구 5만 명 소도시에 첨단 반도체 패키징 생산기지를 건설하고 있다. 하지만, 한국은 용인까지가 고급 인력 채용 남방한계선이라고 고집한다. 덕분에 ‘수도권 집중이 살길’이라는 공포 마케팅이 횡행하고, 지방은 한없이 비어가고 있다. 문제는 윤석열 정부가 ‘국가균형발전정책을 포기했다’라는 신호로 읽힌다는 점이다. 이런 ‘서울 공화국’ 끝판왕이 ‘8·8 부동산 수도권 공급 대책’이다. 국토교통부가 서울 지역 그린벨트까지 해제해 2029년까지 수도권에 42만 7000가구를 새로 짓겠다는 계획이다. 수도권 집값을 잡는 대신 비수도권 소멸은 감내하겠다는 의도다. 국토부 박상우 장관은 “넘치도록 주택공급을 해보자”라고 외쳤다고 한다.
윤석열 대통령은 “수도권 집중과 과도한 경쟁이 저출산의 원인”이라면서 국가균형발전을 수시로 강조한다. 한국은행도 “수도권 집중 완화가 출생률을 높인다”는 보고서를 제출했다. 서울시 합계출산율 0.55명이 수도권 집중 탓이라고 모두가 알지만, 정책은 거꾸로 간다. 한국의 국운이 ‘반도체 전쟁’에만 걸려있을까. 이런 식이면, 불과 몇십 년 뒤 유출될 인구조차 없는 지방의 소멸과 곧 이은 국가 소멸은 정해진 미래다. 윤 대통령은 극단적 수준의 ‘수도권 몰아주기’가 가져올 폐해를 못 본 체하는 것일까, 모르는 것일까.
휴가 말미에 서울 친구들 입에서 “부모가 서울 사는 게 자식들 결혼 스펙”이라는 이야기가 나왔다. 발끈했지만, 눈앞의 반도체 클러스터 공사장 먼지에 입을 다물었다. 고려시대에는 처인부곡과 같은 향·소·부곡 사람들은 군·현으로 이사하는 것도, 군·현 사람들과 결혼하는 것도 금지되었다. 어디서 태어나고 어디서 사는지에 따라서 사회적 지위가 결정됐기 때문이다. 그런 지역적 신분 차별과 천대가 겹치면서 고려 말기에 민중 봉기가 유독 많았다. 입으로만 ‘국가균형발전’을 외치는 윤석열 정권에게 비수도권은 고려시대 홀대받던 향·소·부곡과 다를 바 있을까. 아둔한 기자의 오해이기를 바랄 뿐이다.
2024-08-20 [17: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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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병철의 인사이트] 국민의힘에 '부산의 힘'은 없다
매년 연말 국회 예산 심사철이면, 서울 여의도에 진풍경이 벌어진다. 각 지자체 단체장은 국비 확보를 위해 서울 여의도에 숙식하다시피 한다. 박형준 부산시장도 지난해 11월 서울 여의도 호텔에서 국민의힘 부산시당과 예산정책협의회를 개최하고, 국회 예결위원들을 차례로 만나 시의 주요 사업에 대한 국비 확보 당위성을 설명했다. 지방정부가 국비를 확보하기 위해 지역 국회의원의 힘을 빌릴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올해는 찾아갈 의원실조차 찾기 힘든 지경이다. 국비의 감액 및 증액을 결정하는 국회 예산결산특별위원회(예결특위)에 부산 지역구 18명 국회의원 중 한 명도 들어가지 못했기 때문이다. 기획재정부에서 제출한 예산안은 국회 상임위원회를 거쳐 50명 정원의 예결특위에서 심사한 뒤 다시 여야 15명으로 구성되는 예산안조정소위원회(예산소위)에서 최종 심의한다. 예결위와 예산소위에서 정부와 여야, 지역구별로 날밤을 새우면서 기싸움을 벌인다. 국가 예산을 배분하고, 지역 살림을 챙기는 첨예한 예산 정치에서 부산은 발언권도, 비빌 언덕도 없는 처지다.
예결위에 지역구 의원이 있어야 지역별 예산 배분 과정에서 긴밀한 내부 협의가 가능하다. 부산은 그런 과정 자체에 끼어들 가능성조차 차단됐다. 그 흔한 ‘쪽지 예산’ ‘카톡 예산’은 꿈도 꾸지 못하는 현실이다. 이에 비해 인근 시도는 경남 4명, 경북 3명, 대구 2명, 울산 2명의 여야 의원이 포진해 부산과는 전혀 다른 상황이다. 이해할 수 없는 상황에 국회 내부에서도 당황할 정도이다. 가뜩이나 정부의 긴축예산 집행 기조 속에서, 국회 예산 심사 과정에 레버리지를 잃은 부산만 국비 확보에 비상이 걸렸다.
또 다른 문제는 국회 상임위 중복과 부재다. 부산 국민의힘 의원 17명은 행안위와 교육위에 3명씩이나 집중돼 있다. 법사위와 기재위, 국토위에 2명씩 배정했다. 산자위, 과기방통위에는 한 명도 없다. 전례가 없는 일이다. 중국산 공세로 허덕이는 지역 조선기자재 산업 회복, 배터리·반도체로 산업 구조조정, 스타트업과 소상공인 활성화도 모두 산자위 소관이다. 부산의 일자리 확충을 위한 핵심 상임위다. AI 등 디지털 대전환, R&D 등 지역 미래 먹거리를 위한 업무를 총괄하는 과기방통위에도 부산 의원은 없다. 부산은 올해 국내 광역시 중 처음으로 소멸 위험 지역에 이름을 올릴 정도로 심각한 상황이다. 20여 지역 대학에서 아무리 청년 인재를 배출해도, 졸업과 동시에 일자리를 찾아 부산을 떠나는 현실이다. 이 문제 해결의 열쇠를 쥔 산자위, 과방위에서 부산 국회의원의 목소리를 들을 수 없다.
왜 이런 일이 발생할까? 부산 정치권의 무능이 크다. 예산에 대한 의원들의 무지와 개인적인 욕망, 부산시당의 정치력 부재가 빚어낸 참사다. 예결위에 들어가야 한다는 생각조차 못한 것 아니냐는 의문마저 들 정도이다. 지역 소멸의 심각성과 부산 미래 비전 공유, 팀플레이는 약에 쓰려도 찾기 힘든 실정이다. 상임위-예결위-소위로 이어지는 강력한 라인업으로 국비 지원을 더 끌어올리는 등 부산 정치력의 극대화를 위한 전략은 처음부터 없었다.
두 번째는 국민의힘 중앙당과 윤석열 대통령의 지역 홀대이다. 집권 여당의 참극으로 끝난 4·10 총선에서 부산은 국민의힘에 18석 중 17석을 몰아주면서 탄핵 저지선을 지켜내는 역할을 했다. 총선 직후 윤 대통령은 PK 당선인들에게 “부산이 효자” “부산이 너무나도 큰 역할을 했다”면서 각별히 격려했다고 한다. 하지만, 그뿐이다. 윤 대통령과 중앙당은 부산을 ‘고향 선산이나 지키는 굽은 소나무’로 생각하는 모양이다. 윤석열 정권의 행정권을 방어한 부산이지만, 법사위와 운영위에 의원 2명씩을 징발해 ‘정치투쟁의 불쏘시개’로 활용할 뿐이다. 한마디로 ‘장기판 졸’ 신세다. ‘글로벌 허브 도시 부산’이란 립서비스 외에는 ‘짝사랑’에 대한 정치적 배려는 없다.
