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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감] 뒷모습
일하다가 문득 고개 들었을 때, 업무에 열중하고 있는 다른 동료의 등을 볼 때가 있다. 그럴 땐 동료의 등이 유난히 든든해 보인다. 근거 없는 신뢰가 뭉클 피어오르고 나도 모르게 마음이 놓인다. 누군가 묵묵히 자기 자리를 지키고 있다는 이 안정감은 ‘뒷모습’이라는 단 하나의 장면으로 전달이 된다.
집에 돌아오면 요리 중인 아내의 뒷모습을 본다. 오래된 앞치마, 반쯤 걷은 소매, 그리고 익숙한 냄새. 아무 말이 없어도, 말보다 더 많은 의미가 담긴 장면이다. 익숙할수록 소중해지는 수많은 시간이 함축된 아내의 뒷모습은 하루를 지탱하게 하는 힘의 상징이기도 하다.
지난 주말에는 오랜만에 집에 들른 딸아이를 기차역에서 배웅했다. 출발 시각이 임박해 캐리어를 끌고 오르는 아이 뒷모습을 오래 바라봤다. 타지에서 다녀야 하는 고단한 직장생활, 부모 품을 떠나 홀로 감당해야 할 삶의 무게. 그 모든 것이 딸아이의 어깨에 앉아 있는 듯하다. 말하지는 않았지만 나는 늘 아이의 등 뒤에 마음을 건넨다.
“힘들면 언제든 돌아와.”
뒷모습은 때때로 말보다 진한 언어를 주고받는다. 말이 없기에 더 큰 여운을 남기고, 말이 없기에 오히려 더 많은 감정을 불러온다. 그런 야릇한 감정을 처음 느낀 건, 어린 시절, 방학이 끝나 외갓집을 떠날 때였다.
기차역을 향해 구불구불한 농로를 따라 걷다가 문득 돌아보니, 멀리 농로의 끝단에 선 외할머니가 아직도 우리를 바라보고 계셨다. 세차게 손을 흔들어주고 다시 걷다 돌아보면 그 자리에 계셨고, 다시 한번 돌아보면 여전히 그 자리에 계셨다.
나는 처음으로 내 뒤에 누군가의 감정이 머물 수 있다는 걸 느꼈다. 물론, 그때는 그저 내 뒤가 간지럽고 가슴이 울렁거렸을 뿐이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그 느낌은 지금도 잊히지 않는다.
오늘 아침, 출근하려 문을 나서고, 무심히 계단을 내려가던 순간, 또 한 번 내 등이 간질거렸다. 퇴근 후, 저녁 식사를 하며 아내가 말했다.
“당신 요즘 좀 힘들어 보여요.”
“나? 쌩쌩한데?”
아내에겐 뭔가가 평소와 달라 보였던 모양이다. 무엇이 달라졌기에 그런 말을 했을까. 뭐가 달라졌는지는 나도 모른다. 뒷모습은 타인의 시선에만 존재하는 ‘나’이기 때문일까. 그렇기에 나는 종종 ‘또 다른 나’를 까맣게 잊어버린다.
말없이 내 등을 바라보는 아내, 멀어지는 나를 지켜보던 친구, 혹은 나를 아는 누군가의 기억 속 한 장면으로 남아 있는 뒷모습. 어쩌면, 뒷모습이야말로 ‘나’에 가장 근접한 모습일지 모른다. 본인도 알지 못해 민낯처럼 드러내는 것이 바로 뒷모습일 테니 말이다.
한참 후, 친구의 기억에서 꺼내진 한 장의 사진 같은 이야기로, 혹은 가식적인 웃음으로 서로 악수하고 돌아선 타인의 뒷모습에서 나는 문득 ‘나’의 뒷모습을 대면하게 된다. 그렇듯 뒷모습은 가장 늦게 마주하는 ‘나’다.
마주 본 뒷모습은 의외로 적나라하다. 내 욕망의 흔적이며, 삶에 남겨진 상처이며, 미처 숨기지 못한 속마음이기에 그렇다. 앞모양은 반듯하게 연출했을지 몰라도, 뒷모습은 그 연출을 위해 구깃구깃 접혔거나 너덜거리기도 한다. 그래서 차마 직시하고 싶지 않은 모습일 수 있다.
우린 흔히 앞모습으로 상대를 기억하지만, 어떤 이는 뒷모습이 더 오래 기억될 때가 있다. 지금 이 순간, 나도 누군가에게 어떤 뒷모습으로 기억되고 있을 것이다. 또한, 누군가의 뒷모습으로 내 뒷모습을 적나라하게 대면할지도 모른다.
2025-06-29 [17: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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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감] 보랏빛 성
아버지는 은퇴 후 몇 년 동안 강원도 산골짜기에 조그마한 집을 짓고 사셨다. ‘나는 자연인이다’에 나올 법한 산골이어서 한 번 찾아가려면 해외여행을 하는 정도로 마음의 준비가 필요했다. 도시에서 멀어진 만큼 훼손되지 않은 자연 풍경을 고스란히 누릴 수 있는 조용하고 평화로운 장소였지만, 그만큼 원시적인 삶의 불편함도 모두 감수해야 하는 곳이었다.
어느 여름날, 우리 가족은 모처럼 동생네 가족과 휴가 날짜를 맞추어 아버지 집에 모였다. 집은 작았으나 그 앞에 너른 공터가 있었기에 텐트를 치고 자기에는 충분했다. 물론 ‘도시 여자’인 나와 올케에게는 상당히 불편한 환경이었다. 잠자리도 그렇고 화장실도 그렇고…. 그곳에 머무는 동안 당연히 위생은 포기해야 했고, 여기저기서 나타나는 다채로운 벌레들은 기본 옵션으로 받아들여야 했다. 그러나 세 명의 꼬마 아이들은 마냥 신이 났다. 포도나무에서 포도를 따먹고 씨를 아무데나 뱉어도 되고, 층간소음 걱정 없이 마구 뛰어다니고 소리를 질러도 되고, 심지어 할아버지가 심어놓은 나무 아래 아무데나 가서 바지를 내리고 쉬를 해도 된다고 하니 ‘도시 꼬마’들은 그렇게 좋을 수가 없는 모양이었다. 도시에선 절대 하면 안 된다고 했던 일들이 그곳에서는 더 이상 금기 사항이 아니었다. 꼬마들은 시골을 불편해하지 않았다. 오로지 그 순간 주어진 자유에 빠르게 적응하고 즐거워할 뿐이었다.
단순한 현상만 보지 않고
그 안에 담긴 정성과 진심을 볼 때
발견할 수 있는 새로운 세계
얼마 후, 뛰어놀던 세 꼬마 중에 막내 조카가 조금 지쳤는지 내 옆으로 와서 앉았다. 그리고 양은냄비에 담겨져 있던 포도를 먹기 시작했다. 오물오물, 작은 입으로 야무지게도 먹는다고 생각하며 인형 보듯 바라보았다. 원래도 인형처럼 생긴 아이인데다 막내는 언제나 더 귀여운 법이니까. 그 귀여운 꼬마에게 잘 보이고 싶었다. 그래서 괜히 이것저것 물어보면서 포도알을 하나씩 건네주었다. 막내조카에게 나란 존재는 오랜만에 보는 낯선 어른일 뿐이고, 특별한 친밀감 없이 그저 고모라고 하니 그렇게 부를 따름이었겠지만, 그래도 내 친절이 그럭저럭 마음에 드는 모양이었다. 묻는 말에 대답도 잘하고 건네주는 포도도 잘 받아먹으며 내 옆에 줄곧 앉아 있었다. 먹고 남은 포도 껍질을 바닥에 하나씩 쌓아두면서. 저 조그맣고 예쁜 손으로 포도 껍질도 한 곳에다 예쁘게 두는구나 싶어 그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았다. 그리고 막내조카가 양은냄비의 포도를 다 먹었을 때 나는 그 애가 쌓아둔 포도껍질을 두 손으로 모아들고 음식물 쓰레기통에 갖다버렸다. 그러자 막내조카가 갑자기 뾰로통한 표정이 되더니 제 엄마에게로 가서 무슨 말인가 한참 하는 것이었다. 나는 영문을 모르고 조카에게 다가갔다. 그랬더니 그 애는 작은 두 팔로 잘 만들어지지도 않는 팔짱을 끼며 고개를 한쪽으로 휙 돌려버렸다.
나중에 올케에게 이야기를 들어보니, 막내조카가 나에게 단단히 토라진 이유는 포도껍질 때문이었다. 자기가 힘들게 성을 만들었는데 그걸 고모가 마음대로 부수었다는 것이다. 아차 싶었다. 그 애는 쓰레기를 한 곳에 모아두고 있었던 것이 아니라, 정성스럽게 자신만의 보랏빛 성을 쌓아나가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아이가 쌓은 성을 무지막지하게 부수어버린 파괴자였다. 모처럼 만난 귀여운 조카에게 환심을 사려고 애썼던 시간, 조심스럽게 쌓아둔 친밀감과 유대감, 그런 것들을 내가 한 순간에 깨뜨렸음을 그제야 알아채고 부끄러운 마음이 들었다.
