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 4.5일제·정년 연장 논의 본격화… 21년만의 노동시장 대격변 예고
韓, 주요국 최장 수준 노동시간
초고령사회 안정성 제고도 필요
정부, 연내 4.5일제 시범 추진 방침
추투 맞아 노동계 요구도 분출
시민 61%, 주 4.5일제 찬성
노동시장 이중구조 심화 우려
생산성 저하·인건비 증가 부담
2004년 주5일제가 첫 도입된 지 21년 만에 노동시장은 물론 경제와 사회 전반의 패러다임을 바꿀 격변이 예고되고 있다. 노동계가 저출생과 고령화 대응, 삶의 질 제고 등을 위해 주4.5일제 도입과 정년연장을 강력히 요구하고 있는 가운데, 이재명 정부도 이를 국정과제로 추진하면서 관련 논의에 불이 붙었다. 경제계에서 인건비 부담과 청년 고용 위축 우려 등을 이유로 우려의 목소리가 나오지만, 시대적 변화를 외면할 수 없는 만큼 관련 논의가 탄력을 받을 전망이다.
8일 고용노동부에 따르면 2022년 기준 우리나라 임금 근로자의 연평균 근로시간은 1904시간으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평균인 1719시간에 비해 185시간 많았다.
OECD 회원국 중 우리나라보다 근로시간이 긴 곳은 콜롬비아, 멕시코, 코스타리카, 칠레, 이스라엘 등 5개국뿐이었다. 반면 한국보건사회연구원이 주요 31개국을 대상으로 워라밸(일과 생활의 균형) 수준을 뜻하는 시간주권을 조사한 결과 우리나라는 노동시간의 경우 3번째로 많았고, 가족시간은 31개국 중 20번째로 적었다.
인공지능(AI) 확산과 함께 생산성 혁신이 기업 경쟁력의 핵심으로 떠오른 가운데 이 같은 장시간 노동이 근로자의 삶의 질 뿐만 아니라 경제 활력마저 저해한다는 지적이 주4.5일제 논의에 불을 지폈다. 올해 65세 이상 인구 비중이 20.3%에 달하며 우리나라가 초고령사회에 진입한 것은 정년연장 논의가 절박한 이유다. 2030년에는 고령 인구 비중이 25%를, 2050년에는 40%를 넘으면서 노동력 감소와 연금 및 복지 부담 증가, 경제성장 둔화가 심각한 사회 문제가 될 것으로 예상된다.
이에 따라 정년연장과 주4.5일제를 결합함으로써 적게 일하고 장기 근속하며 일자리를 나눔으로써 사회경제적 안정성을 높이고 지속가능한 일자리 모델이 가능하다는 것이 현재 논의의 기본 틀거리다.
이병훈 중앙대 사회학과 명예교수는 "고령화와 저출생 시대 정년연장은 사회경제적 미스매치 해소를 위해 중요한 과제"라며 "주4.5일제 역시 일자리 나누기 차원에서 젊은 층을 위한 양질의 일자리 확대 기회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노동시장 이중구조가 심각한 가운데 섣부른 조정은 현재의 격차를 더 심화할 것이라는 지적이 제기된다.
이미 2016년 시행된 60세로의 정년 연장에 대해서도 대기업 고령 근로자에 혜택이 집중되고, 소송과 조기퇴직 증가 등 부작용이 잇따랐다는 평가가 나온다.
한국은행은 최근 김대일 서울대 교수와의 공동연구에서 "임금 체계와 고용 경직성을 유지한 채 정년만 연장하면 과거처럼 청년 고용 위축, 조기퇴직 증가, 노동시장 이중구조 심화 등 의도치 않은 부작용이 반복될 우려가 크다"고 밝혔다.
한국경영자총협회에 따르면 2022년 121건이었던 임금피크제 관련 소송은 지난해 292건으로 크게 늘었고, 지난해 조기 퇴직자는 2013년에 비해 87.3% 증가해 같은 기간 정년 퇴직자 증가율 69.1%를 크게 웃돌았다.
기업 입장에서는 생산성 저하와 추가 인건비 부담이 당면한 걱정거리다.
한국경제인협회에 따르면 정년연장 시 5년 후 60~64세 고령 근로자 고용 비용이 30조 2000억 원에 달할 것으로 추산된다. 이는 25~29세 청년층 90만 명을 고용할 수 있는 수준이다.
이런 문제는 해외 생산이나 자동화를 위한 여력이 작은 중소기업들에서 더욱 두드러질 것으로 관측된다. 연구개발(R&D) 분야의 경우 이미 주52시간제 도입 이후 성과가 감소하는 경향도 확인됐다.
노동계와 경영계의 팽팽한 입장차에도 불구하고 새 정부가 이들 사안을 국정과제로 추진하기로 한 만큼 논의는 빨라질 전망이다.
이재명 대통령은 선거 기간 "우리나라 평균 노동시간을 OECD 평균 이하로 단축하겠다"며 주 4.5일제 도입 추진을 공약했다. 법정 정년의 65세로의 단계적 연장과 함께 2025년 내 입법 추진 및 범정부 지원 방안 마련도 약속했다.
김영훈 고용노동부 장관도 임금 감소 없는 주 4.5일제가 가능하다면서 정년 연장을 위한 사회적 대화와 입법을 추진하겠다고 강조했다. 가능한 곳부터 주 4.5일제 시범 사업을 하겠다는 의지도 밝혔다.
김동명 한국노총 위원장은 최근 이 대통령을 만난 자리에서 "65세로 정년을 연장하는 것은 단 하루도 늦출 수 없는 과제"라며 "과감하게 주 4.5일제 시범 사업을 도입해 내년을 근로시간 단축의 역사적 첫해로 만들어야 한다"고 말했다.
현대차 노조는 최근 정년 임금 인상은 물론 정년 연장과 주 4.5일제 등을 요구하며 부분 파업을 벌이고 있다. 전국금융산업노조 역시 오는 26일 총파업을 결의하면서 같은 요구 사항을 제시하는 등 노동계의 추투(秋鬪)를 통해 이들 의제가 본격적으로 확산할 가능성이 있다.
지난 2월 한국리서치 여론조사 결과 응답자 61%가 주 4.5일제 도입에 찬성할 정도로 여론의 공감대도 상당하다. 다만, 응답자 60%는 근무 시간이 줄어도 급여 수준은 유지돼야 한다고 답했다. 기업에서 생산성 저하와 비용 증가를 우려하면서 임금 조정을 고용 조정과 병행해야 한다는 의견이 나오는 상황에서 향후 논의가 난항을 겪을 것이라는 예상이 나오는 이유다.
송현수 기자 songh@busa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