‘돼지 구유통 정치’(pork barrel politics)라는 정치 용어가 있다. 미국 남북전쟁 이전에 남부 농장에서 고기가 든 돼지 구유통에 노예들이 모여들어 서로 많이 먹겠다고 경쟁하는 것에서 유래한 말로, ‘지역 예산 정치’를 빗댄 표현이다. 정치인들에게 가장 중요한 관심사는 재선이며, 이를 위해 자신의 지역구에 이익을 줄 수 있는 예산 배분 권한을 최대한 활용한다는 뜻이다. 돼지 구유통까지는 아닐지라도, 지역구에 이익을 가져다 오겠다는 열정, 재선하겠다는 욕망조차 없는 지역구 국회의원을 어떻게 바라봐야 할까. 아마 이 순간에도 부산 국회의원들은 얄팍한 예산 따내기 성과를 알리기 위해 골목마다, 건널목마다 ‘플래카드 내걸기’에 바쁠 것이다. 자기 지역구 밥그릇조차 챙기지 못한 정치인과 정당에 미래가 있을까.
이병철 논설위원 peter@busan.com
2024-07-18 [1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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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병철의 인사이트] ‘할 수 있다’로 퇴행한 특별법, 안 할 길 터주나
부산이 난리다. 2030월드엑스포 유치도 실패하고, 윤석열 대통령이 약속했던 산업은행 부산 이전은 희망고문으로 전락했다. 에어부산 분리 매각 좌절, 가덕신공항 부지공사 유찰 등 부산의 현안이 마냥 표류하고 있다. 대통령실, 국회와 함께 한 몸을 이뤄 변화를 일으키려는 부산의 리더십은 보이지 않는다. 박형준 부산시장과 지역 국회의원 등은 ‘괜찮다’ ‘문제없다’라면서 공포탄만 요란하게 쏘고 있다. 정작 집에 물이 새고, 불이 나고, 강도가 들었지만, 부산 리더십에는 절실함도, 배짱도, 하다못해 ‘깡다구’조차 보이지 않는다. 부산 위기의 원인이 ‘리더십 부재’ 탓이라는 목소리가 커지는 이유다.
대표적인 것이 ‘부산 글로벌 허브도시 조성에 관한 특별법안’이다. 부산의 열망, 대통령의 공언에도 불구하고, 21대 국회에서 폐기됐다. 22대 국회가 열리자마자 여야 협치 1호 법안으로 다시 발의됐지만, 미심쩍은 구석이 한둘이 아니다. 부산을 물류·금융·첨단산업 분야 글로벌 경쟁력을 가진 도시로 조성하기 위한 특구 지정 등을 담고 있는 이 법안은 21대보다 더 개악됐다는 평가까지 받고 있다. 실제로 이헌승, 전재수 여야 의원이 대표발의한 법안을 뜯어보면 대경실색할 노릇이다. 법안 대부분이 ‘한다’가 아니라 ‘할 수 있다’로 바뀌었기 때문이다. 법률 용어로 ‘한다’는 것은 법규의 집행에 대하여 행정청의 재량이 전혀 허용되지 않는 ‘기속행위’를 말한다. 하지만, ‘할 수 있다’는 행정기관이 행정행위를 할 때 자유로운 재량이 인정되는 것을 뜻한다. 기속행위와 상반되는 개념이다. 21대 법안에서는 89번만 나오는 ‘할 수 있다’ 문구가 22대 법안에서는 107번이나 사용됐다. 강제조항인 ‘한다’가 재량행위인 ‘할 수 있다’로 대거 바뀐 것이다.
50페이지 안팎의 21대 법안에는 ‘정부는 부산시의 공항·항만 인프라 구축에 재정적 지원을 하여야 한다’ ‘특구 내 관세 및 환적 제도 개선 조치를 마련하여야 한다’ ‘금융특구 입주 금융기관 등에 규제적용 특례 등을 부여받을 수 있도록 지원하여야 한다’ ‘첨단산업 국제협력 강화를 위해 국제행사 개최 시책을 마련해야 한다’ ‘첨단산업 추진에서 행정적·재정적 지원을 하여야 한다’ ‘투자진흥지구 입주 기업·기관에 자금을 충분히 지원하여야 한다’ ‘외국인의 편의시설 설치관리 시책을 수립하여야 한다’ ‘국제물류특구 외국 물품, 용역에 대해 영세율을 적용한다’ ‘관세 등을 면제하거나 환급한다’ 등의 ‘한다’는 문구가 22대에서는 전부 ‘할 수 있다’로 바뀌었다. ‘할 수도 있고, 안 할 수도 있는 법’으로 입법이 후퇴한 것이다.
행정·법률전문가들은 법률상 ‘한다’라고 해도 예산 등의 이유로 못하는 현실에서 ‘할 수 있다’는 것은 ‘안 하겠다’는 의미라고 해석한다. 입법 정신은 국민에게는 부담을 적게 주고, 정부는 강한 부담을 가져야 하는 것이 원칙이다. 부산의 정치·행정 리더십이 어떤 의도로 이렇게 법을 협의하고, 개악했는지, 당장이라도 엄청난 변화를 일으킬 듯이 포장했는지 고개를 갸우뚱할 수밖에 없다. ‘안 되면 말고’ 식으로 법을 통과시킬 자신도, 의욕도 없었기 때문은 아니라고 믿고 싶다.
이 와중에 박형준 부산시장은 ‘할 수 있다’에 불과한 글로벌 허브도시 조성을 위해 경제부시장 직제를 폐지하고, 미래혁신부시장을 신설하는 조직 개편안을 통과시켰다. 일반 행정·민생·경제 분야는 행정부시장이, 시정 혁신과 글로벌 허브도시 기반 마련을 위한 중장기 계획 수립과 기반 조성 등은 미래부시장이 맡는다고 한다. 당연히 임기 내내 큰 그림만 그리는 것은 아닌지, 소는 누가 키울지 걱정부터 앞선다. 큰 그림도 없이 부산의 리더를 자처하지는 않았겠지만, 누추한 기색이 역력하다.
조직론의 최고 권위자 제임스 G 마치 스탠퍼드대 명예교수는 저서 〈문학에서 배우는 리더의 통찰력〉에서 “오늘날의 리더는 배관공이면서도 한편으로는 시인이 되어야 한다”라고 주장했다. 배관공이란 화장실처럼 일상적으로 필요한 곳이 제대로 작동하도록 하고, 막힌 곳을 시급히 뚫어주는 역할을 하는 리더다. 시인은 새로운 길을 탐험하며 영감을 불어넣는 리더이다. 불확실성의 시대에 부산에 통찰력을 주는 시인 같은 리더십도 필요하지만, 배수관이 터져 밥조차 하기 힘든 상황에서 유유자적 큰 그림만 그리는 것이 가당키나 한 일일까.
지방행정은 국가 경영이 아니다. 단기적으로 작은 성공을 쌓아서 장기적으로 큰 변화를 이루는 것이 핵심이다. 아무리 큰 그림을 그려도 성과로 나타낼 수 없다면 학자의 공허한 이론에 불과하다. 진정한 리더라면 물난리가 난 집에 옷을 입은 채로 걸레와 양동이로 물을 퍼내고, 파이프를 고쳐야 한다. 자칫 다음 선거에서 이런 질문이 던져지지 않을까. “기림만 기맀지, 머~ 했노”라는….