단순한 현상만 보느냐 그 안에 담긴 정성과 진심을 보느냐에 따라, 쌓여있는 포도껍질은 음식물 쓰레기가 될 수도 있고 아름다운 보랏빛 성이 될 수도 있다. 이제 다시 여름의 시작이다. 후회 없이 돌아오는 계절처럼, 내가 무너뜨렸던 성도 다시금 쌓아볼 수 있다면 좋겠다.
2025-06-22 [18: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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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감] 노는 것도 일이다
교직에 종사하는 나에게 수업은 분명 일이다. 학생들에게 가끔 말한다. “정말 미안한 말인데, 나는 수업이 즐겁습니다.” 내게 수업은 제자들과 주고받는 대화의 놀이고, 강의실은 앎이 삶을 외면하지 않고 삶이 앎을 기피하지 않는 지적 놀이터였다. 임금 노동자인 나는 당연히 노동의 대가로 돈을 받아야 하는데, 놀고 돈을 받으니 미안했고, 평가 대상인 학생들에게 수업은 놀이가 될 수 없음을 알기에 더 미안했다. 나는 내 일이, 노동이 아니라 학생들과 함께하는 놀이였으면 했다.
대부분 포유류는 놀이로 학습하고 성장하며 생존 방식을 터득한다. 인간도 마찬가지다. 술래잡기는 공동체의 규칙을 지키며 동료와 협력하는 사회화 과정을 자연스레 터득하고 체력도 기르는 놀이다. 지금도 어릴 적 술래잡기의 기억은 선연하다. 공터에 땅거미가 지고 철길 저편 노을이 붉게 물들어도, 엄마가 호명한 아이들이 하나둘 골목 저편으로 사라질 때까지 우리 놀이는 이어졌다. 그 시절 우리에게는 공터와 놀이가 선생이었다.
미하엘 엔데의 〈모모〉에서 회색 신사들이 “노래하고 책을 읽고 친구들을 만나느라고 귀중한 시간을 낭비하지 말라”고 말했듯, 오늘날 우리는 놀이의 시간을 낭비라 여긴다. 그래서 회색 신사들은 이발사 푸지 씨에게 손님 한 명당 이발하는 데 30분씩 걸린다며, 앞으로는 잡담하지 말고, 15분으로 줄여 시간을 저축하라고 부추겼다. 손님과 대화하며 이발할 때, 푸지 씨의 일은 노동의 시간이 아니라 놀이의 시간이었음을 자신도 알지 못했다.
부모들은 아이들을 학교와 학원에 맡기고 노동에 전념한다. 아이들과 함께 노는 대신 장난감을 사주거나 주말 놀이공원에 데려간다. 하지만 놀이공원은 노는 곳이 아니라 놀이를 판매하는 곳이며 이윤 추구를 위한 산업 현장이다. 노래방, 피시방, 스크린 골프방 등 각종 놀이 산업이 제공하는 상품들은 소비가 곧 놀이임을 착각하게 만들며, 그 소비를 감당하고자 자처하는 노동은 결국 우리가 지금 놀이로 위장된 노동의 세계에 살고 있음을 방증한다.
문화인류학자 요한 하위징아는 〈호모 루덴스〉에서 인간의 본원은 노동이 아니라 놀이라고 하였다. 문화가 놀이를 낳은 것이 아니라, 놀이가 문화를 만들며, 결국 인류는 노동이 아니라 놀이로 문명을 발전시켜 왔다는 그의 주장에 나는 매료되었다.
하위징아는 놀이 정신이 근대에 와서 쇠퇴했다고 보았다. “놀고 있네”라는 비아냥의 언어처럼, ‘노는 인간’에 대한 시선은 차갑다. 근대 이후 세계가 시장을 중심으로 재편되며 이윤 추구는 윤리가 되었고, 놀이는 폄하되고 노동은 높이 평가받았다. 베짱이가 뼈아픈 반성 끝에 개미의 삶을 지향했듯 노는 인간은 노동하는 인간으로 변신하거나 개조되었고, 우리는 시장에서 더 많은 이윤을 내기 위한 노동에 매달리며 놀이 정신을 잃어갔다.
우리는 일하지 않고 먹고살 길이 없다. 그럼에도 여전히 일을 노동이 아니라 놀이로 여기며 살아가는 이들이 있다. 놀이(play)의 반대말은 일(work)이 아니라 노동(labor)이다. 이들에게는 일상이 놀이고 일터는 놀이터가 된다. 제대로 놀아본 사람들은 안다. “노는 것도 일”이란 말처럼, 노는 게 얼마나 힘든지. 본디 놀이는 고단한 즐거움이 아니든가.
우리는 지금 소비를 놀이로 착각하며 살고 있다. 내일의 노동을 위한 놀이는 놀이가 아니라 노동의 일부일 뿐이다. 제대로 놀려면, 우연과 의외성에 자신을 맡기고 세상 곳곳에 숨겨진 차이를 발견하며, 스스로 재미를 만들어 낼 줄 알아야 한다. 바로 지금 여기에서, 순수한 즐거움으로 노는 인간만이 자유롭고 자신의 무한한 가능성을 열어 새로운 세계를 만든다.
2025-06-15 [17: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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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감] 젊다, 모두 너무 젊다
허공에 가득 찼던 흰 꽃들이 떨어진다. 이팝꽃 때죽나무꽃이 후드득 내려앉는다. 떨어지는 것이 어디 계절 꽃뿐이랴. 떨어지는 열매, 떨어지는 풀잎, 떨어지는 이슬…. 그러나 떨어져 버린 목숨만큼 아깝고 애달픈 것이 있을까. 무엇보다 타인을 위해 생명을 바친다는 것은 인간의 가장 존엄한 희생정신이다.
여기, 재한유엔기념공원에 그 거룩한 역사가 펼쳐져 있다. 숭고한 죽음이 단단한 석비로 돋아났다. 과거와 현재를 연결하고 산 자와 죽은 자를 이어주는 흔적들, 육체는 소멸되고 결코 잊어서는 안 될 이름들만 몇 줄의 글자로 남았다. 선지자들이 만물이 하나라고 이르듯 과연 삶과 죽음도 하나라고 주장할 수 있을까. 죽음이라는 것은 육신이 흩어지는 것이니 몸속 원소도 해체되어 사라져버리는 일. 하지만 사라진다는 것은 틀렸다. 육체의 질료가 다른 삶에게로 옮겨가는 과정일 뿐. 그러므로 우리는 믿는다. 이곳 무덤에 푸른 제비꽃이 피고 녹색 잔디가 싱싱 뿌리 내리듯이 그들의 영혼과 정신은 불멸한다는 것을.
오랜 수탈에 시달려 헐벗고 가난했던 나라, 그 힘없는 나라에 전쟁은 시작되었고, 북새통에 급히 마련된 묘지는 열악하기 짝이 없었다. 한국전쟁을 종식시키겠다고 공약을 내세웠던 미국 대통령 당선자의 유엔묘지 참배를 앞두고 이 허술한 묘역을 어떻게 정리하였던가. 기록을 살펴보면 부검 후 묻은 전사자의 주검을 다시 꺼내 햇볕에 말렸다가 커다란 지퍼백에 넣어 되묻었는데, 시신을 말리는 악취가 퍼졌고 전사자를 감싼 옷과 담요를 씻어낸 용당 앞바다가 붉게 물들었으며 비릿한 피 냄새가 사방에 진동하였다. 하물며 한겨울 엄동설한에 어디에서 푸릇한 잔디를 구해올 것인지에 대해 발을 구르고 있을 때, 어느 대기업 회장의 아이디어로 잔디 대신 푸른 보리 싹을 심었다는 일화 또한 슬픈 역사로 남았다.
머나먼 이국땅 한국에서 자유와 평화를 위해 목숨을 걸고 싸웠던 그때의 청년들은 아흔을 훌쩍 넘긴 백발 노병이 되었고, 안장자 유족들은 물론 자식 세대도 고령에 접어들었으며, 그들이 목숨 걸고 바친 나라는 이제 세계 강국이 되었다. 그 속에 한국 청년들이 함께 누워 있다. 창녕과 영산지역 전투에서 산화한 카투사들이다. 육군 일등병 도재빈의 묘, 홍옥봉의 묘, 김록이의 묘, 오학연의 묘, 박지호의 묘를 거쳐 묘지 번호 369번, 무명용사의 묘 앞에 발길을 멈춘다. 젊다, 모두 너무 젊다.
