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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감] 비틀어질 테다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이 신기할 때가 있었다. 좋고 싫음의 구분만으로 뭐든 맛보고, 만지고, 느껴보려 했었다. 처음 접해본다는 것만으로도, 그 대수롭지 않은 체험에도 기뻐하고 자랑스러워했을 때가 있었다. 세상 모든 것이 낯설어 빛났던 유년 시절이다.
낯섦의 이면을 알게 되는 두 번째 시기가 있다. 무턱대고 달려들다 상처받고 위험에 빠지기도 했었다. 자의든 타의든 모든 낯선 것들이 도전으로 덮쳐오고, 때로는 성공하고 때로는 실패했었다. 그런 경험으로 무모함이 뭔지 알게도 되었다. 조금 창피할 뿐인 실패를 세상이 무너지는 실패로 받아들여 미래를 속단하기도 했었다. 하지만 낯섦은 여전히 나를 매혹하는 미지의 영역이었다. 이른바 소년과 청년의 시절이었다.
다음에는 협상의 시기라고 이름 붙이겠다. 낯섦에는 감히 범접할 수 없는 두려운 영역이 있으며 동시에 엄청난 가능성이 깃들어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가능성을 얻기 위해선 그만한 대가가 필요하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그 이중성을 알기에, 감당할 수 있는 만큼의 낯섦만 즐겼다.
어쩌다 용기를 내어 낯섦에 도전해 보기도 한다. 하지만 도전이 반복될수록 낯섦에 치르는 비용은 줄어들었다. 오히려 낯섦의 대가로 빈털터리가 될까 싶어 몸을 사렸다. 대신에 책을 읽거나 여행을 떠나고, 새로운 취미에 눈을 돌리기도 했다. 가끔은, 가진 걸 포기하고 미지의 공간에 몸을 던지는 사람을 부러워하기도 했다. 하지만 내심으론 낯섦의 가능성은 랜덤 박스처럼 운이 따라야 한다고 믿는다.
그다음 시기는 잘 모르겠다. 뭔가 다음 단계가 있을 것 같다. 실토하자면, 아무래도 내가 다음 단계에 발을 디딘 것 같다. 일단, 웬만한 것은 다 심드렁하다. 주말에 낄낄거리며 봤던 코미디 프로가 재미없고, 가슴 졸이는 공포 영화를 보고도 주인공은 결국 살아남을 거라며 콧방귀를 뀐다. 세상엔 새로운 것도 특별한 것도 없으며, 결국은 힘의 논리이며, 결국은 원자들의 집합일 뿐이라는 괴상한 논리를 중얼거리기도 한다.
변명하자면, 내 탓만은 아니다. 각종 매체에선 앞다투어 세계 곳곳의 명소와 이색 지역을 소개한다. 전문 정보들이 떠먹여 주듯 넘실거리고, 온갖 극한 직업과 기인, 지구촌 소식과 사건 사고가 눈만 뜨면 보인다. 이런 걸 매일 접하다 보니 가보지 않아도 가본 것 같고 먹어보지 않아도 배가 부르다.
한데, 이런 익숙함이 의외로 고약했다. 마치, 의욕, 식욕 다 잃은 무기력증 환자가 된 기분이다. 나도 한때는 오지를 탐험하고, 세상 끝까지 걸어가 그곳의 별을 보고 싶었었다. 이득을 얻고자 함도, 철없는 호승심도 아니었다. 그 순수한 호기심과 욕구는 분명 삶의 열정이었다. 그러고 보니 다음 단계는 낯섦의 소중함을 새삼 깨닫는 시기인 것 같다.
그렇다고 내가 새삼스럽게 낯섦을 찾아다녀야 하나? 찾는다고 해서 그 낯섦을 감당이나 할 수 있을까? 심드렁해서 더 삐딱해진 눈으로 둘러보니 그럴듯한 낯섦이 바로 코앞에 있었다. 그러니까 늘 보는 것이지만, 거꾸로 돌리거나 비틀어보면 전혀 다르게 보이는 것들 말이다.
갯바위만 보는 것이 아니라, 갯바위 바닥 틈에 우글거리는 고둥과 게를 발견하는 것처럼, 길 걷는 사람 뒷모습만 보는 것이 아니라, 걸을 때마다 보였다 사라지는 신발 바닥 무늬를 보는 것처럼, 눈으로 보고도 미처 몰랐던 광경이 주변에 널려 있었다. 세상을 꼭 정면으로 보라는 법이 있나? 돌려서 보고, 비틀어서 보니 낯선 것이 지천이었다. 까짓것 어디 한번 비틀어서 보자. 어차피, 죽음이라는 최고의 낯섦을 겪기까지 끊임없이 낯섦을 즐겨야 할 운명이 아닌가.
2024-10-10 [17: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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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감] 이상한 시험공부
며칠 전 아이가 중학교에서의 공식적인 첫 시험을 치렀다. 시험을 치른 것은 아이인데 공부는 내가 더 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국어의 품사 분류 연습문제를 만들고(소설을 쓰는 사람으로서 정말이지 그런 식으로 소설을 읽게 하고 싶지는 않았지만), 김유정 소설의 시점과 서술자의 특징과 대사에 담긴 인물의 심리 같은 것을 제대로 숙지하고 있는지 확인했다. 자기 주도적 학습이 중요하다는 것을 나도 물론 잘 알고 있다. 말 그대로 사교육과 타인에게 의존하지 않고 주체적으로 목표를 세우고 학습하는 것이 핵심인데, 아이러니하게도 그 능력을 키우기 위한 사교육 시장이 오히려 늘어났다는 소문도 들었다. 그러나 혈육에 대한 본능적 편애와 이상적 기대를 접어두고 냉철한 이성으로 판단했을 때, 내 아이는 아직 자기 주도적 학습 능력이 부족했고, 여전히 친구들과 노는 게 제일 좋다는 천진난만으로 무장하고 있었다.
다만 발등에 불이 떨어졌을 뿐이다. 나도 평소 공부에 대해 그리 닦달하는 편은 아니었지만 당장 시험이 코앞인데 아이 스스로 메타 인지가 생길 때까지 기다려줄 대범함이나 인내심까지는 없었다. 이상과 현실의 괴리감 속에서 엄마 주도적 학습이라도 시켜야 했다. 물질적 보상 같은 외재적 동기보다 과제 자체에 대한 흥미나 성취감 같은 내재적 동기 유발이 더욱 효과적이라는 교육학 이론들이 내 머릿속에 잔뜩 있었지만, 형이상학적 지식 같은 건 고이 접어두고 용돈이나 선물이라도 걸어야 했다.
국어 과목이야 전공이니 어렵지 않았다. 하지만 다른 과목들을 봐주려면 나도 예습이 필요했다. 내 일을 끝내놓고 중학교 공부까지 하려니 피곤한 마음이 들기도 했지만, 30년 전쯤 했던 공부를 배경지식이 달라진 상태에서 다시 해보니 은근한 재미도 있었다. 아이에게 필요한 내재적 동기는 오히려 내게 촉발된 것 같았다. 이런 식이라면 몇 년 뒤엔 수능을 다시 쳐봐도 되겠다는 쓸데없는 용기까지 생겼다.
과학 시험 범위는 힘에 관련된 단원이었다. 문제집을 아이에게 풀게 하기 전에 내가 먼저 내용 확인차 읽어 보았다. 물체의 모양이나 운동 방향, 빠르기를 변하게 하는 원인과 원리에 대해 이해하고 응용문제를 풀어야 했다. 문제집의 개념 설명 페이지에 과학에서 정의하는 힘에 대해 나와 있었고, 그 옆에는 작은 글씨로 참고 사항이 적혀 있었다. ‘과학에서의 힘이 아닌 예:아는 것이 힘이다. 강아지 키우기가 힘들다. 식사를 하고 나니 힘이 난다. 선생님 말씀이 힘이 되었다.’ 뭐 이렇게 당연한 걸 적어놓았나 싶어서 처음엔 피식 웃었다가, 나중에는 힘이란 무엇인가 하는 생각에 빠져들었다. 나는 어떤 종류의 힘을 얼마만큼이나 가지고 있을까 하는 생각도. 힘은 능력이기도 하고 자신감이나 용기이기도 하고 도움이나 의지처이기도 할 것인데 나는 과연 내면에 힘이 있는 사람일까, 누군가에게 그 힘을 나눠줄 수 있는 사람일까, 그런 생각들.