2024-06-13 [18: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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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병철의 인사이트] "대통령님! 거기는 전기가 없습니다"
지난주 덕구온천에 몸도 담그고 친구도 볼 겸해서 경상북도 울진을 찾았다. 친구 부부와 죽변항에서 동해 앞바다에서 갓 잡은 장치탕 한 그릇을 비웠다. 식후 커피를 위해 죽변항 일대를 돌았지만, 친구는 ‘스타벅스’는 여기 없다면서 겸연쩍은 웃음을 보였다. 인구 5만 명이 무너지고, 지방소멸이란 괴물과 사투하는 대한민국 지방 소도시의 일상적인 모습이었다. 덕구온천으로 향하는 길 오른편으로 신한울원자력발전소가 펼쳐져 있었다. 지난달 가동을 시작한 신한울2호기에서는 연간 서울에서 1년간 쓰는 전력량의 21%인 1만 56GWh 전기를 생산한다. 그 옆에는 2033년 준공 목표로 신한울3·4호기가 들어설 부지 조성 작업이 한창이었다.
문제는 이곳에서 생산한 전력을 수도권으로 보낼 방법이 막연하다는 점이다. 송전탑 건설은 2012년 밀양 사태처럼 엄청난 사회적 갈등을 일으킨다. 동해안의 대형·신규 화력발전소들이 수도권으로 연결할 송전선로가 없어 속속 가동을 멈추는 황당한 일조차 벌어지고 있다. 2036년까지 건설될 1000MW 이상 설비용량의 대형 발전소는 신고리5·6호기를 비롯, 하동복합, 신호남복합, 울산복합, 신한울3·4호기 등 대부분 동·서·남해안에 밀집해 있다.
전기 확보 방안조차 묘연한 수도권에는 막대한 전력이 필요한 공장 신설이 무더기로 계획돼 있다. ‘전기 먹는 하마’인 데이터센터 60%가 수도권에 있다. 경기도 용인 반도체 클러스터에는 SK하이닉스, 삼성전자 반도체 공장이 들어선다. 2050년까지 이곳에 필요한 전력은 10GWh에 이른다. 원전 10기에 이르는 대규모다. 전기조차 들어오지 않는 ‘오지’에 첨단공장을 마구 짓는 코미디를 대한민국 최고 엘리트들이 자행하는 셈이다. 대통령과 삼성, SK그룹 회장이라면 한전에 “전기가 있느냐”는 질문부터 먼저 던져야 했다. 뒤늦게 한전만 쳐다보고 있다. 200조 원의 빚을 떠안은 한전은 송전탑 신설은 차치하고, 기존 선로망 유지·보수조차 힘든 상황이다. 국가전력망 정전 사태가 2018년 506건에서 2022년 933건으로 85%나 급증한 것이 방증이다.
정부와 서울 언론, 기업들은 약속이나 한 듯 ‘지역이기주의(NIMBY), 지역 주민과 결탁한 지역 정치권·지자체가 문제’라고 손가락질한다. 국가가 나서서 송전선로를 건설하는 ‘국가 기간 전력망 확충 특별법’을 조속히 통과해야 한다고 주창한다. 송전탑이 삶의 터전을 짓밟는다고 외치는 주민을 무시하고 한전 대신 국가가 공사를 강행하는 것은 독재정권에서나 있을 법한 일이다. 본인들의 강남아파트 앞에 변전소 하나 설치해도 “집값 떨어진다”면서 난리를 칠 ‘서울 사람’들은 허구한 날 지역의 희생에만 목을 매고 있다. ‘국가 성장동력 확보’란 허울에 숨은 ‘망국적 수도권 집중’의 민낯이다.
세계는 인공지능(AI) 시대로 옮겨갔다. 반도체, 데이터센터 등 AI 생태계는 전기로만 움직인다. 2050년쯤엔 지금보다 1000배의 전기가 더 필요하다는 예측이다. 오픈 AI 창업자 샘 올트먼이 ‘전기를 쥔 자가 살아남는다’고 외치고 있다. ‘글로벌 데이터센터 허브’로 불리는 미국 버지니아주 의회가 전기 부족을 우려해 데이터센터 신설을 제한하는 법을 발의할 정도다.
이제는 ‘전기가 있어야 공장을 돌릴 수 있다’는 평범한 진리를 깨달아야 한다. 수도권에 계획된 반도체, 데이터센터 등 대규모 전력 수요처를 발전소가 집중된 지역으로 분산하도록 국가산업정책을 재편해야 한다. 그것이 ‘에너지 안보’다. 안정적인 전기가 넘쳐나는 ‘전기 맛집’인 삼척과 울진, 기장, 하동, 삼천포, 영광 등 대형 발전소 인근에 첨단공장을 건설하면 된다. 막대한 송전선로 공사비와 유지비, 사회적 갈등 조정 비용을 기업 보조금으로 활용해도 국민은 박수칠 것이다. 기업과 정부는 ‘인재 구인난’을 들면서 손사래 치겠지만, 지역마다 거점 국립대학과 포항공대, DGIST, 유니스트 등 첨단기술에 특화된 우수한 대학이 있다. 우수한 기업이 없을 뿐이다.
이는 지방소멸을 막고, 국가균형발전에도 엄청나게 기여한다. ‘무식한 촌놈’ 때문이 아니라, ‘이기적인 서울 사람’들 때문에 국가의 경쟁력을 망치는 것이다. 송전탑 건설이 어렵다면, 인력과 공장을 분산하는 것은 노력으로도 가능하다. 첨단산업 경쟁이 국가 대항전이 됐다면, 가장 빨리, 효율적·복합적으로 효과를 낼 방안을 강구해야 한다. 인구의 절반 이상이 수도권에 몰린 탓에 송전탑이 촘촘히 꽂힌 지방만 소멸하고 있다. 고향을 떠난 아들딸은 힘겨운 서울살이에 지쳐 가정을 꾸릴 꿈조차 갖지 못한다. 저출생과 국가 소멸의 주요 원인이다. 언젠가 울진 친구 부부도 삼성전자 반도체 울진공장에 취직한 딸 부부와 동해 장치로 요리한 식사를 함께하면서, ‘스타벅스’를 마실 수 있는 날이 오기를 기대한다.
이병철 논설위원 peter@busan.com
2024-05-14 [18: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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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병철의 인사이트] 옷매무새 가다듬고, 꼭 투표합시다
대한민국 유권자들은 양쪽에서 차가 달려오는 길 한복판에서 위태롭게 서 있었다. 사람들은 그 ‘길 한복판’에서 ‘각자가 가는 방향이 정당하고, 합리적’이라는 클랙슨 소리와 고함, 삿대질에 갇혀 옴짝달싹 못 했다. 예비후보 등록부터 공천 난장, 선거로 이어졌던 정당과 후보들의 4·10 총선 질주도 종착역에 도착했다. 유권자들은 이제는 한쪽을 선택하는 시간이 다가왔다. 오죽했으면 프랑스 철학자가 “인생은 삶과 죽음 사이의 선택“이라는 명언까지 남겼을까. 대의민주주의 꽃인 선거가 바로 선택이다. 자신을 대표할 누군가를 고르는 일이다.