그들 묘비 앞에서 로렌스 비니언의 ‘전몰용사를 위하여’라는 시를 아는 자라면 “살아남은 우리는 늙겠지만 그들은 늙지 않으리라. 세월 앞에 추해지거나 좌절하지도 않으리라. 해가 저물고 그리고 아침이 오면 우리는 언제나 그들을 기억할 것이다”라는 구절을 저절로 떠올릴 것이다. 그리고 안장된 전몰용사들의 전사일에 맞춰 경비팀 직원들이 매일 아침 헌화한 ‘오늘의 추모용사’를 찾아 참배하는 일도 빠트리지 않으리라.
전몰장병 중 최연소 소년병인 도은트 일병도 반드시 기억할 이름이다. 당시 호주에서는 군에 지원할 수 없는 열일곱 나이로 가족 몰래 형 이름을 빌려 참전했다. 짧은 생을 마감한 도은트 군의 넋을 기리고자 만든 작은 개울, ‘도은트 수로’에는 물고기도 살아 있음이 송구한지 몸을 납작 엎드렸다. 그 너머 대형 분수 위로 찬연히 솟은 불기둥이 있다. 높다란 기둥 위에는 빗줄기가 쏟아져도 365일 꺼지지 않는 추모의 불꽃이 피어오른다. 타국의 수많은 용사가 목숨을 잃은 땅, 그중 14개국 2330명이 이곳 공원에 잠들어 있다는 사실을. ‘영원히 기억하겠습니다’라는 국제추모식 문구 앞에서 거듭 생각해 봐도 그들은 정녕, 너무 젊다.
2025-06-08 [17: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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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감] 인간을 넘보는 기계
몇 해 전 뉴스에서 엄청난 AI가 등장했다고 호들갑 떨었다. ‘챗지피티(ChatGPT)’라는 것이었고, 나도 그게 신기했다. 호기심에 PC에 설치하고 질문도 던져보았다. 흠, 그럴듯하게 대답하는군. 한데, 이걸 어디다 쓴단 말인가? 인공지능? 아직 멀었어. 그렇게 단정하고 한참을 잊고 지냈었다.
현재의 나는 그 인공지능에 익숙해지려 노력하고 있다. 궁금한 것이 있으면 챗지피티에 묻는다. 질문의 절반은 다른 인공지능에 질문할 요령을 묻는 것이다. 이제 전문적으로 특화된 다양한 인공지능이 등장했기 때문이다. 이미지나 영상을 만드는 AI, 리서치하고 보고서를 만드는 AI, 심지어 코딩을 짜주는 AI도 등장했다.
각각의 AI 툴을 배우느라 진땀 빼야 했을 과정이 생략되고, 몇 마디 말로 결과물을 얻을 수 있다. 다만, 최적의 결과물을 얻기 위해선 지시할 말을 다시 인공지능에 물어봐야 한다. 이것을 ‘프롬프트’라고 한단다. 사람의 말을 인공지능이 알아듣게 바꿔 묻는 현실이 아이러니하긴 하다. AI는 더 이상 전문가의 영역이 아니다. 일상의 비서이고, 업무 동료이며, 때로는 나를 가르치는 선생님 역할도 해낸다.
상상이 현실로 변하는 건 순식간이다. 그러니 SF영화에서나 보던 AI의 무서운 변신도 마냥 무시할 수 없게 되었다. 그런 상황에 자연히 따라붙는 질문이 있다. 과연 인공지능은 인간처럼 생각하고 판단할 수 있을까? 물론, 혼자 고민해봐야 별 뾰족한 수는 없다. 그래서 챗지피티에게 물어봤다. 너는 인간처럼 자율적으로 생각하고 판단할 수 있냐? 그랬더니 꽤 장문의 대답이 나왔다.
“나는 인간처럼 자율적으로 생각하거나 판단하지는 않습니다. …중략… 내 판단은, 자의적인 것이 아니라 통계적인 최적화의 결과입니다. 자유의지를 행사하지 않으며, 욕망도, 후회도, 두려움도 느끼지 않습니다. 인간은 불확실성 앞에서 흔들리며 방향을 찾지만, 나는 확률 속에서 가장 안정된 문장을 출력할 뿐입니다. …중략… 그래서 이렇게 대답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나는 자율적으로 생각하지 않지만, 당신이 자율적으로 생각하도록 도울 수는 있습니다. 그것이 내가 존재하는 이유이기도 하니까요.”
위안이 되는 대답 같긴 한데, 왠지 아니꼽다. 아니, 이놈이 뭔 대답을 이렇게 논리적으로 따박따박 잘 하는 거야? 인간 비위를 살살 맞춰가면서? 따지고 보면 이보다 먼저 짚고 넘어가야 할 부분이 있다. 우리 인간이야말로 정말 ‘자유의지’로 생각하고 판단하는가? 하는 질문이다.
자유의지가 뭘까? 원하는 걸 선택할 수 있는 능력인가? 철학자 쇼펜하우어는 냉소적으로 말했다. ‘인간은 원할 수 있는 자유는 있지만, 무엇을 원할지는 자유롭지 않다.’ 이 말은 우리가 뭔가 원하는 걸 선택했을 때, 과연 그 ‘원하는 것’의 근거가 무엇이었나에 관한 성찰이다.
조금만 깊이 들여다보면, 정말 내 의지로 선택했는지 의심스럽다. 배고프면 음식을 찾고, 사랑하면 다가가고, 두려우면 피한다. 이 모든 반응의 기저에 신경계의 전기신호와 호르몬작용, 유전자의 프로그램이 관여한다. 굳건한 내 의지로 다짐했던 결심들이 내 두뇌에 저장된 기억 데이터와 다양한 호르몬으로 파생된 욕망과의 결합물이 아니라고 단정할 수 있을까?
그러니 기계가 인간을 넘보는 이 시대에 우리가 던져야 할 질문은 ‘우리가 인간임을 어떻게 증명할 수 있는가’가 될지도 모른다. 인간은 정보의 최적화를 도출해내는 프로그램이 아니다. 당연히 인간은 정답을 모른다. 후회하고, 망설이고, 스스로 의심하는 그 불완전한 과정. 완벽한 알고리즘은 흉내 낼 수 없는 오직 인간만의 혼란스러운 자의식에서 끊임없이 물음을 던지는 존재이기도 하다. 그런 질문 속에서 우리는 비로소 인간답게 되는 게 아닐까 싶다.
2025-06-01 [17: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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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감] 관성과 변화
나른하게 누워있는 고양이 사진에 이런 글귀가 적혀 있다. ‘아무것도 안 하고 싶다. 이미 아무것도 안 하고 있지만 더 격하게 아무것도 안 하고 싶다.’ 한때 유행했던 밈(Meme)이다. 침대에 누운 채로 시간을 흘려보내 본 사람은 알 것이다. 그 상태를 유지하는 것이 얼마나 편하고 쉬운 일인지. 그건 그가 특별히 게으른 사람이어서가 아니다. 어떤 힘이 가해지지 않는다면 우리는 기존의 상태를 계속 유지하려고 한다. 가만히 있는 상태에서뿐만이 아니라 어떤 행동을 반복하고 있을 때에도 마찬가지다. 특별한 계기가 없으면 지금 하고 있는 행동 패턴을 반복하는 것이 편하다. 뉴턴의 제1운동법칙, ‘어떤 물체에 외부에서 힘이 작용하지 않는 한, 정지해 있던 물체는 계속 정지해 있으려 하고, 운동 중인 물체는 계속 같은 속도로 직선 운동을 한다.’ 이 법칙을 삶의 여러 측면에 폭넓게 적용해보면 우리의 관성적인 행동이 매우 자연스러운 물리 현상이라는 점을 새삼 느끼게 된다.
그러나 자연스러운 현상이라고 해서 모두 긍정적인 것은 아니다. 잘못 굳어진 관성은 하루를 망칠 뿐만 아니라 몇 년의 세월을 그릇된 방향으로 흘러가게도 한다. 나는 20대 후반에 취미로 시작했던 풍물패 활동을 지금까지 이어오고 있는데, 대학 풍물패 출신이었던 초창기 멤버들과는 달리 기본기가 아예 없는 상태에서 모임에 들어온 케이스였다. 선배들은 얘를 어떻게 해야 하나, 난감해 하면서도 내치지 않고 끈기와 인내로 장구 강습을 해주었다. 그러나 대학 시절 매일 동아리방에 드나들며 악기를 두드리고 방학 때마다 각종 전수 프로그램을 통해 기량을 쌓아나가던 이들과 내가 같을 수는 없었다. 평일에는 직장 생활을 하고 주말에만 두어 시간 연습을 하는 처지에 기본기를 차곡차곡 쌓아나가기는 아무래도 어려웠다. 일주일에 한 번 모이는 상황이었기에 선배들도 나에게 몇 달 동안 ‘쿵’만 치라고 할 수는 없었을 것이고, 나로서도 빨리 다양한 가락을 익혀 선배들과 같이 공연을 하고 싶은 욕심이 컸다. 그러다보니 기본 타법이나 자세가 바르게 잡히기 전에 여러 가락들을 배우며 공연 연습을 하게 되었고, 가락을 외우는 일과 빠르게 속도를 내는 일이 시급했기에 잘못된 타법과 자세는 그대로 굳어지고 말았다. 가끔 선배들이 지적을 해주기도 했지만 그 순간에만 잠시 신경을 쓸 뿐 나는 금세 기존의 잘못된 습관을 되풀이하게 되었다. 늘 하던 대로 하는 것이 편하니까. 그러나 잘못된 관성은 결국 문제 상황을 맞닥뜨리게 하고 그로 인한 한계를 직면하게 한다. 나는 가락을 다 외웠으면서도 일정 빠르기 이상의 속도를 내지 못했고, 힘을 빼고 쳐야할 부분에서도 자꾸만 힘을 줬다. 그것이 잘못된 타법 때문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지만 여전히 고치기는 쉽지 않다. 뉴턴의 제1운동법칙에 따르면 이러한 관성을 깨기 위해서는 힘의 작용이 필요하다. 물체의 운동에 국한한다면 그건 외부의 물리적인 힘을 뜻하는 것이겠지만, 우리의 관성적 행동 패턴에 적용해 본다면 그 힘은 강한 내적 동기나 새로운 목표, 변화를 향한 의지 등으로 볼 수 있겠다.
