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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승현의 남북 MZ] 북한 MZ와 한류 너머의 꿈
지난해 한국에 입국한 탈북민 196명 중 MZ세대가 절반이 넘는 99명이었다. 정부는 한류 등의 영향으로 인한 북한 내 MZ세대의 인식 변화와 무관치 않은 것으로 추정했다.
필자는 지난 몇 년간 입국한 북한군 출신 탈북민을 만날 기회가 있었는데 러시아와 중동 등 해외에 현역으로 파견되었다가 경험한 자유세계와 한국에 대한 비교적 상세한 정보가 한국행을 부추겼다고 했다. 입대 전에는 USB, 외장하드, 손전화(핸드폰) SD카드나 스마트칩으로 한국의 영상을 접했다며 북한에서 본 한국의 영화와 드라마 십수 편의 제목을 줄줄이 말하는데 나도 알지 못하는 드라마도 꽤 있었다.
전방에서 군인으로 근무하다 한국에 온 경험이 있는 필자가 그들의 말에서 놀랐던 것은 북한 MZ세대의 한국에 대한 관심은 예상을 뛰어넘고 있기 때문이다. 배급제 붕괴 후 확산한 장마당을 친숙한 생활 공간으로 삼고 성장했던 필자가 외부 정보를 접했던 경로는 ‘곽 테이프’(VTR), CD, DVD 정도였는데 장마당에서 진화한 시장 세대는 기술 발전에 힘입어 유통 매체의 다양화와 비약적으로 증가한 한류 콘텐츠 유통량의 기반에서 성장한 것이다.
해외에 파견되어서는 인터넷과 유튜브를 통해서 한국의 정보를 접하느라 영화나 드라마는 북한에 있을 때보다 상대적으로 관심이 적었다고 할 정도이니 북한 내 MZ세대의 인식 변화와 정보의 영향력은 생각보다 강했다.
북한에 한국 콘텐츠가 퍼지기 시작한 건 1990년대 ‘고난의 행군’으로 배급제가 붕괴하고 장마당이 급증하면서다. 처음에는 한류보다는 외국의 콘텐츠가 많았는데 북중, 북러 접경지대가 고리가 돼 한국 것보다 검열과 처벌이 덜한 외국 문물이 유통되었고, 한국의 콘텐츠는 출처가 모호한 상태로 유통됐다.
필자가 비무장 부대 훈련소에 입소하여 열렸던 오락회 시간에서 한 훈련병이 ‘이등병의 편지’를 부르다가 보위장교에게 추궁당한 일이 있었다. 당황한 훈련병이 적공국(적군와해공작국)에서 개사한 노래라고 얼버무렸는데 다음 날 그는 보병부대로 쫓겨갔다. 당시만 해도 훈련병 대부분이 그 노래가 한국 노래라기보다 북한에서 한국군을 대상으로 만든 심리전 노래로 알고 있었다.
훈련소를 마치고 비무장 부대에 들어온 후 동기생들은 남쪽의 대북 확성기 방송에서 울렸던 ‘이등병의 편지’를 듣고 철렁했던 가슴을 쓸어내렸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 북한에 한류가 공공연히 유통되면서 ‘이등병의 편지’는 ‘떠나는 날의 맹세’라는 제목으로 북한 청년들이 군에 입대할 때 흔히 부르는 노래로 자리했다.
사회보다도 더 철저하게 통제되는 북한군에서조차 장교와 군인 등 지위 고하를 가리지 않고 한류를 접하다가 단속된 사례는 북한 당국의 발표를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그러니 주민과 청년들은 말할 필요도 없다.
문제는 북한의 기성세대가 한류를 통해서 한국의 발전상과 자본주의 실체를 접한다면 장마당 세대는 동경을 넘어서 한국과 같은 삶을 꿈꾼다는 데 있다. 서울말과 패션이 유행되고 한국의 문화를 일상에서 구현하며 최근에는 한국행을 원하는 장마당 세대가 늘고 있는 것이 대표적인 예가 된다.
결국, 체제를 흔드는 뇌관이 될 수 있는 MZ세대를 정조준하여 북한은 서슬 퍼런 칼날을 빼고 나섰다. 이른바 반동사상문화배격법(2020년), 청년교양보장법(2021년), 평양문화어보호법(2023) 등으로 불리는 ‘혐한 3법’ 제정인데 사형을 포함한 가장 가혹한 처벌로 북한 주민들을 옥죄고 나선 것이다.
‘고난의 행군’ 시기 대량 아사 사태를 고통으로 겪으며 장마당을 처음 만들어간 지금의 4050세대나 “날 키운 건 노동당이 아닌 장마당”이라고 스스로를 규정하며 시장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인 2030세대는 이제는 모두 체제의 지속성과 생존에 믿기 어려운 존재가 되고 있다.
북한 스스로 이미 인정한 것처럼 중동에서 ‘아랍의 봄’을 통한 정권 교체가 일어난 것은 청년 세대의 성장 환경이 이전 세대들과는 완전히 다르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작 북한이 두려워하는 것은 통제를 강화하면 할수록 K콘텐츠를 열망하는 북한 주민들의 욕구 너머에는 한국이 자리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최근 북한의 동족 지우기와 반민족, 반통일 선언은 이와 무관치 않다. 이제 우리가 고민해야 할 것은 민족도 통일도 무관심해진 한국에서 언제인가 분출될 북한 주민들의 목소리에 과연 누가 어떻게 화답할 수 있느냐 하는 것이다.
2024-10-08 [17: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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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순연의 도시 공감] 강한 소상공인, 함께 성장 프로젝트
부산의 10월은 축제와 행사의 계절이다. 부산국제영화제, 부산국제록페스티벌을 비롯하여 자갈치축제, 영도다리축제, 구포나루축제, 전포커피축제 등 크고 작은 축제들이 부산 전역에서 개최될 예정이다. 이러한 축제는 주변 상인들에게도 모처럼 활기를 찾는 기회이기도 하다. 당연히 축제에는 사람들이 모이니 상인들의 기대는 높을 수밖에 없다. 부산의 10월은 바로 대목 시즌이 시작되는 시간인 셈이다.
얼마 전 명절 준비로 부평시장을 방문한 적이 있었다. 시장통은 추석 하루 전이라 사람들이 붐볐으나 정작 시장 상인들의 표정은 좋지 않았다. 상인들 대부분 이렇게 손님이 없는 건 처음이라고 하였다. 이제는 명절 대목이라는 말이 무색해진 시대인 것이다. 굳이 시장에서 구매하지 않아도 빠른 배송 서비스로 24시간 안에 원하는 제품들이 집 앞까지 배달되는 시대이다. 품질 좋은 제품을 온라인에서 가격까지 비교하면서 구매할 수 있기 때문이다. 손님을 기다리는 시대가 아니므로 더욱 소상공인들도 변화가 필요한 시기이다. 이제는 일반상품을 파는 시대가 아닌 자기만의 색깔과 스토리로 승부를 걸어야 경쟁력을 확보할 수 있는 시대가 되었다.
중기부, 고도화 자금 최대 1억 원 지원
9000여 개 업체 신청해 부산 4개 선정
자기만의 색깔과 스토리로 승부해야
100년 기업 도약 위해 지속 지원 절실
지난해부터 중소벤처기업부는 지역의 소상공인을 발굴하고 육성하는 프로젝트인 ‘강한 소상공인 성장 지원 사업’을 진행하고 있다. 이 사업은 생활문화 기반의 유망 소상공인을 발굴, 스타트업과 협업을 통해 독특한 제품·서비스를 개발하도록 지원하는 프로그램이다. 이를 통해 지역 소상공인들이 기업으로 성장하고 차별화된 비즈니스 모델을 구축하는 것을 도와 경쟁력 있는 소상공인으로 육성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고 있다. 올해는 전국에서 9137개의 업체가 신청해 1~2차 오디션을 거쳐 최종적으로 60개 기업이 선정됐다. 이들 업체에는 최대 1억 원의 사업 고도화 자금을 지원한다.
부산기업 중에는 신안 지역의 땅콩을 활용하여 오일과 버터를 제조하는 크레이지피넛과 다도문화 디저트 카페인 비비비당이 로컬브랜드 분야에서 선정됐다. 라이프스타일 분야에서는 상처 치료시 피부보호와 통증 감소를 위한 리무버스프레이를 제조하는 유주케어와 화학첨가물을 최소화한 비건식품 제조사인 온유어사이드가 최종 선발됐다. 부산시도 부산경제진흥원과 함께 스타 소상공인 프로젝트를 통해 소상공인들의 성장을 도와주고 있다. 2022년부터 시작한 스타 소상공인 사업은 부산 지역의 작은 메밀소바집부터 미국 아마존에서 즉석 떡볶이를 파는 대표들까지 다양한 영역의 기업이 참여하고 있다. 올해는 팥 하나로 승부를 걸고 있는 백로앙금을 비롯하여 10개 사가 지원을 받았다.
선정된 대부분의 강한 소상공인들은 지역을 막론하고 자기만의 스토리와 창의적인 아이템을 가지고 있다. 기성품을 파는 상인이 아닌 자기만의 색깔을 갖추고 있다. 이들은 단순히 아이디어에서 그치지 않고 제품을 위해 무수히 많은 실험과 노력을 통해 시제품을 완성하고 이를 기반으로 비즈니스 모델까지 구축했다. 더욱이 대기업처럼 체계적인 시스템으로 움직이기보다는 ‘체험 삶의 현장’같이 현장에서 부딪혀서 얻은 노하우를 가진 경험 중심형 기업이 대부분이다. 이들은 지역에서 막 성장을 시작하는 예비창업자들에게는 롤모델이 될 수 있고, 같은 소상공인들에게는 새롭게 도전하는 계기가 될 수 있는 ‘사람자산’으로 충분한 역량을 갖추고 있다.
그래서 이들의 장점을 인정하고 지원하는 연속적인 프로그램이 만들어졌으면 한다. 일회성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지속적인 성장 그래프를 구축할 수 있도록 지원도 계속 이루어졌으면 한다. 앞으로 강한 소상공인으로 선정된 팀은 라이콘 기업으로 또 한 번의 성장을 준비해야 한다. 라이콘(Licorn)은 라이프와 로컬에서 혁신을 통해 새로운 콘텐츠를 창출하는 유니콘 기업(기업가치 1조 원 이상 비상장기업)을 일컫는다. 그래서 지역에서는 지속적인 지원 프로그램이 더욱더 필요하다.