문제집의 설명에 따르면 중력은 끌어당기는 힘이고 탄성력은 되돌아가려는 힘이며 부력은 밀어 올리는 힘이다. 그것은 물리적인 힘을 설명한 과학의 언어였지만 실은 우리의 마음에도 끌어당기는 힘과 되돌아가는 힘과 밀어 올려주는 힘 같은 것이 필요하겠다는 생각을 했다. 이런저런 상념에 빠져들었던 나는 다시금 깨닫게 되었다. 내가 학창 시절에 나름대로 공부를 열심히 한 것 같으면서도 기대만큼 좋은 성적을 받지는 못했던 이유를. 책상 앞에 계속 앉아서 교과서를 보고 있긴 했지만 의식의 흐름은 자주 그런 식으로 흘러갔던 것이다. 아무래도 수능을 다시 치는 건 곤란하겠다는 결론을 내리며, 아이에게 문제집을 내밀었다. 아이가 입을 앙다물고 문제를 푸는 동안 여전히 내 머릿속에는 내가 가진 힘과 타인이 가진 힘, 그리고 우리가 나눌 수 있는 힘에 대한 생각들이 무수히 가지를 치며 뻗어나가고 있었다.
2024-10-03 [18: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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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감] 옛 텔레비전드라마를 다시 보다
일이 있어 30년도 더 지난 텔레비전드라마를 보게 되었다. 나의 의지는 무관하게 보게 된 것인데, 가만히 생각해 보니 1991년 대입학력고사를 볼 즈음에 시작한 드라마였다. 나는 이듬해 대학생이 되었고 대학 생활 틈틈이 보는 둥 마는 둥 그렇게 흘깃흘깃 넘겨 보아야 했던 드라마이기도 했다.
이 드라마는 1997년 중국으로 수출되었고 큰 인기를 끌었다. 당시 신문은 시청 가능한 중국 인구 9억 명 중 4.2%에 해당하는 3900만 명이 이 드라마를 보았다고 전하고 있다. 우리로서는 의외였고, 중국으로서도 신기한 일이었다. 한국 신문도 이 드라마의 성과에 자랑스럽다는 듯한 인상을 내보이곤 했다. 그래도 그때는 그냥 의외였고, 별일에 불과했지만, 훗날 이 드라마의 파장은 한류의 시작을 알리는 일종의 예광탄으로 자리 매김되었다. 그러자 이 드라마는 연구 논문 속에서 살아나기 시작했고, 각종 한류 서적에 그 이름을 올릴 수 있었다.
평소 나 역시 이 드라마가 한국 내에서 상당한 인기를 끌었을 뿐만 아니라 드라마 수출 역사에서도 중요한 이정표로 남는다는 주장을 덧붙이곤 했다. 하지만 정작 55부작에 이르는 이 드라마를 다시 볼 엄두는 내지 못하고 있었다. 마침 추석 연휴는 길었고, 더 이상 미룰 수 없었기에, 용기를 내서 그 시작을 다시 경험하기로 했다. 긴 연휴도 그 끝을 드러내면서 당연하다는 듯 일상이 기다리고 있었지만, 드라마 시청은 이어졌다. 그만큼 재미있었다. 그 시절 그 드라마와 함께 떠났던 MT도 생각났고, 한껏 비웃으며 이 작품을 은근히 폄하했던 기억도 드문드문 떠올랐다.
개인적인 추억을 논외로 친다고 해도, 이 드라마가 가진 매력을 별거 아닌 것으로 치부할 수는 없어 보인다. 이 드라마에는 삶에 대한 명료한 발언이 담겨 있었다. 과거 재래식 ‘한국인’의 삶과 미래 ‘도시인’의 삶이 고루 담겨 있었고, 지나가 잊힌 것에 대한 미련과 함께 새롭게 찾아올 미래에 대한 우려 역시 함께 담겨 있었다. 그래서 이 작품은 과거의 작품이기도 했지만, 현재의 작품도 될 수 있었다. 억지로 보지 않아도 될 정도로, 30년도 더 된 이 드라마 안에 지금-이 시대의 문제도 함께 담겨 있었다. 그리고 그 시간의 격차로 인해, 우리가 걸어왔던 지난 30년의 모습이 어쩌면 이 드라마의 깊이를 더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밤을 새기 시작했다. 55부작을 다 보기 위해서는 며칠을 더 보내야 할지도 몰랐지만, 상관하지 않기로 했다. 작품을 보고 써야 할 연구 논문과 저술도 잠시 잊기로 했다. 그 시절, 그때, 우리들이 보고 그 세대의 또 다른 우리들이 구상했던 이 작품은 확실히 지금 작품과 달랐다. 지금처럼 세련되지는 않았지만, 분명한 어조로 그 시절과 그 이후의 시절, 그리고 그 이전의 삶에 대해 이야기하려는 자세와 의지를 갖추고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의 삶에 대해 분명한 어조로 무언가를 주장하고자 하는 태도는 인상 깊지 않을 수 없었다. 수많은 사람의 서로 다른 기호를 맞추어야 했던 주말 연속극이 분명한 자기 목소리를 내고 있다는 사실은 충격일 수밖에 없었다. 그러자 한 가지 사실을 인정해야 했다. 사실 이 드라마는 중국인이 좋아한 이야기가 아니라, 중국인마저 좋아할 수밖에 없다는 이야기였던 셈이다.
한때 1980~1990년대 풍조가 유행한 적이 있었다. 유행에 둔감하기 때문에 지금도 그 풍조가 남아 있는지는 잘 모르겠으나, 그러한 유행이 필요했다면 나름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아마도 그것은 용기가 아니었을까. 신중함과 점잖음을 핑계로 지나치게 머뭇거리지 않고, 해야 할 것과 하고 싶은 것을 과감하게 실행할 수 있었던 용기는 그 시절 더욱 분명했던 것 같다. 그래서 지금 이 시점에서 그리운 것은 아니었을까. 문득, 오래된 옛날 텔레비전드라마를 다시 보다가 든 생각이었다.
2024-09-26 [18: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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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감] 주막(酒幕)
집사람은 안마기에 발을 넣고 소파에서 쉬고 있었다. 항암이 얼마나 지독한 것인지, 집사람은 마치 전장(戰場)에서 거친 전투를 치르고 빈사 상태가 되어 집으로 돌아온 병사처럼 지쳐 있었다. 집사람의 코가 저렇게 길었었나 라고 생각할 만큼 코가 길어 보였으므로, 내게는 그런 집사람이 생소했다. 집사람은 광대뼈와 볼이 두툼해서 코가 작아 보이는 얼굴이었다. 항암 치료는 두툼하던 집사람을 마른나무 막대기처럼 만들어 놓았다. 앙상해진 어깨는 생명이 도망쳐 나간 흔적처럼 보였다.
밖에는 비가 내리고 있었다. 빗소리는 이야기꾼의 이야기 소리처럼 조곤조곤하게 들렸다. 창밖을 내다보던 집사람이 무언가 말을 했는데, 잘 듣지 못한 나는, 집사람이 요양병원으로 가야 할 시간이 되었다는 말을 한 것으로 생각했다. 나는 의중을 확인하기 위하여 집사람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집사람이 응시하고 있는 것은 창밖의 비였고, 마치 끝이 보이지 않는 미로 앞에 암담히 서 있는 사람의 얼굴이었다. 그 모습을 보자, 갑자기 슬픔과 언짢음, 그리고 가슴벽이 바늘로 찔린 듯한 지독한 아픔이 밀려왔다.
무슨 말을 했는지 묻고 있는 내 얼굴에, 그녀는 아주 조그맣게 말했다. “사람이 죽으면 어디로 가는 걸까요?” 항암 치료를 시작한 지가 2년이 넘었지만, 집사람은 단 한 번도 죽음을 입에 담은 적은 없었다. 그래서 그 말은 의외였다. 그렇지만, 그런 의외의 것이 우리에게도 다가올지 모른다. 나는 한 번도 생각해 보지 못한, 죽음으로 인한 이별을 생각했다.
사람들은 경험해 보지 않은 것들은 알 수가 없고, 그래서 경험 이외의 것들은 믿지 않는다. 그래서 우리는 대개 의문 속에서, 의문을 묻어 둔 채 그냥 살아간다. 죽음이 그런 것일 것이다. 정말 궁금하지만 경험할 수가 없으므로 어떤 것인지 궁금해하며 살아간다. 어릴 때, 평상에 누워 바라보던 하늘을 떠울렸다. 수많은 별들이 빛나는 보석처럼 뿌려져 있었다. 나는 어른이 되어서, 그 별들이 이 지구처럼 가없는 우주를 떠도는 또 다른 지구라는 것을 알았다.
“하늘에 수많은 별들이 있는 이유를 알아? 그곳은 전부 이 지구처럼, 사람의 실체(實體)인 영혼들이 저 끝없는 우주를 여행하다 쉬고 싶을 때 쉬어가는 곳이야. 사람의 영혼은 우주를 여행하는 나그네거든! 우리도 이 우주를 여행하는 나그네야. 우리는 어느 날 이 지구별을 지나다가, 마치 여행객이 쉬어갈 주막(酒幕)에 들리듯이 이 지구에서 행장을 푼 거야. 지구별에서는 사람의 옷을 입어야 하므로 우리는 각각 너와 내가 된 거야!”