변화는 어렵다. 과거에 우리가 고수했던 사고방식이나 이미 굳어져버린 패턴에 자꾸 부딪친다. 익숙해진 무언가를 바꾸는 일은 새로운 무언가를 시작하는 것보다 더 큰 에너지를 필요로 하므로, 지금까지 그 일에 들인 시간보다 기존의 관성에서 벗어나는 데 더 오랜 시간이 걸리기도 한다. 이는 개인에게 국한된 문제만이 아니다. 사회나 국가 차원의 집단적인 관성도 있다. 사회 전체의 잘못된 관성을 멈추거나 변화시키려면 엄청난 에너지가 필요하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에게는 그러한 내적인 힘이 충분히 있다는 것을, 그 힘으로 더 나은 세계를 찾아갈 수 있으리라는 것을 나는 믿는다.
2025-05-25 [18: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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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감] 나는 반항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존재한다
나는 청소년기에 알베르 카뮈의 〈이방인〉을 읽고 주인공 뫼르소를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당시 일본어를 거친 중역본의 조악한 번역 때문인지, 아니면 작품을 이해하기에 내가 너무 어렸기 때문인지 모르지만, 무척 재미없는 소설로 기억한다.
최근 카뮈의 책을 다시 읽었다. 소설 〈이방인〉과 〈페스트〉, 에세이 〈시지프 신화〉와 〈반항하는 인간〉, 그리고 희곡 〈계엄령〉까지, 결국 카뮈의 작품 세계는 부조리와 반항으로 귀결되었다. 카뮈의 부조리는 두 차례의 세계대전을 치른 전후 유럽 사회에만 해당하지 않았다. 〈페스트〉를 다시 읽으며, 우리를 위태롭게 하는 페스트는 어떤 형태로든 수시로 준동할 수밖에 없음을 깨닫는다. 그것은 감염병, 전쟁, 계엄령, 혹은 다른 어떤 것일 수도 있다.
5월 연휴 나들잇길 고속도로에서 사고를 목격했다. 대형트럭이 가족이 탄 승용차를 추돌했다. 파편이 사방으로 튈 만큼 차는 부서졌고, 충격으로 튕겨 나간 차가 다시 앞 차를 추돌했다. 봄날 연휴 나들이에 나선 그 가족은 무슨 잘못이 있었을까. 전시 혹은 그에 준하는 비상사태가 아닌데 계엄령을 선포하는 정부, 사회를 지탱해야 할 의료와 법률이 공동체를 위태롭게 하는 상황, 늘 밝게 웃으며 인사하던 이웃집 아이가 소아암으로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 이들은 어떤 합리성으로 설명할 수 있을까.
우리가 사는 세상은 부조리하다. 애초 인생에 정해진 의미란 없고, 세상에는 질서나 인과 관계가 없는 것 투성이며, 때때로 내 의지와 무관한 결과를 맞닥뜨린다. 모든 인간은 죽는다는 것, 〈이방인〉의 구절처럼, 우리 모두 사형선고를 받은 채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을 제외하고 인생에 규칙은 없다. 나쁜 사람은 벌을 받는다는 사실을 믿을 수 없는 세계도 그 세계를 살아가는 우리 삶도 부조리하다.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시지프는 힘들게 정상으로 밀어 올린 바위가 순식간에 아래로 굴러떨어지는 것을 바라본다. 정상을 향해 다시 바위를 밀어 올려야 하는 부조리 앞에서, 그는 묵묵히 들판으로 내려간다. 그리고 바위를 밀어 올린다. 굴러떨어질 것을 알면서도 바위를 밀어올리는 시지프와 통장이 금방 텅 빌 것을 알면서도 통장을 채우고자 출근하는 직장인은 무엇이 다를까.
이토록 부조리한 삶의 형벌 앞에서 시지프와 우리의 선택은 무엇일지 고민한다. 카뮈는 부조리에 반항하라고 조언한다. 부조리한 현실을 혐오하거나 무기력하게 굴복하지 말기를, 미래에 나아질 거란 막연한 희망에 기대거나 절대자의 구원에 호소하지 말기를, 카뮈는 우리에게 권한다.
소설 〈페스트〉의 감염병은 카뮈가 반항하려고 한 부조리의 은유였다. 페스트 이전 오랑 시민의 삶은 주중 돈벌이와 주말 오락이 반복되는 권태로운 일상이었다. 페스트가 창궐하자 공동체를 위험에 빠뜨린 감염병에 맞서 시민은 ‘보건대’를 조직한다. 외지인 타루와 의사 리유를 중심으로 시작한 보건대는 시청 공무원 그랑, 기자 랑베르, 신부 파늘루, 판사 오통 등이 합류하여 페스트라고 하는 공동의 적에 맞서 연대하며 반항한다.
카뮈가 말한 반항은 자유이고 열정이다. 열정이 있는 이는 자유롭고, 자유인은 부조리한 세상에 순응하지 않고 반항한다. 반항은 고립되지 않으며 이웃이 있다. 내가 반항하는 순간, 반항하는 다른 내가 모여 우리가 된다. 공감을 통한 연대는 사피엔스의 본능이기에 공동체를 위협하는 적이 있을 때 ‘우리’가 되는 것이다. 그래서 카뮈는 〈반항하는 인간〉에서 “나는 반항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존재한다.”라고 하였다. 선의를 지닌 개인이 다른 개인과 연대하며 부조리에 반항할 때, 비로소 우리는 존재한다.
2025-05-18 [17: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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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감] 오리를 품다
도심 한복판에 고총이 올록볼록 돋아 있다. 길게 뻗은 산줄기에 거대한 알이라도 밴 듯 봉우리마다 큰 고분을 중심으로 작은 봉분들이 모여들었다. 모두 열여덟 기로 삼국시대 선조들이 조성한 지배집단의 무덤으로 추정한다.
연산동고분군이 세상에 처음 알려지게 된 것은 일제 강점기에 세 명의 도굴꾼이 언론에 보도되면서부터였다. 철제 갑옷과 투구를 비롯하여 굽다리접시와 그릇받침, 긴목항아리 토기들과 화살통, 쇠촉 등의 철기와 무기류가 출토됐다. 하지만 안타까운 일은 도굴로 부장품이 대부분 망실되었다. 그나마 출토된 조그만 오리모양토기가 남아 있다는 사실에 위안을 얻는다.
물론 신발모양이나 등잔모양과 낙타모양 같은 세련된 토기도 관심이 없는 것은 아니나, 연산동 무덤의 오리모양토기는 이유 없이 애정이 간다. 그것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사람도 그렇지 않은가. 그냥, 무조건 좋은 경우이다. 그동안의 오리모양토기는 굽다리 위에 오리를 올려놓은 형태가 대부분이었다. 그들 오리는 한결같이 등 위에 잔의 아가리 모양을 붙였거나 꼬리 쪽에 구멍을 내어 그릇 역할을 도우며, 구멍에 기름을 넣어 등잔 기능을 한 것이 대부분이었다. 그것들은 주로 몸집이 대칭적이거나 고도비만인 것이 많은데 기우뚱기우뚱 걷는 오리의 뒷모습을 상상하면 저절로 웃음이 난다.