정치가 진영으로 나뉜 것은 세계적인 흐름이지만, 이번 선거에서 ‘길 한복판’에 서 있는 아슬아슬한 상황이 더욱 많아졌다. 여야 어느 정당이고 정치적 존재감과 실행력은 찾기 어려웠다. 대신 ‘상대방이 당선되면 국가가 무너진다’라는 불안감을 부추기는 공포 마케팅만 횡행했다. 미국의 정치심리학자 드루 웨스턴은 저서 〈감성의 정치학〉에서 “성공적인 선거운동은 유권자의 이익과 가치관 속에 숨은 감정에 얼마나 영향을 주느냐에 따라 결정된다”라고 지적했다. 사람은 이성보다는 감성에 쉽게 움직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이번 선거에서 여야는 공약, 비전, 이념 등 대형 쟁점은 온데간데없고, 상대에 대한 부정적 감정을 불쏘시개 삼기 위해 ‘정권 심판론’ ‘이·조(이재명·조국) 심판론’을 내걸었다. 유권자의 감정을 흔들기 위해 ‘대파’ ‘삼겹살’ ‘일하는 척했네’ ‘눈물 쇼’ 등 감정 이슈만 흔들었다. 실력보다 상대방의 실패와 반사이익만 노리는 저질 정치다. 지지자의 분노를 자극하고, 상대방에 대한 부정적 이미지를 최대한 확대하는 분열의 정치였다. ‘적’이 있어야 내가 살 수 있고, ‘적’에 대한 부정적 감정을 자신의 정당성 근거로 삼는, ‘적’이 없으면 ‘악의 진영’이란 프레임을 만드는 정치였다. 마치 고대 사회에서 적대적 부족에 속하는 사람들을 두려워하고 혐오하고, 돌을 던지는 부족주의를 보는 듯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4월 10일이 불쑥 찾아왔다. 총선 날이다. 벚꽃 비가 부산의 바닷바람에 하얗게 날리는 아름다운 계절이다. 정치공학적으로는 2030 세대, 60대 이상의 투표율이 중요한 변수라고 한다. 하지만, 선거를 장사치 선거꾼들의 셈법에 맡겨둘 수는 없다. 선거는 축제이자 투쟁의 장이기 때문이다.
오늘은 꼭 해야 할 일이 있다. 조간신문이 현관 앞에 떨어지는 소리를 듣자마자, 이불을 걷어차고 투표소로 향하는 것이다. 어떤 이는 ‘기권도 권리’라고 말한다. 하지만, 투표하지 않는 유권자에게는 정치인 그 누구도 귀를 기울이거나 허리를 굽히지 않는다. 혹시나 ‘고만고만하거나 비도덕적인 후보’ 일색이라는 이유로 투표를 포기한다면 ‘분열의 정치꾼’들에게 헌법에 보장된 주권을 그저 내어주는 꼴이 된다. 영문도 모르고 절만 하는 셈이다. 헌법 제1조는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라고 규정한다. 주권을 행사해야 주권자가 된다.
누군가는 ‘바뀌는 것이 하나도 없다“면서 투표의 가성비를 이야기한다. 선거에 투입된 비용은 선결제다. 21대 총선처럼 유권자의 34%가 기권하면 버리는 세금만 1496억 원이다. 투표에 참여하지 않으면, 가성비를 따질 수조차 없다. 게다가 마음에 들지도 않는 머슴이 4년 내내 주인행세를 하는 꼴을 멍하니 지켜볼 수밖에 없다. ‘도무지 내키는 후보’가 없더라도 더 적극적으로 투표해야 한다. 누구를 꼭 뽑기 위해서가 아니라, 누군가를 떨어뜨리기 위한 투표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투표장에 나서기 전에 현관 거울 앞에서 옷매무새도 가다듬자. 그래도 공식적인 국가 행사이다. 깔끔한 차림과 함께 오늘 찍을 후보자들의 매무새도 찬찬히 살펴보자. ‘소속 정당’ ‘정책·공약’ ‘능력·경력’ ‘도덕성’ 등 나만의 거울로 후보들을 하나하나 평가해야 한다. 지역의 대표를 뽑는 총선인 만큼 지역을 이해하고, 발전시킬 후보인지, 막말과 투기, 범죄 전과 등 헝클어진 이력은 없는지도 따져야 한다.
22대 국회의 역할은 정말로 막중하다. 저출산·인구 감소로 지방과 국가소멸이란 시한폭탄이 째깍째깍 돌고 있다. 고령화사회, AI 개발 경쟁, 세계적인 전쟁 위기 등 숙제가 가득하다. 부산은 경제 침체와 수도권 집중으로 제2의 도시라는 타이틀조차 뺏길 위기이다. 어느 정당과 후보가 주권자의 요구를 제대로 수행할지를 판단해야 한다. 유권자의 책임이다. 나쁜 정치인은 투표하지 않는 시민들에 의해 선출된다고 한다. 투표하지 않고서는 나쁜 정치를 탓하거나, 피해자라고 호소할 자격조차 없다. 누가 더 절박하게 오늘 투표장으로 향하는지에 따라 대한민국 운명이 결정된다. 국민과 국가의 미래를 먼저 생각하는 단정하고 실력있는 후보들이 많이 당선되길 바란다.
이병철 논설위원 peter@busan.com
2024-04-09 [17: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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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병철의 인사이트] "아무것도 이뤄지지 않았다"
누구에게나 ‘희망’은 있다. 매일 탈모약을 먹고, 탈모샴푸를 쓰고, 탈모크림을 바르면 머리숱이 수북해지고, 어깨너머로 받은 정보로 투자한 주식이 상종가를 거듭 쳐서 10배 이상 수익을 올리고, 원하는 대학에 떨어진 아들이 신입생 오리엔테이션 직전에 추가합격하는 것일 수도 있다. 희망은 스스로 기대한 것이라면 틀어지더라도 그 고통을 감내할 수 있다. 하지만, 실현하기 어려운 희망을 미끼로 상대방을 고통스럽게 한다면 ‘희망고문’이 된다. 그것이 반복되는 국가나 사회는 미래가 없다. 불신만 쌓이기 때문이다.
희망고문이란 단어는 원래 프랑스 소설가 빌리에 드릴라당이 1883년에 쓴 소설 〈희망이라는 이름의 고문〉에서 비롯됐다고 한다. 고리대금을 했다는 혐의로 투옥돼 화형 선고를 받은 유대교 랍비가 감옥 문이 열려 있는 사실을 발견하고는 탈옥할 수 있다는 희망을 품지만, 감옥 밖에서 그를 기다린 것은 종교재판관이었다. 이뤄지지 않을 ‘거짓 희망’이 한 인간에게는 잔혹한 고문이라는 사실을 증명한 셈이다.
4·10총선이 불과 한 달 앞으로 다가왔다. 부산 유권자를 상대로 희망고문이 또다시 시작되는 조짐이다. 부산글로벌허브도시조성 특별법 통과, 한국산업은행 부산 완전 이전이라는 희망이다. 여야 모두 특별법을 5월까지 통과시키겠다고 약속하고 있다. 어디까지 진심일까. 총선 이전의 21대 국회 본회의는 끝났다. 총선 이후에는 책임론에 따른 분란과 집안 단속, 정계 개편, 형사재판 등으로 임시국회는 예상조차 하기 힘들다. 해산을 며칠 앞둔 21대 국회 상임위가 법안을 심도 있게 논의하고, 여야의 박수와 축복 아래 통과시킬 가능성은 바라기 어렵다.