“이 지구별에서 우리의 일생은 저 우주의 하룻밤과 같아. 그래서 너무 짧은 하룻밤인데, 우리는 이 짧은 밤에 긴 인생의 꿈을 꾸는 거지. 뜨거운 사랑을 하고, 미워도 하고, 배신도 해 보고, 의리 때문에 목숨을 버려보기도 하고, 가슴이 아려 녹아내리는 헤어짐의 아픔을 겪기도 하고…. 그리고 마침내 이 몸이 죽으면, 그때 우리의 실체인 영혼은 꿈을 깨는 거야! 그래서 우리 삶이 꿈일걸 알게 되지. 우리는 지금 꿈을 꾸면서도 꿈인 걸 몰라. 왜 그런지 알아? 이 인생의 꿈이 너무도 실감이 나거든!”
“우리가 지난밤 꿈을 꿀 때, 우리는 그것이 꿈인 줄 몰랐지만, 깨어보면 그것은 재미난 꿈이었지. 당신과 나는 지금까지 이 지구별에서 재미난 한편의 꿈을 꾼 거야! 이 꿈에서 깨어나면, 당신은 이번의 우리 인생에서 얻은 정서를 바탕으로, 다른 별에서, 그 주막에서 새 생활인 또 다른 꿈을 꾸게 될 거야. 그리고 우리가 함께한 이 삶은 다만 작은 이야깃거리가 될 거야.” 창밖에는 슬픔처럼 지독한 어둠이 찾아오고 있었다.
2024-09-19 [17: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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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감] 기억이 만든 기억
사람의 생각과 판단의 근간은 모두 기억이 아닐까 싶다. 당장 뭔가를 떠올려 봐도 그렇다. 어떤 모습, 대화, 단어, 현상, 뜬금없는 계획…. 무엇을 상상하든 과거의 기억을 토대로 떠올려진다. 아무 생각 없이 습관적으로 하는 행동도 결국은 오랫동안 쌓아온 기억의 결과가 아닌가. 그래서 개개인이 가진 기억은 삶의 방향을 정하기도 하고, 삶 자체의 증거가 되기도 한다.
까마득히 오래된 기억이 있다. 아마도 가장 오래된 기억일 것이다. 그래서 스틸사진처럼 순간의 장면만 떠오른다. 나는 엄마의 등에 업혀 있었고 막 잠에서 깨어나 눈을 떴다. 그때 보았던 것은 초가의 처마와 창이 뚫린 낮은 황토벽이었다. 그리고 벽 안쪽에서 소의 나지막한 울음을 들었다. 기억의 영상은 그것이 전부다. 하지만, 그 영상에는 또 다른 감각들, 이를테면 삭은 짚 더미 냄새와 뜨끈한 여물통에서 피어나는 증기가 뒤섞인 형언할 수 없는 냄새가 섞여 있었다.
내가 몇 살 때였는지는 모른다. 하지만 비슷한 시기의 정황으로 그곳이 외갓집의 어느 장소였음은 분명하다. 그래서 지금도 이끼 낀 시골의 오랜 담벼락을 보면 왠지 삭은 짚 더미 냄새가 느껴지기도 한다. 엄마의 친정, 즉 외갓집의 풍경은 내 유년의 기억에 크게 자리 잡고 있다. 나지막한 산 앞에 앉은 외갓집 앞에는 이삭을 피우기 시작하는 벼가 바다처럼 펼쳐져 있었다.
바람에 일렁이는 초록 물결은 구불구불 가로지른 개울둑에 막혀 되돌아오고, 그보다 더 까마득한 지평엔 기적을 울리며 나타나 어린 시선을 사로잡고 마는 동해남부선 기차의 행렬이 있었다. 어렸던 나는 외갓집 대청마루에 앉아 그것이 얼마나 오랫동안 내 기억의 바닥을 차지할지 모르고 마냥 바라보기만 했었다.
여름밤, 대나무 평상에서 외할머니 무릎을 베고 칭얼거리다가 문득, 숨 막힐 정도로 황홀한 밤하늘의 은하수를 목격했었다. 처음 보는 그 장관에 나는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나는 그런 은하수의 현기증을 두 번 다시 느끼지 못하리라는 것을 몰랐다. 그저 침묵으로 하늘의 끝과 끝을 더듬었었다.
기억의 단편은 뒤죽박죽이다. 바닷가에서 고둥을 줍다가 발견해 내 손바닥 위에 올린 성게의 보일 듯 말 듯 한 움직임. 그리고 따갑지도 간지럽지도 않은 아슬아슬한 손바닥의 느낌을 기억하고 있다. 무심코 휘둘렀던 내 잠자리채에 부딪혀 죽어 가던 제비의 까만 눈. 밤마실 가는 외할머니 따라 농로를 걷다가 내 옷에 앉은 반딧불이의 깜박이는 불빛. 그렇다. 그것들은 모두 일종의 신호였었다.
무엇을 뜻하는 신호인지는 나도 모른다. 하지만 그 신호에 따라 평범했던 사건이 전혀 다른 의미의 기억으로 변하기도 했었다. 또 그런 신호에 따라 불쾌했던 사건이 망각의 심연 속으로 가라앉기도 했다. 그래서 나는 나의 기억이 그다지 정확하지 않다는 것도 알고 있다. 기억은 언제나 기억을 만들어 내기 때문이다.
기억이 쉽지 않았던 만큼, 망각 또한 맘대로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다. 나쁜 기억은 지우려 문지를수록 더욱 선명해지고, 영원히 간직하고픈 기억은 나도 모르게 구멍이 숭숭 뚫린다. 기억이란 본디 그런 것이긴 하던데, 똑같이 체험하더라도 개인마다 다른 신호에 따라 다른 의미를 만들고 전혀 다른 기억으로 저장되는 것 또한 기억임을 깨닫는다.
그래서 나는 내가 가진 내면의 기억들이 궁금하다. 언제, 어떻게 나타나 지금 겪고 있는 사건에 의미를 부여하고, 현실을 채색해줄지 모르기 때문이다. 아무것도 모르는 나는 지금도 무심코 밤하늘을 올려다보고, 골목길 아래의 무성한 이끼에 눈길을 던지곤 한다. 그리고 늘, 초록의 물결을 그리워한다.
2024-09-12 [18: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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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감] 삶과 체험
예전에 ‘체험 삶의 현장’이라는 TV 프로그램이 있었다. 각종 노동 현장에 유명인들이 하루짜리 일꾼으로 투입되어 일을 하고 그날 받은 일당을 기부하여 불우이웃을 돕는 콘셉트였다. 평소 잘 모르고 있던 타인의 노동 현장을 들여다본다는 것, 몸으로 하는 일에 익숙지 않은 유명인들이 좌충우돌하며 일하는 장면을 지켜보는 것, 그리고 그날 번 돈을 어려운 이웃에게 기부함으로써 세상을 아름답게 만드는 데 일조하는 것. 시청자들의 관심을 끌 만한 요소는 충분했다.
그 프로그램의 하이라이트는 주인공이 받은 돈을 스튜디오로 들고나와 유니콘을 타고 공중으로 올라가서 하트 모양의 모금함에 넣는 것이었다. 그러면 그날의 일당과 그동안 쌓인 모금액이 화면에 커다랗게 나타났다. 나는 그 장면이 무척 의미심장하다고 느껴졌다. 날개와 뿔이 달린 하얀 유니콘, 현실에는 존재하지 않는 상상의 동물. 그 유니콘을 타고 높이 올라가 만나는 사랑의 하트. 그 설정 자체가 환상에 기대고 싶어 하는 우리의 마음을 보여주는 것 같았다.
그날 하루치의 고생으로 타인의 삶을 다 이해한 것 같은 착각, 잠깐 체험해 본 것으로 타인의 고충을 모두 헤아린 것 같은 오만함, 그리고 하루의 일당으로 인류에 대한 사랑을 실천한 것 같은 거대한 환상. 물론 그 프로그램이 나빴다는 것은 아니다. 다양한 직업의 세계를 시청자들에게 알려주기도 했고, 그렇게 모은 성금은 실제로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또 어떤 시청자에게는 봉사나 나눔에 대한 의지를 불러일으키기도 했을 것이다. 그렇지만 동시에 나는 불편하기도 했다. 타인의 삶의 현장을 단 하루 이벤트처럼 ‘체험’한다는 사실이. 내가 쓴 단편소설 ‘서로에게 좋은 일’에 이런 장면이 있다. 부유한 친구의 휴가에 따라온 주인공이 별장을 차지하기에 미안해서 텐트에서 자겠다고 하자 친구의 남편이 말한다. “방에서 편하게 지내세요. 저희는 텐트에서 하루 자면서 리아한테 불편하고 힘든 경험도 좀 시켜보려고요.” 그들에게 힘든 경험은 휴가용 이벤트이지만, 누군가에게는 매일같이 견디며 살아야 하는 삶이다. 요즘은 캠핑이 워낙 유행이고 나 역시 아이가 졸라대서 한두 번 가본 적이 있지만, 나는 사실 캠핑을 즐기지 않는다. 텐트처럼 불안전한 공간에서 자고 싶지 않다. 화장실에 가기 위해 집 밖으로 나가고 싶지 않다.