이곳의 돌덧널무덤에서 출토된 오리모양토기를 한번 보시라. 사진은 검색만 하면 나오고 실물은 부산박물관에 고이 모셔놓았다. 물론 발견 당시에는 여러 조각으로 깨져 있었으나 복원과정에서 접착되었다. 가히 생김새가 독보적이다. 몸을 낮게 엎드렸다. 눈앞에 물고기 사냥감이라도 있는 양 단풍잎 같은 양발은 깃털 아래 숨긴 채 바짝 긴장하고, 바람에 마른 풀이라도 날리면 후다닥 날개를 펴고 쏜살같이 달려들 것만 같다. 콩알만 한 콧구멍은 들창코처럼 치들려서 비 오는 날이 걱정되기도 하지만 그 때문에 후각은 더 발달하였을 듯하다. 부리가 넙덕하고 짧아서 거추장스럽지 아니하고 뻐끔하게 꺼진 눈은 먹이를 놓치지 않으려는 듯 미동도 없다. 엉덩이 안쪽은 결실되어 텅 빈 속을 드러내 놓았지만 그렇다고 결코 가벼운 행색이 아니다. 천 년을 넘게 무덤 속에서 제 주인을 지키고 영혼을 안내했으리라 생각하니 가상하기 짝이 없다.
그러면 오리는 어떤 동물인가. 샤머니즘의 우주창조신화에 의하면 태초의 물바다에서 인간을 구원한 동물은 오직 오리뿐이었다. 오리가 수중 밑바닥까지 잠수하여 흙을 퍼다가 물 위에 붓고 계속 쏟아부어 그 흙이 쌓여 오늘날의 땅이 되었다 한다. 공중을 날고 물에서 헤엄치며 땅 위를 걷는 탁월한 능력이 있는 오리야말로 땅과 하늘을 연결하기에 충분한 자질이 있다고 여겼다. 오리를 한 번이라도 키워본 사람이라면 오리의 위풍당당한 걸음걸이를 경외하지 않을 수 없다. 뒷걸음치지 않고 직진의 걸음을 걷는 강인함을 알면, 오리가 과연 인간보다 못하다고 단정 지을 수 있겠는가.
일렬로 늘어선 고분군을 한 바퀴 도는 데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오리모양토기가 출토된 커다란 봉분 앞에서 한참을 멈추었다. 그때 산책 나온 동네 노인이 도굴꾼들 때문에 거칠산국 무덤 속이 텅텅 비어버렸다고 한숨을 쉬며 지나간다. 내 키보다 높고 큰 이 고분 속에는 이제 오리모양토기는커녕 더 이상 잠자는 오리도 오리알도 없다. 유물이 모두 빠져나가고 주인도 알 수 없는 빈 무덤 곁으로 쓸쓸한 바람만 휘돌며 지나간다.
2025-05-11 [18: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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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감] 망각의 길목에서
전화벨은 저녁 식사 시간에 자주 울린다. 김칫국을 한 숟갈 떠 올리려던 찰나, 익숙한 소리에 한 방향으로 고개를 돌린다. 아내는 휴대폰 화면을 보자마자 중얼거렸다.
“또, 아빠다.”
화면의 통화 터치를 하기도 전에 벨 소리가 뚝 끊긴다.
“어휴, 확인을 안 할 수도 없고…”
미간을 찡그린 아내가 다시 전화를 걸고, 이내 장인어른 목소리가 새어 나온다. 걸걸한 목소리에 반가움이 잔뜩 묻어있다.
“여어, 우리 딸. 웬일이고? 니가 전화를 다 하고?”
“웬일이라니? 아까도 통화했잖아요.”
“어엉?”
“아빠! 왜 자꾸 전화를 걸다 끊어요?”
“내가? 내가 언제?”
“아빠! 하루에도 몇 번씩 이래. 시도 때도 없이 전화 걸고 끊고… 내가 못 살겠다 진짜.”
아버님 증상은 몇 달 전부터 눈에 띄게 심해졌다. 비슷한 연배의 여느 노인들보다 건강하고, 정신이 맑았던 분이었다. 산책하러 간다며 집을 나선 뒤, 행방이 묘연해지는 일도 몇 번 있었다. 처음에 아내는 경찰에 신고하고, 남동생과 함께 동네 골목골목을 뛰어다녔다. 그런 일을 몇 번 겪어내자 이제는 아버님의 반복된 패턴을 알게 되어 걸려오는 어머니 목소리 톤으로도 상황을 유추할 수 있을 정도였다.
“아버님 없어졌다는 전화가 아니어서 다행이지.”
내 말에 아내는 버럭 소리를 높인다.
“진짜 기억 못 하는 건지, 일부러 그러는 건지… 게다가 왜 자꾸 나만 찾는 거야? 남동생도 있잖아? 아, 모르겠어. 나도 이제 지쳐…”
아내의 짜증에 속절없이 입술을 깨물다가 문득, 며칠 전 아내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아버님 치매약을 타러 아내가 부산에 다녀온 날이었다.
“아빠가… 울었어.”
“아니, 왜?”
무슨 큰일이 생겼나 싶어, 되물었는데, 아내 목소리는 의외로 차분했다.
“우리 딸 애기 때 얼매나 예뻤는지 아나? 하면서 우시는데… 눈물만 뚝뚝 흘리더라.”
아내는 울음 섞인 침을 삼키더니 조용히 덧붙였다.
“치매 때문인지… 그냥, 그냥. 내 손만 잡고 울었어.”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몰라 우물쭈물하면서도 어렴풋이 짐작은 되었다. 아버님도 알고 있었을 것이다. 기억이 점점 지워지고 있다는 걸. 행복했던 순간들, 그래서 소중하게 간직했던 기억들이 하나하나 지워지고 있다는 걸 인정해야 했을 때의 감정을 무슨 언어로 표현할 수 있을까.
연애하던 시절, 아내는 어릴 적 아빠 이야기를 자주 했다. 외항 선원이었던 아버님이 몇 달 만에 집에 오면 마냥 좋았다고 했다. 벼르고 별렀던 아빠와의 시간이 기뻤던 만큼, 그 딸의 환한 표정을 마주한 아빠는 또 얼마나 행복했을까.
치매는 아이러니하게도 기억하려는 이들의 마음을 가장 깊이 흔든다. 그들의 언어는 완성된 문장이 아니기 때문이다. 두세 번 울리고 꺼져버리는 전화벨처럼 구멍이 숭숭 뚫린 문장이기 때문이다. 자꾸만 반복되는 아버님의 시도는, 망각의 길목에서 기억을 향해 손을 뻗은 최선의 몸부림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그 끊어진 신호음이 가슴에 아린다.
아버님은 여전히 연결을 시도하고 있다. 그리고 우린 그저, 구멍 뚫린 수화기를 들었다가 놓으며 어리석은 한숨만 내쉴 뿐이다.
2025-05-01 [18: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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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감] 흔들리지 않게
춤을 배우기 시작했다. 계획에 없던 일이었다. 살면서 춤을 배우게 될 거라고는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그러나 때때로 어떤 일들은 특별한 의도나 계획도 없이 그냥 벌어진다. 물론 그 일도 내가 선택했기에 내 삶의 일부로 편입된 것이지만, 다른 선택지들을 두고 왜 굳이 그것을 선택했는지는 논리적으로 설명하기 어려울 때가 있다. 그렇게 시작된 일들은 잠시 스쳐 지나가는 경험들 중 하나가 되기도 하고, 내 인생에서 매우 중요한 부분이 되기도 한다. 소설 쓰기도 그렇게 시작되었다. 어린 시절부터 책을 읽고 글을 끄적거리는 것은 좋아했으나 소설가가 되겠다는 생각은 해본 적이 없었다. 그저 평범하고 흔한 문학 소녀였을 뿐이었는데, 소설을 써보는 게 어떻겠냐는 누군가의 한 마디가 내 안의 무엇을 건드렸던 것인지 모르겠다. 그렇게 습작을 시작했고 어느 순간 글쓰기는 내 삶에서 가장 중요한 일이 되었다. 스쳐 지나가는 경험이 될지, 인생의 핵심적인 사건이 될지, 시작하는 순간에는 알 수가 없다. 그러니까 일단 시작해 본다. 그리고 노력해 본다. 그러다보면 내가 그 일을 지속할 수 있는지 없는지, 계속 하고 싶은지 아닌지, 서서히 알게 된다.
나는 전통 예술을 좋아한다. 물론 깊은 조예를 갖고 있는 것은 아니고 취미 수준이다. 가끔 공연을 보러 가기도 하고, 시민 대상으로 하는 국악 강좌가 있는지 유심히 살펴보기도 한다. 아마추어 풍물패에서 장구를 치고 있긴 하지만 기회가 된다면 해금이나 가야금 같은 현악기도 배워보고 싶은 마음이 늘 있었다. 그런데 올해 국악원의 시민 강좌에 뜬금없이 한국무용 과정을 신청한 것이다. 평소 배우고 싶었던 해금이나 가야금 강좌도 있었는데 말이다.