2030월드엑스포 부산 유치 실패 이후 윤석열 대통령이 제안한 부산글로벌허브도시조성 특별법은 광범위한 특례와 파격적인 규제 해제 내용을 담았다. 부산과 국가균형발전을 위한 만능열쇠인 셈이다. 하지만, 그만큼 숱한 장애물을 넘어야 한다. 법안 제안에 참여한 의원실조차 “논의 과정에서 더 다듬어질 것이다”라고 할 정도였다. 소관 부처도 교육·국토·기재부 등과 광범위하게 중첩돼 법적 체계와 의제가 한 방향으로 모이지 않은 상태다. 대통령 지시라고 해도 법안이 한칼에 통과되는 것을 바라는 것은 여의도 정치를 너무나 모르는 것이다. 국회 입법 관련 전문가들도 “상임위조차 통과할 수 있을지 모호하다”라고 지적할 정도다. 총선을 앞두고 ‘되면 좋고, 안되면 민주당 탓’이라는 애드벌룬을 띄워 놓은 것에 불과하다는 볼멘소리가 나오는 이유다.
다른 도시와 이해관계가 상충되는 것도 사실이다. 인천, 대구, 광주 등 타 도시 출신 국회의원과 지자체, 언론에게 “엑스포 유치 실패로 상처받은 부산을 위해 한 번만 눈감아 달라”고 요구할 수 있을까. 애초에 대한민국에 그런 정치력이 존재했는지 금시초문이다. 게다가, 법안을 대표발의한 전봉민 국민의힘 부산시당위원장은 공천조차 받지 못했다. 추동력을 잃은 법은 ‘낙동강 오리알’로 전락할 신세다. 그 와중에 특별법 소관 상임위인 국회 행안위 김교흥 위원장(더불어민주당·인천 서구갑)은 ‘인천 글로벌 경제거점도시 조성 특별법안’을 국회에 제출했다. 민주당이 부산과 정면충돌하는 모양새다. “21대 국회 내 특별법을 통과시키겠다”는 민주당 홍익표 원내대표의 약속은 휴지조각이 된 셈이다.
선거에서 지방 표를 얻기 위한 여의도 정치권의 핑퐁게임은 어제오늘이 아니다. 여야 공수만 바뀔 뿐이다. ‘희망고문’ 원조 정당인 민주당 이해찬 전 대표도 문재인 정권 시절 ‘수도권 공공기관 지방 이전’ 카드를 꺼내 들었지만, 5년내내 ‘대국민 사기극’으로 끝났다. 당시 야당인 자유한국당은 “서울 경제를 황폐화하겠다는 의도” “가족 분리까지 유발하는 정책”이라며 깎아내리기에 혈안이었다. 초록이 동색인 듯, 여야는 ‘수도권 적폐 정당’ ‘수도권 카르텔 정당’으로 일관한 셈이다. 지방 유권자는 선거 때 자갈치시장만 들여다보면 되는 ‘어리석은 백성’으로 여겨질 뿐이다. 하인이 주인을 속이는 참 이상한 나라다.
1969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사뮈엘 베케트의 희극 〈고도를 기다리며〉의 줄거리는 ‘기다림’이다. 며칠이고 고도라는 사람만 기다리는 그 부조리극에서 ‘아무것도 되지 않는다(Nothing to be done)’라는 명대사가 나온다. ‘산업은행 등 2차 공공기관 이전, 국가균형발전, 글로벌허브도시, 지방시대’. 수십 년간 비슷한 희망고문이 반복됐을 뿐, 아무것도 이뤄지지 않았다. 국가를 책임지겠다는 정치인이 표를 얻기 위해 함부로 희망을 이야기해서는 안 된다. 희망이란 미끼를 국민에게 던진다면 우리 모두를 불행하게 만든다. 한 번 속지 두 번 속을까. 4·10총선에서 희망을 실현하는 정치인을 보고 싶은 이유다.
이병철 논설위원 peter@busan.com
2024-03-05 [18: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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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병철의 인사이트] 청년 로그아웃과 부산의 미래
‘로그아웃(Log Out)’ 문화가 확산되고 있다. 로그아웃은 사용 중인 네트워크에서 업무를 끝내고, 호스트 컴퓨터와의 연결을 끊고 나오는 작업이다. 인터넷, 스마트폰에 이어 OTT 넷플릭스 유행에 따른 현상이다. 카카오톡 대화방, 넷플릭스 등 OTT 구독 서비스, 쿠팡 멤버십 등에서 자신이 필요하면 매달 구독료를 내고 드라마, 영화를 보거나 쇼핑하고, 필요가 없어지면 바로 회원을 끊고 로그아웃하는 시대로 바뀌었다. 어디에도 얽매이지 않고, 처음부터 가볍게 로그아웃할 수 있는 관계를 맺는 것이 추세이기도 하다. 오죽했으면 카카오톡이 가벼운 로그아웃을 위해 ‘조용히 나가기’ 기능을 추가했을 정도이다. 대기업 인사 담당자와 대학교수들은 이런 로그아웃 현상에 대해 어려움을 토로한다. 젊은 세대들은 회사가 한 달의 구독료를 내고 자신을 쓰는 곳이란 인식을 갖고 있다고 한다. 가볍게 입사(로그인)하고, 언제든지 구독을 끊고 퇴사(로그아웃)할 수 있는 관계로 직장을 본다는 이야기다. 학교도 마찬가지다.
로그아웃은 관계, 직장에 이어 지역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취업과 학업을 위해서는 언제든지 고향을 떠나는 세태다. 통계청의 ‘수도권 인구 유출 데이터’를 보면 삶의 터전에서도 로그아웃이 심화되는 양상이다. 청년들의 고향 이탈은 특히 심각하다. 이미 체념 수준에 이르고 있다. 2023년 한 해에만 부산에서 수도권으로 1만 1260명의 인구가 순유출됐다. 이 중 67%가 2030세대다. 직장을 찾아 서울로, 수도권으로 부산에서 로그아웃하는 양상이다. 정부가 134조 원을 들여 수도권 광역급행철도(GTX)로 충청·강원권까지 연결해 준수도권 범위가 넓어지면, 유출 인구도 더 많아질 전망이다. 정부가 국가 예산과 첨단산업으로 지역의 젊은이들을 강제로 로그아웃시키는 형국이다. 젊은이가 떠난 부산 인구는 8년 5개월째 연속해서 감소하고 있다.
이 와중에 인천이 비수도권 인구 유입으로 300만 명을 넘어서면서 제2의 경제도시로 급부상하고 있다. 서울 언론들은 ‘대한민국 NO.2는 당연히 부산?’ ‘좀만 기다려라… 추격 나선 이 도시’ 등의 기사를 쏟아내고 있다. 불난 집에 부채질하는 모양새다. 인천은 대규모 공단과 인천경제자유구역, 인천국제공항 등의 힘으로 실질 경제성장률이 6%를 기록했다. 지역내총생산(GRDP)도 부산을 밀어내고, 서울에 이어 2위다. 이런 추세라면, 2035년에 인천이 부산 인구를 추월할 것이라는 통계청의 예상은 빗나가고, 오히려 앞당겨질 전망이다.
