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감] 무가치하지 않다

부산닷컴 기사퍼가기

고유한 속도와 방향으로
성실하게 나아가는 삶은
결코 무가치하지 않다

서정아 소설가 서정아 소설가

책이나 영화에 비해 시간을 많이 들여야 하는 부담감 때문에 드라마는 멀리하는 편인데 최근 화제작인 ‘모두가 자신의 무가치함과 싸우고 있다’ 정주행을 시작해 버렸다. 제목에서부터 사람을 훅 끌어당기는 강렬함, ‘나의 아저씨’, ‘나의 해방일지’ 등 작가의 전작에 대한 기억, 그리고 주변에서 들려오는 이야기들. 결국 1화를 클릭하고 말았다. 그리고 어느 순간 드라마 속 세계에 안착하고 나면 인물들과 함께 울고 웃으며 끝까지 가는 수밖에 별 도리가 없다.

영화판에서 어느 정도 입지를 다져가고 있는 선후배들과는 달리, 주인공 황동만은 20년 째 데뷔하지 못한 채 열등감과 질투심에 휩싸여 있는 인물이다. 그가 느끼는 좌절의 감정은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 상대적인 것으로 보인다. 성공가도를 달리는 주변 사람들과의 비교를 통해서 더욱 깊어지는 실패의 감각. 물론 자신의 시나리오가 영화화 되지 못했다는 사실에 대한 아쉬움과 슬픔도 당연하긴 하지만 그런 마음이 언제나 전부는 아니다. 우리는 결과와 상관없이 과정에서 충만한 기쁨을 느끼기도 한다. 남들의 눈에는 아무 일도 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하루하루가 실은 중요한 의미들로 가득 차 있는 경우도 많다. 그러나 자신의 가치를 눈에 보이는 결과물로 증명해 보이기를 강요하는 세상에서, 소박한 하루치의 진심이나 좋아하는 일을 묵묵히 해나가는 과정 같은 것은 쉽게 폄하된다. 주인공 황동만은 비록 형의 집에 얹혀사는 처지이지만, 그 작은 공간에서 빔 프로젝터로 좋아하는 영화를 볼 때 가장 행복해 보인다. 그러나 형이 보기엔 아무런 성과도 내지 못하는 일에 20년째 매달리고 있는 그의 모습이 한심하기만 할 뿐이다. 노트북을 앞에 둔 채 멍하니 앉아 있는 황동만에게 형은 소리친다. “언제까지 집구석에서 놀 건데?” 그 말에 황동만의 억울함이 북받친다. “노는 거 아니라고! 다 생각하는 거야! 글이 그렇게 쉽게 나오는 줄 알아?” 황동만의 그 목소리에 어쩐지 나도 같이 억울해졌고, 함께 소리쳐주고 싶었다. “가만히 있다고 쉬는 거 아니고요, 머릿속은 엄청나게 움직이고 있고요, 돈으로 환산되지 않는다고 안 중요한 일이 아니고요,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무가치한 일이 아니거든요!”

모든 일을 경제적 가치로 환산하거나 눈에 보이는 성과만으로 판단하게 되면 다양한 삶의 방식과 존재의 형태들이 일직선상에 놓이게 된다. 서로 다른 속도와 방향을 가진 개별적인 삶들이 마치 동일한 기준으로 판단할 수 있는 것처럼 여겨지는 것이다. 이런 가치관이 일반화되면 사람들은 자신의 고유한 삶을 타인의 삶의 궤적과 나란히 놓고 끊임없이 비교 점검하게 된다. 황동만이 느끼는 무가치함은 이러한 비교의 장에서 발생하고, 그 지점이 바로 이 드라마의 공감 포인트가 아닐까 싶다.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서 피할 수 없는 경쟁의 늪은 SNS의 확산으로 인해 비교 대상의 범위가 더욱 넓어졌다. 우리는 수많은 온라인 친구들의 사진에 하트를 누르고 박수를 보내면서도 타인의 가장 빛나는 순간과 자신의 평범한 일상을 은연중에 비교하고 내심 상대적 박탈감이나 좌절감에 휩싸이곤 한다. 나만 정체되어 있는 것 같고 나만 무가치한 것 같다. 그러나 우리 삶의 대부분은 눈에 띄는 성취나 타인의 인정 같은 결과물 이외의 것들로 이루어져 있다. 남에게 딱히 자랑할 것 없는 평범한 하루를 반복하는 일이 아무것도 아닌 것 같아 보여도, 외부의 보상과 무관하게 지속하는 일들은 우리 자신을 가장 성실하게 증명하는 방식이다. 매일 같은 자리에서 묵묵히 무언가를 하고 있는 사람의 모습은 마치 정지해 있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겠지만, 그 하루하루의 작은 축적이야말로 가장 중요한 변화의 과정이다. 누가 알아주지 않더라도 자신만의 고유한 속도와 방향을 가지고 성실하게 나아가는 삶, 그런 삶은 결코 무가치하지 않다.


당신을 위한 AI 추천 기사

    당신을 위한 PIC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