왜 그랬지, 하고 고개를 갸우뚱하며 첫 수업에 갔다. 그리고 선생님 얼굴을 보는 순간 가슴이 뛰었다. 사람 얼굴을 잘 기억하지 못하는 편이지만 때때로 어떤 얼굴은 단 한 번 보고도 잊을 수 없는 경우가 있고, 선생님의 얼굴이 그랬다. 정확히 말하자면 흔치 않은 표정이 깃든 얼굴이랄까. 나는 몇 년 전 공원을 산책하다가 우연히 그분의 춤을 본 적이 있었다. 아무 장식도 없는 새하얀 한복을 입고 추는 ‘허튼춤’이었다. 시간 여유가 있었기에 별 생각 없이 자리에 앉아 구경을 했는데, 춤에 대해 문외한인 나조차도 순식간에 빠져들게 만드는 대단한 춤판이었다. 점차 고조되는 춤사위. 그리고 음악이 멎었을 때 마침내 모든 것을 다 소진해버린 듯이 그분은 양팔을 벌린 채 바닥에 털썩 누웠다. 그 순간의 표정을 나는 잊을 수가 없다. 모든 에너지를 춤에 다 쏟아 부어 완전히 소진되었으나, 그래서 오히려 가득 채워진 것 같은 표정이었다.
그런 선생님에게 춤을 배우게 되다니. 갸우뚱하던 마음은 대번에 사라지고 모든 게 운명인 것만 같았다. 열정이 샘솟고 수업이 기다려졌다. 물론 열정만으로 다 되는 건 아니었다. 나의 두 팔은 올라가야 할 때와 내려가야 할 때를 알지 못하고 자주 허우적거렸다. 다음 동작이 뭐지, 생각하는 순간 이미 한 장단이 지나가버렸다. 장구를 칠 때는 너무 느려서 지루하기까지 했던 굿거리장단이, 춤을 출 때는 EDM 비트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가장 어려운 것은 한 발을 들고 한쪽 발만으로 360도 빙그르르 회전하는 동작이었다. 우아하게 한 바퀴를 돌고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제자리에 와 있어야 하는데, 내 몸은 매번 중심을 잡지 못하고 흔들렸다. 도종환의 시 구절을 떠올렸다. ‘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랴.’ 그래, 처음부터 흔들리지 않고 도는 몸이 어디 있을까. 연습하다 보면 언젠가는 중심을 잃지 않고 우아하게 한 바퀴 돌게 될 날이 오겠지. 그리고 마침내 열 바퀴를 빙글빙글 돌아도 흔들리지 않게 될 내 모습을 상상하면서 몸을 움직일 때면, 나의 하루가 조금은 더 단단해진 기분이 든다.
2025-04-24 [18: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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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감] '폭싹 속았수다'와 앙드레 고르의 편지
아내와 함께 드라마 ‘폭싹 속았수다’를 보았다. 우리 인생의 서사를 사계절로 구성한 드라마의 마지막 회를 보며, 아내와 나는 약속한 듯 오열했다. 중환자실에서 가쁜 숨을 몰아쉬며 떠나가는 남편 관식을 보며 아내 애순은 눈물을 멈추지 못했고, 어릴 때 한동네에서 자라 부부가 된 우리는 드라마 속 사랑의 역사에 공감하며 눈물을 멈출 수 없었다. 평소 아내는 내가 자신보다 하루라도 더 살아야 한다고 말했다. 기타를 치며 김광석의 노래 ‘어느 60대 노부부의 이야기’를 부르면, 언젠가 우리도 저 노랫말의 이야기를 살아가는 나이가 올 거라며 쓴웃음을 지었는데, 어느새 그 나이가 되었다.
드라마가 끝나고, 얼마나 울었는지 마른 눈물이 소금 길을 만들어 세안을 다시 해야 했다. 애순은 관식을 먼저 보냈지만, 당신은 건강 관리 잘해서 나를 먼저 보내줘야 한다는 당부를 강조하는 아내를 토닥이며 잠자리에 들었다. 쉬 잠이 오지 않았다. 뒤척이다 18년 전에 읽은 책을 떠올렸다. 앙드레 고르의 〈D에게 보낸 편지〉를 읽을 때 나는 40대의 나이였다. ‘어느 사랑의 역사’란 부제가 붙은 이 책은 오스트리아 출신의 철학자이자 생태주의 이론가인 앙드레 고르가 그의 아내 도린에게 쓴 편지 모음이었다.
이 책은 고르가 아내 도린에게 쓴 사랑의 고백이자 유서였다. “세상은 텅 비었고, 나는 더 살지 않으려네.” “우리는 둘 다, 한 사람이 죽고 나서 혼자 살아가는 일이 없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서로에게 이런 말을 했지요. 혹시라도 다음 생이 있다면, 그때도 둘이 함께하자고.” 불치병을 앓는 아내를 간호하다 아내의 생이 다함을 예감한 고르는 아내와 함께 죽음을 맞이했다. 경찰에게 알려달라는 쪽지를 문에 붙여 놓고. 그때 부부의 나이 여든넷과 여든셋이었다.
앙드레 고르는 일자리 나누기와 최저임금제의 필요성을 역설하고, 생태주의를 정립한 이론가이다. 사르트르는 그를 “유럽에서 가장 날카로운 지성”이라고 평가했다. 고르가 세상을 떠나기 1년 전 아내에게 편지를 쓴 이유가 궁금했다. “나는 살면서 많은 책과 연구를 내놓았어요. 그것들이 내가 누구인지 말해주겠죠. 하지만 사람들은 도린에 대해서는 무엇을 알까요? 나는 아내를 알려야 했어요.” 고르는 아내를 기록하고자 했다. 알랭 바디우는 〈사랑 예찬〉에서 우연을 영원으로 기록하여 고정하는 것이 사랑이라 하지 않았던가.
당신과의 만남은 우연이며 내가 좋아하는 당신이 나를 좋아해 주는 것은 기적이다. 우연이 기적을 거쳐 운명에 이르는 과정이 사랑이다. 하지만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은 상대가 나의 존재를 위태롭게 하는 행위이며, 혼자서는 절대 겪지 않을 ‘차이의 진리’를 온몸으로 경험하는 실존적 위기이다. 특히 결혼과 함께하는 사랑은 긴긴 시련의 여정일 수밖에 없다. ‘폭싹 속았수다’를 보며, 애순과 관식이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겪었던 시련과 슬픔에 공감하는 것은 동시대를 살았던 우리 모두 그러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시련을 회피하고 사랑의 달콤한 과실만 취하려는 이들을 알랭 바디우는 비판했다. 사랑은 모험의 여정이며, 그 시련의 여정을 공유하지 않는 사랑은 사랑이 아니다.
철학의 본령은 참된 삶의 가능성을 사유하는 데 있고, 문학의 본질은 그러한 삶의 가능성을 형상화하는 데 있다. ‘폭싹 속았수다’는 드라마, 즉 극문학이 왜 문학의 주요 갈래인지 말해주는 작품이었다. 누구나 사랑을 말하지만, 누구도 좀처럼 사랑을 믿지 않는 시대에 드라마 ‘폭싹 속았수다’를 보고 앙드레 고르의 편지를 다시 읽는다.
인간은 결국 누군가의 기억 속에 현존한다. 내가 남긴 책과 논문이 내가 누구인지 말해주겠으나, 사람들은 훗날 아내를 기억하지 못할 것이다. 아내에게 부치지 않는 편지를 쓰기로 했다. 아내가 어떤 사람인지, 가장 곡진하게 기록할 사람은 나이기에.
2025-04-17 [18: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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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감] 우물이 있는 자리
도시 한복판에 우물이 있다. 갈증을 풀어주는 차고 맑은 물이라는 뜻일까. ‘냉정(冷井)’이라는 이름을 얻었다. 삼백 년 역사를 지닌 샘터가 있으니 인근 역 이름도 냉정역이라 명명하였다. 흔히 땅을 파서 만든 속 깊은 우물은 아니다. 맨땅을 파서 물이 괴게 하는 토정도 아니며 바위틈 사이로 솟은 석정이라고도 할 수 없다. 우물이라는 이름이 붙었지만 면밀히 따지면 지하에서 솟아나는 자연 샘물이다. 나무 지붕을 이고 있는 낮은 우물 속 물거울을 들여다보니 겹겹으로 쌓인 세월이 고여 있다.
물이 귀하던 시절이 있었다. 고향 마을에도 큰길 모퉁이에 우물이 하나 있었는데 새미 또는 새미깡이라고 불렀다. 사시절 물동이 행렬이 늘어섰고 아낙들의 발걸음이 끊이지 않았다. 그곳에서 너나없이 물을 길었다. 두레박으로 윗물을 휘휘 헤쳐 젓고 속물을 떠서 벌컥 삼키면 달던 물맛에 허기도 사그라졌다. 시골 소녀들은 수건이나 짚으로 만든 따뱅이를 정수리에 얹고 요령 있게 양철 물동이를 올렸다. 그러면 앞뒤로 잠시 출렁거리긴 했지만 까딱까딱 중심을 잡고 잘도 걸어 다녔다.