결국 인구 로그아웃 사태로 부산 중·서·동·영도구 등 4곳에 이어 남·사하·금정구까지 소멸위험지역으로 판정됐다. 결혼 적령기인 청년세대의 급격한 유출로 부산의 생산연령인구(15~64세) 감소 속도가 타 도시보다 급속히 빠르다고 한다. 4년 뒤에는 부산지역 어린이집과 유치원 열 곳 중 네 곳이 사라진다. 그때는 대기업을 유치해도 일할 사람을 찾기 어렵게 된다. ‘강제 로그아웃’ 부산의 정해진 미래다.
청년세대의 로그아웃은 공동체에 트라우마를 남긴다. 떠난 자와 남은 자로 나뉘면서, 문화적 정체성을 해치고, 지역의 존속을 위협한다. 그래서 청년세대를 다시 로그인시킬 대책이 절실하다. 청년세대 로그인의 조건은 ‘서울보다 여건이 비슷하거나 좋으면…’으로 압축된다. 결국 ‘일자리와 교육’이다. 부산 인구가 인천에 추월당할 위기에 놓인 것도 첨단산업이 없고, 관련 인프라가 열악한 탓이다. SNS 인플루언서, 네이버 검색광고, KTX서울역 광고판까지 동원해 도시 브랜드를 선전할 수 있지만, 직접 로그인으로 유도할 요인은 일자리와 좋은 대학 교육이다.
4·10총선이 코앞으로 다가왔다. 이번 총선의 화두는 ‘청년 인구 로그인 유지와 추가 로그인 방안’으로 모아져야 한다. 기존의 지역 정치권과 예비 후보자, 부산시까지 시간대별 목표 실행 계획을 내놓아야 한다. 활발하게 생산하고, 떠들썩하게 소비할 인구가 없는 도시에 신도시도, 트램도, 문화시설도 짐이 될 수밖에 없다. 총선에서 여권과 중앙정부는 물론이고 야당까지 다양한 정치적·국가적 자산을 동원해야 한다. 읍소와 설득이 아니라면, 투표권을 동원한 협박도 필요하다. 그만큼 절실하기 때문이다. 답보 상태인 KDB산업은행의 부산 이전도 총선 전에 마무리 되어야 한다.
설날이 다가온다. 지난해 부산을 떠난 1만 1260명을 포함한 아들딸들이 고향으로 잠시 돌아온다. 컴퓨터 네트워크에 로그인하면 접속 기록(로그)이 남듯이, 지역에도 삶의 기록이 온전히 남아있다. 온 가족이 한데 모인 자리에서 부산에서 좋았던 기억을 나누고, 추억을 발전시킬 방안을 이야기했으면 좋겠다. 이번 설날과 총선이 부산에 더 많이 로그인하고, 끈을 잇는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 핵심은 ‘청년세대 로그인’이다. 그 모든 책임은 부산시장과 정치권, 중앙정부에 있다.
이병철 논설위원 peter@busan.com
2024-02-01 [18: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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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병철의 인사이트] '국회의원'을 찾습니다
선거가 코앞으로 다가오는 모양이다. 2024년 4·10 총선을 100여 일 앞두고, 부산 남천동의 10년째 단골 미장원에도 화제는 단연 차기 국회의원 공천이다. ‘윤핵관’으로 알려진 국민의힘 영남권 유력 정치인인 장제원 의원, 김기현 대표 등의 ‘불출마와 사퇴’가 신호탄을 쏘아 올렸다. 국민의힘 한동훈 비대위원장이 26일 취임하면서 영남권 물갈이론이 본격적으로 거론되고 있다. 윤석열 정권의 운명을 짊어진 비대위 성패는 공천에 달려있다. 그 공천에 따라 지역과 국가의 미래가 좌우된다.
노회한 선거 전략가들은 혁신을 바라는 유권자의 마음을 읽고 있지만, 어려운 과제다. 표 계산과 이해득실을 따지느라, 재정·연금·노동 개혁 등 근본적인 혁신은 건드리지조차 못 한다. 대신에 손쉽게 할 수 있는 인적 물갈이로 고개가 돌아간다. 물갈이는 ‘대한민국 선거 승리의 방정식’으로 통칭될 정도다. 부실한 정책성과를 희석할 수 있고, 상대의 강점을 약화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지역에서는 21대 국회의원의 마뜩잖은 성적표 탓에 22대 새 인물에 대한 기대가 뒤섞여 어수선하다.
여의도에서 지역 국회의원을 가까이서 관찰해 온 일명 ‘선수’들은 지역 국회의원 자질 부족을 제일 큰 문제로 꼽고 있다. 언급하기조차 부끄러운 추문은 차치하더라도, 몇몇 의원은 국정 이해나 법과 예산 관계에 대한 개념조차 없이, 예산을 따오는 것이 국회의원이라는 생각을 갖고 있더라는 전언이다. 결국 부산 전체의 큰 그림이나 문제의식을 갖지 못하고, 자신의 지역구 이익만 대변하다가 4년을 허송세월한 경우가 대부분이라고 한숨지을 정도다. 오죽 답답했으면 해당 의원실 보좌관 출신들도 “우리 영감 존재감이 1도 없다”는 말을 입에 올릴 정도이다.
이런 자질 부족은 지역의 뒤떨어진 정치 문화와 훈련 부족에서 기인한다. 여야와 지역, 진영으로 나뉜 치열한 대립적 정치 구도인 중앙 정치무대는 차가운 논리와 합리성, 의원 간의 팀플레이, 전투력이 바탕이 되어야 정치력을 발휘할 수 있다. ‘막대기만 꼽아도 당선된다’는 영남권에서 ‘끼리끼리 모여 놀던 형님 동생’ 문화로는 통하지 않는 세상이다. 상임위와 국감에서 제 목소리조차 내지 못하고, ‘여의도 부산 사람’들과 시간만 축내기 일쑤다. 서울에서는 ‘꿔다 놓은 보릿자루’처럼 있다가, 지역에서는 ‘골목대장’을 자임하며, 구청장 업무까지 도맡아 나선다. 개인 영달을 위한 동네 모임이란 비아냥까지 나올 정도다. 동네 건널목마다 설치된 플래카드가 대표적이다.
더 큰 폐해는 ‘줄서기 정치’다. ‘한 번은 더 해야 하지 않겠느냐’를 삶의 목표로 세운 초선들은 어느 게 썩은 동아줄인지도 모른 채 ‘윤심 코드’에 맞춘다면서 ‘친윤 홍위병’을 자처했다. 이들에겐 ‘살아보겠다고 몸부림치는 군상들’이란 한물간 정치인의 냉소조차 과분할 정도이다. 하지만, 지역의 자존심과 미래가 걸린 사안에는 묵묵부답이다. 대표적인 것이 ‘부산 촌 동네’ 발언으로 결국 사임까지 이어졌던 이재환 전 한국관광공사 부사장 사태다. 350만 부산시민 모두가 분개했지만, 지역 국회의원들은 어디에도 없었다. 혹시나 ‘친윤 낙하산’을 건드려 공천에 불이익을 받을까 미리 겁을 먹고, 꼬리를 만 것은 아닐까. 쥐새끼도 밟으면 짹 하는데, ‘우리’ 국회의원은 밸도 쓸개도 없는 형국이다.
