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된 기억, 현재의 시간으로 스며들다

김효정 기자 teresa@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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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미형 소설가 <검은 밤, 영도> 출간
6년만에 찰간된 세 번째 소설집
잔잔하게 스며드는 위로와 힐링
최근 부산소설가협회 회장 맡아

정미형 소설가는 7편의 단편소설을 묶은 소설집 <검은 밤, 영도>를 출간했다. 김효정 기자 정미형 소설가는 7편의 단편소설을 묶은 소설집 <검은 밤, 영도>를 출간했다. 김효정 기자

정미형 소설가는 7편의 단편소설을 묶은 소설집 <검은 밤, 영도>를 출간했다. 김효정 기자 정미형 소설가는 7편의 단편소설을 묶은 소설집 <검은 밤, 영도>를 출간했다. 김효정 기자

부산의 중견 작가, 정미형 소설가의 소설집 <검은 밤, 영도>를 다 읽었다. 6년 만에 나온 작가의 세 번째 소설집으로 작가 특유의 고즈넉한 분위기가 독자를 압도한다. ‘외롭다’ 혹은 ‘쓸쓸하다’와는 결이 다르다. 아무런 움직임이 없이 정지된 상태는 결코 아니다. 어느 날 문득, 낯선 공간에 던져진 사람이 천천히 그곳에 물들어간다고 표현해야 할까.

대다수 현대소설에서 주인공은 어떤 사건을 겪으며 심경의 변화를 일으키고 새로운 도전을 하는 사례가 많다. 독자가 책을 한 번 잡으면 순식간에 책장을 넘어가게 만드는 것이 현대소설의 특징이다. 도파민이 터지거나 상상하지 못한 반전으로 극적인 감정을 끌어낸다. 물론 너무나 담담하고 쿨하게 처음부터 끝까지 이야기를 끌어가는 소설도 있다.

정 작가의 이번 소설집은 최근 읽었던 소설과 결이 달랐다. 주인공들은 대체로 외로운 인물이며 상황을 주도하기보다 늘 한두 걸음 정도 떨어져 있는 듯하다. 정을 붙이기 위해 혹은 버티기 위해 많은 현대인의 자신만의 최애, 혹은 힐링을 만들지만, 정 작가 소설에 등장하는 사람, 사물 등 그 어떤 것에도 집착하지 않고 자신의 길을 걸어간다. 이 모습이 묘하게 안도감을 주며 “이래도 되고 저래도 된다”라는 위로를 건넨다.

2020년부터 2024년까지 쓴 7편의 단편을 담은 이 소설집에서 ‘일상의 정물같이 살고 있다”라는 표현이 등장한다. 앞서 설명한 정서와 비슷한 표현이다. 작가는 “남에게 내가 어떻게 보이는가를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혼자인 나 자신을 바라보는 걸 좋아한다. 편안한 상태이다. 정물처럼 산다는 것은 나에게 부정적인 의미가 아니다”라고 설명했다.

소설집 제목에 등장한 영도를 비롯해 남원, 언양, 월내 등 구체적인 장소를 배경으로 한 소설이 4편이나 된다. 표제작인 ‘검은 밤, 영도’는 가난했던 부부가 새 일을 찾아 칠흑 같은 밤 영도로 이사하는 이야기로 시작된다. 전기도 들어오지 않는 집, 도배조차 되지 않은 이 집에서 세 딸로 홀로 키우게 된 새댁은 무섭고 불안했다. 50년 전이기에 딱히 전기 없이 몸으로 모든 걸 부대끼며 살 수 있었다. 다만 남편은 배를 타기 위해 장기간 집을 비웠고, 칠흑 같은 어둠만 있는 산 아래 작은 집에서 밤을 견뎌내는 것이 힘들었다. 언제부터인지 이웃 선생님 댁에 밤새 불 켜진 방이 등장했고, 그 불빛 덕분에 새댁은 겨우 버텨냈다. 이사갈 즈음 “뒷집에 혼자 딸들을 데리고 살고 있는 젊은 여자가 전깃불이 없는 밤이 얼마나 무서울까” 싶어 일부러 불을 켜두었다는 이웃 선생님의 배려를 알게 된다.

소설에선 팔십 대 고모가 젊은 조카에게 사연을 이야기하며 누군가 이 이야기를 기억해 주기를 바란다고 말한다. 검은 밤이라는 어둠과 불빛이라는 희망의 대비를 통해 고독과 연대를 동시에 말하고 있다. 작가는 “지금은 영도가 MZ세대의 핫플레이스로 변신한 것을 보며 나의 방식으로 영도를 색다르게 풀어내려고 했다”라고 말한다.

‘남원 어딘가에서’ ‘뼈 이야기’는 제사 때 쓰는 그릇인 제기와 화장 후 받은 뼈 항아리가 주요 소재이다. 쉽지 않은 소재를 흥미로운 글로 엮은 걸 보며 정 작가의 솜씨를 느낄 수 있다.

이 소설집의 발문을 쓴 배이유 작가는 “정미형 작가에게는 세밀한 자수 공예가의 시선이 있다. 흰 천에 문장이라는 바늘로 촘촘히 수를 놓는다. 흔한 듯 흔하지 않은 그 공간에서 별나지 않은 사람들의 소소한 이야기의 흔적을 쫓는다”라고 설명한다.

정 작가는 “2020년부터 2024년까지 쓴 소설을 묶으며 그 시간의 잔영을 되돌아보는 것이며 장소와 관계없이 인생의 어느 지점을 거쳐 삶에 대한 시각이 달라지는 그 부분을 쓰고 싶었다”라고 소개한다. 어릴 때부터 30대까지 쭉 일기를 썼다는 정 작가는 자주 그 일기를 꺼낸다. 완전히 잊었던 삶의 어느 지점, 어느 사건을 다시 보며 당시 자신의 상태를 돌아보는 것이며 그것이 소설로 연결된다. 이번 소설집 역시 자신의 이야기가 많이 들어있다고 했다.

정 작가는 최근 부산소설가협회 총회를 통해 2년 임기의 부산소설가협회 회장을 맡았다. 소설은 혼자 하는 작업이지만, 그 힘든 과정을 이해하는 동료가 멀리서 지켜보며 응원하고 있다는 것, 정 작가가 이끌 부산소협의 목표라고 전했다.


정미형 소설가는 7편의 단편소설을 묶은 소설집 <검은 밤, 영도>를 출간했다. 김효정 기자 정미형 소설가는 7편의 단편소설을 묶은 소설집 <검은 밤, 영도>를 출간했다. 김효정 기자


김효정 기자 teresa@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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