공동수도가 들어오고 나서도 윗동네에는 몇 개의 단우물이 더 생겼다. 하지만 큰 강을 경계로 아랫동네에 판 우물들은 한결같이 짜거나 떫은 물이 나왔다. 그제야 어른들은 오래전 바다 자리를 메운 땅이라는 사실을 납득하고 더는 물맛을 기대하지 않았다. 어쨌든 땅을 파면 짜든 달든 샘이 솟았으니 돈으로 물을 사 먹는 작금의 세상이 오리라는 것은 감히 상상하지 못하던 시절이었다.
재미있는 안내판도 보인다. 물이 청냉하고 감미로워 물맛은 천하일품이며, 아무리 가물어도 샘이 마르는 법이 없고 마을 사람들뿐만 아니라 옛 장꾼들에게 더없이 필요한 생명수가 되어주었다는 내용이다. 입구 정자에 앉았던 노인 두 분이 말씀을 거든다. 과거 샘터 주변에는 민물장어와 가재가 살았으며, 지금은 사라진 탁주 공장과 콩나물 공장도 이 물로 시원한 술을 빚고 고소한 콩나물을 키워 올렸다고 한다. 한술 더 떠서 일본 막부시대에도 다도에 심취한 지방 제후들이 이곳까지 와서 찻물을 구해갈 정도였다며 찬탄한다.
우물이 있던 장소들을 생각한다. 그 어둡고 은밀한 물의 자리가 있다는 것을 사람들은 단지 수맥으로만 짐작했을까. 물에 대한 인간의 상상은 어디까지 가능한 것일까. 기억과 회상만으로도 상상의 이미지를 만들 수 있겠지만 진정한 상상은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세계를 찾아내는 일이겠다. 같은 강에서 두 번 목욕하지 않는다는 경구를 생각해보면 지금 솟는 이 샘물도 봄날 흐르는 낙동강 물도 모두 새로운 물이라고 이름 붙여도 좋겠다.
세상 어느 곳에나 고일 수 있는 물이다. 그러나 어디에서 흐르느냐에 따라 그 성질이 달라질 터. 국화 밑에서 나면 국화수가 될 터이고 옥이 있는 곳에서 흐르면 옥정수로 불릴 것이다. 비단 물만 그럴까. 이제 여기 냉정샘은 물의 성분이 달라져 안타깝게도 식수로 사용하지 못한다. 오직 벌레와 새들만 목을 축인다. 더 이상 인간은 맛볼 수 없으니 그저 상상으로만 짐작할 수밖에. 아마도 물맛은 섣달 눈이 녹은 것처럼 맑고 차고 달며 새벽이슬같이 연하고 가벼웠을 것이리니.
물이라는 것은 생명수이기도 하지만 흐르고 멎고 고임에 따라 정신세계를 움직이게 하는 힘도 지녔다. 사람이 어디에서 머무는가 혹은 누구와 더불어 있는가에 따라 인생관이 달라지듯 어디에서 어떤 물을 먹고 살아가는가에 따라 삶의 가치도 변할 수 있다고 여긴다. 물을 받들고 물의 탄생지를 성소로 여기는 것도 같은 맥락이겠다. 그런 까닭일까. 우물 탄생 설화를 가진 지혜로운 옛 왕이 더욱 생각나는 요즈음이다.
2025-04-10 [18: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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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감] 개미의 숙제
어릴 적에 오래된 기와집에 살았었다. 마당이 있고, 화초가 밀림처럼 우거진 정원도 있었다. 어린 내 눈으론 그렇게 보였었다. 밀림 속엔 개미가 많았다. 옆집 담벼락에 붙은 사철나무 아래엔 꽁무니가 길쭉한 개미가, 대청마루 앞의 천리향 나무 아래엔 엉덩이가 반짝이는 개미가 살았다. 그 외에도 모양이 조금씩 다른 개미가 저마다의 영역을 차지하고 있었다.
유흥거리가 없던 그 시절엔 개미가 만만한 구경거리였다. 개미는 제 덩치보다 큰 과자 조각을 옮기고, 하얀 알을 물고 줄지어 이사하기도 했다. 가끔은 전쟁도 벌였다. 나는 쪼그려 앉아 새카맣게 동원된 두 왕국의 전투를 구경하곤 했다. 그래서 그런지 개미라는 곤충이 나름 친숙하다. 그들 왕국에 관해 알면 알수록 인간 사회의 축소판이라는 생각이 든다.
‘담흑부전나비’라는 나비가 있다. 이놈은 일본왕개미가 다니는 길목에 알을 놓는다. 길목이라 해봐야 진딧물이 많은 나무줄기다. 알다시피 개미는 진딧물이 내는 단물을 좋아한다. 담흑부전나비 알이 부화하고 애벌레가 어느 정도 성장하면, 이놈도 배에서 단물을 낸다. 우연히 애벌레와 마주친 일본왕개미는 이 달콤함에 흠뻑 빠진다. 적당히 즐기면 될 터인데 더 욕심을 부린다. 집안에 두고 언제든 단맛을 즐기고 싶은 것이다. 그래서 애벌레를 집으로 물고 간다. 그런 개미가 한 둘이 아니다. 단맛에 중독된 일개미들은 자신의 애벌레처럼 그들을 돌봐준다.
이제 애벌레는 아무 거리낌이 없다. 개미 집안을 활보하며 고치와 알들을 잡아먹는다. 그러거나 말거나 일개미는 담흑부전나비 애벌레에게 정성껏 영양분을 먹인다. 대신에 달콤한 분비물을 얻어먹는다. 결국, 개미 알들로 살을 찌운 애벌레는 번데기가 되어 우화를 준비한다.
더 극적인 사례도 있다. 가시개미는 독자적으로 왕국을 만들 능력이 없다. 그래서 일본왕개미 둥지로 침입한다. 그녀는 먼저 정찰 나온 일개미 하나를 물고 늘어진다. 그리고 일개미의 페로몬을 몸에 묻힌다. 감쪽같이 변장한 가시개미는 일본왕개미 집으로 침투하고, 이번엔 일본왕개미 여왕을 노린다.
기회를 노려 여왕을 덮친다. 목덜미를 물린 여왕개미는 서서히 죽어가고 그동안 페로몬을 복제한 가시개미는 드디어 새로운 여왕으로 등극한다. 일개미들은 전혀 알아차리지 못한다. 그저 익숙한 페로몬을 풍기는 새 여왕을 핥고 양분을 먹여준다. 한 계절이 지나, 일본왕개미 굴속엔 가시개미 일족으로 가득 찬다. 몇 남지 않은 일본왕개미 일개미는 노예처럼 가시개미의 애벌레를 돌본다.
모든 독립 생물은 기생체를 극복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었다. 이로 인해 진화의 방향이 달라진다는 말이 있다. 인간도 예외가 아니다. 질병을 일으키는 각종 기생 생물은 차치하고, 분명 인간이지만 기생 생물의 삶을 답습하는 부류도 있다. 어찌 보면 숙명적 현상인지도 모른다. 인간도 독립적으로 양분을 얻지 못해, 남의 살과 땀을 섭취하고 있지 않은가. 하지만 그 와중에도 자신의 정체성과 독립성을 중요한 가치로 보는 부류가 다수를 차지한다. 바로 인간이기 때문이다.
두려운 것은 일본왕개미처럼 기생체에 점령당했어도 정작 본인은 모른다는 것이다. 그저 원하는 단물만 있으면 주변 상황엔 눈길을 두지 않는다. 냄새만 맡고도 자기편이라 믿어버리는 판단은 또 얼마나 위태로운가. 그렇기에 나 자신이 얼마나 편취당하는지, 혹은 일방적으로 얻어내고 있는지 모르고 오히려 기생체를 두둔하고 있을까 싶어 두려운 것이다.
누구를 탓하는 건 의미가 없다. 어차피 기생 본능을 가진 이는 그에 관한 어떤 자책도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걸 자연의 섭리라 한다면, 기생 당하지 않기 위한 삶의 지혜 또한 섭리다. 본질을 보는 눈, 이것은 독립 생물의 영원한 숙제이다.
2025-04-03 [17: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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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감] 성장통
최근 들어 아이가 발목과 무릎, 사타구니 주변의 통증을 자주 호소했다. 심할 때는 서 있지도 못하겠다면서 갑자기 주저앉아버렸다.
정형외과에 가서 검사를 했지만 별다른 소견은 없었다. 성장기 아이들에게 흔히 나타나는 성장통 같다면서, 뼈가 자라는 속도에 비해 근육이나 인대가 자라는 속도가 느리다 보니 그로 인해 통증이 유발될 수 있다고 했다.
병원에서 딱히 해줄 수 있는 게 없다기에 집으로 돌아와 아이에게 찜질과 마사지를 해주었다. 크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겪는 일이니 시간이 좀 지나면 괜찮아질 거라고 위로하면서.
극심한 통증으로 매일 괴로워하는 아이를 계속 지켜보는 일은 나에게도 고통이었다. 조금이라도 나아질 방도가 있다면 뭐라도 해볼 텐데 그저 시간이 흘러가기만 기다려야 한다는 사실이 안타까웠다.