국회 과반 의석을 차지하고 있는 더불어민주당의 몽니에 대해서도 뒷짐지며 ‘양반 흉내’만 내고 있다. KDB산업은행법 연내 개정 불발 사안이 대표적이다. 이재명 민주당 대표는 부산 상공계와 시민사회단체, 부산시장까지 무시했다. 하지만, 지역 국회의원들이 ‘항의, 삭발, 기자회견’ 등 을 했다는 시원한 소식 하나 들려오지도 않는다. ‘강 건너 불구경’하는 부산 국회의원 무용론이 나오는 이유다. 연내 법 통과가 무산된 것보다, 우리를 대변할 국회의원조차 없다는 사실에 더 큰 절망을 느낀다. 산은 이전이 국가균형발전 정책의 주춧돌이 된다는 논리를 국회 야당 의원실 문턱이 닳도록 얼마나 전파했는지 의문이다. 아들 딸들은 취업을 위해 서울 월세방을 얻어 떠나지만, ‘부잣집 도련님’ 출신 국회의원들은 그런 걱정조차 필요 없는 ‘당신들만의 천국’이 있는 것은 아닌지 궁금할 지경이다. ‘산업은행의 경제적 가치와 부산 이전의 의미를 몰랐다’는 오리발이 오히려 위안을 준다.
이런 좀스러운 지역 정치 현실에 제22대 국회의원 선거에 어떤 정치인이 필요한지 해답이 숨어 있다. 최소한 부산, 부울경의 지도자로 칭할 수 있는 역량과 자존심, 문제의식, 투지를 갖춘 사람을 제대로 추천하라는 이야기다. 취임 하루를 맞은 한동훈 국민의힘 비대위원장이 이 모든 상황을 반전시킬 수 있을까. 지켜보겠지만, 엉터리 공천으로 지역을 팽개친다면, 혹독한 책임은 정권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다. 자고로 촌놈이 화나면 더 무서운 법이다. 째깍째깍 총선 시곗바늘이 바쁘게 돌아가고 있다. peter@busan.com
2023-12-26 [18: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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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병철의 인사이트] "시장님! 부산에 살고 싶습니다"
“초격차 혁신을 일으킬 수 있는 인재와 기업이 지역 발전의 원동력입니다.” 지난주 부산의 젊은 기업인, 교수 등과 함께 하는 독서클럽에서 한국 최대 헤드헌터 회사 대표를 강연자로 초청했다. 23년째 5000여 개 기업과 거래하면서 인재 채용에 대한 고민을 나눈다는 K 대표와 기업 트렌드와 부산 경제 현황 등 다양한 이야기가 오갔다. 기업인, 교수들도 핵심 직원의 퇴사와 졸업생의 수도권 취업으로 전전긍긍하는 상황이 오버랩되면서 대화는 밤늦게까지 이어졌다. 시작은 ‘대퇴사’였다. 어떤 그룹사에서는 2022년에 29세 이하 정규직 직원 1만여 명 중에서 3000~4000여 명이 회사를 떠났다고 한다. 이젠 직원들이 직장이 아닌 직무 중심의 캐리어를 추구하면서, 잦은 퇴사로 평생직장의 시대가 저물었다.
‘얼굴 익힐 만하면 퇴사’하는 시대에 대응해 기업도 관리 시스템을 바꾸고 있다고 한다. ‘회사는 학교가 아니다’라는 인식이 퍼지고 있기 때문이다. 수천 명씩 신입사원을 채용해 인재를 키우던 관행에서 당장 투입 가능한 경력직 채용이 정착되고 있는 추세이다. 최근 헤드헌터 회사에는 이공계 박사학위에 글로벌 기업 경험을 가진 40대, 속칭 ‘슈퍼 엘리트’ 스카우트 요청이 잦다고 한다. ‘왜 그런 사람까지 필요하냐’라고 물으면 ‘기존의 인재, 과거의 시각으로는 글로벌 혁신이 안 된다’는 답이 돌아온다고 한다. 2023년, 대한민국 기업과 스카우트 시장의 현주소였다.
시간이 지나면서 대화 주제가 ‘부산’으로 급선회했다. 과연 부산에 글로벌 기업 경험을 가진 슈퍼 엘리트를 찾거나, 포진한 기업이 어디일까라는 고민이었다. “부산이 영남권 제조업의 중심지라 생각하고 해운대 센텀시티에 부산지사를 설치했지만, 생산직 알선 외에는 스카우트 요청이 많지 않아 놀랐다”라는 K 대표의 한마디가 불을 붙였다. 그날 〈부산일보〉 기사도 거론됐다. ‘전국 매출액 기준 1000대 기업 중 부산 기업은 28개로 역대 최저 수준이었다’는 내용이었다. ‘2008년보다 절반 감소, 총매출 비중 1.2%’ 성적표는 부산상공회의소로서는 누워서 침 뱉기 같지만, 오죽했으면 저런 실정까지 공개했을까라는 절박함마저 느껴졌다. 그 와중에 한 기업 대표는 지난주 기업 상장 절차를 논의하기 위해 코스닥 거래소와 만난 자리에서 “부산에서 오랜만에 (상장 관계로)올라오셨다”는 이야기를 듣고 얼굴이 화끈거렸다고 술회했다. 실제로 전국 1696개 코스닥 상장 기업 중에서 부산은 42개에 불과해 인구 비례보다도 한참 못 미친 수준이라는 설명이었다.
과문한 탓도 있지만, 문제는 지역의 리딩 기업 상당수가 글로벌 인재와 경쟁력 확보, 기업 상장 등은 언감생심인 모양새다. 설상가상으로 학생들의 취업 환경은 더욱 열악하다. 지역 대학생들은 이력서를 채우기 위해 알 만한 서울 기업의 인턴십 기회조차 갖기 어려운 실정이다. 사실은 인턴십 채용 사실조차 모르고 지나가기 일쑤라고 한다. 지난 5년간 부산의 화학, 소재·재료, 전기·전자 공학 등 첨단산업 분야 대학 졸업자의 70% 이상이 부산을 떠났다고 한다. 바닥을 알 수 없는 지역경제의 추락, 인재 유출에 먹먹할 따름이다.
인재를 담을 그릇은 기업이다. 알짜 기업이 있어야 고소득 일자리가 생기고, 그런 일자리가 있어야 청년들이 몰린다. 당장 KDB산업은행 부산 이전 등 수도권 공기업 이전도 시급하다. 그것만으로는 역부족이다. 민간 기업의 투자가 활성화돼야 한다. 전통 제조업과 해양수산업, 건설업 등 기존 산업의 활성화·첨단화와 함께 블록체인 클러스터 조성, 에어부산 분리매각을 통한 부산 거점의 LCC 등 항공산업 성장, 전력반도체 및 이차전지 등 첨단산업 투자가 절실하다. 그런 경제 창출을 위한 규제 완화와 특구 설립, 세금 및 전기세 특혜, R&D 및 수출 지원, 풍요로운 주거와 문화 조성 등은 부산시와 중앙정부, 대학의 몫이다. 그 모든 것을 박형준 부산시장을 필두로 한 부산시의 치밀한 전략과 정치력, 에너지가 추동해야 한다.