그런 경험이라면 청소년기와 대학 시절에 이미 충분히 했고, 그것은 전혀 낭만적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는 남의 집 주차장에 살았던 적이 있다. 주차장이었으므로 셔터가 출입문이었다. 안에서 자물쇠를 걸어 잠그고 자면 늦게 귀가하는 가족이 들어올 수 없었기 때문에 종종 잠금장치를 하지 않은 채 셔터만 내리고 자야 했다. 그럴 때면 누가 들어와 나를 해칠까 봐 불안했다.
무허가 판자촌에 산 적도 있었다. 얇은 합판을 통해 들어오는 모든 소리들이 나를 잠 못 들게 했다. 두 집 모두 화장실에 가려면 집 밖으로 나가야 했는데 그것은 하루짜리 체험이 아니고 나의 생활이었다. 누가 그 시절의 내게로 와서 단 하루 머물다 가며 좋은 경험이었다고 말하면 나는 모멸감을 느꼈을 것이다.
그래서 며칠 전 기사에서 접한 퍼스트레이디의 미담에도 나는 마음이 불편했다. 4시간 동안 쪽방촌의 청소와 도배를 하고서 “어려운 이웃들과 함께하는 이 시간이 너무나 소중하다”고 한 그녀의 말에 얼굴이 달아오르는 것 같았다. 누군가가 힘겹게 겪어내는 매일의 생활이 누군가에게는 하루짜리 ‘체험 삶의 현장’이구나, 그런 생각. 이웃을 돕는다는 것은 좋은 일이지만, 그것이 자신의 선행을 전시하는 일로 끝나버리지는 않았으면 좋겠다. 타인의 고통을 잠시 체험하고 빠져나와 ‘소중한 경험’이었다고 쉽게 말해버리지는 않았으면 좋겠다.
2024-09-05 [1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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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감] 또 다른 어둠 앞에서
지금, 내 눈에는 한 사진이 들어온다. 1945년 11월 26일 〈조선일보〉에 수록된 사진이다. 기사와 함께 게재된 사진은 건물에서 나오는 사람을 포착한 사진인데, 중절모를 눌러쓴 인물의 표정도 어둡지만, 건물에 드리우는 어둠 역시 만만치 않다. 그날의 사진은 그날의 어둠과 역사의 어둠 그리고 곧 일어날 우리 민족의 비극을 보여 주는 것처럼 어두컴컴하다.
사진 밑에는 다음과 같은 설명이 달려 있다. "사진은 정동 예배당에서 예배를 보시고 문밖으로 나오시는 김구 선생". 이 설명은 환국(귀국) 3일 차 김구 선생의 동선과 활동을 추적한 기사에 부기되어 있다.
빛바랜 이 사진이 생각난 것은 지금 우리 주변에서 일어나는 '반역사 세력'과 그들의 왜곡된 가치관 때문이었을 것이다. 김구로 대표되는 항일 인사의 업적을 깎아내리고 고의적일 정도로 보수 세력 몇몇을 상찬하는 움직임부터, 청문회에 나온 기관장 후보가 독도가 분쟁 지역이라느니 혹은 위안부 문제는 답변할 사안이 아니라느니 하며 뱉어냈던 수상한 말들, 김구를 테러리스트로 지칭하고 그를 비난하는 책을 출간한 인사가 앉지 말아야 할 요직을 차지한 기현상, 게다가 대놓고 친일을 넘어 숭일(崇日)을 지향하는 정부 자세에 이르기까지, 최근 대한민국에는 정상 범주를 넘어선 기류와 행보가 넘쳐나고 있다.
대한민국 국민 중에서 독도 영유권이 일본에 있다고 믿는 극소수의 세력이 있다고 했는데, 작금의 문제는 그러한 소수가 늘어나고 있기 때문에 생기는 문제만은 아니다. 작금의 문제는 수면 아래에서 암약해야 할 문제 세력이, 오히려 권력 위로 부상하면서 자신들의 의지대로 대한민국을 다시 조종할 수 있다고 믿고 있다는 점에서 문제적이다.
언제부터인지, 정부의 발언과 요직 인사의 동향은 반일을 경계하고 있고, 일본을 따르지 않는 이들을 오히려 문제적 인물로 몰아붙이는 성향이 강해졌으며, 친일의 논리를 편드는 강경 발언이 힘을 얻고 있는 실정이다. 이것은 전반적으로 이 세상의 한 축이 무너지고 있고, 그 무너진 축에 다른 축을 끼워 넣으려는 일들이 늘어나고 있다는 위험 신호이다.
최근 국방 백서에는 일본의 주장을 따르는 문구가 삽입되었고, 육군사관학교에서는 홍범도의 흉상을 제거하려는 움직임이 감지되었으며, 김구를 테러리스트라고 부르는 이의 발언을 들어야 하는 세상이 도래했다. 이 모든 것이 우연의 산물일까. 갑자기 이러한 일들이 확산되는 것이 우연이고, 그 확산을 두려워하지 않은 이들이 권력을 장악하는 일이 단지 우연일 뿐이라면, 우리는 이제 그러한 우연의 확률을 줄이는 일에 매진해야 할 것이다. 만일 이러한 일들이 계획된 일이라면, 그 원인과 그 배후를 밝히고 도대체 이러한 뻔뻔한 생각과 무책임한 발언을 확산하는 근본적인 이유를 따져 물어야 할 것이다.
김구는 자신의 시대에서 그러한 이유를 찾았고, 그 이유를 제거하기 위하여 자신의 삶을 걸었다. 우리도 마찬가지여야 하지 않을까. 그 원인이 어디에 있는지를 찾아야 하며, 만일 일각에서 주장하는 것처럼 그 축의 근원이 '용산총독부'라면, 이제 그 총독부를 처리할 방안을 더 이상 미룰 수는 없어 보인다. 모든 사태의 근원을 밝히고 문제적 상황을 원점으로 되돌려 놓으려 한다면, 그때는 또 다른 독립운동과 마주해야 한다고 믿는다. 그것은 잘못된 역사와 그릇된 선택에 대한 독립운동일 것이다. 그날 사진 속 김구의 얼굴이 어두웠다고 느낀 것은 아마도 그 선택이 김구 선생의 얼굴에 드리워졌기 때문이 아닐까. 그의 표정에서 또 다른 세상의 어둠을 다시 읽어야 한다는 사실이, 너무나 미안하다.
2024-08-29 [18: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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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감] 내일(來日)
30대 때의 일이니, 아주 오래된 일입니다. 그렇지만 나는 그날을 지금까지 잊지 못합니다. 그때는, 고향에 갈 때는 하루일과를 마치고 막차를 탔으므로, 마치 어둠 속을 잠행하는 것 같았습니다. 그날은 늦가을의 찬비가 내리고 있었습니다. 고향이 가까워져 오자 버스의 창으로 흐릿한 불빛이 보였고, 나는 유리창에 낀 뿌연 습기를 손바닥으로 닦았습니다.
고향 마을은, 마치 어둠 속에 웅크린 고독한 짐승 같아 보였습니다. 버스에서 내린 나는, 두꺼운 뿔테 안경을 낀 주인이 지키는 책방에 들러 책 한 권을 사고는, 어머니가 혼자 지키는 집에 들었습니다. 책을 펴들고 자리에 누웠을 때, 뒤뜰 대나무 숲에 내리는 늦가을 빗소리가 가슴을 차갑게 적시었습니다. 고향집은 고적함으로 가득했습니다. 그날의 귀향은 그 추적거리는 늦가을 비처럼 썰렁하고 외로웠습니다. 그때 긴 마당으로 저벅거리는 발자국 소리와 함께 들리는 목소리가 있었습니다.
“어이!…, 니가 고향에 와서 우째 내한테 신고도 없이 혼자 잔단 말이고! 대체 누구 허락받고 하는 짓이고….” 그 못 말리는 오지랖과 장난기가 서 말이나 담긴 목소리의 주인은 내 초등학교 친구였습니다. 막차에서 내리는 나를 본 누군가로부터 나의 귀향을 신고받은 모양이었습니다. 뜻하지 않은 친구의 방문으로, 그때까지 집을 지키던 적요(寂寥)가 놀라서 도망을 가버리고, 나의 외롭던 귀향은 갑자기 정신없이 시끌벅적해져 버렸습니다, 나는 그에 이끌려 시내로 나갔고, 그는 친구들을 불러내었습니다. 그에게 불려 나온 우리는 밤새 같이 술집을 돌았습니다. 우리는 그 밤을 정다운 담소와 폭소로 보냈습니다.