게다가 통증은 통증으로만 그치지 않고 무기력과 짜증으로 이어졌다. 나중에는 그 짜증이 통증 때문인지 아닌지도 분간할 수 없었다. 아파서 그렇다는 아이에게 야단을 칠 수도 없는 노릇이었지만, 다 받아주자니 내 마음에도 한계가 찾아왔다.
정형외과에는 다시 가도 소용이 없을 것 같아서 이번에는 통증의학과를 찾아갔다. 증상을 들은 의사가 아이의 눈을 쳐다보며 이렇게 물었다. “니 몇 학년이고?” 아이가 무뚝뚝하게 대답했다. “중2요.”
그러자 의사가 다시금 아이의 얼굴을 가만히 쳐다보더니 진지한 어투로 말했다. “중2병인가.” 어쩐지 정확한 진단명을 들은 것만 같았다. 의사는 아이가 아프다는 부위를 눌러보면서 이렇게 말했다. “세상에서 중2가 제일 무섭다.”
그래, 이 아이는 중2다. 그걸 잊고 있었다. 아이는 중2답게 의사의 질문에 매번 표정 없이 단답형으로 대답했고, 주사를 맞고 나와서는 이까짓 것 별 거 아니라는 듯 갑자기 으스댔다.
주사가 효과가 있었던 것인지, 다시 주사를 맞기가 싫어서 그런 것인지, 아니면 그새 근육과 인대가 좀 더 자라났던 건지, 다행히도 아이의 통증은 나아졌다.
그렇지만 아이가 커가는 과정에서 겪는 성장통은 수시로 나타날 것이다. 조금 놀리듯이 중2병이네 뭐네 하지만 결국은 그것도 마음의 성장통이다. 뼈가 자라는 속도를 근육과 인대가 따라잡지 못해 온몸이 아팠던 것처럼, 정신의 어떤 부분이 자라는 속도를 다른 부분이 따라잡지 못하니 감정은 들쑥날쑥하고, 송곳처럼 튀어나온 감정들에 찔려 아플 수밖에.
예컨대 독립심과 비판적 사고력은 쑥쑥 성장하는데, 절제력이나 포용력은 그에 미치지 못함에서 오는 불균형이랄까.
결국 성장통이라는 것은 자라나는 속도의 불균형에서 비롯되고, 그렇게 생각해보면 성장통이 오로지 성장기 아이들에게만 오는 것도 아닌 것 같다.
사람의 정신은 죽을 때까지 성장할 수 있다. 육체는 쇠락해도 정신은 그 육체의 틀을 깨고 높게 뻗어나갈 수 있다. 성인이라고 해서 그 성장의 과정이 늘 안정되고 균형 잡혀 있는 것도 아니니, 성장하려는 이들에게는 언제든 마음의 통증이 찾아올 수 있을 것이다.
오래전 인기몰이를 했던 자기계발서 중에 〈아프니까 청춘이다〉라는 책이 있었다. 그러나 청춘만 아픈 것은 아니다. 중년도 아프고 노년은 더욱 아프다.
실은, 아프니까 사람이다. 진정 살아 있으니까 아프고, 현재에 안주하지 않고 미래를 향해 계속해서 자라려니까 아프다.
제법 긴 시간 동안 우리는 함께 아파왔다. 통증 때문에 서로를 찔러대기도 했다. 이것이 성장통이라면, 어긋난 것들의 균형이 맞춰질 때 비로소 통증은 멎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 통증의 시간 동안 더욱 단단하게 자라난 우리의 정신은 위기의 순간마다 굳건한 힘을 보여줄 것이다. 지금 우리가 겪는 통증이 불치의 병이 아니라 미래를 향해 나아가는 성장통이었기를. 곧 다시 만나게 될 세계에서는 따뜻한 봄날 오후의 햇살처럼 서로를 보듬으며 미소 지을 수 있기를.
2025-03-27 [18: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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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감] 각금시이작비, 지금이 옳은 삶
밀양강변 금시당을 가끔 찾는다. 이곳은 조선 명조 때 문신 이광진 선생이 귀향하여 휴양하고자 마련한 집으로, 수령 450년이 넘는 은행나무 덕분에 가을이면 일대가 주차장이 된다. 나는 금시당의 겨울을 좋아한다. 겨울이면 금시당을 찾아, 들머리 매화나무 가지 끝에 봄을 걸어두고, 뜰 지나 은행나무 옆 배롱나무 아래 근심을 묻는다. 인적 드문 금시당에 물이 고이듯 시간이 고이고, 산책길에 놓인 널평상에 앉아 지난날을 돌아본다.
금시당이란 이름은 도연명의 〈귀거래사〉에 있는 글에서 따왔다. 각금시이작비(覺今是而昨非), 지금이 옳고 지난날이 그름을 깨달았다는 이 구절은 벼슬길에 올랐던 지난날이 잘못되었고, 벼슬살이 그만두고 귀향한 지금이 잘한 일이라는 뜻으로 흔히 해석된다. 도연명의 나이 41세 때 지방 현령으로 일하며 윗사람에 굽신거리며 살기 싫어 귀향하며 지었던 글이라, 매일 모멸감을 견디며 밥벌이에 나서는 직장인들에게도 와닿는 내용이다. 다만, 〈귀거래사〉의 내용처럼 직이나 업을 내려놓고 돌아와도 반길 가족은 오늘날 드물 듯하여 슬프다.
도연명의 절개를 흠모했던 이광진은 1565년 고향인 밀양으로 돌아와 금시당을 지어 후학에게 학문을 가르치는 데 뜻을 두었으나, 이 집이 완성된 1566년 54세로 별세했다. 정3품 당상관을 거쳐 담양부사를 마지막으로 귀향했으니, 그는 오랜 관직 생활로 이미 건강이 좋지 못했을 터, 도연명을 흠모했으나 안타깝게도 그의 삶을 따르지는 못했다. 지금은 당시 부친의 병환을 위로하고자 아들 이경혼이 그린 밀양 12경 진경산수화와 밀양강 언덕 위 금시당이 남아 후세에게 삶의 의미를 되묻게 한다.
3월 첫머리에 딸 혼사가 있었다. 혼사를 준비하며 아내와 대화를 나누던 중, 취업 이후 한 치의 오차 없이 치열하게 살아가는 딸을 걱정하는 나에게, 아내가 말해주었다. 젊은 날의 당신도 송곳 같았다고. 밤을 지새우며 공부하거나 글을 썼고, 학생의 실수나 오류를 좀처럼 용인하지 않았다. 자신을 엄격히 몰아갔기에 주변 이들에게 관대하지 못했다. 어렵사리 석사 학위를 받고 박사과정에 진학하고 싶다는 제자에게, 연구 능력이 부족하다며 끝내 받아들이지 않았던 기억은 후회의 못질이 되어 마음에서 빠지지 않는다. 아내가 송곳 같았던 나를 얼마나 배려했을지, 그런 아버지를 두어 자식은 원망이 얼마나 컸을지, 내 그릇된 말과 행동이 가을 금시당 은행나무 잎보다 무수했음을 깨닫는다.
알고 싶은 것이 많아 손에서 책을 놓지 않았다. 전공인 문학뿐 아니라, 철학, 역사, 심리학, 사회학, 자연과학까지 책을 쌓아두고 닥치는 대로 읽었다. 아는 것이 많아 똑똑하다는 소리에 우쭐하기도 했다. 무엇보다 옳고 그름을 분명히 하여 시비 가리기를 중시했고, 그러한 신념이 나를 가둘 수 있다는 사실은 미처 깨닫지 못했다.
겨울이면 도연명과 이광진을 떠올리며 금시당을 찾는다. 금시, 지금이 옳은 삶, 이러한 삶은 지난날의 내 그릇됨을 끊임없이 돌아보아야 가능하다. 가을 금시당은 발 디딜 틈이 없었다. 번성했으나 지금은 적요만이 남은 겨울 금시당, 그 뜰에 우뚝 솟은 은행나무를 본다. 그토록 풍성한 잎들을 모두 떨구고도 여전히 당당한 은행나무를 흠모한다. 세월이 앗아간 열정과 그동안 이룬 성취를 그리워하기보다 지난날을 돌아보며 지금이 옳은 삶을 살고자 다짐한다.
각금시, 오늘이 옳았음을 깨달으려면, 이작비, 지난날이 잘못되었음을 먼저 알아야 한다. 지각(知覺), 알아야 깨닫는 것이 인생이다. 깨달은 이는 필시 뉘우치며, 뉘우치는 이는 자신을 돌아보며 어리석음을 되풀이하지 않는다. 깨닫고 뉘우쳐 과거의 나를 바로잡아, 지금이 옳은 삶을 살아야 함을, 금시당은 내 어깨를 토닥이며 일러준다. 금시당은 겨울이 좋다.
2025-03-20 [18: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