기업 성장이 멈추는 것은 임직원의 역량이 한계에 부닥쳤기 때문이다. 모든 기업의 문제는 사람에서 시작되고, 사람에서 끝나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지역의 성장이 멈추는 것은 결국 ‘임직원’의 역량 탓이다. 지역이 더 이상 저렴한 인건비와 3D산업으로 싸우는 생산 기지가 아니라, 초격차 수준의 세계 경쟁력을 갖추기 위해서는 세상을 뒤바꾸는 혁명적인 아이디어를 가진 인재, 이를 실행하는 기업이 필요하다. 그 뒷배가 부산시와 중앙정부, 대학이다. 하루아침에 상전벽해와 같은 변화를 갈망하는 것이 아니다. 흔들리지 않는 국가균형발전 철학과 부산시의 추동력, 기업의 혁신이 뒷받침된다면 불가능한 일도 아니다. 하루빨리, 서울 대기업으로부터 “일 시킬 만하면 다들 부산으로 가려고 안달”이라는 탄식을 듣는 날이 오면 좋겠다.
이병철 논설위원 peter@busan.com
2023-11-21 [18: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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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병철의 인사이트] '지방시대' 대통령과 함께 못할 자들
“시도 때도 없이 부는 바람이 피게레스 주민들의 억센 성격을 만들었다.” 스페인 바르셀로나 근교 도시 피게레스는 초현실주의 화가 살바도르 달리의 고향이다. 피게레스에서 유년 시절을 보낸 달리는 프랑스 파리에서 초현실주의 예술인과 교류하면서 미국 뉴욕 등 세계를 누빈 뒤 고향으로 돌아왔다. 달리는 자서전에서 “바다와 햇살이 내리쬐는 환상적인 고향 해변에서 빛과 색채를 향한 욕망을 채우고, 그 아름다움을 옮기려 했다”고 회고했다. 피게레스 ‘달리 극장미술관’에는 그의 시신이 안치돼 있고, 작품이 대거 전시돼 있다. 피게레스와 극장미술관은 ‘괴짜 천재’ 달리를 추억하려는 전 세계 관광객들로 언제나 인산인해다.
바람과 바다, 햇살이 세계적인 예술가의 창작 원천이자 관광자원인 셈이다. 하지만, 같은 ‘바람’도 한국에서는 ‘촌동네’에만 부는 성가신 자연 현상이다. 한국관광공사 부사장 이재환 씨 이야기다. 서울 출신으로 윤석열 대통령직인수위원회 경제2분과 상임자문위원을 맡았다는 이 씨는 지난 8월 말 한국관광공사 홍보회의에서 ‘한국방문의 해’ 기념행사를 부산에서 추진한 것을 두고 “내가 거기 가봤더니, 막 폭풍우 치는데, 바람 때문에 설치도 안 돼”라고 비아냥댔다고 한다. 국회 문화체육관광위원회 국정감사에서 공개된 내용이다. 이 씨는 한술 더 떠 “뭐야, 왜 거기서 한 거야, 동네 행사해”라며 “지금 부산 깔아주는 거야. 그것도 부산 촌동네, 그 시골에…”라면서 직원들을 질책했다. 2030월드엑스포 부산 유치 열기를 확산하려는 그 행사는 이후 미국 뉴욕과 서울 여의도로 이어졌다. 지방 소도시까지 관광의 뉴 프런티어로 삼아 외국인 방문을 늘리고 지방을 살리겠다면서 팔을 걷어붙인 이웃나라 일본과는 영 딴판이다.
이 씨의 망언 사건 보름 뒤인 지난달 14일 윤 대통령은 부산에서 열린 ‘지방시대 선포식’에 참석해 “지역 경쟁력이 곧 국가 경쟁력”이라면서 “대한민국 전체의 발전과 성장을 위해서는 서울과 부산이라는 두 개의 축이 작동돼야 한다”라고 선언했다. 또, “모든 권한을 중앙이 움켜쥐고 말로만 지방을 외치는 전철을 밟지 않겠다”고 했다. 수도권 집중에 따른 지방 소멸을 막기 위한 의지의 표현으로 여겨졌다.
하지만, 중앙정부와 공기업, 국회, 국책연구기관 등에 산재한 ‘제2, 제3의 이재환들’로 인해 대통령의 지방시대 선언은 빛이 바랬다. 사실 지금까지 부산 등 비서울에서 무엇을 하려고 해도 ‘촌동네가 뭘~’이란 ‘이재환들’에 막힌 경우가 한두 번이 아니다. 청년들은 교육과 취업 기회를 찾아 서울로 떠나고 있다. 그들을 붙잡을 좋은 일자리 확충도 백년하청이다. 산업은행 부산 완전 이전을 위한 법 개정안은 국회 문턱조차 넘지 못하고 내년 총선 이후로 넘어갈 상황이다. 올해 역대 최대 규모라는 세수 결손의 가장 큰 피해자도 지방이다. 전체 연구·개발(R&D) 예산 감소폭은 13.5%인데, 지방의 R&D 예산은 무려 67.3%나 깎였다. ‘촌동네’는 머리 대신, 몸이나 쓰라는 ‘이재환식’ 사고이다.
이 모든 것이 당론마저 부정하는 더불어민주당의 몽니 탓일까. 여당인 국민의힘과 중앙정부에 ‘이재환들’이 포진한 원인이 더 크다. 그들의 눈에 지방은 텃밭에서 야채나 뜯고, 바다에서 고기 잡아 회쳐 먹고, 힐링하는 ‘삼시세끼’ 예능프로그램 장소로밖에 여겨지지 않는다. 서울이라는 이유로 지방을 노골적으로 차별하고, 우월감을 가지는 망국적인 불치병이 심화되고 있다. 지방의 박탈감과 모멸감은 일상사가 됐다.
“어떻게 올라온 서울 길이었던가…이 자랑스러운 도시의 시민이 된 영광…다시 쫓겨나게 되어서는 안 된다.” 소설가 이청준은 1960년대 중반 문단 데뷔로 서울에 간신히 입성했던 시절을 이렇게 그렸다. 무려 60년 가까이 지난 오늘 서울 집중의 파멸적 문제는 더 커졌다. 그 사이에 부산 인구만큼이 하루에 3~4시간씩 전철과 버스를 타고 서울로 출퇴근하는 국가적 낭비가 매일 반복될 정도이다.
피게레스의 바람과 바다가 살바도로 달리의 예술을 만들었다고 한다. 부산에도 바람이 불지만, 피게레스보다 못한 모양이다. 바람이 부는 탓에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하기 때문이다. 서울을 떠받친 것이 지방이다. 30년 후 지방이 사라진 서울과 한국은 지속 가능할 것인가. 이 씨가 친하다고 주장하는 ‘원희룡(국토교통부 장관) 선배, 15년 지기 오세훈 서울시장’, 그를 낙하산에 태워 한국관광공사 부사장에 최종 임명한 윤 대통령의 대답이 궁금하다. 부산의 거친 바람이 부산의 드센 성정을 만들었다. 민심의 바다에 바람이 불면 백파가 일고, 폭풍우가 덮친다. 내년 4월 총선을 앞두고 부산 앞바다에 먹구름이 몰려든다. 어찌 부산뿐이랴…. 바다를 낀 국민의힘 부산시당 유리창부터 단속해야겠다. ‘촌동네 바닷바람’이 더 무서운 법이다.
이병철 논설위원 peter@busan.com
2023-10-24 [18: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