그러나 그 얼마 후, 그는 우리 친구들 중 제일 먼저 친구들의 배웅을 받으며 그 젊고 아까운 나이에 세상을 떠났고, 그 후 그 밤은 내게 평생 잊을 수 없는 밤이 되었습니다. 그 밤이 그 친구와의 마지막 술자리가 될 줄은 아무도 몰랐습니다. 나는, 그가 세상을 버릴 때까지, 앞으로의 삶이 팍팍하게 많이도 남았다고, 그런 밤은 앞으로 얼마든지 더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 친구를 술 초대 한번 해보지 못하고 보냈습니다.
사람에게는 기약된 내일이란 없는 데도 나는 많은 내일을 믿고 있었습니다. 내일이란, 마치 흘러간 어제처럼 사람의 생각에만 존재하는 허구이지만, 사람들은 매일 내일을 만들어 동행하면서, 귀찮은 것들은 전부 내일에 맡겨버립니다. 나도 그 친구에게 권할 술잔을 매일 내일로 미루다가 끝내 권하지 못하고 보냈습니다.
이 하염없는 우주 중 먼지같이 작은 지구 중에서도 그 작은 골짜기에서, 이 하염없는 세월 중 찰나 같은 이 육체의 시간 중에, 친구라는 인연으로 만나는 것은 불가사의한 기적일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모두의 만남의 경험은 그런 기적일 것입니다. 가을비가 추적거리던 고향의 늦은 가을밤, 그의 뜻하지 않는 방문은 내가 잃어버렸던 따뜻한 고향을 되찾게 하였으며, 늘 곁에 두고도 무감각하던 친구의 넉넉한 정을 발견하게 하였습니다.
그의 방문은 새삼스레 내 주위를 둘러보게 만들었고, 사소한 만남조차 두 번 다시 되돌려 경험할 수 없는 소중한 순간들이란 사실을 일깨워 주었습니다. 나는 그가 살았던 삶의 길이보다 두 배나 더 긴 삶을 살았습니다. 그가 산 삶의 길이보다 더 많이 산 삶은, 그의 삶에 비하면 덤입니다. 나는 이렇게 오래 살면서, 그가 나를 눈뜨게 해 준 것처럼, 누구에겐가 친구의 의미에 대하여 눈뜨게 해준 적이 있는지 내게 물어보았습니다.
2024-08-22 [17: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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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감] 지구의 면역력
며칠간 몸 상태가 심상찮더니 결국 코로나로 진단받았다. 지나갔다고 생각했던 전염병이 다시 유행하는 조짐이다. 이 바이러스는 제 몸을 변형시켜 끊임없이 자신의 명맥을 유지하려 한다. 이들의 좌우명은 숙주를 옮겨 다니는 것이며, 그 숙주는 인간이다. 기생 생물이 무엇인가? 한마디로 다른 종에 붙어살면서 그 종만 피해를 보게 하는 생물이다. 그런 기준으로 보면 우리를 병들게 하는 세균이나 바이러스도 기생 생물이다. 기생 생물이라는 명칭이 당장 혐오스럽지만, 서적이나 다큐멘터리 영상으로 살펴보는 기생충의 생태는 나름 흥미롭고 신비하다.
저녁이 되면 감염시킨 개미를 풀잎 끝으로 올라가게 해 초식동물에게 잡아먹히도록 조종하는 창형흡충이라든지, 물속에 새끼를 풀어놓기 위해 숙주를 물가로 가게 만드는 메디나충. 고양이에게 잡아먹히기 쉽도록 쥐에게 두려움을 없애버리는 톡소포자충 등을 보면, 기생 생물이 자신의 생존을 위해 얼마나 기발한 방법을 쓰고 있는지도 알게 된다.
한데, 당장 약을 처방받아 먹어야 하는 처지에 직면하니 마냥 재미있게 볼 수만은 없다. 새삼 심각하게 살펴보니 문득, 의구심이 든다. 인간은 늘 기생 생물들에게 당하기만 하는 숙주였을까? 그렇지는 않다. 인간들 또한 지금까지 번성하는 과정에서 일방적으로 얻어내기만 했던 대상이 있다.
만약에 지구가 생명체라 가정한다면 인간은 분명히 지구에 기생하는 생물이다. 개인적으로 필자는 지구를 생명체로 본다는 가정이 그다지 억지스럽지 않다. 인간을 살펴봐도 그렇다. 인간의 바깥 피부는 죽은 세포이다. 하지만 그 외피가 없으면 인간은 살아갈 수 없다. 즉, 생명체를 구성하기 위해 모든 영역이 살아 있어야 하는 게 아니다. 오히려 생명체는 살아 있는 것과 무생물의 절묘한 조화와 융합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러니 인간이 지구에 기생한다는 말이 어쩌면 냉정하게 판단한 현실일 수도 있다. 기생이라는 단어 자체로 혐오할 필요는 없다. 남의 살을 먹어야 살 수 있게 태어난 걸 어쩌겠는가. 기생 생물의 원칙만 잘 지키면 되는 것이다.
기생 생물의 원칙은 바로 이것이다. 숙주의 면역체계를 필사적으로 피해야 하며, 또한 자신이 원할 때까지 숙주가 살아 있게 해야 하며, 또 다른 숙주로 이동할 수 있게끔 숙주를 조종할 수 있어야 했다.
한데, 숙주인 지구의 건강 상태가 심상찮다. 팬데믹 이후로, 이상 기후가 세계를 뒤덮고 있다. 폭염과 홍수. 그로 이한 산림화재까지 빈번하게 일어난다. 지구 온난화로 해수 온도가 올라가고 해수면의 급격한 상승으로 국토가 위협받는 국가도 있다.
그래서 지구가 걱정되냐고? 천만의 말씀이다. 지구는 잠깐 앓을 뿐이다. 독감에 걸려 열이 나듯 평균 기온을 한 50도쯤 올릴 수도 있겠다. 그렇게 100년쯤 지나면 현재의 생명체는 대부분 멸종할 것이다. 나쁜 세균이 사멸하듯 깨끗이 청소된다. 지구는 다시 멀쩡하게 회복될 테고, 곧 새로운 생명체로 가득 채울 것이다.
지구 면역력에 비하면 인간의 생명력은 정말 보잘것없다. 그러니 온난화로 인한 지구의 위기가 아니다. 바로 인간의 위기인 것이다. 그것도 멸종의 위기이다. 한껏 예민해진 지구의 면역체계를 어떻게 속일 수 있을지, 기생 생물 인간의 비장한 생존 본능에 기대를 걸어본다. 저녁을 먹고 코로나 경구약 4알을 물과 함께 삼켰다. 기생 생물 속에 기생하는 생물이라니…. 아무쪼록 적당히 뺏어 먹고 물러나길 바란다. 몸속에서 탐욕만 부리지 않았으면 저도 좋고 나도 좋았을 텐데 말이다.
2024-08-15 [1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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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감] 한계선
계속되는 폭염으로 밤마다 푹 잠들지 못한다는 사람들이 많다. 나 또한 그렇다. 사실 열대야가 아니더라도 잠을 자주 깨는 편이고, 한 번 깨고 나면 그때부터 수면의 질이 매우 낮아지는데, 요즘은 더위 때문에 한 시간에도 몇 번씩 ‘자다 깨다’를 반복하는 것 같다. 그러다 보니 늘 피곤하고, 피곤하니까 커피를 자꾸 마시고, 커피를 많이 마시니까 밤에 또 깊이 못 자고…. 악순환이 이어진다.
얼마 전 새벽녘에는 요란한 천둥과 번개 때문에도 잠이 깼다. 아마 많은 사람들이 그 시간에 깨어버렸을 것이다. 어두운 집안이 클럽의 무대처럼 번쩍거리며 빛났고 천연 조명이 켜질 때마다 사물들이 환영처럼 나타났다가 사라졌다. 나는 어떤 신비한 존재에 홀린 듯 창밖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러면서 생각했다. 지금 나는 누군가와 동시에 깨었겠지. 이렇게 비현실적인 빛과 소리의 향연을 함께 보고 있는 사람들이 어디엔가 까만 점처럼 박혀 있겠지. 그런 생각을 하니 그날의 불면은 어쩐지 외롭지 않고 오히려 묘한 위안이 되었다.
한참을 그렇게 있다가 시간을 확인하려고 휴대폰 화면을 켰다. 그런데 대체 무슨 영문인지, 휴대폰 화면에도 번개가 내리꽂혀 있는 것이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화면 우측에서 사분의 일 정도 되는 지점에 세로로 길게 분홍색 선이 생겨 있었다. 마치 초등학교 시절 짝지가 책상 위에 불공평하게 그어놓은 금처럼 아주 선명하고도 단호하게 말이다. 휴대폰을 껐다 켜 보고 화면을 이리저리 터치해 보았지만 선은 사라지지 않았다. 인터넷으로 검색을 하니 친절한 누군가가 이미지까지 올려가며 설명을 해둔 내용이 있었다. “이것은 라인 디펙트 현상입니다. 디스플레이 패널과 메인보드를 연결하는 부위에 이상이 생긴 것이죠. 당장 사용하는 데에는 문제가 없지만 점점 화면이 보이지 않게 될 겁니다. 스마트폰이 시한부 판정을 받은 거라고 보시면 됩니다. 미리 대비하세요. 화면이 전부 잠식되기 전에요.” 대략 이런 내용이었다.
