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감] 망각의 길목에서
신호철 소설가
심해진 아버지의 치매 증세
갑자기 사라져 찾느라 고생
딸에게 전화 수차례 반복해
잊지 않으려 애쓰는 몸부림
전화벨은 저녁 식사 시간에 자주 울린다. 김칫국을 한 숟갈 떠 올리려던 찰나, 익숙한 소리에 한 방향으로 고개를 돌린다. 아내는 휴대폰 화면을 보자마자 중얼거렸다.
“또, 아빠다.”
화면의 통화 터치를 하기도 전에 벨 소리가 뚝 끊긴다.
“어휴, 확인을 안 할 수도 없고…”
미간을 찡그린 아내가 다시 전화를 걸고, 이내 장인어른 목소리가 새어 나온다. 걸걸한 목소리에 반가움이 잔뜩 묻어있다.
“여어, 우리 딸. 웬일이고? 니가 전화를 다 하고?”
“웬일이라니? 아까도 통화했잖아요.”
“어엉?”
“아빠! 왜 자꾸 전화를 걸다 끊어요?”
“내가? 내가 언제?”
“아빠! 하루에도 몇 번씩 이래. 시도 때도 없이 전화 걸고 끊고… 내가 못 살겠다 진짜.”
아버님 증상은 몇 달 전부터 눈에 띄게 심해졌다. 비슷한 연배의 여느 노인들보다 건강하고, 정신이 맑았던 분이었다. 산책하러 간다며 집을 나선 뒤, 행방이 묘연해지는 일도 몇 번 있었다. 처음에 아내는 경찰에 신고하고, 남동생과 함께 동네 골목골목을 뛰어다녔다. 그런 일을 몇 번 겪어내자 이제는 아버님의 반복된 패턴을 알게 되어 걸려오는 어머니 목소리 톤으로도 상황을 유추할 수 있을 정도였다.
“아버님 없어졌다는 전화가 아니어서 다행이지.”
내 말에 아내는 버럭 소리를 높인다.
“진짜 기억 못 하는 건지, 일부러 그러는 건지… 게다가 왜 자꾸 나만 찾는 거야? 남동생도 있잖아? 아, 모르겠어. 나도 이제 지쳐…”
아내의 짜증에 속절없이 입술을 깨물다가 문득, 며칠 전 아내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아버님 치매약을 타러 아내가 부산에 다녀온 날이었다.
“아빠가… 울었어.”
“아니, 왜?”
무슨 큰일이 생겼나 싶어, 되물었는데, 아내 목소리는 의외로 차분했다.
“우리 딸 애기 때 얼매나 예뻤는지 아나? 하면서 우시는데… 눈물만 뚝뚝 흘리더라.”
아내는 울음 섞인 침을 삼키더니 조용히 덧붙였다.
“치매 때문인지… 그냥, 그냥. 내 손만 잡고 울었어.”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몰라 우물쭈물하면서도 어렴풋이 짐작은 되었다. 아버님도 알고 있었을 것이다. 기억이 점점 지워지고 있다는 걸. 행복했던 순간들, 그래서 소중하게 간직했던 기억들이 하나하나 지워지고 있다는 걸 인정해야 했을 때의 감정을 무슨 언어로 표현할 수 있을까.
연애하던 시절, 아내는 어릴 적 아빠 이야기를 자주 했다. 외항 선원이었던 아버님이 몇 달 만에 집에 오면 마냥 좋았다고 했다. 벼르고 별렀던 아빠와의 시간이 기뻤던 만큼, 그 딸의 환한 표정을 마주한 아빠는 또 얼마나 행복했을까.
치매는 아이러니하게도 기억하려는 이들의 마음을 가장 깊이 흔든다. 그들의 언어는 완성된 문장이 아니기 때문이다. 두세 번 울리고 꺼져버리는 전화벨처럼 구멍이 숭숭 뚫린 문장이기 때문이다. 자꾸만 반복되는 아버님의 시도는, 망각의 길목에서 기억을 향해 손을 뻗은 최선의 몸부림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그 끊어진 신호음이 가슴에 아린다.
아버님은 여전히 연결을 시도하고 있다. 그리고 우린 그저, 구멍 뚫린 수화기를 들었다가 놓으며 어리석은 한숨만 내쉴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