예를 들면 법적 문제를 찾아가는 해결사 프로그램, 직접적인 노하우를 전수받고 싶은 기업 방문 1:1쿠폰, 라이콘 기업 맞춤형 인력 지원 매칭 프로그램, 전문가 인력 파견 등 강한 소상공인들이 라이콘으로 성장하기 위해 필요한 사안에 빠르게 대응할 수 있는 창구가 필요하다. 그리고 ‘강한 소상공인 성장 전담팀’이 구성돼 소상공인의 부족한 부분을 채워주는 역할이 필요하다. 만약 그중 성공 모델이 나온다면 자연스럽게 지역 활성화에 도움이 될 것이다. 이러한 모델이 구축된다면 강한 소상공인들은 지역을 떠나지 않고 부산에 정착하여 100년 기업으로 성장할 수 있다. 라이콘 기업들이 부산에서 성장·정착하여 일자리 창출까지 이어진다면 부산은 1년 365일이 대목이 되지 않을까.
2024-10-01 [17: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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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인권의 핵인싸] 빛과 어둠, 앞이 보이지 않는 암흑의 시대
비가 갠 하늘, 햇빛의 반대쪽에 나타나는 형형색색의 무지개는 ‘무(無)’에서 창출되는 ‘유(有)’를 경험하기에 충분하다. 허공에 난데없이 나타난 총천연색이라니. 아무것도 없는 것 같이 투명해 보이지만, 우리의 일상은 ‘모든 색’으로 가득 차 있다. 하지만 이것을 눈과 영상에 담아 빛나는 색깔로 간직하는 것과, 이것을 사진으로 인쇄하는 것 사이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다. 전자가 순수한 빛의 직접적인 경험이라면, 후자는 순수한 빛이 인쇄된 면에 반사(反射)된 효과를 보는 것이다. 색의 반사는 나머지 색이 모두 흡수됨으로써 나타난다. 즉, 모든 색이 합쳐진 투명한 빛으로부터 그 물체의 색을 제외한 모든 색이 ‘빠진’ 현상을 보는 것이다.
모니터나 스마트폰의 액정화면을 보면, 빨강-초록-파랑(Red-Green-Blue, R-G-B)의 조합으로 모든 색이 표현되고 있지만, 정작 프린터의 잉크나 토너에는 그런 색들이 없다. 그 대신 잉크나 토너에는 우리가 하늘색이라고 부르는 색에 가까운 시안(Cyan), 분홍색에 가까운 마젠타(Magenta) 그리고 물감으로는 어떤 색을 섞어도 만들어낼 수 없는 노란색(Yellow)으로 이루어진 하늘-분홍-노랑(C-M-Y)이 있다.
컴퓨터의 그림판에 들어가서 색깔을 한번 만들어보자. 거기서 R-G-B 패널을 각각 0에서 255까지 총 256가지씩, 총 1600만 8000가지의 조합으로 우리가 화면에서 보는 모든 색을 만들어낸다. 모두 최대로 해서 합치면 우리가 보는 ‘무색(백색광)’이 된다. 흔히 우리가 어려서 배운, ‘빛의 삼원색을 모두 합치면 흰색이 된다’는 그것이다. 모든 색을 다 갖고 있어서 그 ‘어떤 색’도 아니다. R-G-B를 모두 합친 그 백색광에서 특정색(R, G, B 중 어느 하나)을 0으로 만들어 하나씩 빼 보라. 그러면 만나게 되는 색깔이 바로 C-M-Y이다. 그래서 C-M-Y는 각각 R-G-B의 반(反·anti)색체계이며, 감산(빼기)의 색체계라고도 한다. C-M-Y를 합치면 백색광의 정반대인 ‘검정’이 되는데, 이것은 동시에 아무런 빛이 없는 ‘암흑’의 상태다.
“오롯한 ‘암흑(검정)’을 본 적이 있는가?” 교수님의 난데없는 질문에 블랙홀 이야기를 하시려나 했는데, 그게 아니었다. 면도날을 여러 개 겹쳐서 앞에서 보라는 것이었다. 즉, ‘들어가는 빛은 있는데 날카로운 날 때문에 빛이 안쪽으로만 반사되어 도무지 눈으로 되돌아오는 빛이 없다(!)’는 것이다.
어렸을 적, 건물들이 있는 풍경화를 그리는데, 건물들의 창문을 온통 창에 비친 하늘과 구름처럼 희뿌옇게 그린 적이 있었다. “모든 창이 실제 그렇게 보이더냐”는 미술 선생님의 지적에 비로소 있는 그대로 쳐다본 건물의 창들은 눈을 의심할 정도로 검었다. 대낮 건물들 대부분의 창은 빛을 반사시키는 게 아니라, 들어간 빛을 그대로 모두 먹어버린 검은빛이다. 우린 얼마나 어설픈 선입견으로 왜곡된 세상을 보고 있는 것일까. 우리가 낮에 밖에서 보는 건물 대부분의 창문은 검은 반면, 안에서 보는 창문은 없는 듯 투명하다. 같은 창문도 언제 어디서 보느냐에 따라 이렇게 다르다.
‘빅뱅’의 순간, 아무것도 없어 보였지만 실제로는 엄청난 에너지로 가득 차 있던 우주는 순식간에 물질과 반(反)물질로 가득했다. 초기우주는 방금 생성된 물질과 반물질들의 엄청난 에너지로 들끓는 용광로와 같았는데, 아이러니하게도 캄캄했다. 전하를 가진 소립자들의 엄청난 상호작용 때문에 빛조차도 뚫고 지나갈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우주는 원자와 같은 중성입자들이 구성되기 전까지 약 40만 년 동안 불투명했으며, 이후 실제 핵융합으로 ‘별’이 형성되기 전까지 약 10억 년 동안 실제 광원이 없는 암흑이었다.
이후 투명해진 우주를 통해 우리는 많은 지식의 지평을 넓혀왔지만, 아직도 현대 인류는 중력을 통해 우주에 반드시 존재해야 하는 물질 총량의 불과 5%만을 파악하고 있다. 우리에게 보이진 않지만 분명히 존재하고 있는 우주의 나머지를 암흑물질이라고 부른다. 심지어 최근 우주의 가속팽창이 관측되면서 암흑물질보다도 더 많은 암흑 에너지가 있다고 하는데, 솔직히 아직도 설만 무성할 뿐 아무런 실마리도 잡지 못하고 있다. 과연 어린 시절의 만화 주제가만큼이나 우주는 미지의 암흑세계의 지배를 받고 있는 셈이다.
너무 많은 소통들이 아무 소리도 들을 수 없는 아우성이 돼버린 탓인지, 역설적으로 양극화된 불통의 아성에 갇혀 눈도 귀도 모두 닫힌 탓인지, 더욱더 늘어가는 분쟁과 심화되는 기후위기 속에서 답답하게도 앞이 보이지 않는 것은 사회나 우주나 매한가지인 것 같다.
2024-09-24 [18: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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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래의 메타경제] 문제는 우선순위
한국전쟁에 참전하였던 미군들이 남긴 기록을 보다가 눈물이 나기도 하고 놀라기도 한 것이 아직도 기억에 생생하다. 참혹한 전쟁 중에서도 한국의 맑고 높은 가을 하늘을 넋을 빼고 보았다는 기록에서 눈물이 나기도 하고, 시골 어디를 가나 초등학교가 있다는 기록에서 크게 고개를 끄덕인 적이 있었다.
그러면서 기록은 한국의 농촌 어디를 가든 큰 건물을 보거든 초등학교로 생각하면 틀림이 없다고 강조하고 있었다. 찢어지게 가난한 상황에서도 한국은 초등교육에 투자를 하고 있는 것에 그들은 큰 놀라움을 나타내었다. 물론 많은 초등학교들은 일제강점기에 이미 세워진 것이었을 게다. 그렇지만 재정 사정이 형편없었던 시절에도 초등학교 문을 닫지 않았던 것은 대단한 일이라고 하겠다.
사회간접자본이라고 하면 으레 고속도로나 철도를 떠올리겠지만 의외로 우리 주변 곳곳에 사회간접자본이 널리 깔려 있다. 일자리 안내와 시민들이 쉴 수 있는 공간, 그리고 새로운 기술을 익히고 정보를 얻는 기관은 물론 다양한 복지 시설에 이르기까지 정말로 찾아보면 곳곳에 사회간접자본이 넘쳐나는 것을 발견한다.
그런데 정말로 필요한 사회간접자본을 제대로 공급하고 있는 것일까를 곰곰이 생각하게 되는 경우가 많다. 이른 아침 온천천에 가끔 나간다. 약간은 어두운 시간인데도 온천천 양변은 사람들로 붐빈다. 부산에서 온천천만큼 접근하기 쉽고 걷기 좋은 곳도 없다. 이른 시간 온천천 양변을 꽉 메운 사람들은 모두 나이 든 사람들이다. 노인의 도시 부산을 정말로 백배 느끼게 되는 시간이다.
그러면서 돌아보니 온천천 전체가 어르신들의 운동기구로 꽉 차 있다. 온천천 가까운 곳에 오랫동안 살면서 온천천의 관리 주체인 동래구와 연제구가 다투어 공사를 하는 것을 수없이 보아 왔다. 거의 한 해도 거르지 않고 양쪽 어디에서인가 무엇인가 뜯어내고 새로 세우는 일이 반복되었다.
그런데 아주 기이하게도 어린이들을 위한 시설은 별로 없었다. 유아들을 위한 놀이시설이 있었다는 기억은 전혀 없다. 부산과 한국이 직면한 문제 중에 고령화와 저출산이 가장 심각한데, 그 문제에 대한 부산의 시선이 얼마나 편중되어 있는지 명확하게 보여 주는 사례이다. 저출산 때문에 도시와 나라의 존립이 위태로운데도 아직 우리의 인식은 그에 미치지 못하고 있다. 비단 이것은 온천천만의 문제가 아니라 부산 전체의 문제이기도 하다.
올 여름에도 정말 많은 사람들이 해외여행을 다녀왔다고 한다. 가까운 나라들로 많이 갔지만 배울 게 있는 선진국들로도 많은 사람들이 다녀왔을 것이다. 어디를 가든 어린이들이 놀 곳이 있고, 놀이터마다 그 지역의 문화적 콘텐츠가 스며 있는 창의적인 놀이기구와 시설들을 보면서 조금은 놀라는 경험도 있었을 것이다.
정말로 아이가 귀하고 그들이 우리의 미래라면 어르신의 운동기구를 만드는 만큼 아이들이 나와서 놀 수 있는 놀이시설도 만드는 데 진심을 보여야 하지 않을까. 투표권이 있는 어른의 시설뿐만 아니라 우리 사회의 미래를 위해 정말로 필요한 사회간접자본이 무엇인지 고민하여야 하는 것이다.
아이를 낳지 않고 젊은이들은 떠나고 고령화된 어르신들이 돌아가시면서, 부산은 빈집이라는 또 다른 사회적이면서도 경제적인 문제와 맞닥뜨리고 있다. 사실 이것도 오래된 문제이지만 최근 들어 갑자기 부각되고 있다. 사람이 없어 비어가는 집에 대한 대책을 세우기는 매우 어렵다. 재생도 사람이 있을 때 효과가 있지, 사람이 떠나면 아무런 효과가 없다.
