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 칼럼] 12월, 잔인함과 빛 사이에서
김길수 중서부경남본부장
한국 현대사의 굵직한 사건 12월에 많아
12·12 군사반란과 12·3 비상계엄 발령
민주주의 파괴… 시민 ‘빛의 혁명’으로 막아
봄과 희망 준비하는 인고의 시간으로 승화
영국 모더니스트 시인 T.S. 엘리엇은 장시 ‘황무지’에서 “4월은 잔인한 달”이라 했다. 일반적으로 봄은 생명과 희망의 계절로 여겨지지만, 엘리엇은 제1차 세계대전 이후 황폐해진 유럽의 현실 속에서 봄의 재생이 오히려 고통을 드러내는 역설로 묘사했다. 겨울은 절망을 덮어 숨기지만, 봄은 죽은 땅에서 억지로 생명을 일깨워 황폐함을 더욱 선명하게 드러낸다는 의미였다.
한국 사회에서 가장 잔인한 달을 꼽으라면, 기자는 12월을 말하고 싶다. 12·12 군사반란과 12·3 비상계엄 등 현대사의 굵직한 사건들이 이 달에 집중돼 있기 때문이다. 1979년 12월 3일 전국 비상계엄 확대와 12월 12일 군사반란은 민주주의를 군홧발로 짓밟은 사건이었다. 박정희 전 대통령 서거 이후 권력 공백은 민주주의로 나아갈 기회가 될 수 있었지만, 신군부는 그 틈을 놓치지 않았다. 계엄 확대는 국민을 보호하기 위한 조치가 아니라 권력을 움켜쥐기 위한 군부의 계산이었다. 헌법은 휴지조각이 되었고, 국회는 무력화되었으며, 언론은 입을 봉쇄당했다. 이어진 12·12 군사반란은 더 노골적이었다. 전두환을 비롯한 신군부 세력은 합법적 절차를 무시하고 군사력을 동원해 권력을 탈취했다. 이는 단순한 권력 다툼이 아니라 헌정 질서를 정면으로 파괴한 반역이었다.
그러나 역사는 침묵하지 않았다. 광주에서 시민들은 목숨을 걸고 저항했다. 신군부의 총탄에 스러진 수많은 희생은 한국 민주주의의 불씨를 지켜냈다. 진실을 은폐하려는 권력의 시도에도 불구하고, 광주의 기억은 꺼지지 않았다. 결국 1987년 6월, 거리로 쏟아져 나온 국민의 분노는 군부 독재를 무너뜨리고 직선제 개헌을 이끌어냈다. 민주주의는 시민의 피와 눈물 위에서 다시 일어섰다.
그로부터 45년이 지난 2024년 12월 3일 밤, 대한민국은 또다시 혼돈에 빠졌다. 윤석열 전 대통령이 비상계엄을 선포하며 민주주의를 일거에 무너뜨리려 했지만, 이번에는 국민이 국회를 지켜냈다. 시민들은 장갑차 앞에 맨몸으로 서고, 경찰의 봉쇄를 뚫어 국회의원들이 헌법상 의무를 이행할 수 있도록 도왔다. 이 장면은 민주주의의 본질이 어디에 있는지를 보여주는 상징적 사건이었다. 이재명 대통령은 이를 ‘빛의 혁명’이라 명명하며, 과거 12월의 어둠과 현재의 빛을 대비시켰다. 군홧발로 민주주의가 짓밟힌 과거와 시민의 손으로 민주주의를 되찾은 현재를 연결해, 민주주의의 본질이 국민 주권에 있음을 강조한 것이다.
이 대통령은 ‘빛의 혁명’을 기념하며 12월 3일을 국민주권의 날로 지정하겠다고 밝혔다. 이는 단순한 기념일이 아니라 국민이 헌법의 주인임을 확인한 역사적 선언이다. 민주주의는 제도만으로 지켜지지 않는다. 국민의 용기와 참여가 있을 때 비로소 살아 숨쉰다. 과거 12월의 사건들은 민주주의가 얼마나 쉽게 후퇴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었고, 현재의 ‘빛의 혁명’은 민주주의가 시민의 힘으로 다시 일어설 수 있음을 증명했다. 따라서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서는 권력의 오만을 경계하고, 시민의 지속적 참여와 감시, 역사적 기억의 계승이 필수적이다.
12월은 한국 민주주의의 가장 잔인한 달이자 동시에 가장 빛나는 달이다. 과거의 군사반란과 현재의 시민 저항은 대비되며, 민주주의는 국민의 참여와 용기로 살아 숨쉰다는 사실을 일깨운다. 민주주의의 미래는 제도에만 달려 있지 않다. 국민이 끊임없이 주권을 확인하고 행동할 때, 민주주의는 비로소 굳건히 서게 된다.
올해도 저물어가고 있다. 먼 훗날 되돌아보면, 2025년은 비상계엄을 극복한 해로 기록될 것이다. 지난 시간은 억압과 불안의 그림자를 드리웠지만, 그 속에서 시민들은 민주주의의 힘을 다시 확인했다. 자유를 잃을 때 비로소 그 가치를 깨닫는 법이다. 이제 우리는 상처를 치유하고, 분열을 넘어 연대와 통합의 길로 나아가야 한다. 비상계엄은 단순한 제도적 사건이 아니라 사회적 교훈이다. 권력의 집중이 얼마나 위험한지, 시민의 목소리가 얼마나 소중한지 우리는 체험했다. 따라서 극복의 의미는 단순히 과거를 벗어나는 데 있지 않다.
그것은 미래를 향한 다짐이다. 민주적 가치와 인권을 지키는 사회, 책임과 교훈을 잊지 않는 공동체가 되어야 한다. 2025년의 극복은 끝이 아니라 시작이다. 희망을 품고 더 강한 민주주의로 나아가는 출발점이 바로 지금이다. 매년 12월은 민주주의를 파괴하거나 시민을 억압한 기억 속의 잔인한 달이 아니라, 봄과 희망을 준비하는 인고의 시간으로 승화되길 바란다.
김길수 기자 kks66@busan.com