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감] 노는 것도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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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국환 동아대 한국어문학과 교수

놀이로 학습하고 성장하는 인간
어릴 적 공터와 놀이가 곧 선생
노동 매달리며 놀이 정신 잃어
노는 인간이 무한 가능성 열어

교직에 종사하는 나에게 수업은 분명 일이다. 학생들에게 가끔 말한다. “정말 미안한 말인데, 나는 수업이 즐겁습니다.” 내게 수업은 제자들과 주고받는 대화의 놀이고, 강의실은 앎이 삶을 외면하지 않고 삶이 앎을 기피하지 않는 지적 놀이터였다. 임금 노동자인 나는 당연히 노동의 대가로 돈을 받아야 하는데, 놀고 돈을 받으니 미안했고, 평가 대상인 학생들에게 수업은 놀이가 될 수 없음을 알기에 더 미안했다. 나는 내 일이, 노동이 아니라 학생들과 함께하는 놀이였으면 했다.

대부분 포유류는 놀이로 학습하고 성장하며 생존 방식을 터득한다. 인간도 마찬가지다. 술래잡기는 공동체의 규칙을 지키며 동료와 협력하는 사회화 과정을 자연스레 터득하고 체력도 기르는 놀이다. 지금도 어릴 적 술래잡기의 기억은 선연하다. 공터에 땅거미가 지고 철길 저편 노을이 붉게 물들어도, 엄마가 호명한 아이들이 하나둘 골목 저편으로 사라질 때까지 우리 놀이는 이어졌다. 그 시절 우리에게는 공터와 놀이가 선생이었다.

미하엘 엔데의 〈모모〉에서 회색 신사들이 “노래하고 책을 읽고 친구들을 만나느라고 귀중한 시간을 낭비하지 말라”고 말했듯, 오늘날 우리는 놀이의 시간을 낭비라 여긴다. 그래서 회색 신사들은 이발사 푸지 씨에게 손님 한 명당 이발하는 데 30분씩 걸린다며, 앞으로는 잡담하지 말고, 15분으로 줄여 시간을 저축하라고 부추겼다. 손님과 대화하며 이발할 때, 푸지 씨의 일은 노동의 시간이 아니라 놀이의 시간이었음을 자신도 알지 못했다.

부모들은 아이들을 학교와 학원에 맡기고 노동에 전념한다. 아이들과 함께 노는 대신 장난감을 사주거나 주말 놀이공원에 데려간다. 하지만 놀이공원은 노는 곳이 아니라 놀이를 판매하는 곳이며 이윤 추구를 위한 산업 현장이다. 노래방, 피시방, 스크린 골프방 등 각종 놀이 산업이 제공하는 상품들은 소비가 곧 놀이임을 착각하게 만들며, 그 소비를 감당하고자 자처하는 노동은 결국 우리가 지금 놀이로 위장된 노동의 세계에 살고 있음을 방증한다.

문화인류학자 요한 하위징아는 〈호모 루덴스〉에서 인간의 본원은 노동이 아니라 놀이라고 하였다. 문화가 놀이를 낳은 것이 아니라, 놀이가 문화를 만들며, 결국 인류는 노동이 아니라 놀이로 문명을 발전시켜 왔다는 그의 주장에 나는 매료되었다.

하위징아는 놀이 정신이 근대에 와서 쇠퇴했다고 보았다. “놀고 있네”라는 비아냥의 언어처럼, ‘노는 인간’에 대한 시선은 차갑다. 근대 이후 세계가 시장을 중심으로 재편되며 이윤 추구는 윤리가 되었고, 놀이는 폄하되고 노동은 높이 평가받았다. 베짱이가 뼈아픈 반성 끝에 개미의 삶을 지향했듯 노는 인간은 노동하는 인간으로 변신하거나 개조되었고, 우리는 시장에서 더 많은 이윤을 내기 위한 노동에 매달리며 놀이 정신을 잃어갔다.

우리는 일하지 않고 먹고살 길이 없다. 그럼에도 여전히 일을 노동이 아니라 놀이로 여기며 살아가는 이들이 있다. 놀이(play)의 반대말은 일(work)이 아니라 노동(labor)이다. 이들에게는 일상이 놀이고 일터는 놀이터가 된다. 제대로 놀아본 사람들은 안다. “노는 것도 일”이란 말처럼, 노는 게 얼마나 힘든지. 본디 놀이는 고단한 즐거움이 아니든가.

우리는 지금 소비를 놀이로 착각하며 살고 있다. 내일의 노동을 위한 놀이는 놀이가 아니라 노동의 일부일 뿐이다. 제대로 놀려면, 우연과 의외성에 자신을 맡기고 세상 곳곳에 숨겨진 차이를 발견하며, 스스로 재미를 만들어 낼 줄 알아야 한다. 바로 지금 여기에서, 순수한 즐거움으로 노는 인간만이 자유롭고 자신의 무한한 가능성을 열어 새로운 세계를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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