빈집에 대한 가장 미래지향적인 대응은 공공이 매입하는 것이다. 공공이 보유하고 있는 자산이 많을수록 도시계획을 세우고 정책을 수립하기가 좋다. 언젠가 도시가 필요한 건물을 짓고 시설을 확보하고 또 도시의 미관을 살릴 수 있는 디자인을 강제할 수 있으려면 공공이 일정 부분 소유권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부산시가 나서서 빈집을 사들이는 것이 최선인데 아마 돈 때문에 쉽지 않을 것이다. 사실 부산시의 예산을 이리저리 따져 보면 여윳돈을 찾아내는 것은 매우 어렵다. 재정은 언제나 그런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지금 여유가 없다면 앞으로는 더욱 여유가 없다. 오랫동안의 정체 속에서도 부산 경제는 여전히 성장을 하고 있고, 그로 인해 부산시의 예산도 매년 최고 기록을 경신하고 있다.
다시 돌아보자. 미국의 원조 자금으로 재정을 어렵게 꾸리던 힘든 시절에도 초등학교는 문을 닫지 않았다. 돈이 없는 것은 맞지만 문제는 우선순위이다. 그게 또 재정이다.
2024-09-10 [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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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소영의 법의 창] 초연결사회에 필요한 디지털 쉼표 법제화
아침에 눈뜨면서 카톡을 확인하고, 관심 있는 동영상을 보며 출근 준비를 한다. 출근길에는 인스타그램에서 지인들의 스토리와 게시물에 ‘좋아요’를 누른다. 근무 중 인터넷 검색을 하고, 점심 식사는 블로그 추천 맛집에 간다. 텔레그램으로 전달된 업무 지시도 이행하고, 귀갓길에는 좋아하는 유튜버 방송을 청취한다. 앱으로 주문한 저녁 식사 후엔 게임하고, 침대에 누워 핸드폰을 하다가 잠이 든다. 우리의 흔한 하루 모습이다.
우리는 지금, 초연결사회에 살고 있다. 초연결사회란 사람, 사물, 공간 등 모든 것들(Things)이 인터넷(Internet)으로 서로 연결되어, 모든 것에 대한 정보가 생성·수집되고 공유·활용되는 사회를 말한다. 초연결사회는 우리의 생활 전반에 많은 변화를 일으켰고, 이 변화는 긍정적이기도 부정적이기도 하다.
게다가 인공지능(AI)의 등장으로 디지털이 사람을 돕고 보완하는 것을 넘어, 사람과 함께 공존하는 디지털 심화 시대가 시작되었다. 이러한 디지털 세계의 확장은 초연결사회를 더욱 강화한다. 디지털 중독을 고민하게 된 우리가 스스로를 지키기 위한 디지털 쉼표를 찾고 만들어가야 하는 현실적 이유다.
디지털 쉼표 제도 중 대표적인 것이 소위 ‘연결을 끊을 권리(right to disconnect)’의 법제화다. 기기의 전원을 끄지 못하는 현대 직장인들에게, 더 나은 휴식을 취하고 일과 삶의 균형을 위해 퇴근 후 직장으로부터의 연락과 연결을 끊을 수 있는 법적 권리를 인정하는 내용이다. 물론 비상 상황이나 직책, 업종별 차이 등 예외는 인정된다.
‘연결을 끊을 권리’ 보장법은 프랑스, 독일 등 20여 개 국가에서 시행되고 있고, 8월 26일부터 시행된 호주법이 가장 강력한 처벌 규정(최대 8460만 원 벌금 부과)을 두었다. 우리나라에서도 근로자의 사생활 보장을 위해 지난 8년 동안 ‘퇴근 후 업무 카톡 금지’ 법안을 논의했지만, 아직 성사되지 못했다.
디지털 기기로 인한 수면장애, 몸을 움직이지 않는 생활 방식, 신체 활동 부족, 과체중과 비만, 시각에 미치는 직간접의 부정적 영향 등은 여러 조사 결과를 통해 확인된 바 있다. 그래서 특히 미성년자의 휴대전화 사용 문제는 우리를 비롯한 여러 국가에서 논쟁 대상이 되어 왔다. 독일은 공립학교에서 교육 외 목적의 교실 내 휴대전화 사용을 제한하며, 영국도 수업 시간 휴대전화 사용 금지 지침을 발표했다.
프랑스는 9월부터 중학교 대상의 ‘등교 후 스마트폰 금지’ 정책을 시범 도입했다. 이미 2018년 초·중학교 내 휴대전화 소지 허용 및 사용 금지법을 시행했지만 강제성이 없어서 잘 지켜지지 않았고, 결국 물리적으로 사용을 막기로 한 것이다. 이제는 우리도 언론에 보도된 교실에서의 문제적 상황 때문이 아니라 디지털 쉼표 차원에서의 재고가 필요하다.
개인은 어떻게 해야 할까. 온라인 활동 중 중요한 개인정보가 노출되지 않도록 각별히 주의해야 한다. 초연결사회에서 자신이 원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자신과 관련된 정보가 계속 노출되는 괴로움은 심각한 사생활 침해가 된다. 여기에 ‘잊힐 권리(right to be forgotten)’의 출발점이 있다.
잊힐 권리는 정보 주체가 온라인상 자신과 관련된 정보에 대한 삭제 및 확산 방지를 요구할 수 있는 자기결정권이다. 자신이 과거에 저지른 행동에 구애받지 않고 자신의 삶을 주체적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보장해 주자는 의미다. 물론 이 권리의 인정 여부나 범위에 대해서는 국가마다 입장이 다르다. 상대방의 알권리 보장이나 기술적 실효성 등 어려움이 병존해서다.
지난해부터 개인정보보호위원회는 어릴 적 무심코 올린 개인정보가 포함된 온라인 게시물에 대해 삭제나 블라인드 처리 등을 도와주는, 이른바 ‘지우개 서비스’를 시행하고 있다. 19세 미만 아동·청소년 시기에 본인이 온라인에 글·사진·영상 등 개인정보를 포함한 게시물을 게시했지만, 지금은 삭제를 희망하는 경우 정부가 대신 접근 배제를 요청하는 디지털 잊힐 권리 서비스다. 2023년 4월 시작 후 올해 7월까지 신청된 2만 896건 중 총 2만 272건이 처리 완료되었고, 신청 건수가 더 증가하는 추세다.
우리는 선택했든 선택하지 않았든 일상에 아주 많은 것들과 ‘연결’된 사회에서 살고 있다. 거의 모든 것이 연결되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렇다고 디지털 부작용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기술이 미래를 변화시키는 것에 저항하는 매우 특이한 공동체인 아미시(Amish)처럼 지낼 수는 없다. 권리를 보호하기 위해 필요한 법제 마련이나 개인적 노력도 필요하지만, 그 안에는 연결의 가치와 더불어 비연결의 가치도 함께 담아야만 한다.
2024-09-03 [17: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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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우석의 기후 인사이트] 혼돈과 질서, 기후 시스템의 양면
1961년 미국 MIT 연구실에서 갓 부임한 교수가 기온 분포를 예보할 수 있는 간단한 예측 모델을 시험하고 있었다. 이 모델은 날씨의 비선형적인 특성을 포함하고 있었다. 교수는 기본값을 설정하고, 당시 컴퓨터를 이용해 시간이 지남에 따라 변하는 온도 값을 계산하기 시작했다. 이후 비슷한 기본값들을 설정하여 모델을 반복 실행하면서 여러 기온 데이터 세트를 만들었다. 비슷한 초기 조건에서 생성된 데이터이기 때문에 그는 시간에 따라 변하는 비슷한 값을 지닌 데이터를 얻을 수 있으리라 기대하였다. 그러나 결과는 기대와 크게 달랐다. 거의 동일한 초기 조건에서 시작된 온도 값들이 시간이 지남에 따라 완전히 다른 결과를 보였던 것이다.
구식 컴퓨터의 오작동으로 치부될 뻔한 이 테스트는 한 젊은 교수의 집념 덕에 물리학의 중요한 이론으로 발전했다. 이 이론이 바로 카오스 이론이며, 이를 시작한 교수가 에드워드 로렌츠(Edward Lorenz)이다. 거의 모든 자연계 시스템은 비선형적인 특성을 가지고 있으며, 그중 가장 독특한 성질이 바로 카오스다. 비슷한 초기 조건에서 시작한 동일한 시스템이 시간이 지나면서 완전히 다른 결과를 보일 수 있는데, 이를 카오스 이론에서 ‘초기 조건의 민감성’이라고 한다. 예를 들어, 마트에서 줄을 설 때 나와 앞 사람의 순서 차이는 매우 작은 찰나의 순간에 결정되지만, 그 결과로 누군가는 1만 번째 고객 경품 냉장고를 얻는 큰 행운을 얻고, 누군가는 그렇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이는 일상에서 볼 수 있는 비선형 시스템의 고유한 특성으로, 오늘날 현대 물리학의 중요한 이론으로 자리 잡았다.
날씨는 카오스 성질 자연 현상
단기 예보 한계 어쩔 수 없어도
장기 시간대에는 규칙성 보여
예측 가능성 최대한 활용해야
카오스 이론을 바탕으로 보면, 우리가 매일 접하는 일기 예보의 신뢰성을 더 잘 이해할 수 있다. 날씨는 카오스의 성질을 가진 자연계의 대표적인 시스템이다. 기상 예보 모델이 실제와 약간 다른 경곗값이나 초기 조건을 가질 경우, 시간이 지남에 따라 예측 결과가 실제와 크게 달라질 수 있는데, 이는 모델의 한계가 아니라 자연계의 본질적인 특성 때문이다. 물론, 더 정교한 모델을 개발하면 예측이 개선될 수 있지만 근본적으로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기후 변화로 인한 지구 곳곳의 이상기후 현상은 신뢰할 수 있는 예보를 더 일찍 제공해야 한다고 요구하고 있다. 아쉽지만 카오스 이론의 관점에서 보면 이는 현실적으로 어려운 요구이다. 날씨는 본질적으로 예측이 어려운 비선형적인 특성을 가지기 때문에 단기 예보에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다행인 것은 한 사람의 인격이 다양한 면을 가지고 있듯이, 기상과 기후 시스템도 카오스라는 단일한 특성만이 적용되진 않는다. 기후 시스템은 약 3일 이내와 같은 단기 시간대에서는 카오스의 성질을 지니지만, 이와는 달리 2주 이상의 장기적인 시간대에서는 규칙성도 갖는다. 2014년 〈사이언스〉지에 발표된 한 연구는 남반구 중위도 강수량의 총량이 약 25일의 주기성이 있다는 것을 밝혀냈다. 남반구 중위도에 비가 많이 내리는 기간이 존재하면 약 12일 후 비가 적게 내리는 날들이 존재하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주기성은 미래를 예측할 수 있는 특징으로, 카오스의 특성과는 대조적이다. 즉 정확한 날씨에 대한 예보는 3일 정도의 단기 예측에서는 불확실하지만 2주 정도의 장기 예측에서는 규칙성을 보일 수 있다.