시한부. 생각지도 못했던 그 단어가 눈에 쏙 박혀 내 마음을 데굴데굴 굴렸다. 보통은 불치병 판정을 받고 죽음을 앞둔 상황에서 흔히 쓰이는 말이지만, 사전적 의미는 이러하다. ‘어떤 일에 대해 일정한 시간의 한계를 둠’. 사실 따지고 보면 인생 자체가 시간의 한계를 가지고 있으므로 우리에게 벌어지는 모든 사건들은 시한부일 것이다. 다만 그 끝이 언제인지를 대체로 알지 못하기에 그 모든 게 영원할 것처럼 어리석게 행동할 뿐. 그런데 만약 끝을 예감하고 있다면? 어떤 일에 시한부 판정을 받고 내게 주어진 시간의 한계를 명확히 받아들여야 한다면?
모든 순간이 어쩌면 마지막일 수도 있다는 사실을 잊지 않는 일. 제한된 시간을 분명하게 인식하는 일. 그것은 우리로 하여금 다분히 체념하는 태도를 갖게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현재 상황에 더욱 몰입하고 집중하게 하는 동력이 되어주기도 한다. 단 한 번뿐인 순간이므로 한눈을 팔 겨를이 없다. 그 순간의 아름다움, 그 순간의 특별함, 그 순간의 기쁨…. 그런 감정을 온전히 느끼는 것만으로도 시간이 부족하니까. 그리고 그 모든 것들을 결국 상실하게 되더라도 의연히 견딜 수 있는 마음의 준비를 차근차근히 해야 하니까.
물론 우리 삶에는 어떤 예고도 없이 한순간에 끝장나 버리는 일들이 더 많다. 휴대폰도 경고 신호 없이 그냥 먹통이 되어버리는 경우가 더 흔할 것이다. 그렇게 되면 저장해 두었던 사진도 연락처도 모두 사라져 버리고 정말 ‘멘붕’이 오겠지. 그 새벽녘, 천둥·번개와 함께 시한부를 알리는 한계선이 생겨줘서, 담아둔 것들을 차곡차곡 정리할 시간을 내게 마련해 줘서, 다시 오지 않을 이 순간을 온전히 감각하게 해 줘서, 나는 끝을 아쉬워하기보다 차라리 그 모든 것에 고맙다는 말을 해야 할 것 같다.
2024-08-08 [17: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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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감] 수평선이 사라지는 도시
부산에서 산 지도 거의 20년이 되어 간다. 20년을 살고 보니, 눈에 보이는 것이 저절로 생겨난다. 그중 하나가 수평선이었다. 부산에 와서 가장 좋았던 점은 바다와 수평선을 볼 수 있었다는 점이었다. 고개를 들면 바다가 보였고, 그 바다를 끝까지 훑어가면 수평선이 보였다. 낮에도 보였지만, 밤에 보는 수평선은 더욱 아름다웠다. 때로는 외롭기도 했지만, 수평선이 보이는 경관에서는 감수해야 할 외로움이라고 생각했다.
부산에서의 거처는 비교적 바다가 보이는 곳에 정하고자 했다. 멀리서나마 바다를 볼 수 있고, 그 평온함과 웅대함을 즐길 수 있는 곳을 선호했다. 주변에서 말리는 목소리도 만만치 않았다. 빨래가 마르지 않고, 태풍이 올 때 위험하고, 자동차와 가전제품이 빨리 부식된다는 충고였다. 바다가 보고 싶으면 그때마다 바다에 갔다 오면 되지, 무엇 때문에 바다 근처에 살면서 그 어려움을 감수하려느냐고 되묻는 이도 적지 않았다.
바다·수평선이 매력인 도시
빌딩숲이 수평선 잠식해가
"바다, 공터, 조망 공존해야"
2005년 부산에 올 때, 서울에서는 한강이 보이는 조망을 찾아다니는 사람이 생겨나고 있었다. 부동산 가치 때문만은 아니었다. 소위 말하는 영구 조망으로 남아서 눈앞에 무언가가 탁 트인 느낌을 주는 곳은 한강 강가가 유일했기 때문이다. 어쩌면 한강마저 메우고 그 위에 무언가를 지을 수 있었다면 한강 역시 남아 있지 않았겠지만, 그럴 수 없는 마지막 보루였기 때문에, 그곳은 트인 전망으로 남을 수 있었다.
그런데 부산에 오자 탁 트인 전망이 곳곳에서 발견되었다. 부산은 인구 400만에 육박하는 대도시이면서도, 곳곳에 영구 조망이 흘러넘치고 있었다. 적어도 그 시절에는 그 조망이 계속될 줄 알았다.
그때와 지금을 비교하면, 영구 조망은 확실히 줄었다. 도시와 바다가 만나는 곳에 건축물이 늘었고, 대부분이 아파트인 이 건축물들은 수평선을 잠식하기 시작했다. 어떤 경우에는 바다가 오션뷰 아파트에만 남아 있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더 놀라운 것은 상황이 이러한 데도 여전히 수평선을 쪼개는 일을, 여전히 그리고 강력하게 추진하고 있다는 점이다.
재직하고 있는 학교는 과거에 학교의 절반이 바다에 면한 곳이었지만, 지금은 늘어난 아파트와 건물에 둘러싸여 이제는 육지의 섬처럼 변해 있다. 어디까지가 바다였는지는 드문드문 남은 해송 잔해로만 확인될 뿐, 주위는 모두 빌딩 숲으로 변해 버린 후였다. 그런데도 혹여 남은 땅이 있다면 여전히 건물을 짓는 일이 우선이고, 바다나 공터 혹은 자연은 밀어내어야 할 무엇으로 치부되었다. 그러니 바다인들 남아날 리 없었다.
우리는 지금 단순히 수평선을 없애고, 바다가 풍경을 없애고, 익숙했던 과거의 정취를 없애고 있는 것만은 아니다. 우리는 주체못할 욕심으로 멈추어야 할 것을 멈추지 못하고 있고, 침범하지 말아야 할 곳을 침범하고 있다. 바다가 그 자리에 있다고 해서, 공터가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고 해서, 그곳을 침범하고 그곳을 파괴하는 행위가 용납될 수는 없다. 그것은 수평선이 사라지고, 어쩌면 바다마저 위협받는 미래의 시점에서는 분명 재앙일 수밖에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아파트 가격이 떨어지자, 더 높은 전망 선호도를 보이는 곳을 골라, 더 좋은 오션뷰를 갖춘 부지를 물색하고, 그 위에 아파트를 짓겠다는 건설사와 투자가가 늘어나고 있는 줄 안다.
바다를 그리고 자연을 마음대로 할 수 있다고 생각한 이들은 '발전'이라는 명목으로 환경을 파괴하는 일에 몰두한 적이 있었다. 하지만 곧 그들은 생각을 바꿔 먹어야 했다. 자연은 무한하지 않았고, 인간은 전능하지 않았다. 자연이 인간에게 해악을 끼치기 이전에 인간은 인간만으로는 살 수 없다는 사실을 알아버렸다. 그 누구보다 인간은 함께 있어야 하는 존재였고, 이를 위해서는 바다도, 공터도, 조망도 이 세상에 함께 있어야 할 것들이었다.
2024-08-01 [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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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감] 손님
몇 달간 집을 비운 사이에도 세월은 어김없이 집을 다녀갔습니다. 목단꽃 봉오리에는 꽃 대신 투박한 씨앗이 달렸고, 환한 웃음으로 나를 맞아 주기를 기대했던 능소화는, 그런 나의 바람 같은 것에는 아예 관심이 없는 듯 벌써 갈 채비를 하고 있었습니다. 화단의 꽃들은 그들 마음 내키는 대로, 그들의 시간에 맞추어 화단을 방문하는 손님들이었습니다.
능소화는 늙어 가는 사람처럼 조금씩 짓무르고 있었고, 어떤 송이는 벌써 땅에 떨어져 처연한 모습으로 썩고 있었습니다. 능소화는 7월의 불꽃 같은 햇살과 경쟁이라도 하듯, 주황색 화려한 옷을 입고 고개를 치켜들고 있었으므로, 매사에 자신이 없는 나는 그 오만스러운 몸짓조차 마음에 들었습니다. 능소화는 한여름의 짧은 일생을 살다 가지만, 자신의 아름다움에 너무도 흡족하여, 그런 지극한 만족감으로 일생을 살아내는지, 질 때는 단 한 가닥 아쉬움도 남아 있지 않다는 듯, 정말 미련 같은 건 남아 있지 않다는 몸짓으로 그냥 “툭” 떨어집니다. 나도 저렇게 헌 옷 한 벌 벗어 던져 버리듯 떠날 수 있을까? 떠나는 날 붙잡을 한(恨) 같은 것은 없을까?
