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병철의 인사이트] ‘서울 사는 부모’가 스펙이 된 세상
논설위원
용인시 처인구 반도체 클러스터 변신
부동산·생산·고용 유발 효과 막대해
‘8·8 부동산 대책’ 서울 공화국 끝판왕
극단적 수도권 몰아주기 폐해 극심
어디 사느냐 따라 사회적 지위 결정
윤석열 정권 국가균형발전 포기하나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남사읍에는 고려시대 토성인 ‘처인성’이 있다. 1232년 용인으로 남하한 몽골군에 대항해 승장 김윤후와 부곡민들이 적장인 살리타이를 화살로 사살하면서 대승을 거둔 곳이다. 고려시대 지명은 ‘처인부곡’이었다. 고려시대 행정 체계상 경(京)·목(牧)·주(州)·부(府)·군(郡)·현(縣) 아래에 향(鄕)·소(所)·부곡(部曲) 같은 행정구역이 있었다. 당시 향·소·부곡 백성들은 천민 취급을 받아 조세와 군역 외에도 갖은 부담을 다 떠안았다. 지난주 휴가를 맞아 오랜 친구들과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일대를 찾았다. 처인구 남사읍과 원산면 일대에 들어선 신규 아파트마저도 ‘쇠똥 냄새난다’는 놀림을 받을 정도로 오랜 기간 개발에서 소외당한 지역이었다. 하지만 지난 17일 찾은 그곳에는 산봉우리마다 송전탑이 빽빽하게 들어서고 있고, 반도체 클러스터 단지를 위한 포크레인 작업이 한창이었다. 인근 식당 주인들은 “SK하이닉스·삼성 첨단 메모리 반도체 공장이 처인구 원삼면~남사·이동읍 일대에 들어서고 있다”라면서 "농사짓던 할아버지들이 부자가 되었다"라고 귀띔했다.
‘생거진천 사거용인(生居鎭川 死居龍仁)’, 즉 ‘살아서는 진천, 죽어서는 용인에 거한다’라고 할 정도로 용인은 묏자리 명당으로 유명하다. 웬만한 기업인이나 권력가들이 죽어서 이곳에 터를 잡을 정도다. 하지만, 지금은 ‘살아서는 용인’이라는 말이 더 어울린다. 1980년대 10만 명 수준이었던 인구는 2010년 87만 명, 2024년에는 107만 명을 넘어섰다. 삼성전자가 최첨단 파운드리 공장 등 총 300조 원을 투자할 계획이다. 생산 유발 효과 700조 원, 고용 유발 효과는 160만 명으로 전망된다고 한다. SK하이닉스도 처인성에서 20분 거리 원삼면에 121조 8000억 원을 쏟아붓고 있다. 국내외 반도체 장비·소재·부품 협력업체까지 입주하면, 일자리 창출과 인구 유입 효과는 어마어마하다.
전국의 아파트 가격이 내리지만, 유독 이곳만 거래량과 가격이 폭등하고 있는 이유다. 오죽했으면, ‘반세권(반도체+세권)’이라는 신조어가 인터넷 부동산 커뮤니티에서 등장할 정도다. 여기다 GTX(수도권광역급행철도) 조기 개통 등 134조 원대 수도권 교통정책과 반도체 설비에 100조 원을 투자하면, 세금 15조 원을 돌려주는 K칩스법까지 발표되면서 이런 흐름을 더욱 부추기고 있다. 반도체 전쟁 와중에 ‘반도체 공장 수도권 설립’에 어깃장을 놓으면 매국노가 되는 세상이긴 하다.
SK하이닉스는 광활한 옥수수밭 한 가운데 위치한 미국 중부 인디애나주의 인구 5만 명 소도시에 첨단 반도체 패키징 생산기지를 건설하고 있다. 하지만, 한국은 용인까지가 고급 인력 채용 남방한계선이라고 고집한다. 덕분에 ‘수도권 집중이 살길’이라는 공포 마케팅이 횡행하고, 지방은 한없이 비어가고 있다. 문제는 윤석열 정부가 ‘국가균형발전정책을 포기했다’라는 신호로 읽힌다는 점이다. 이런 ‘서울 공화국’ 끝판왕이 ‘8·8 부동산 수도권 공급 대책’이다. 국토교통부가 서울 지역 그린벨트까지 해제해 2029년까지 수도권에 42만 7000가구를 새로 짓겠다는 계획이다. 수도권 집값을 잡는 대신 비수도권 소멸은 감내하겠다는 의도다. 국토부 박상우 장관은 “넘치도록 주택공급을 해보자”라고 외쳤다고 한다.
윤석열 대통령은 “수도권 집중과 과도한 경쟁이 저출산의 원인”이라면서 국가균형발전을 수시로 강조한다. 한국은행도 “수도권 집중 완화가 출생률을 높인다”는 보고서를 제출했다. 서울시 합계출산율 0.55명이 수도권 집중 탓이라고 모두가 알지만, 정책은 거꾸로 간다. 한국의 국운이 ‘반도체 전쟁’에만 걸려있을까. 이런 식이면, 불과 몇십 년 뒤 유출될 인구조차 없는 지방의 소멸과 곧 이은 국가 소멸은 정해진 미래다. 윤 대통령은 극단적 수준의 ‘수도권 몰아주기’가 가져올 폐해를 못 본 체하는 것일까, 모르는 것일까.
휴가 말미에 서울 친구들 입에서 “부모가 서울 사는 게 자식들 결혼 스펙”이라는 이야기가 나왔다. 발끈했지만, 눈앞의 반도체 클러스터 공사장 먼지에 입을 다물었다. 고려시대에는 처인부곡과 같은 향·소·부곡 사람들은 군·현으로 이사하는 것도, 군·현 사람들과 결혼하는 것도 금지되었다. 어디서 태어나고 어디서 사는지에 따라서 사회적 지위가 결정됐기 때문이다. 그런 지역적 신분 차별과 천대가 겹치면서 고려 말기에 민중 봉기가 유독 많았다. 입으로만 ‘국가균형발전’을 외치는 윤석열 정권에게 비수도권은 고려시대 홀대받던 향·소·부곡과 다를 바 있을까. 아둔한 기자의 오해이기를 바랄 뿐이다.
이병철 논설위원 peter@busa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