오전 9시까지 출근하는 직장인은 직장에 도착하기까지 다양한 변수를 마주하게 된다. 가령 집을 나서자마자 중요한 서류를 잊고 다시 돌아가야 할 수도 있고, 갑작스러운 도로 위 사고로 교통 체증에 걸릴 수도 있다. 신호등을 기다리지 않는 행운으로 운 좋게 바로 출발하려는 버스에 승차하기도 한다. 이러한 다양한 변수 때문에 시시각각 직장인의 정확한 위치와 상황을 예측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하지만 책임감 있는 직장인은 대체로 9시 무렵에는 직장에 도착한다. 출근길 직장인의 정확한 위치를 분 단위로 예측하는 것은 어렵지만, 9시 언저리에 회사에 도착할 것이라는 예상은 충분히 신뢰할 수 있다.
최근 연구는 중위도 제트 기류와 이의 불안정성에 의해 발생하는 저기압이 상호작용하면서 25일 주기의 패턴이 형성된다는 것을 밝혀냈다. 이 주기성을 고려한 예보는, 마치 책임감 있는 직장인이 9시 무렵에 도착하는 것처럼, 약 2주 후의 날씨를 대략적으로 예측할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준다. 비록 날씨의 카오스적인 성질이 단기 예보의 한계를 드러내지만, 이와 더불어 기상기후 시스템이 지닌 예측 가능한 성질은 신뢰할 수 있는 중장기 예보가 가능하다는 희망 또한 제공한다. 기후 변화로 극한 기상이 증가하는 상황에서 신뢰성 있는 중장기 예보가 어느 때보다 중요해지고 있다. 앞으로의 예보는 이러한 예측 가능성을 최대한 활용하는 방법을 찾아야 할 것이다.
2024-08-27 [18: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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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승현의 남북 MZ] 탈주, 자유를 향한 경계 넘기
영화 ‘탈주’가 올여름 개봉작 중 처음으로 관객 수 255만 명을 넘기며 장기 흥행 모드에 들어갔다. 북한·분단을 소재로 한 작품에 대한 관심이 시들해질 즈음 모두의 예상을 깨고 다시금 관객을 집중시킬 수 있었던 것은 남북 대결이 휴전선을 중심으로 위태롭게 흘러가고 있는 점과 무관치 않다. 하지만 영화의 흥행을 보장하는 데 남북의 대결 구도나 탈출자의 스토리는 그리 함량이 높은 편이 아닐 것이다. 따라서 귀순 병사의 뻔한 탈출기가 아닌, 실패하더라도 꿈과 자유를 얻기 위해 ‘탈주’를 선택한 전개를 통해 한국에서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 모두의 복잡한 상황과 오버랩되며 관객의 흥미를 자극한다. 영화 ‘탈주’는 통제된 북한 비무장지대(DMZ) 부대에서 10년 만기 제대를 앞둔 규남(이제훈 분)의 실패할 자유가 있는 내일(한국)을 향한 질주와 오늘(북한)을 지키기 위한 보위부 장교 현상(구교환 분)의 목숨 건 추격전을 그린 작품이다.
영화는 북한군과 비무장지대 상황과 다소 어긋난다는 지적도 끊임없이 받아 왔는데 이를테면 자동차를 통한 탈북 과정과 추격 총격전, 고압선과 지뢰밭, 가수 자이언티의 노래 ‘양화대교’를 듣는 북한군과 한국어에 가까운 북한말 등 현실성이 낮다는 의견이 분분했고 감독도 인정했다. 하지만 감독을 포함하여 우리는 모두 영화보다 더 영화 같은 분단 상황을 간과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몇 년 전 판문점을 통한 귀순 병사는 군용차를 몰고 공동경비구역(JSA)의 군사분계선(MDL) 10m 앞까지 왔고 차가 배수로에 빠진 뒤 남쪽으로 향하자 북한군은 AK소총 등으로 40여 발의 총격을 가해 몸 5곳에 총상을 입은 후 가까스로 귀순에 성공했다. 휴전선을 넘어온 필자 역시 3중의 고압선과 수백m의 지뢰밭을 뚫고서야 한국에 올 수 있었고 DMZ 내 근무지에서는 몰래 라디오 주파수를 돌려가며 뉴스를 청취했다. 한때 북한의 MZ세대가 서울 말투뿐 아니라 용어까지 따라 하는 유행이 일었는데 이를 막기 위해 북한 당국은 ‘평양문화어보호법’을 제정하였으며 그 MZ들이 현재 북한군의 다수를 차지하고 있다. 최근 북한 오물 풍선 살포에 대응해 휴전선 일대에서 재개한 대북확성기의 방송 내용에는 북한군 46사단 전방 DMZ 안에서 귀순을 시도하려는 북한군이 포박돼 압송당했다는 내용도 들어있는데 영화가 아닌 현실이다.
그런데 영화 ‘탈주’가 관객에게 전달하려는 메시지는 북한과 탈출자에게만 국한되지 않는다. 제목이 말해주듯이 탈북도, 탈출도, 귀순도, 월경도 아닌 ‘탈주’다. 탈주의 사전적 의미는 ‘감금된 곳에서 몸을 빼어 달아남’이다. 분단은 한민족의 대결 상태를 뜻하므로 영화 ‘탈주’는 분단 현실에 갇혀 살아가는 우리의 이야기로 향하고 투영된다. 태어나 보니 분단국가인 나라의 MZ세대가 평소 그것을 인지하지 못하다가 군에 입대해서야 긴장된 현실을 마주하게 되는 상황이나, 분단으로 사방이 꽉 막힌 섬나라에서 청년들이 마주한 끊임없는 경쟁과 필사적인 도전은 마냥 남 일이 아니다. 영화는 더 이상의 안주가 보장되지 않는 작금의 현실과 미래에 경종을 울리고 있다. 세계 유일의 분단국가인 한국과 북한의 분단선은 통일을 원하든 아니든 잘못된 ‘민족의 분단선’으로서 그 불편함과 불안함에서 해방될 수 없다. 어디 그것뿐이겠는가. 북에서 탈주에 성공한 이들이 한국에 와서 겪게 되는 차별과 편견 속에서도 악착같이 더 나은 자유와 꿈을 위한 의지를 불태우는 스토리는 덤덤하지만 납득되는 메시지를 전달한다.
사실 북한군 신분으로 군사분계선을 통과해 온 필자 또한 목숨을 건 지독한 탈주 끝에 한국에 왔지만 만만치 않은 탈주의 여정은 지금도 현재진행형이다. 녹록지 않은 도전 끝에 교수라는 신분도 얻었지만, 무수한 좌충우돌 끝에 지금은 비무장과 멀리 떨어진 최남단에 있는 섬에서 살고 있지만 여기까지 쫓아오는 사회적 편견과 현실의 핍진함은 여전히 극복해야만 할 벽이다. 하지만 돌아보면 희망의 도착점은 늘 도전의 시작점이었고 자유와 의지는 절박한 삶에서 ‘탈주’를 선택할 수 있는 동력이었다. 그래서 아슬했던 휴전선 탈주 경험과 비빌 언덕 하나 없었던 치열한 경쟁 사회에서의 도전을 학생들과 공유한다. 그리고 대학 졸업 후 세상으로의 탈주를 준비하는 학생들에게 섬에서 많은 것을 배우고 축적한 후 대륙을 횡단하라고 주문하고 있다. 아직 포기하지 않는 절박한 꿈도 갖고 있다. 분단을 딛고 통일이 돼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는 내달음이라면 한 번 더 목숨을 걸만한 성취라고 믿고 있다. 성공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마음껏 선택하고 실패라도 해보기 위해서 간다”라고 했던 영화 속 주인공이 던진 대사의 의미를 여러 환경적 이유로 불안전한 현재에 사는 우리는 이미 직관적으로 알고 있다.
2024-08-20 [17: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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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순연의 도시 공감] 퐁피두, 공감의 도시문화로 전환하기
세계인의 축제인 파리 올림픽이 끝났다. 이번 올림픽은 문화 다양성과 탄소발자국, 지속 가능성 등의 키워드를 통해 과제와 가능성을 던진 대회로 평가되고 있다. 새롭게 건축하지 않고 기존의 공간을 활용해 서양 건축사 시간에 배웠던 르네상스 시대의 앵발리드 탑을 양궁 경기 내내 볼 수 있었다. 근대5종 경기에서는 베르사유 궁전 모습을 감상하면서 아이들에게 역사를 설명하는 계기가 되었다. 역사적인 장소뿐만 아니라 미래지향적인 파리라는 도시를 통해 과거와 현재, 미래의 시대적 정신을 담아냈다. 파리가 세계적인 이벤트로 전 세계의 이목이 집중된 것처럼 부산의 도시 공간에서도 파리의 도시 정책과 거점 활용에 대한 내용이 연결되어 있다. 그것이 바로 15분 도시 퐁피두센터일 것이다.
15분 도시의 경우 여가, 쇼핑, 교육, 문화, 휴식, 공유 및 재사용 등 다양한 기능을 복합적으로 누릴 수 있는 자립적인 생활권으로 재편성을 주도하였다. 그리고 공공 공간인 도로와 광장, 학교를 주민을 위한 삶의 공간으로 전환하는 동시에 주민 중심 문화와 소통을 강조한다. 파리의 경우 일상에서 문화를 연결하는 플랫폼 형식으로 재편성하는 작업을 진행하고 있다. 이러한 정책과 유사하게 소생활권 개념의 '부산형 n분 도시 사업'이 진행 중이다.
특히, 퐁피두센터는 1977년에 오픈한 복합문화공간이다. 지역재생 중에서 문화적 재생 사례의 성지로서 거점을 통한 지역 활성화를 모태로 건축과 도시를 전공하는 학생들이라면 무조건 방문해야 하는 코스 중에 하나이다. ‘대중을 위한 문화의 장소’로 건립된 퐁피두센터는 생마르탱 거리와 보부르 거리 사이에 경사진 광장을 지나다 보면 외관이 파이프로 노출된 괴상하게 생긴 건축물이다. 배낭여행으로 찾았던 퐁피두센터는 광장과 건축물을 따라 들어서다가 선명한 색채에 감탄하며, 공간 내부를 오르다 보면 자연스럽게 앙리 마티스, 마르셀 뒤샹, 잭슨 폴록의 작품들을 감상하고 개방형 도서관과 디자인 전시 및 관련된 서적들을 볼 수 있었다.