달빛 아래서 세레나데를 부르던 안타까운 젊음이 있었고, 정체를 알 수 없는 외로움과 불안에 사로잡혀 불면으로 새던 밤도 있었습니다. 가족들과의 영원한 이별, 뼈저린 회한(悔恨), 그것들은 곱고, 슬프고, 밉고, 분노한 모습으로 내 마음에 살면서 나를 끌고 다녔습니다. 나는 애증(愛憎)에 사로잡힌 포로였고, 그것들을 사랑할 줄 몰랐습니다. 그것들이 내 삶의 실제 내용물이었지만, 나는 그런 것들은 기꺼이 그대로 받아들인 사실이 없었습니다. 하나하나에 대하여 갈증과 증오라는 원망의 이름을 달았습니다. 그런 것들은, 나의 초대나 허락에 아랑곳하지 않고 마음대로 내 마음에 차고 들어와, 주인이 되어 마음대로 짓밟고 괴롭히는, 불청객들이었습니다.
그러나 부정할 수 없는 것은, 그것들은 내 마음의 나무에서 피어나는 꽃과 같은 것들이었습니다. 그것들 전부, 이 화단에 소리 없이 찾아왔다 떠나는 온갖 꽃들처럼, 내 삶에 찾아온 손님들이었습니다. 어떤 것은 저 능소화처럼 거만을 떨고, 어떤 것은 제비꽃처럼 슬프고, 어떤 것은 독초처럼 아프기도 했지만, 그러나 그것들은 전부 내 마음에서 피었다 지는, 모양과 색깔이 각기 다른 꽃들이었고, 그 꽃들이 없었다면 내 삶은 텅 빈 쭉정이이었을 것입니다.
고운 것은 고운 것대로, 추한 것은 추한 것대로, 괴로운 것은 괴로운 것대로, 아픈 것은 아픈 것대로, 그것들은 전부 나를 찾아온 손님들이었고, 그것들이 나를 찾아온 것에는, 내가 모르는 어떤 까닭이 있었을 것입니다. 부모님은 나와 형제들을 가족으로 초대하여 서로에게 귀한 손님이 되었습니다. 꽃들이 화단에서 이슬과 햇살을 공유하듯, 우리는 한 공간, 같은 시간대를 공유한 세상의 손님이었습니다. 그렇게 모두 손님이었던 까닭에, 그들의 예정된 시간에 따라, 나의 헤어질 준비 같은 것은 헤아리지 않고 그렇게 내 곁을 떠났을 것입니다.
가슴 떨리던 젊은 날의 환희, 사랑의 상실이 가져온 아픔도, 모두 세월 따라 나를 찾아와 잠시 머물다 간 손님들이었습니다. 지금 남아 있는 손님들-그리움과 외로움, 늙음에 대한 분노-도 때가 되면 떠나겠다고 손을 내밀 것입니다. 손님은 자기가 가야 할 때는, 아무리 붙잡아도 뿌리치고 홀연히 떠나기 마련입니다. 세상을 연초록 그 아름다운 빛깔로 물들이고, 자취 없이 사라지는 봄날 훈풍처럼 말입니다.
아마, 내 곁의 세사(世事)도 그렇게 흘러갈 것입니다. 이제 나는, 화단의 꽃들이 사라지는 것을 바라보듯, 모든 인연이 만든 얽매임도 그렇게 바라볼 것입니다. 그도 잠시 나를 찾아온 손님일 테니, 그냥 태연히 맞았다가 애쓰지 않고 보낼 것입니다.
2024-07-25 [18: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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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감] 인간이여 분발하자
저녁 먹고 운동 삼아 동네를 한 바퀴 돌다 보면 개와 함께 산책하는 사람을 심심찮게 볼 수 있다. 모퉁이를 돌다가 강아지들끼리 마주치면 서로 냄새 맡고, 왈왈 짖기도 한다. 그 틈을 이용해 주인들은 서로 대화를 나눈다. ‘아휴, 털이 참 곱다. 어디서 미용시켜요?’, ‘얘는 몇 살이에요?’, 그렇게 친목을 쌓은 주인들은 자연스럽게 동네 학부모가 된다. 모찌 엄마, 율콩이 엄마. 아빠도 있다. 하몽이 아빠. 그렇게 불릴 때마다 하몽이 아빠는 객쩍게 웃는다.
그렇다. 내가 바로 하몽이 아빠다. 귀여운 아기로 꼬물대던 두 딸을 키웠고, 장성한 딸들은 버젓이 직장생활하고 있지만, 아이들은 어디로 가고, 나는 강아지 아빠가 되고 말았다. 어쩌면 우리 집안엔 개와 족보가 꼬이는 고대의 비밀이 있는지도 모른다. 어렸을 때, 할머니는 ‘아이고, 우리 강아지 인물이 훤하네.’ 하며 내 머리를 쓰다듬으셨고, 지금은 내가 ‘우리 애가 제일로 이쁘네.’ 하며 강아지를 쓰다듬고 있으니 말이다.
사실, 요즘엔 반려동물과 함께 사는 사람들이 참 많아졌다. 농림축산식품부가 2022년에 집계한 반려견의 수가 이미 302만 마리가 넘는다고 했다. 지금은 1000만이 넘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반려견뿐만 아니라 고양이, 새, 거북이, 열대어 등등 다양한 동물까지 생각하면 대단히 많은 사람이 반려동물과 함께 생활한다고 볼 수 있다.
덕분에 반려동물에 대한 인식도 많이 달라졌다. 어떤 항공사에서는 기내에서 반려견과 나란히 여행할 수 있는 상품을 발표하는가 하면, 또 어떤 대형 할인점에선 반려견과 함께 식사할 수 있는 공간을 따로 마련하기도 했다. 반려동물 전용 카페는 우후죽순으로 늘어나고 있다. 반려동물을 가족의 일원으로 여기는 추세에 맞춰진 상업적 대응이라 할 수 있겠지만, 또 한편으로 사람과 동물을 구분하는 어떤 경계가 허물어지고 있다는 느낌도 크게 와닿는다. 최근에 젊은이들이 이용하는 커뮤니티에서 아주 흥미로운 내용을 읽은 적이 있다. 만약에 자신이 키우던 개와 낯선 사람이 동시에 물에 빠졌을 때 누구를 구하겠냐는 물음이었다.
그런데, 의외로 많은 사람이 자신이 키우던 개를 구하겠다고 답변했다. 사랑하는 가족을 구하는 게 당연한데, 그게 무엇 잘못되었냐고 반문하기도 했다. 어떤 댓글에선 사람을 구하긴 하겠는데, 그 선택이 옳았는지 확신할 수 없겠다는 대답도 있었다. 인간의 가치는 여타 동물들과 비교할 수 없으며, 그 가치는 절대적이라는 의견에는 공격적인 댓글이 많았다. 인간 생명이 동물 생명보다 더 가치 있다는 근거가 무엇이냐는 반론부터 해서, 동물은 사랑을 베풀면 거짓 없이 그 사랑을 되돌려 주는데, 인간이라는 족속은 과연 그렇게 하고 있냐고 따지기도 했다.
나도 나 자신에게 그 질문을 던져 봤다. 나는 인간의 형상을 가진 생명을 위해 내가 사랑하는 식구의 죽음을 선택할 수 있을까? 솔직히 말해, 나는 인간과 반려동물 중 어느 생명이 더 소중하냐는 질문으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우리가 각자의 삶에서 인간에 대한 환멸을 얼마나 겪었을까, 라고 묻는 문제로 보였다. 나는 여전히 인간만의 특별한 가치를 믿고 싶기 때문이다.
하지만, 거짓으로 이득을 취하고, 폭력으로 빼앗고, 훔치고, 죽이고, 심지어 누군가의 약점을 이용해 착취하려는 사람들까지 북적이는 뉴스 속에서도 굳건히 그 믿음을 유지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사람에 대한 의심이 깊어질수록 인간 고유의 가치는 모호해질 것이며, 그 불신은 부조리의 악순환으로 되돌아올 것이다. 분명한 것은 나도 인간이며 누군가에게는 일면식 없는 타인이다. 자신의 가치조차 믿지 못하게 되어 버린 우리 인간들이여 부디…분발하자.
2024-07-18 [18: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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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감] 한 가지 작은 다행
올해 중학교에 입학한 아들은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즐겁게 한 학기를 보내고 있다. 자유학기제 덕분에 시험공부에 대한 스트레스가 없는 데다 각종 스포츠 활동, 문화예술 체험, 진로 체험 등 다양하고 흥미로운 활동들을 학교에서 하고 있기 때문이다. 어떤 날엔 석고 방향제나 도자기 컵 같은 것을 만들어 오고, 어떤 날엔 먼 나라의 전통춤을 배워 오고, 또 어떤 날엔 종일 축구를 했다면서 자기가 어떤 활약을 했었는지 저녁 내내 자랑한다. 그런 이야기들을 늘어놓을 때 아이 얼굴에 가득 채워지는 해맑은 웃음. 그 웃음이 오래 지속되었으면 좋겠다고, 그걸 지켜주고 싶다고 나는 생각한다. 2학기부터는 성적이 산출되는 지필평가가 있겠지만 시험 점수로 스트레스 주지 말자. 저렇게 행복하고 즐거운 표정, 그거면 되지 않나. 다른 건 부차적인 문제다, 그런 생각.
