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시향 설립 64년 만에 첫 '모녀 단원' 나왔다
바이올리니스트 배영주 씨, 1993년 입단
지난해 10월엔 딸 권순지 씨도 공채 합격
남편 권재용 씨, 재작년까지 트롬본 연주
“가족 모두 참여하는 협연 꿈 일부 이뤄져"
부산시립교향악단 바이올리니스트 배영주(오른쪽) 단원과 딸 권순지 단원이 13일 부산문화회관 내 부산시향 연습실에서 연주하는 포즈를 취하고 있다. 박석호 기자
부산시립교향악단 설립 64년 만에 첫 ‘모녀 단원’이 탄생했다. 엄마와 딸이 같은 오케스트라에서 같은 악기를 연주하는 것은 다른 전국 교향악단에서도 찾아보기 힘든 사례다.
엄마인 배영주 씨는 경북예고와 계명대 음대를 졸업한 뒤 대구시립교향악단에서 활동하다 1993년 부산시향에 입단해 33년째 제2바이올린 파트를 맡고 있다.
배 씨는 바쁜 공연과 연주 활동을 하면서도 세 자녀가 모두 음악을 할 수 있도록 뒷받침했고, 부산시향 내에서도 자신의 역할을 묵묵히 수행해 온 든든한 버팀목 역할을 했다. 배 씨는 “제 인생에서 부산시향은 모든 생활의 원동력이었다”면서 “집에 들어오면 잘 나가지도 않고 오로지 무대와 가정만 왔다 갔다 하면서 살았던 것 같다”고 말했다.
딸 권순지 씨는 지난해 10월 부산시향 단원 공개모집 오디션에서 80대 1의 경쟁률을 뚫고 합격해 오케스트라에 합류했다. 부산예고를 졸업한 뒤 부산대 음악학과와 한국예술종합학교 전문사 과정을 마친 뒤 부산시향 비상임 단원, 경산시립교향악단 단원 등으로 활동하다 고향인 부산으로 돌아온 것이다. 엄마 배 씨와 마찬가지로 제2바이올린 파트에서 연주한다.
부산시립교향악단 바이올리니스트 배영주(왼쪽) 단원과 딸 권순지 단원이 13일 부산문화회관 내 부산시향 연습실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박석호 기자
권 씨가 처음 바이올린을 잡은 건 만 3세 때라고 한다. 엄마가 다른 장난감 대신 어린이용 바이올린을 가지고 놀아주면서 자연스럽게 친해졌다. 5세 때부터는 엄마의 후배 바이올리니스트로부터 정식 레슨을 받기 시작했다. 중·고교 시절엔 부산시립청소년교향악단 단원으로도 활동하면서 음악인으로서의 잠재력을 키워왔다.
두 사람이 함께 오른 첫 번째 부산시향 무대는 지난해 10월 부산문화회관 중극장에서 열린 제624회 정기연주회였다.
배 씨는 “처음 연주를 함께 할 때는 같은 파트에 앉아서 악기를 다루다 보니 모녀의 외모가 닮았다는 이야기도 들리고, 조금 따가운 시선이 느껴졌다”면서 “이제는 그런 불편함이 전혀 없다. 다른 동료들을 대할 때와 똑같은 느낌으로 적응했다”고 말했다.
권 씨도 “연주 때 앞뒤 또는 대각선으로 자리가 배치될 때가 많아 계속 엄마가 시야에 들어와서 처음에는 신경이 쓰였다”면서도 “지금은 다른 동료 연주자 가운데 한 명일 뿐”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어릴 때 엄마 따라와서 보아왔던 이모, 삼촌들과 같은 단원이 돼 함께 시향 무대에 설 수 있다는 사실이 잘 믿기지 않는다”고 덧붙였다.
두 사람은 서로의 예술적 지향점이나 연주 취향에 대해서는 확실히 선을 긋고 있다. 배 씨가 정통 클래식에 집중해 왔다면, 권 씨는 낭만주의 이후의 근현대 음악에 더 관심이 많다. 배 씨는 “음악을 대하는데 있어서도 세대 차이가 있다”고 말했고, 권 씨는 “각자의 스타일이 다르기 때문에 엄마 앞에서는 가급적 악기를 만지지 않으려 한다”고 웃었다.
사실 이 가족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부산시향 패밀리’다. 배 씨의 남편이자 권 씨의 아버지 권재용 씨는 부산시향 상임 단원으로 32년 간 트롬본 연주를 해오다 2024년 정년퇴직했다. 지금은 화물운송자격증을 따서 트레일러 개인 사업자로 ‘인생 2막’의 무대에 올랐다.
권순지 씨가 정년을 채운다고 가정하면 세 사람의 부산시향 근무 연수는 무려 90년을 넘어서게 된다.
첫째 딸인 권순지 씨뿐만 아니라 모든 가족이 음악을 전공했다. 둘째 딸은 피아노, 막내 아들은 트럼본을 연주한다. 배 씨는 “아이들이 어릴 때는 가족들이 모두 참여해 협연을 해 보는 것이 꿈이었다”며 “지금은 딸과 같은 음악 단체에서 연주하고 있으니, 어느 정도 꿈을 이룬 것 같다”고 미소를 지었다.
부산시립교향악단 바이올리니스트 배영주(왼쪽) 단원과 딸 권순지 단원이 13일 부산문화회관 내 부산시향 연습실에서 연주하는 포즈를 취하고 있다. 박석호 기자
그러면서 “시향에서 받는 월급 만으로 아이 셋 모두를 음악 공부시키는 게 힘들었지만 지금은 좋은 추억이 됐다. 특히 남편이 자상하게 어린 자녀들을 잘 챙겨줬다”고 고마움을 표시했다. 배 씨는 은퇴 후 계획에 대해 “시향에서 원 없이 바이올린을 만져봤기 때문에 이제는 다른 일을 좀 하고 싶다”고 말했다. 손재주가 많아서 바느질, 수세미 제조 등 수공예를 지금도 취미 삼아 하고 있다.
권 씨는 “어릴 때부터 가족이 함께 있는 시간이 많았고, 대화 주제도 비슷해서 좋았다”면서 “대체로 음악 이야기를 많이 했고, 정치나 주식 이런 쪽과는 거리가 멀었다”고 음악 가족 내부의 분위기를 전했다. 향후 계획에 대해서는 “바이올린을 배우면서 독주회나 실내악 연주를 많이 했었고, 다양한 무대를 경험하고 싶다”면서도 “지금은 다른 생각할 겨를이 없다. 어렵게 부산시향에 들어온 만큼 오케스트라의 일원으로 민폐 끼치지 않고 하루빨리 자리 잡는 게 중요하다”고 말했다.
‘엄마와 딸이 함께 하는 바이올린 듀오 콘서트’ 같은 걸 해보는 건 어떠냐는 질문에 배 씨는 “기회가 있으면 못할 건 없다”고 했고, 권 씨는 말없이 웃기만 했다. 배 씨는 같은 직장에서 딸을 바라보는 느낌에 대해 “젊은 세대의 공부법에 대해 배우는 게 많다”며 “우리 때와는 달리 새로운 곡과 기법을 쉽게 다루는 모습을 보면서 오히려 도움을 받는다”고 말했다.
어엿한 음악가로 성장한 딸을 바라보는 엄마의 따뜻한 시선과, 자신을 음악의 세계로 이끌어준 엄마에 감사하는 딸의 마음이 교차하는 순간이었다.
박석호 기자 psh21@busa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