한참을 내부와 외부 공간을 보면서 건축이 가진 힘과 관계성에 대한 내용을 접하게 되었다. 당시 건축학도의 로망이었던 퐁피두센터가 ‘세계적인 미술관’ 계획 아래 부산에도 유치된다는 소식을 들었다. 대상지는 부산의 대표적인 자연경관지역으로 지역 주민들이 사랑하는 트래킹 장소인 부산 남구 이기대라는 뉴스를 접했다. 사업 초기에는 북항에서, 이제는 이기대로 장소가 변경되었으며 3차례에 걸쳐 계획이 수립 중이라고 한다. 중간에 모 기업에서 유치 경쟁에 끼어들어 이미 서울 63빌딩에 퐁피두센터 분관이 유치됨에 따라 사업의 힘이 빠졌으나, 2025년부터 퐁피두 분관 서울 4년간 유치 후 2030년부터 유치하는 계획 변경을 통해 추진 중이다.
시민단체에서는 몇 가지 문제점을 지적하고 있다. 첫 번째가 부산의 메가 이벤트가 대부분 동부산권역에 집중된 점에서 문화 불균형이다. 그리고 건설비를 포함한 로열티, 관리·운영 비용 문제, 인근 지역 대형주거지 인허가에 따른 공공성 훼손 문제 등 난개발 우려까지 제기했다. 세계적인 미술관이란 대표성을 가진 퐁피두센터가 오히려 시민의 공감대를 형성해야 함에도 과정의 투명성 문제와 대상지 주변의 이슈까지 겹치면서 논란이 되고 있는 셈이다. 결국 사업 타당성에 대한 의문까지 제기되고 말았다.
아마도 사업 초기에 입지타당성 및 다양한 장단점을 고려하여 계획을 수립했을 것이다. 다만 이러한 과정 속에 시민들의 공감대를 형성하는 적극적인 소통이 있었다면 세계적인 미술관이 부산 시민들에게 환영받지 않았을까. 건축계획각론에는 기획-계획-설계-시공이라는 단계적 추진 과정이 있다. 그중 기획은 예전에는 ‘초기 검토 정도’ 단계였으나, 현재는 하드웨어적 내용과 함께 사회·경제적 요소와 통계적 수치를 활용한 지속 가능성까지 반영하도록 한다. 그리고 사회적 실험을 통해 니즈와 가능성까지도 고려하여 기획 단계에서 했던 다양한 고민을 계획단계에 최대한 반영해야 한다.
퐁피두센터 본원이 지어진 지 약 50년 가까이 되어간다. 당시 퐁피두센터를 비롯하여 오르세미술관, 라빌레트 공원 등을 건립한 파리 전체가 문화 공간이자 창작 활동의 중심지 역할을 위한 활동이었다면 2024년 이후의 퐁피두센터는 달라져야 하지 않을까. 향후 50년 동안 세계적인 미술관으로서 자리매김하기 위해서는 지역이 가진 다양한 문화 요소와 결합하는 방법과 부산만의 도시의 방향성에 따른 마스터플랜 아래 퐁피두의 역할을 제안해야 하지 않을까? 법적 프로세스와 하드웨어적 검토가 아닌 도시문화로서 내용을 채울 방법과 퐁피두센터가 결합하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
2024-08-13 [18: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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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인권의 핵인싸] 망원경과 가속기
외국에서 태어난 딸아이가 하루는 한국말이 어렵다며 울상을 지었다. 학교에서 ‘별을 관측하기에 적당한 도구’를 묻는 질문에 망원경·현미경·돋보기가 예시로 나왔단다. 망원경도 현미경도 돋보기도 모두 ‘작은 것을 크게 보는 것’인데, 도대체 무엇이 다르냐는 푸념이었다. 당시 열 살이던 딸아이 덕분에 필자도 우리말의 어려움을 새삼 알게 됐다.
망원경·돋보기·현미경은 모두 작은 것을 크게 보는 원리지만, 각각의 용도에 맞도록 달리 제작된 도구다. 특히 멀리 있는 것을 당겨서 보기 위해 제작된 망원경과, 작은 것을 크게 확대하는 기능만 최대화한 현미경은 큰 차이가 있다. 빛을 모으는 볼록렌즈는 작은 것을 크게 보이게 하는 반면, 빛을 퍼뜨리는 성질이 있는 오목렌즈는 광각을 크게 만드는 역할을 한다. 흔히 이런 광학기기의 경우 자세히 볼 수 있는 분해능에만 관심이 있을 수 있으나, 실은 어두운 것을 밝게 볼 수 있게 하는 집광력도 광학기기의 아주 중요한 성능이다.
망원경은 멀리 있는 것을 크게 볼 수 있게 한다는 점에서 천체 관측의 중요한 도구가 됐는데, 멀리 있는 천체란 결국 빛이 그만큼 먼 거리를 달려와야 한다는 점에서 멀리 있는 별의 관측은 과거의 우주를 눈으로 관측하는 셈이 된다. 그래서 우주의 나이만큼이나 멀리 있는 별은 초기우주를 알려주는 중요한 단서가 된다. 그래서 원리적으로만 보면 ‘우주 최초의 상태를 알 수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하게 되지만, 유감스럽게도 초기우주는 빛이 아무 장애 없이 통과될 만큼 투명하지 않았다. 전기적으로 중성인 안정된 원자들이 형성되기 이전, 전자·핵·양성자·쿼크 등 하전된 입자들이 우주를 가득 채워 우주가 불투명했을 때를 알기 위해서는 다른 장치가 필요하다. 그게 바로 가속기다.
흔히 입자를 가속시킨다고 알려져 있는 가속기는 하전된 입자만 전기장을 통해서 가속시킨다. 음전하를 띠는 전자가 음극과는 밀치고 양극에는 당겨지는 원리를 이용한 것이다. 건전지의 음극과 양극을 따로 전선을 연결해서 두 판을 마주 보게 하면 가장 기본적인 가속장치가 되는데, 공기 입자가 방해하지 않도록 진공으로 만든다. 보통 음극을 뜨겁게 만들면 전자가 음극에서 방출되는데, 그래서 음극선관(Cathode-Ray Tube, CRT) 모니터는 그 자체로 작은 가속기다.
입자를 가속시키는 가속기가 초기우주 탐구를 가능하게 한 비결에는 두 가지 물리학적 이유가 있다. 입자는 빨라질수록 커다란 것은 통과해 버리고 점점 더 작은 것들과 반응하는 양자적 성질이 있다. 오늘날 세계 최대인 27km 가속기에서 가속된 양성자는 1아토미터(100경 분의 1m)의 미시세계까지 볼 수 있게 해 준다. 동시에 이 작은 공간에 집약된 엄청난 에너지는 아인슈타인의 ‘에너지와 물질의 등가원리’(E=mc²)에 따라 완전히 새로운 무거운 입자들을 생성시킨다. 좁쌀끼리 충돌시켰는데 마술처럼 수박과 호박들이 쏟아져 나오는 것이다. 10여 년 전 표준모형의 화룡점정이 된 힉스 입자도 양성자보다 약 125배 무겁다. 이렇듯 가속기는 빠른 입자를 통해 미시세계를 볼 수 있게 해 줄 뿐만이 아니라, 지금 우주엔 존재하지 않지만 최초의 우주에나 존재했을 법한 무거운 입자들을 생성시켜 우주 최초의 상태들에 대한 연구를 가능하게 해 준다.
약 400년 전 거의 동시에 발명된 망원경과 현미경이 인류 역사를 완전히 바꾸어 놓았듯이, 약 100년 전 개발된 가속기는 우주와 물질의 근원에 대한 탐구에 완전히 새로운 지평을 열었으며 거의 예외 없이 노벨상의 업적이 됐다. 미국과 러시아(옛 소련), 유럽은 경쟁적으로 고에너지의 가속기를 개발해 왔으며 일본도 예외가 아니었다. 30년 전 우리나라도 가속된 전자를 통해 고에너지의 빛(X선)을 만들어내는 포항 방사광가속기를 시작으로 최근 중이온(희귀동위원소) 가속기(RAON)를 완공하고 첫 충돌실험을 눈앞에 두고 있다.
우주를 이해하려는 인간의 노정은 당장의 편리와 재화를 창출하는 일과 자못 거리가 먼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역사의 새로운 지평을 열어가는 첨단기술 개발의 동인이 됨은 물론 세상을 보는 우리의 눈과 생각을 변화시킨다. 중국과 유럽은 최근 100km에 달하는 초대형 가속기 건설 추진을 선언하고 나섰다. 사실 현재의 우리 지식으로는 그 새로운 도구가 우리를 어떤 경지로 데려다 줄지 아직 모른다. 현미경과 망원경을 처음 만들었던 이들이 질병의 원인이 되는 세균 관찰과 우주여행까지 꿈꾸었을 리 만무하다. 답답하고 아슬아슬해 보이는 국내외 정세와 기후변화를 실감하는 무더위 속에서도 과학자들의 호기심과 끈기는 그래서 더 위대해 보인다.
“인류의 도약은 새로운 개념보다는 새로운 도구의 발명에서 기인한 바가 훨씬 크다.”(프리먼 다이슨)
2024-08-06 [18: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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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래의 메타경제] 위기와 부산의 선택
지금 살고 있는 아파트에 30년 넘게 살았다. 한곳에 오래 살다 보니 그 시간만큼 묵은 관계도 적지 않게 생겼다. 자주 다녔던 목욕탕은 그사이 몇 번 수리를 하였고, 아직도 장사를 하고 있는 작은 마트의 주인과는 만나면 반가운 인사를 나눈다. 여기에 이발소를 빼놓을 수 없다. 이사 오고부터 줄곧 한 곳에서만 머리를 깎았으니 참으로 오래된 인연이다.
이발소를 하시던 분이 얼마 전 문을 닫았다. 나이가 팔순을 바라보면서 기력이 많이 떨어진 탓이다. 한두 달에 한 번씩 들렀던 이발소에서 머리를 깎으면서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1960년대에 경북 영주에서 부산으로 와서 이발소를 시작한 그 분을 통해 내가 살고 있는 아파트 자리에 원래 미진화학이 있었다는 것을 알았다. 1950년대부터 부산 화학공업의 일익을 담당했던 미진화학, 그 옆에는 대우실업이 있었다. 물론 거기도 지금은 아파트가 들어서 있다.
오래전에 지어져 지금은 재개발의 열기에 들떠 있는 이 동네의 작은 아파트 자리들은 모두 기업들이 있었던 곳이다. 이발소 아저씨는 그 아파트 자리에 있던 기업들을 아직도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명절이 가까워 오면 고향에 가는 인근 공장의 근로자들이 머리를 깎으러 몰려들곤 했는데, 명절 전날에는 밤새워 근로자들의 머리를 깎았다고 했다.
부산 산업을 이끌었던 봉제와 플라스틱이 작은 길 하나를 두고 마주해 있었던 것처럼, 1960년대는 우리가 잘 기억하고 있지 않지만 부산 경제가 정말 잘나가던 때였다. 사실 포항제철이 생기기 전까지 우리나라 최대의 철강 도시는 부산이었다. 많은 철강기업이 지금은 부산을 떠났지만, 당시 부산에서 생산된 철강이 전국으로 판매되어 갔었다. 흔히 부산 경제의 구조적 문제점으로 지적되어 온 노동집약적인 경공업 중심이라는 수사는 훗날에 만들어진 것으로 1960년대 말까지만 해도 그렇지 않았다.