공식적인 시험은 없어도 학습 확인 차원에서 수업 중에 시험을 치기도 하는 모양인데, 큰 관심을 두지는 않았다. 그런데 얼마 전 아이가 학교에 다녀와서 말했다. “엄마, 나 오늘 국어 시험 쳤는데 38점 받았어.” “그렇구나. 만점이 50점이야?” 나는 미소를 띠고 물었다. 50점 만점에 38점이면 딱히 잘한 건 아니지만 그래도 나쁘진 않네, 라고 생각하면서. 시험 점수로 아이를 압박하지 않겠다고 늘 생각했으니까, 썩 만족스러운 점수가 아니더라도 칭찬하고 격려해 줘야지, 하고 다시 한번 다짐하면서.
“아닌데. 100점이 만점인데?” 아이는 천진난만하게 대답했는데, 그 순간 내 동공은 흔들렸던 것 같다. 100점 만점에 38점이라고? 영어도 수학도 아닌 국어 점수가? “그건 너무 심한데. 충격인데. 공부를 좀 해야겠다. EBS 강의를 들어볼래? 엄마랑 문제집을 하나 풀어볼까? 차라리 학원 다닐래?” 등등의 말을 횡설수설 늘어놓는 나에게 아이는 또박또박 말했다. “엄마, 진로 탐색 시간에 선생님이 그러셨는데 시험 점수 같은 것보다 내가 행복한 게 제일 중요한 거래.”
물론 나도 아이들을 대상으로 강의를 할 때마다 그렇게 말했었다. 다른 사람들이 획일적인 가치에 매몰되어 허황된 목표를 향해 달려가고 있을 때 자신이 진정으로 좋아하는 소박한 일들을 하루하루 기쁘게 해내는 주인공의 모습이 담긴 그림책을 읽어주면서 “여러분도 남들이 다 좋다고 말하는 것 말고 자기가 진심으로 좋아하는 걸 찾아가면서 그 과정에서 행복하기를 바랍니다”고 말해 주었다. 사춘기에 접어든 아이들은 그 이야기에 눈빛을 반짝였고, 그때의 내 마음도 가식은 아니었다. 하지만 국어 점수 38점을 받아온 아이에게 나는 끝내 그 말을 해주지 못했다.
그날 나는 내 안의 모순을 마주하고 밤새 괴로웠다. 아이가 원하지 않으니까, 라며 세상 쿨한 엄마인 것처럼 학원도 안 보내고 있지만, 그 저변에는 아이가 학원에 가지 않고도 평균 이상의 학업 성취를 이룬다는 전제가 있었나 보다. 어쩌면 나는 사교육 없이 명문대에 간 아이들의 인터뷰 답변을 내 아이에게 기대했을지도 모른다. “학원은 안 다녔고요, 교과서 위주로 공부했어요.” 나는 초연한 태도를 취하되 아이는 알아서 잘했으면 하는 더 큰 욕망. 차라리 닦달하는 것만 못한 속물성과 이중성.
내가 했던 말과 행동의 저변에 깔린 마음을 가만히 들여다본다. 대외적으로 나를 포장한 언어들을 벗겨내면 결국 드러나고 마는 것은 비루함이었다. 내 안에 가득 찬 모순과 자아의 민모습을 마주하는 순간이 오면 고작 이런 인간으로 살다 죽게 된다는 것이 슬프고 한심하다. 다만 한 가지 작은 다행은, 그런 나에 대해 글을 쓴다는 것. 쓰기 위해 내면의 밑바닥까지 내려가 마주하기 싫은 스스로의 모습을 오래도록 우두커니 바라본다는 것이다. 고통스러워도 자신을 직면하고 계속 쓰는 일, 그것이 나를 조금은 나은 사람으로 만들어 줄 수 있을까.
2024-07-11 [17: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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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감] 차별 없는 처벌, 처벌 없는 차별
한 남자가 밥상의 맞은편에 앉은 남자에게 느닷없이 설명한다. “헌법 제11조 1항, 모든 국민은 법 앞에 평등하다. 누구든지 성별·종교 또는 사회적 신분에 의하여 정치적·경제적·사회적·문화적 생활의 모든 영역에 있어서 차별을 받지 아니한다.” 맞은 편의 남자는 뜨악한 표정으로 듣고 있지만, 결코 부인하거나 반발하지 않는다. 그들의 식사 풍경 뒤에서, 그들을 바라보고 있는 우리도 결코 부인하거나 반발하지 않는다.
헌법 제11조에는 이 외에도 제2항과 제3항이 더 있다. 제2항은 “사회적 특수계급의 제도는 인정되지 아니하며, 어떠한 형태로도 이를 창설할 수 없다”이고 제3항은 “훈장 등의 영전은 이를 받은 자에게만 효력이 있고, 어떠한 특권도 이에 따르지 아니한다”이다. 하지만 2년 전부터 한국 사회에는 인정되지 말아야 할 ‘특수계급’이 버젓이 인정되고 있으며 결코 창설할 수 없다는 ‘사회 제도’가 이미 창설되어 있다.
우리 사회 특수계급의 탄생
영화 속 현실과 비슷해져
처벌 없는 차별의 결과물
특수계급으로 부상 중인 여인은 ‘여사’라고도 불리는데, 지금까지 연루된 범죄만 해도 상당하다. 금품 수수, 허위 경력, 논문 표절이 그것이고, 주가 조작, 사기 행위 등에 대해 의심을 받고 있다. 많은 이들은 막연한 의심을 넘어 합리적 의심을 품고 있으며, 이를 해명하기 위하여 여사에 대한 수사와 소환이 이루어져야 한다고 믿고 있다. 그럼에도 여사는 무사했다.
영화 ‘내부자들’에서 헌법 제11조 1항을 읊어 준 남자는 검사(우장훈)였다. 그 검사는 공정했고 상식적이었다. 자기가 먹은 밥값은 자기가 계산해야 한다고 믿었지만, 오갈 데 없는 남자에게는 밥을 내주었다. 출세에 대한 욕심이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편법과 모략과 결탁으로 출세하고 싶은 마음은 품지 않았다. 그는 어떻게 하든 간에, 검사로서 범인을 잡고 범죄를 수사하고 그래서 얻은 실적으로 더 높은 곳을 향하여 올라가고 싶어 했다.
하지만 우장훈의 세상은 달랐다. 검사가 높게 올라가고 올라가지 않고는 사전에 정해져 있었다. 검사가 하는 노력 이외에도 많은 것들이 변수로 작용했다. 그래서 검사는 끊임없이 발버둥 쳐야 했다. 하지만 그러면 그럴수록 검사의 입지는 좁아졌고, 출세는커녕 범죄자에 대한 단죄조차 어려웠다. 그는 내부자가 되기로 마음먹고 범죄자의 소굴로 들어갔고, 그곳에서 강력한 범죄자 그룹도 부인하기 어려운 강력한 증거를 얻었으며, 그 증거로 세상을 조금 변화시켰다.
지금, 여사를 필사적으로 보호하는 남자도 과거에는 검사였다. 그 남자는 제법 의기로운 적도 있었고, 무모할 정도로 과감한 적도 있었다. 검사였던 이 남자 역시 출세에 대한 욕구는 강력했지만, 어느 정도까지는 사회 정의와 맞물려 있기도 했다. 검사였던 그 남자 역시 적들의 소굴로 들어갔고 그곳에서 강력한 힘을 얻어 자신이 생각하는 단죄를 내리고자 했다. 그렇게 영화 속 남자와, 현실 속 남자는 비슷한 길을 걷는 것 같았다.
하지만 결정적인 차이가 있었다. 영화 속 남자는 검사의 직위를 버렸고, 친구의 구속도 감내했다. 하지만 현실 속 남자는 검사의 직위를 이용했고, 여인의 구속을 막았다. 그리고 자신에게, 자신의 가족에게, 자신이 속한 그룹에게 더욱 엄중했어야 할 칼을, 타인에게, 자신의 상대에게, 자신에게 불복하는 그룹에게만 휘두르는 참극을 빚어냈다. 영화 속 야인이 된 남자는 공정하고 상식적이고자 했지만, 현실 속 대통령이 된 남자는 편파적이고 이기적이었을 따름이다. 그래서 영화로 이미 구경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 사회는 영화가 경고했던 그 세계로 돌아가고 말았다. ‘차별 없는 처벌’을 하지 않고, ‘처벌 없는 차별’을 한 마땅한 결과였다. 그렇게 우리는 20년은 뒤로 가야 했다.
2024-07-04 [18: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