산업구조 혁신 기회 잃고 쇠락의 길로
기업 사라진 자리에 아파트만 들어서
수도권 집중 부산 경제 선택의 기로
소멸 벗어날 준비 하고 있나 성찰해야
그리하여 부산시도 이러한 사실을 매우 자랑스러워했는데 ‘신문 용지 말고는 모든 것을 만들 수 있는 유일한 도시’라는 자부심을 공식 기록에 남기고 있었다. 그리고 부산의 미래를 ‘종합공업도시’로 제시하면서 경공업과 중화학공업이 고루 발전된 도시를 지향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1970년대로 접어들면서 그 길은 깨어졌다. 부산 경제는 신발과 섬유 그리고 합판과 같은 노동집약적 공업에 집중하였다.
이것이 태생적으로 공업 용지가 부족하고 정부의 산업단지 배치에서 부산이 소외된 구조적인 문제 때문인지 아니면 부산시와 부산 기업들의 선택의 결과인지는 좀 더 연구가 필요하다. 구도는 우리가 극복해야 할 대상이며 선택할 수 있는 범위에 영향을 준다. 반면 선택은 익숙한 길을 갈 것인지 아니면 혁신의 길을 갈 것인지에 관한 것이다. 익숙한 것은 쉽지만 성장성이 떨어진다.
1990년대 이래 긴 고난의 시대를 걸어오고 있는 부산 경제가 다시 중대한 선택의 기로에 놓여 있다. 오늘날 구도와 관련하여 가장 강력하게 작용하고 있는 것은 수도권 집중이다. 기업과 사람을 모두 빨아들이는 엄청난 흡인력이다. 이러한 구도를 넘어서서 부산이 선택할 수 있는 길을 찾는 것이 우리의 과제이다.
부산시가 가장 역점을 두고 추진하고 있는 글로벌 허브도시는 수도권 집중이라는 구도의 제약을 넘기 위한 수단과 함께 새로운 산업을 넣기 위한 방안으로 추진되고 있다. 부산 기업들의 다짐도 이에 가세하고 있다. 지난 19일 부산상공회의소는 창립 135주년 기념식을 가졌다. ‘더 강한 기업’이라는 비전을 통해 과거 부산의 기업들이 가졌던 역동성을 이어받으려는 의지를 보인 것으로 이해된다.
그러나 이러한 시도와 선택들이 부산 경제를 얼마나 바꿀 수 있을지는 지켜보아야 한다. 부산 경제가 잘나가던 시기에도 순간의 방심과 진취성의 상실로 기회를 놓쳤는데, 지금은 그때보다 더 힘든 상황이기 때문이다. 불리한 상황에서 역전을 이루어내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그렇기에 부산 시민들의 선택과 협조도 중요하다.
무엇보다 기업을 밀어내고 그 자리에 아파트를 짓는 선택이 지속되는 한 부산 경제의 회복은 쉽지 않다. 바다와 노인의 도시 부산에 쌓여가고 있는 것은 콘크리트 구조물들뿐이다. 대도시 가운데 가장 먼저 부산이 소멸의 위기에 직면하였다는 진단이 얼마 전 있었다. 달리 표현하면 부산이 위기에 빠져 있다는 것이다.
부산이 다시 활력을 찾고 소멸의 위험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당면하고 있는 문제에 대한 올바른 이해와 함께 제대로 된 선택을 하고 실천하는 지혜가 필요하다. 그런 준비가 정말로 되어 있는지 성찰해 보아야 한다.
2024-07-30 [17: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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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우석의 기후 인사이트] 지구온난화가 부른 극한 이상기후
1996년 미국 재난 영화 ‘트위스터’를 보며 기상학자라는 직업에 처음 매료되었던 기억이 떠오른다. 토네이도를 추적하는 과학자들의 모습이 매우 인상적으로 다가왔다. 30년 가까운 세월이 흐른 2024년 4월, 미국 중서부에서는 하룻밤 사이에 100여 개의 토네이도가 동시다발적으로 발생했다. 영화보다 더한 극한 이상기후 현상으로 인해 오클라호마에서는 4명이 숨지고 마을이 초토화되었다. 지금도 4700만 명의 미국인이 토네이도의 위험에 직면해 있다고 미국 기상청은 발표했다.
더욱 놀라운 것은 토네이도가 일어나지 않던 중국에서도 토네이도가 발생하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같은 시기 중국 남부 광저우에서도 이제껏 경험하지 못한 강력한 토네이도로 5명이 사망하고 141채의 공장 건물이 손상되었다. 그리고 얼마 전인 7월 초, 중국 산둥성에서도 토네이도가 발생해 2800여 채의 주택이 파괴되고 80여 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올여름 동아시아의 극한 기상은 비단 토네이도만이 아니다. 올해 4월 중순, 중국 광둥성에서는 폭우로 10만 명이 대피해야 했고, 양쯔강에서는 홍수로 안후이성에서만 100만 명에 가까운 이재민이 발생하였다. 지난주 일본 규슈 지방에서도 기록적인 폭우로 수십만 명이 대피했으며, 우리나라도 최근 중부지방의 집중 호우로 많은 지역이 침수 피해를 입었다. 이러한 폭우는 과거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강력하고 피해 역시 심각하다. 장마가 끝나면 극한 폭염이 예상된다.
지난해 전 세계 평균기온이 역대 최고치를 이미 기록했지만, 올해는 그 기록을 넘어설 것으로 보인다. 해양의 자연적 순환주기와 더불어 온난화는 지구 평균기온을 급격히 상승시키며 극한 이상기후 현상을 증가시키고 있다. 지구온난화와 극한 이상기후 현상의 관계를 살피려면 기온의 증가가 특정 지역 대기의 흐름과 어떠한 연관성을 지니는지 파악해야 한다. 최근의 연구에 따르면 대륙과 해양의 열적 성질 차이로 인해 형성된 전 지구 규모의 대기 패턴이 중위도 서풍의 약화와 함께 강해지고 있다. 중위도 서풍의 강도는 북극 지역과 적도 지역의 온도 차이에 비례한다. 온난화의 대표적 현상인 북극 지역의 가파른 온도 상승이 적도와의 온도 차이를 줄여 여름철 중위도 지역의 서풍을 약하게 하는 직접적인 원인이 되고 있는 것이다. 결국 북반구 여름철 기후를 주관하는 대륙성 저기압과 북태평양 고기압의 세기가 증가하고 있는 것이다.
특히 한반도는 강해진 북태평양 고기압과 대륙성 저기압 사이에 위치하게 된다. 장마철 남풍의 영향은 적도의 고온다습한 공기를 한반도로 이동시키며, 북쪽의 차갑고 건조한 공기와 만나게 되고, 이로 인해 대기의 불안정성이 커져 극한 이상기후 현상이 발생한다. 온난화로 인해 중위도 서풍이 약화되면서 강한 남풍이 다량의 수증기를 한반도로 수송하고 있다. 이는 언제 어디서 폭우를 맞이할지 모르는 상황을 초래하게 된다. 여름철 극한 이상기후 현상에서 온난화의 흔적을 뚜렷하게 보게 되는 것이다.
극한 이상기후 현상이 현실로 다가온 지금, 필자는 가끔 피에르험버트 교수의 깊은 한숨이 떠오를 때가 있다. 2008년 2월 필자는 박사과정 입학 인터뷰를 위해 시카고대학을 방문하였고, 거기서 지구온난화 연구의 선구자이자 세계적인 석학인 피에르험버트 교수를 만나는 영광을 누리게 되었다. 석사 졸업 후 갓 연구를 시작한 필자에게 그의 조언은 무척이나 소중한 것이었다. 다양한 기후 관련 연구 주제들에 대해 열정적으로 이야기하던 그가 문득 필자의 눈을 조용히 바라보며 이야기했다. “나는 종종 잠들기 전에 지구온난화의 악영향을 생각하며 잠을 설치곤 한다네. 다음 세대가 겪어야 할 고통을 떠올리면 초조함에 날밤을 새울 때가 있어. 걱정이 밀려오기 때문이지.”
1996년 흥행에 성공한 영화 ‘트위스터’에 대해 당시 영화평론가들은 토네이도의 동시다발적 발생에 비현실적인 영화적 표현이 가미된 것으로 평가하였다. 하지만 올해 4월 오클라호마 인근에서 발생한 100여 개의 토네이도는 영화 ‘트위스터’를 작금의 현실을 전혀 담아내지 못한 매우 철 지난 영화로 만들어 버렸다. 북반구 여름의 고점을 지나고 있는 지금 피에르험버트 교수의 한숨과 걱정이 과장이 아닌 현실로 우리 곁에 바로 다가온 것이다. 이제 지구온난화와 극한 이상기후 현상은 우리가 직면한 현실의 무게이자, 변화의 심각성을 무시하지 말라는 단호한 비상 경고이다. 온난화의 진행을 막기 위한 국제적인 협력이 선행적이고 즉각적으로 이루어져야 함은 물론, 각국의 재난관리 시스템 강화를 통한 체계적인 대비가 반드시, 그리고 매우 절실히 필요한 때이다.
2024-07-23 [18: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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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소영의 법의 창] 반(反)헌법에 퇴색된 제헌절
헌법이 대중화되었다. 그만큼 헌법이 국민들 가까이서 체감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예상하지 못한 지점에서 헌법이 등장하는 시대이기도 하다. 그래서 헌법적 판단과 해석을 필요로 하는 일이 도처에서 등장하곤 한다. 그런 헌법이 17일로 일흔여섯 번째 탄생일을 맞았다.
하지만 제헌절에 마음이 무겁다. 나라의 경사를 기리는 5대 국경일(삼일절·제헌절·광복절·개천절·한글날) 중 2008년부터 제헌절만이 공휴일에서 제외된 것 때문만은 아니다. 헌법 제정을 축하하고 후손들의 제헌 정신 계승 의미를 이어 가기 위해 제헌절의 공휴일 재지정을 요구하는 목소리도 적잖고, 지난달에는 공휴일에 관한 법률 개정안이 발의되기도 했으니까.
제헌절을 맞은 헌법학자의 마음을 무겁게 만든 건, 우리 헌정 사상 요즘처럼 헌법의 근본 이념과 기본 원리가 심각하게 퇴색된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한 대한민국 헌법의 제정권자들은 시대가 흘러도 나라의 근본을 바탕으로 이어 가야 하는 헌법 이념과 원리를 1948년 7월 17일 선언했다. 우리 헌법이 지향하는 근본 가치는 인간의 존엄성 존중·기본권 보장·국민주권 원리·자유민주주의·법치주의·시장경제 원리 등을 핵심으로 한다.
국민주권은 존엄한 국민이 나라의 주인이라는 것이고, 그래서 주인의 위임을 받은 한시적인 국가권력은 국민의 기본권을 실현하기 위해서만 위임받은 권력을 행사해야 한다. 선출된 권력이 민주적 정당성을 가졌어도 헌법적 정당성에 어긋나는 권력 행사를 하면 안 되는 이유다.
선거를 통해 구성된 대의기관인 국회는 필연적으로 다수와 소수의 정치 세력이 대립하는 구도가 될 수밖에 없다. 다수결 원리와 소수의 보호는 대의민주주의를 기능하게 하는 쌍두마차다. 다수의 소수 보호는 민주주의 가치이기도 하다. 대의민주주의는 양자 간 타협과 절충을 통해서만 실현될 수 있다. 그래서 요즘 국회가 보여 주고 있는 모습, 다수결 원리만을 앞세워 타협과 절충을 무시하며 소수를 배제하는 건 사이비 대의민주주의다. 대의기관이 대의민주주의를 유린하는 이 상황을 뭐라 해야 하나. 22대 총선에서 야당은 182석의 다수가 되었지만, 여야 간의 지역구와 비례대표 득표율은 큰 차이가 없었다. 주권자가 디자인한 이 숫자 사이의 숨은 함수의 의미를 생각해야 한다. 견제와 균형이 작동하지 않으면 법치도 작동할 수 없다.
그뿐인가. 우리 헌법은 사회의 다양성을 포용하지만 평등 아래 자유를 희생시키거나 참여민주주의의 이름으로 대의민주주의를 말살하는 것까지 허용하지는 않는다. 대의제의 약점을 보완하고 극복하는 것이 참여민주주의다. 국민의 정치적 의사 표현과 국정에 대한 투입(Input)이 최대한 보장된다 하더라도, 헌법의 근본 이념과 기본 원리를 존중하는 범위 내에서만 허용된다. 때문에 합법과 민주주의로 포장한 극단적 열성 지지자들로 인한 민주주의 훼손은 허용될 수 없다. 민주주의는 상호 관용과 자제라는 두 규범적 가치를 필수 요건으로 하기 때문이다.
또다시 개헌이 언급되고 있다. 이즈음 헌정 현실의 모든 모순과 폐단이 헌법에 기인한 것인가. 그건 아니다. 물론 우리 헌법이 완전무결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수백 년의 헌법 역사를 가진 나라들이 제도와 운영의 정합성을 찾아왔던 것과 비교해 보면, 우리는 제도보다 운영의 문제가 컸다. 그래서 헌법 궤도를 이탈하지 않는 운영을 위한 보완적 개헌은 고민할 필요가 있다.
우선 국가 운영 시스템을 정비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대통령 인사권에 대한 제어 장치의 도입이나 국회의원의 불체포특권 폐지, 심지어 공직자에게는 유죄추정 원칙을 더 엄격히 적용하는 선진국의 예를 고려해 볼 필요가 있다. 또 헌법 재정 조항에 국가 부채 한계를 정해둔 나라들처럼, 우리 헌법에도 재정준칙 규정을 신설해서 퍼주기 포퓰리즘 정책을 방지할 필요가 있다. 그들만의 정쟁으로 국민을 잊은 국회가 국민을 위한 정부의 중요 정책을 발목 잡지 않도록, 국민 생활에 직접적이고 중대한 영향을 미치는 중요 정책은 대통령이 국민투표에 부쳐서 국민의 뜻으로 시행될 수 있게 하는 개헌 방안도 생각해 볼 만하다.
주권자가 선출해 준 현재의 권력들이 헌법을 정면으로 파괴하지는 않고 있다. 그런데 살펴보면 주권자인 우리들이 알아채지 못하는 사이 헌법의 지표가 흐물흐물해지고 있다. 소위 두더지식 헌법 파괴라 할 만하다. 선출된 권력이 국민의 뜻을 무시하고 이렇게 반헌법적인 정치 행태를 계속한다면, 주권자는 최후의 수단을 선택해야 하는 것인지 고민할 수밖에 없다. 이런 고민을 해야 하는 대한민국 주권자의 모습에 제76회 제헌절의 비애가 스며 있다. 퇴색된 제헌절의 의미를 누가 어떻게 되살려야 하는가.
2024-07-16 [17: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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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승현의 남북 MZ] 대남 확성기·대북 확성기의 추억
필자는 비무장지대(DMZ)에서 북측 심리전 방송 요원이자 서부전선 내 방송국 책임조장으로 근무하다가 휴전선을 통해 한국으로 왔다. 당시는 비무장지대를 중심으로 남측의 대북 확성기와 북측의 대남 확성기 공세가 끄트머리로 치닫던 시기라 최전방 확성기 방송은 군사적 긴장 고조를 유발해 왔다. 남북은 여러 심리전 수단 중에서도 각자 확성기 방송에 집중하고 있었는데 전방에 설치된 확성기를 통해 체제의 우월성을 직접 전파할 수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2000년대 초까지 남북은 전 휴전선 일대에 800여 개의 확성기 스피커를 운용하고 있었고, 야간에도 환히 볼 수 있는 선전용 전광판과 입간판을 남북이 각각 100여 개와 200여 개씩 설치해 심리전을 진행해 왔다. 한국전쟁 휴전 이후 반세기 넘도록 군사분계선(MDL) 지역에서 한국보다 더 공세적인 심리전을 전개하던 북한이 주춤거리기 시작했던 것은 소련 및 동유럽 사회주의 붕괴 이후 고립의 길로 접어들면서다. 체제 경쟁에서 열세를 확인하면서 북한 사회의 우월성을 선전해 봐야 의미 없는 울림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 시점이기도 했다. 설상가상으로 전력난과 장비난으로 대남 확성기 방송 시간은 하루 15시간에서 5시간으로 줄어든 반면 대북 확성기는 하루 10~15시간 증가했고, 공세적이었던 대남 확성기 방송은 대북 확성기를 방어하는 수세적 위치로 전환했다.
필자가 북측 비무장지대에 있는 방송국에 배치되었을 때 이미 방송국 명칭이 ‘제압방송’으로 바뀌었다. 제압방송은 대북 확성기 방송 내용의 차단을 목표로 대북 확성기가 진행되면 대남 확성기의 자체 출력을 최대로 높여 남측 방송의 내용과 메시지를 무력화시키는 맞불 방송으로 운용됐다. 하지만 전력이 제대로 들어오지 않고 방송 장비 부품도 원활하게 조달되지 않으면서 비무장지대의 북한군은 남쪽의 일방적인 방송을 속수무책으로 들어야만 했다. 어찌 보면 좁은 DMZ 안에서 남북의 확성기 소음으로 노이로제에 걸릴 지경인 군인들 처지에서는 한쪽의 고출력 스피커만 중단되어도 반가운 일이다.
기본적으로 전방에 설치된 대북 확성기를 통한 대북 방송은 대한민국 체제의 우월성을 선전하는 내용으로 진행한다. 북한 체제를 고발하는 내용에는 북한 정권의 독재성과 인권침해, 경제적 실패 등이 포함돼 있고 북한군의 사기 저하를 위해 한국의 경제 발전과 생활 수준 등과 함께 국내외 뉴스와 최신 가요, 날씨 등도 내보낸다. 또한, 한국에 와 있는 탈북자들의 현황과 탈북 방법, 탈북 이후 남한에서의 생활에 대한 정보를 제공했는데 DMZ 내 북한군에게는 휴전선을 통해 한국으로 간 사례에 관심이 높다. 하지만 어찌 된 일인지 당시에는 휴전선 탈북 군인에 관한 방송 내용에는 한국에서의 정착 부분만은 쏙 빠져 있었다. 그 이유는 일반 탈북자와 다르게 휴전선을 통한 탈북 사례가 많지 않을 뿐더러 한국에서 성공 사례도 극히 드물기 때문으로 보인다.
그동안 대북 확성기가 북한군의 귀순 결심에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는 홍보와는 다르게 대북 확성기로 인한 귀순 사례는 드문 것으로 밝혀졌다. 대북 확성기가 공세적으로 진행되는 시기에 귀순한 사례보다는 방송 중단 후 귀순한 군인이 대부분이란 사실이 그 방증이다. 하지만 이는 과거 이야기일 수 있다. 장마당과 개인주의 환경에서 성장한 현재의 북한군에게 북한 체제의 취약점과 한국 사회의 발전상은 이제는 ‘정보’를 넘어선 ‘사실’에 가깝기 때문이다. 다만 심리전에서도 신뢰는 중요하다. 북한의 오물 풍선과 확성기 방송 문제로 소란스러울 무렵 알고 지내던 한 예비역 장군이 이럴 때 휴전선 귀순자들이 대북 확성기의 위력에 대해 한마디만 해 주면 얼마나 좋겠냐는 푸념을 한 적이 있다. 몇 명 안 되는 휴전선 귀순자들이 침묵을 지키는 것은 그럴 만한 이유가 있어서일 거라고 말해줬지만 사실 북한군에게 한국의 발전상만큼이나마 중요한 것이 한국을 선택했을 때 이곳에서의 삶에 관한 부분일 것이다. 그런 면에서 단순한 정보 전달보다는 한국을 선택한 후 삶의 질이 향후 심리전의 중요한 척도가 될 수 있다.
현재 대남 확성기는 기능을 상실했지만, 대북 확성기는 북한 정권의 ‘아킬레스건’으로 평가받는다. 비무장지대 30㎞ 안에 장마당 세대로 불리는 북한군 70여만 명이 복무 중인데 북한 지도부는 이들이 대북 확성기에 노출된다면 북한 체제 근간이 흔들릴 수 있다고 판단하고 있는 모양새다. 아직도 북한군의 복무 기간이 10년으로 긴 만큼 심리전은 연쇄적 탈북뿐만 아니라 전역 후 전국으로 흩어진 이들에 의해 북한 내부에 영향을 미칠 치명적인 무기가 될 수 있다. 남북의 갈등 상황에 따라 중단과 재개, 반복의 역사를 지속해 온 남북 ‘확성기 전쟁’은 대남 확성기의 몰락과 대북 확성기의 강력한 카드 앞에 또 다른 파란과 도전적인 환경을 예고하고 있다.
2024-07-09 [18: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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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순연의 도시 공감] 골목, 다시 상인들이 살아나야 한다
7월 여름의 시작으로 우리는 여행계획을 세운다. 도시를 찾거나 한적한 공간이 어디 있는지 키워드를 검색하고 시장을 방문하고 골목 맛집을 찾아다니면서 이미 휴가를 즐기는 상상을 하게 된다. 부산에 있으니, 다른 지역의 지인들이 오랜만에 부산에 오면 연락이 온다. 대부분 유명한 관광지가 아닌 지역민들만 아는 특별한 장소를 묻는다.
하지만, 부산의 현실은 외부의 관심과 다르게 지역 자영업자 수가 2024년 1분기에 31만 7000명으로 전년 동기 대비 4만 명(11.3%)이나 줄었다. 옛 번화가였던 대학가 상권, 원도심 상권은 이미 공실과 임대 표지판이 흔한 풍경이 된 상황이다. 이러다 보니 부산은 상인들이 활동하기에 힘든 도시가 되고 있다.
그럼에도 멈추지 말고 변화를 모색해야 한다. 좀 더 좁은 골목에 주목하였으면 한다. 과거 유명한 지역마다 있는 ‘~리단길’보다 북적이다가 쇠퇴하거나, ‘둥지 내몰림’ 현상을 경험했지만 생존력과 다양성을 품고 있는 골목상권은 지금까지도 버티고 있다. 대표적인 도시가 공주이다. 충남 공주는 제민천을 중심으로 비어있는 옛 하숙집들을 활용하며 새로운 골목상권을 형성하여 공주만의 라이프스타일형 도시로 탈바꿈하고 있다. ‘곡물집’이라는 가게는 일반적인 커피보다는 콩과 관련된 다양한 상품, 재배 농부들의 커뮤니티 프로그램과 함께 다양한 식 경험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관심 있는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를 않는다.
‘고마다락’이라는 가게는 헌책도 팔지만 집수리 프로그램을 비롯하여 자체 프로그램을 기획하고 지역의 주민들이 연극, 전시, 요가 등 다양한 공간으로 빌려 쓸 수 있게 하는 등 커뮤니티형 공간을 운영 중이다. 작은 가게를 중심으로 좁지만 생활형 복합문화공간으로 활용하고 있다. 또한 하나의 가게에서 다양한 시간 단위의 활동을 하면서 재방문율을 높이고 방문객들에게 공간을 활용할 수 있는 경험을 제공하고 있다. 이 중심에 상인들이 있고, 상인들의 아이디어가 모여서 골목이 활성화되는 것이다.
사실 골목은 건물 사이나 뒷면에 형성된 길을 가리킨다. 폭이 좁아 소수의 보행자만 통행할 수 있는 공간으로 큰길에서 갈라져 나온 작은 길을 통틀어 이른다. 골목은 보행권이 확보돼 있어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주변 건축물과 자연을 관찰하고, 교감할 수 있는 장소이다. 우연히 마주친 작은 가게들을 발견하는 즐거움과 가게에 들어서서 한참을 상품을 들여다보고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여유를 즐길 수 있는 장소이며 담장 너머 능소화나 수국이 피어있는 것을 슬쩍 볼 수 있는 장소이기도 하다.
골목을 중심으로 하는 특별한 생활형 골목상권은 부산에서도 곳곳에 존재한다. 상인들 대부분이 짧게는 10년, 길게는 30년 정도 골목을 중심으로 활동을 해온 분들이다. 상인들끼리는 사장님보다는 ‘형님 동생’이란 호칭에 더 익숙해져 있다. 이런 분들이 서로 협력하는 모델을 만들고 있다.
‘온천천 카페거리’의 경우 사계절 방문을 유도하는 방법을 고민하면서 포토존을 만들고 카페 상인들이 과자샌드 쿠키류를 만들어 공통 판매를 계획하고 있다. ‘수비벡스코’ 골목상권은 ‘면옥향천’ 주변 상인들 중심으로 벡스코 행사와 연결하여 골목상권을 홍보한다. 또, 방문객들에게 단발적인 행사 대신에 골목 상인들이 지속적으로 시즌 위크를 기획하여 참여하고 있다. 사상 ‘가로공원’ 상인들은 젊은 사장들 중심으로 인근 신라대와 협력하고 공동 배달 서비스를 통해 상권을 지키는 활동을 진행 중이다. 연제구의 ‘연동되는 골목상인회’는 지난해에 이어 팝업 스토어를 기획하고 있다.
결국 지역 특성을 잘 아는 주민이자 상인들을 중심으로 장소마다 다른 특색 있는 골목상권을 만드는 것이다. 이런 골목상권의 특징은 커뮤니티가 살아있다는 것이다. 오래도록 골목을 사이에 두고 이야기해 온 이웃들이다 보니, 그들의 눈에는 조급함을 찾아볼 수 없다. 그리고 협력해야만 한다는 것 또한 너무나 잘 알고 있어 여유를 배울 수 있다.
골목의 특성이 좀 더 살아나면 어떤 상권은 창업모델골목, 365일축제형 골목이 되고, 공주처럼 작은 단위의 복합문화공간들이 만들어질 것으로 기대된다. 정부 지원이 있건 없건 골목 상인들은 자발적으로 골목을 살릴 방법을 고민하고 실천력을 갖고 있다. 그래서 상인들만의 방식으로 골목상권이 움직일 것으로 기대된다.
부산이 이런 공간을 중심으로 도시와 도시민 간의 관계, 도시의 특성에 따른 다양한 삶의 방식으로부터 활력을 찾았으면 한다. 골목에서 활동하는 사람들 즉, 상인들로부터 도시의 생명력과 매력이 끊임없이 분출되기를 희망한다.
2024-07-02 [18: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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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인권의 핵인싸] 기초가 무너지고 있다
광속에 가깝게 가속된 두 개의 핵이 서로 충돌하면 순간적으로 엄청난 에너지가 ‘수천조 분의 1㎥’에 집중된다. 그 에너지는 순식간에 양성자보다 훨씬 무거운 입자들을 포함한 수많은 소립자들을 생성시키고, ‘백만 분의 1초’도 지나기 전에 모두 분열하여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양성자·중성자·전자를 비롯한 여러 중간자가 되어 사방으로 퍼져 날아간다. 이는 우주 최초에 일어난 일과 거의 같을 것으로 추정되기 때문에, 충돌 시 생성된 입자들의 질량과 속도 분포 등 각종 물리량들을 통하여 우주 최초의 물질 생성과 상태를 연구할 수 있다.
그래서 생성된 입자들의 물리량을 측정하기 위해서 이 충돌 지점(입자들의 생성 지점)은 수많은 검출기들로 둘러싸여 있다. 이 검출기들은 통과한 입자들의 궤적과 시간, 에너지를 측정한다. 마치 엑스선이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인화 필름에 투과된 흔적을 남기듯 여러 종류의 입자들은 검출기에 흔적을 남긴다. 입자들이 통과하면서 남긴 흔적을 우리가 알아볼 수 있는 신호로 잡아내는 일은 결코 간단치 않다. 오늘날 스마트폰으로 아무렇지도 않게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디지털카메라도 결국 이런 검출기들이 개발된 과정을 통해서 나온 것이다. 빛의 밝기에만 민감했던 흑백필름에서부터 시작하여, 마침내 다양한 색깔을 재현해 낸 디지털 영상에 이르기까지, 엑스선에 민감한 필름에서부터 여러 가지 입자들의 에너지를 검출해 내기까지, 연구와 개발의 엄청난 시행착오를 피할 수 없었다.
필름과 검출 센서에 나타난 정보들을 노이즈와 중요 정보로 구별하여, 각 픽셀 단위의 디지털 정보로 컴퓨터 저장장치에 기록한다. 이렇게 기록된 엄청난 양의 정보들을 분석하여 마침내 생성된 입자들의 궤적과 속도, 질량을 알아낸다. 생성된 입자들의 종류와 양, 각 입자들의 속도 분포와 상관관계를 통해 그 입자들이 생성될 당시의 온도와 같은 물리적 환경을 추적한다. 측정된 입자들의 질량 조합을 통하여 이 입자들이 어떤 다른 입자로부터 붕괴한 결과물이라는 것을 밝혀내고, 마침내 충돌 순간부터 여러 입자들로 측정되기까지의 시나리오를 구성해 낸다.
이 실험과 데이터들은 몇 개의 연구실과 몇 명의 연구자들로는 소화해 낼 수 없는 규모로, 전 세계의 검출기 및 데이터 전문가 수천 명을 필요로 한다. 이들이 실험 데이터와 의견의 교환을 위해서 월드와이드웹(WWW)을 개발했으며, 스마트폰의 터치패드를 비롯한 각종 신물질(섬광체, 반도체) 센서는 물론, 오늘날 컴퓨터의 새로운 패러다임이 된 클라우드와 그리드 컴퓨팅의 시대를 열었다.
우주 최초의 물질 상태를 연구하는 일은 이처럼 우리의 일상과 직접적인 연관은 없을지 모르지만 결과적으로 현재 우리의 일상을 채우고 있는 생각과 각종 문명의 이기들은 물론 인류가 아직까지 경험해 보지 못한 새로운 패러다임을 개척하고 있다. 오늘날 전 세계적인 국가경쟁력의 핵심이 된 반도체와 양자기술, 기계학습과 인공지능 등 모든 기술은 이같이 거의 하나도 빠짐없이 기초과학의 부산물로 얻어진 것들이다. 기초과학자들이 연구개발한 각 부산물들에 특허권을 걸었으면 어떤 일이 일어났을까. 새삼 부자가 되는 일이 과학자들의 바람이었다면, 인류의 역사는 어찌 됐을까.
나는 물리학자다. 물리학 중에서도 우주 최초의 물질상태를 연구하는 기초과학자다. 운 좋게도 사이언스와 네이처 같은 논문에 공동저자로 참여한 덕분에 나름 언론 등에 보도된 적이 있지만, 인터뷰에서 대뜸 이 연구가 우리의 일상생활에 어떤 영향을 미칠 것인지에 대한 질문을 받을 때면 무척 곤혹스러워지곤 한다. 우주 최초의 물질상태가 어떻든 도대체 우리의 일상생활과 무슨 상관이 있단 말인가. 하지만 그 연구 자체로 얼마나 엄청난 일인가. 감히 우리가 우주 최초를 이해하려 들고 있다니. 덕분에 우리는 인류의 새로운 지평을 개척하고 있지 않은가.
기초과학을 바탕으로 응용학문이 있고, 응용학문을 바탕으로 기술과 경제가 피어난다. 우리의 일상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는 완제품을 얻기 위해서는 투자된 기계설비와 인력을 바탕으로 이 제품을 대량생산하되, 이 기계설비와 이 제품에 대한 아이디어는 이보다 훨씬 앞서 수행된 수많은 연구와 개발이라는 인고의 시간을 거쳐야 한다. 바로 이 연구와 개발의 근본 동인이 되는 것이 ‘기초’다. 언어가 없이는 생각을 할 수 없고, 기본적인 원리에 대한 이해 없이는 연구를 할 수 없으며, 원리가 작동하는 이유와 근원적인 질문에 대한 도전 없이는 새로운 것이 있을 수 없다. 나무를 심고 물과 양분을 주어 살뜰히 가꾸는 과정을 모두 방기한 채, 정작 국가 연구개발(R&D) 예산은 축소시켜 기초학문이 고사되고 있는 마당에, 첨단학과를 새로 만들고 증원시킨단다. 거위의 배를 갈라 황금알만 꺼내겠다는 발상에 도대체 무슨 말을 어디서부터 어떻게 해야 할지 난감한 시국이다. 기초가 없이는 미래도 없다.
2024-06-25 [18: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